담마의 거울

아무리 찾아봐도 관찰자는 없네

담마다사 이병욱 2024. 10. 3. 14:18

아무리 찾아봐도 관찰자는 없네
 
 
음식에 주의해야 한다. 어제 낮 한식부페식당에서 먹은 고기가 문제 된 것 같다. 평소 닭고기를 먹지 않는데 닭도리탕 몇 개를 먹었더니 이후 불편했다. 어제 저녁에 이어 오늘 아침도 불편하다. 수행하는 데 지장이 있다.
 
재가우안거 76일째이다. 속이 불편해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오늘 아침도 행선을 하고 좌선을 했다. 좌선 삼십분동안 아래가 불편했지만 무시하고 가만 있었다.
 
안거 중에는 청정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일체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오계를 넘어 팔계를 지키는 삶을 살고자 한다. 그러나 오후불식은 끊을 수 없다.
 
오전만 같은 삶을 살수 있으면 좋겠다. 하루 일과 가운데 오전이 가장 청정한 삶이다. 하루를 오전, 오후, 저녁, 밤, 이렇게 네 주기로 나누었을 때 오전은 수행의 시간이다.
 
수행을 하려면 몸이 건강해야 한다. 몸이 아프면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자연스럽게 먹는 것을 신경 쓰는 수밖에 없다. 또한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 술을 마셔서도 안된다. 술을 마시면 집중에 방해되기 때문이다.
 
가장 이상적인 삶은 어떤 것인가? 마치 바라문인생사주기에 학습기가 계속 연장되는 것처럼, 오전이 계속 연장되어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생업이 있는 재가자수행자에게는 이런 것은 가능하지 않다.
 
오전은 청정한 시간이다. 세상사에 오염되지 않은 시간이다. 일체 뉴스를 보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좌선이 끝난 다음 청정한 마음의 상태에서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는 것도 하나의 수행과정이다.
 
삼십분 좌선하고 두세 시간 수행기를 쓴다. 어떤 이는 수행기 쓸 시간에 더 앉아 있으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앉아 있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행선도 수행이고 글쓰기도 수행이다. 늘 새김(sati)을 유지하고 있다면 일상에서 수행 아닌 것이 없다.
 
대뜸 관찰자를 보라고
 
어제 댓글을 하나 받았다. 페이스북에 어떤 이가 “관찰자를 보세요.”라고 써 놓은 것이다. 마치 다짜고짜 대뜸 말하는 것 같다. 무언가 가르쳐 주려고 하는 것 같다. 이런 태도에 불쾌의 감정이 밀려 왔다.
 
관찰자, 어떤 관찰자를 말하는 것일까? 선불교에서 말하는 ‘그놈’을 말하는 것일까? 나를 지켜 보고 있는 그놈, 나의 내면에 있는 또 다른 자아를 말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이 들었을 때 마치 화두를 드는 것 같았다.
 
관찰자가 있다고 한다. 관찰자를 보라고 한다. 이럴 때 대뜸 “그런 관찰자는 없습니다.”라고 쓰고 싶었다. 그러나 시비 거는 것 같아 그만 두었다. 또 한편으로 “한대 맞으십시오.”라고 쓰고 싶었다. 마치 선사가 주장자로 머리통을 갈기는 것과 같은 행위를 말한다.
 
질문 같지 않은 질문, 말 같지 않은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침묵이 답이다. 왜 그런가? 존재론적 질문에는 답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관찰자를 보라는 말에 관찰자가 있다고 말하면 상견에 빠질 것이고, 관찰자가 없다고 말하면 단견에 빠질 것이다.
 
질문 같지 않은 질문, 질문으로 성립되지 않는 질문에는 침묵해야 한다. 그럼에도 굳이 답을 한다면 책상을 탕탕 치는 것이다.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정신과 물질의 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다. 찰나생찰나멸하는 궁극적 실재를 보여 주는 것이다.
 
글에 답 해야 한다. 구구절절 설명할 수 없어서 “글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끝냈다. 시비조의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예의를 갖추어 준 것이다.
 
무례한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은 시비조이다. 장문의 긴 글을 다 읽지는 않는 것 같다. 결론 부위의 글만 보는 것 같다. 허공과 친구가 되지 말고 선지식을 찾으라고 정중하게 충고한다. 이런 태도에 “더욱더 노력하겠습니다.”라는 말로 답글을 썼다.
 
그 사람은 자꾸 알려 주려고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자꾸 깨우쳐 주려고 하는 것 같다. 위빠사나 수행한다고 애쓰는 모습이 안쓰러운 것 같다. 그런 한편 쓸데 없는 짓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다. 수행은 방편에 지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무례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있다. 같이 맞받아 친다면 똑 같은 사람이 된다. 개싸움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자신의 견해가 강한 사람과 대화는 되지 않는다.
 
목적도 방향도 다른 사람과의 대화는 처음부터 평행선이다. 그럼에도 자꾸 시비를 건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삼진아웃제를 도입하는 것이다. 세 번째도 예의 없이 시비 건다면 차단 조치하는 것이다.
 
M선생의 견성영상을 보니
 
오전에는 수행하고 오후에는 업무를 본다. 일감이 있어서 일이 있으면 일을 하는 것이다. 일이 없으면 유튜브를 본다.
 
요즘 주로 시사유튜브를 본다. 정치관련 유튜브를 본다. 그러나 보다 보면 닥치는 대로 보게 된다. 자연스럽게 수행관련 유튜브도 보지 않을 수 없다.
 
유튜브에 견성에 대한 영상을 종종 본다. 아마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은 M선생일 것이다. 중학교 국어교사로 정년퇴임한 사람이다. 이절 저절에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법담하는 것이다.
 
M선생 영상은 몇 년 전에도 보았다. 한시간 동안 끊임 없이 이것을 말한다. 책상을 “탕탕”치며 ‘이것타령’ 하는 것이다. 보고, 듣고, 맛보고, 생각하는 이것이 있다는 것이다. 가짜 나가 아닌 진짜 나가 있음을 말한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그놈’
 
불교에 2004년 정식으로 입문했다. 그때는 초기불교가 있는 줄도 몰랐다. 대승불교만 있는 줄 알았다. 그해 BBS불교방송에 아침방송을 들었다. 교리에 대한 것이다. 선사들은 한결 같이 본마음, 참나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어떤 선사는 ‘그놈’을 이야기 했다. 보면 볼 줄 아는 그놈이 있고, 들으면 들을 줄 아는 그놈이 있다는 것이다. 대체 그놈은 어떤 놈일까?
 
선불교에서는 본래면목을 말한다. 누구나 부처의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부처라고 말한다. 수행하는 것은 자신이 부처인 것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대신심, 대분심, 대의심의 마음으로 화두를 드는 것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다는 소소영영한 그놈을 찾기 위한 것이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그놈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운다. 이는 선가귀감에서 "옛 부처 나기 전에 홀로밝은 동그라미(古佛未生前 凝然一相圓)”라는 전송이 있다. 여기서 동그라미(일원상)은 하나의 명칭일 뿐이다.
 
동그라미라는 말은 하나의 대표 명칭이다. 마치 X와 같은 것이다. X에 본래면목, 본래불, 참나, 불성, 관찰자 등 갖가지 명칭으로 대치할 수 있는 것이다.
 
선가귀감 게송을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도 모른 것이 있다. 일체지자인 부처님도모른 것이 선불교에 있다는 것이다. 선사들이 말하는 그것 또는 그놈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모르는 것이 있으면  수제자인 가섭도 모를 것이다. 그래서 후송에서는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는데 어찌 가섭이 전하랴.(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라고 되어 있다. 마치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를 능멸하는 게송처럼 보인다.
 
혜민스님의 ‘깨달음이란?’시를 보면
 
부처님도 모르는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이는 혜민스님이 ‘깨달음이란?’제목의 시로 정리해 놓은 것을 보면 어느 정도 개념을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깨달음이란?)
 
깨닫는다는 것은 
깨달음이 뭐냐고 묻는 그 놈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로 알아채는 그 주인공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글씨를 보는 그 놈을 역으로 반조해서 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눈 뒤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뒤는 무형상이라서 컴퓨터 모니터보듯 볼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생각이 떨어져 나가면 그것을 확인할수는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이 떨어져 나가 마음이 고요하고 비여있지만
한 생각이 뽀록하고 올라오면 
그 생각이 일어 났다는 것을 그 놈이 바로 알아채요.
 
그럼 조금전까지만 해도 텅텅비어 아무것도 없었는데 
무엇이 생각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까요?
텅텅비어 고요했는데 그 텅텅비어 고요한 것이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아있다는거
그리고 지성知性이 있어서 빛보다 빠르게 안다는 거
텅텅비어 아주 고요한 상태로 살아있는 그것이 내 본성입니다.
그것이 알아챔, 앎 자체입니다.
 
내면의 빛을 본다던가
천상의 소리를 듣는다던가
천상에 있는 듯한 말할수 없는 지복감이나
부처님, 예수님을 명상이나 기도중에 만난다던가
화두가 깨지고 밑둥이 확 빠진듯한 느낌이나
내 몸이 온 세상을 비추는 거울처럼 투명하게 변한 상태
내 몸이 완전히 사라지는 듯한 경험이 아니고
 
오직 
오직
오직 앎만이 해탈을 시켜 줍니다.
 
그것은 원래부터 해탈할것이 없었다는 것을 아는 앏입니다.
그런데 이 앎은 앎 스스로를 확인할때 그렇다는 것을 앎니다.
즉 이 앎은 희한하게도 앎 스스로를 확인 할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앎 스스로가 스스로를 확인하면 어떻게 되느냐?
 
그럼
아는 그놈, 
즉 앎자체가 스스로를 깨닫는 순간 온세상에 앎만 홀로있다는 것을 압니다.
태초부터 그 앎이 혼자라는 깨달음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앎이 묘妙를 부려서 
둘로 셋으로 나온후 원래 하나라는 것을 잊어 버린것입니다.
왜냐면 생각이 들어가기 때문에.
 
이 앎은
개념적 앎이 아닙니다.
생각으로 아는 앎이 아닙니다.
생각이 완전히 끊어져 나간후에 
그 마음 바탕을 확인한 앎입니다. 
즉 텅텅 빈 본성이 듣고 말하고 쓰고 다 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텅텅 빈채로 있는 그 본성은 듣고 말하고 쓰는 것에 
한번도 물든 적이 없습니다.
즉 아주 고요히 텅빈채로 있는 그것이 즉 앎입니다.
다시 말하면 빈 (마음의식) 공간=앎 자체입니다
 
그런데 그 앎을 통해서 
눈을 떠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은
그 앎에서 공간적으로 펼쳐진 세상입니다.
즉 앎 자체가 공간화 되어 3차원 영상으로 만들어진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 앎과 공간안의 대상들이 둘이 아닙니다.
이래서 일체유심一切唯心 마음뿐 입니다.
 
하나다라는 것을 스스로 확인한 앎자체가 
눈을 떠 세상을 보면 
비여있다는 앎이 물질에 스며들어 보입니다.
즉 물질, 사람, 소리 모든 것이 있으면서도 비여있는 것이 보입니다.
앎이 물체를 투과하면서 자성自性 없이 비여서 있음을 스스로 앎니다.
 
그 앎안에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시간이 없고 영원한 현재입니다.
공간도 없고 앎 자체입니다.
앎에서 펼쳐 놓으면 시간과 공간이 있는 것처럼 보일뿐입니다.
 
이 앎은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습니다.
텅텅빈채로  아주 아주 고요한 그 놈이 알고 보고 말하고 다 합니다.
또 스스로를 확인하여 알수 있습니다.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는 사실을 
하나(뿐인) 님이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을
보는 觀 놈 스스로가 自 있는 그 자리 在,  관자재 보살이 이것이라는 것을
둘이 아닌 불이문 不二門에 들어간다는 것이 바로 그 앎이라는 사실을
비어서 고요한데 영묘하게 아는 공적영지 空寂靈知가 바로 이거라는 사실을
눈앞에 홀로 밝은 이놈! 
이 앎만 또렸합니다!
 
이 앎은 도착하려는 피안에서 
한발자국도 떠난적이 없었음을 
아는 부처의 앎입니다!
 
그런데 그 앎안에는 부처도 사실 없습니다.
오직 앎만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도 알수 없습니다.
 
(혜민스님, 깨달음이란)
 
 
선종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바로 ‘그놈’을 깨닫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놈은 갖가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운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관찰자’일 것이다.
 
혜민스님이 시의 형식으로 써 놓은 ‘깨달음이란’이라는 제목으로 길게 써놓았다. 선종의 깨달음을 잘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방송이나 유튜브에서 선사들이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초기경전, 즉 니까야 어디에도 본래마음, 본래면목, 참나, 불성, 관찰자, 주재자가 있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만약 부처님이 이런 것이 있다면 발견 했을 것이다. 그리고 설했을 것이다. 경전에 실려 전승되어 왔을 것이다. 그러나 오부니까야 어디에도 그놈은 발견되지 않는다.
 
혜민스님의 ‘깨달음이란?’ 시에는 어떤 고정불변한 실체가 있음을 말한다. 이를 그놈이라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어떤 변치 않는 고정된 실체를 부정했다. 무아를 설한 것이다.
 
불교에 영혼은 있을 수 없다. 어떤 고정불변하는 자아가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부처님은 이를 연기법으로 알려 주었다. 조건발생하는 연기법에서 고정불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든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어느 것이든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이 세계는 어느 것 하나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누군가 그놈이 있다고 말했을 때 그놈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관계와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만약 그놈이 홀로 따로 존재한다면 연기법 바깥에 있는 것이 된다.
 
사람은 홀로 살아 갈 수 없다. 자연인이 산속에서 홀로 살아가지만 완전히 자급자족하는 것은 아니다.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누군가 본마음, 참나, 관찰자, 주재자를 말한다면 이는 ‘망상’이기 쉽다.
 
부처님은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고 했다. 만약 홀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과법 바깥에 있는 것이다. 창조주 같은 것이다.
 
나는 누구일까? 누구나 이런 의문을 한번쯤 해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쓸데 없는 생각이다. 내가 의문하는 나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존재하는 나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내가 존재한다면 나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그 어떤 것도 홀로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만약 내가 존재한다면 관계속에서만 있게 된다. 오온이 조건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질 때 ‘찰나생찰나멸’하는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연기적 그물망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1번 경에서도 확인 된다.
 
경험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
 
누군가 이것을 ‘땅’이라고 말한다. 정말 땅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느님이여, 나는 땅을 땅으로 곧바로 알고 땅이 땅이라는 것으로 경험되는 것이 아님을 곧바로 알고, 나는 땅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땅 가운데 생각하지 않고 땅으로부터 생각하지 않고 땅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땅을 긍정하지 않았습니다.”(M49)
 
 
여기서 하느님은 고대 인도의 창조신‘브라흐마(Brahma)’를 말한다. 망상적 하느님 바까(Baka)이다. 윤회하는 중생임에도 영원히 산다고 착각하고 있는 하느님에게 영원하지 않음을 알려 주기 위한 것이다.
 
부처님이 말하는 땅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경험되어지는 땅이다. 경험되어지지 않는다면 개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언어적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언어적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영원히 간다. 사람들의 마음에서 기억되고 있는 한 영원히 사는 것이다. 유일신교에서 믿는 창조주 하나님도 개념이다. 유일신교를 믿는 사람들이 대를 이어서 살아간다면 창조주라는 개념도 그만큼 오래 존재할 것이다.
 
부처님은 경험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땅은 땅이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다.”(M49)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 땅은 땅의 실체가 없으므로 오로지 다른 것들과의 관계속에서 경험된다는 뜻이다.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실제로 땅을 자세히 관찰하면 그 곳에는 땅의 현상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분이나 공기, 온도, 생명현상이 공존하면서 땅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든 것은 연기적인 관계 속에서 단지 명칭만이 주어져 있을 뿐이지 실체는 경험되지 않는 것이다.”(867번 각주, 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 M49)
 
 
땅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땅은 관계망 속에서 존재한다. 수분이나 공기, 온도, 생명현상이 공존하면서 땅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적 관계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주는 어떠할까?
 
부처님은 창조주에 대하여 따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는 “하느님이여,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곧바로 알고 하느님이 하느님이라는 것으로 경험되는 것이 아님을 곧바로 알고, 나는 하느님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 가운데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긍정하지 않았습니다.”(M49)라는 말로 알 수 있다. 그래서 “하느님은 하느님이라는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다.”(M49)라고 했다.
 
언어적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땅이라는 말, 물이라는 말은 언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진짜 존재하는 것이라면 경험 되어져야 한다. 수행하는 이유가 된다. 개념이 아닌 실재를 보는 수행을 말한다.
 
오직 정신과 물질(名色)만이 있을 뿐
 
위빠사나 수행은 실재를 보는 수행이다. 반면에 사마타는 개념을 대상으로 한다. 실재를 보아야 열반에 이를 수 있다. 이는 개념이 아닌 실재를 보는 수행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집착된 무더기(取蘊)을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관찰해야 한다.
 
위빠사나수행은 관찰수행이다. 오온을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각각 새기면 무상, 고, 무아로 드러난다. 여기에 어떤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있을 수 없다. 찰나생찰나멸만 있을 뿐이다. 이렇게 생멸하는 오온에 그놈, 본마음, 본래불, 관찰자, 주재자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청정도론 18장 견해의 청정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있을 때 ‘뭇삶’이나 ‘개인’이라는 명칭만이 있고, 하나하나의 사실로 관찰할 때는 궁극적 의미로는 ‘내가 있다.’라든가 ‘나이다.’라는 집착의 토대가 되는 뭇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는 오직 명색만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보는 자의 봄을 있는 그대로의 봄이라고 한다.”(Vism.18.28)
 
 
있는 그대로 보면 언어적 개념에는 실체가 없음을 알게 된다. 이는 위빠사나수행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집착된 무더기를 정신과 물질로 구분하여 새기면 텅 빈 것과 같이 되는데 여기에 홀로 존재하는 참나, 본마음, 주재자, 관찰자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그 어떤 것도 연기법의 법칙 아래에 있다. 이는 조건발생의 법칙 아래에 있다는 말과 같다. 또한 인과의 법칙 안에 있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인과의 법칙, 연기의 법칙 바깥에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언어적 개념이다. 본마음, 본래면목, 참나, 관찰자, 주재자, 창조주와 같은 개념이다.
 
초자아(超自我)를 부정하신 부처님
 
어떤 것이든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오로지 관계와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만약 누군가 창조주가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망상이기 쉽다. 왜 그런가? 홀로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홀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개념이다. 언어적 개념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누군가 “관찰자를 보시오.”라고 조언 했을 때 그런 관찰자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혜님스님 시에서 보는 그놈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경험되어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동아시아불교에서는 ‘초자아(超自我)’를 상정한다.
 
동아시아불교 전통에서는 본마음, 참나라 하여 어떤 초자아를 상정한다. 그런데니까야를 보면 부처님 당시에도 이런 생각을 한 수행승이 있었다는 것이다.
 
 
초기경전을 읽다 보면 오늘날 문제가 되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된다. 어떤 수행승은 참나와 같은 초자아를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자아가 자아가 아닌 것이 만들어낸 행위들에 영향을 주는 것인가?”(M109)라며 의문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어떤 어리석은 사람은 무지하고 몽매해서 그의 마음이 갈애에 의해 지배되면서도, 이와 같이 ‘물질은 나의 자아가 아닌 것 같다. 느낌도 나의 자아가 아닌 것 같다. 지각도 나의 자아가 아닌 것 같다. 형성도 나의 자아가 아닌 것 같다. 의식도 나의 자아가 아닌 것 같다. 어떤 자아가 자아가 아닌 것이 만들어낸 행위들에 영향을 주는 것인가?’라고 스승의 가르침을 앞지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여러 가지 것에 대해 그때그때의 경우에 따라 질문을 통해서 나에게서 수련을 받았다.”(M109)
 

 
부처님은 초자아를 부정했다. 오온 너머에 어떤 초자아, 참나, 관찰자, 주재자와 같은 존재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자아가 자아가 아닌 것이 만들어낸 행위들에 영향을 주는 것인가?”라고 되묻는 것이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오온무상에 대하여 수없이 설했다. 그럼에도 알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부처님은 “스승의 가르침을 앞지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라고 했는데 이는 초자아를 상정하고 있는 것에 대한 훈계인 것이다.
 
반복되는 역사
 
역사는 반복된다.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을 이해 하지 못하는 자는 부처님 당시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도 볼 수 있다. BBS불교방송이나 BTN불교TV에서 선사의 법문을 들어 보면 알 수 있다.
 
처음 불교에 입문 했을 때 선사들의 법문을 열심히 들었다. 공통적으로 참나가 있다고 했다. 본래 청정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놈은 볼 줄도 알고 들을 줄도 알고 맛볼 줄도 안다는 것이다. 오온 너머에 초자아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맛지마니까야 109번경에서 보는 것과 똑 같은 것이다.
 
참나는 어떤 변치 않는 고정된 실체에 대한 것이다. 이를 궁극적 실재라고도 말할 수 있다. 존재의 근원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길희성이나 오강남 교수 같은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이와 같은 참나에 대하여 하느님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브라만교의 브라만과도 같은 것이라고 했다. 마치 길은 달라도 정상에서 만나는 것처럼 본래 하나인데 명칭만 다를 뿐이라고 설명한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고정된 실체는 있을 수 없다. 연기법에 따르면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어느 것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관계와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말과 같다. 이렇게 본다면 영혼도 있을 수 없다.
 
감각기관과 분리된 영혼의 존재가 있다면
 
밀린다팡하에서 밀린다 왕이 나가세나 존자에게 질문했다. 왕은 “존자 나가세나여, 영혼은 있습니까?”라며 질문했다. 이에 존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대왕이여, 궁극적 의미로 영혼은 없습니다.”(Mil.71)라고 답했다. 영혼에 대한 문답이다.
 
궁극적 의미에서 영혼은 없다고 말했다. 이는 인식이나 행위의 주체는 존재할 수 없음을 말한다. 만약 ‘있다’고 말하면 상견(영원주의)에 빠지고, ‘없다’고 말하면 단견(허무주의)에 빠질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십이연기로 설명했다.
 
조건발생으로 설명하면 상견도 없고 단견도 없다. 당연히 상견에 해당되는 영혼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깟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S12.15)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무상하게 소멸해 가는 과정을 관찰하면 모든 존재가 영원하다는 영원주의는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밀린다왕 의 질문을 보면 오늘날 선사가 참나를 말하는 것 같다. 밀린다 왕은 “존자여, 시각으로 형상을 보고, 청각으로 소리를 듣고, 후각으로 냄새를 맡고, 미각으로 맛을 맛보고, 신체로 감촉을 접촉 하고, 정신으로 사실을 아는 내면에 있는 영혼입니다.”(Mil.54)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밀린다 왕은 보고 듣고 맛보는 영혼이 있다고 했다. 감각기관과 분리된 영혼의 존재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영혼은 불멸하는 존재로서 몸에 정착하여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선사가 보면 볼 줄 알고, 들으면 들을 줄 아는 그놈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이천년 전 사람들이나 지금 사람들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사견(邪見)에 빠지기 쉽다. 영혼이나 참나가 있다고 믿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나가세나 존자는 어떻게 반박했을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왕이여, 다섯 가지 감관의 문에 관하여 말 할 것이니, 그것을 듣고 잘 새기십시오. 내면에 있는 영혼이 우리가 여기 전당에 앉아 어떤 창문으로든 보고자 하는 대로 각각의 창문을 통해서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동쪽의 창문을 통해서 볼 수 있고, 서쪽의 창문을 통해서 볼 수 있고, 북쪽의 창문을 통해서 볼 수 있고, 남쪽의 창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처럼, 1) 시각으로 형상을 보듯, 그와 같이 그 내면에 있는 영혼으로 청각으로 형상을 볼 수 있고, 후각으로 형상을 볼 수 있고, 미각으로 형상을 볼 수 있고, 촉각으로 형상을 볼 수 있고, 정신으로 형상을 볼 수 있을 것이고, …촉각으로 사실을 식별할 수 있습니까?”(Mil.55)
 
 
어떤 불멸하는 존재, 즉 참나가 몸에 붙어 있다면 모든 것을 다 보고, 모든 것을 다 들어야 할 것이다. 마치 방안에서 동, 서, 남, 북 창문으로 다 보는 것과 같다.
 
감각기관에는 각각 고유기능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눈은 형상만 볼 수 있고, 귀로는 소리만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눈은 소리를 들을 수 없고 귀는 형상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가세나 존자는 “내면에 있는 영혼으로 청각으로 형상을 볼 수 있고, 후각으로 형상을 볼 수 있고, 미각으로 형상을 볼 수 있고, 촉각으로 형상을 볼 수 있고, 정신으로 형상을 볼 수 있습니까?”라고 역질문 하는 것이다.
 
우리 몸과 마음 안에 본마음, 참나, 관찰자, 주재자가 있다면 그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만능인 것이다. 그래서 눈으로 들을 수도 있고 귀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감각기관에서는 그런 일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왕이 생각하는 영혼관에 대하여 “대왕이여, 그대의 말은 앞과 뒤가, 뒤와 앞이 맞지 않습니다.”(Mil.56)라고 말했다.
 
선사들이 말하는 본마음, 본래면목, 참나, 관찰자, 주재자 등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선사들이 볼 때 볼 줄 아는 놈이 있고, 들을 때 들을 줄 아는 놈이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 눈은 형상만 볼 수 있고 귀는 소리만 들을 수 있다. 그래서 나가세나 존자는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왕이여, 여기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납니다. 그와 동시에 접촉, 느낌, 지각, 의도, 심일경성(心一境性), 명근(命根), 정신활동 등 이와 같은 모든 원리들이 조건적으로 생겨납니다. 여기에 영혼은 없습니다. 대왕이여, 여기 청각과 소리를 조건으로 청각의식이 생겨납니다. 그와 동시에 접촉, 느낌, 지 각, 의도, 심일경성, 명근, 정신활동 등 이와 같은 모든 원리들이 조건 적으로 생겨납니다. 여기에 영혼은 없습니다.”(Mil.56-57)
 
 
나가세나 존자는 조건발생적으로 설명한다. 이는 접촉에 따른 것이다. 어떤 것이든지 접촉 없이는 생겨날 수 없는데 이는 연기법에 따른 것이다.
 
어느 것이든지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 어떤 것도 관계와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만약 누군가 본마음, 참나, 관찰자, 주재자와 같은 초자아를 상정한다면 이는 언어적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된다. 언어적 명칭은 이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한 항상 존재한다. 생멸도 없다. 생멸이 없어서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몽둥이가 답일 때
 
페이스북에 어떤 이가 “관찰자를 보세요.”라고 말했다. 있지도 않은 관찰자를 보라는 말에 당황 했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경전적 근거를 들어서 설명해야 한다. 이렇게 긴 글을 쓰는 이유에 해당된다.
 
사람은 홀로 살 수 없다. 나 혼자 독불장군처럼 살 수 없다.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살아 간다. 그 어떤 것도 홀로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홀로 스스로 존재한다면 이는 연기법을 위반한 것이다.
 
부처님은 조건발생법을 설했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법이다. 이 연기의 생멸과 환멸로 상견과 단견을 부수었다. 그 어떤 것도 관계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하물며 언어적 개념에 불과한 관찰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
 
누군가 나에게 “관찰자를 찾아 보십시오.”라고 말한다면 몽둥이질을 할 것이다. 있지도 않은 것을 찾으라고 했을 때 몽둥이가 답인 것이다. 왜 그런가? 머리통을 한대 맞았을 때 그 아픔이 바로 법의 성품인 것이다. 조건에 따라 찰나생찰나생 하는 궁극적 실재이다. 아무리 찾아 보아도 관찰자는 없다.
 
 
2024-10-0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