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삶의 결실 쌍윳따니까야 완독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바늘이 돋는다고 한다. 하루라도 경전을 접하지 않으면 불선심의 나날이 될 것 같다.
어제저녁 쌍윳따니까야를 완독했다. 쌍윳따니까야읽기 대장정의 막을 내린 것이다.
하루에 인상 깊었던 일은 기록해 둔다. 블로그에 써 놓는 것이다. 쌍윳따니까야읽기 시동도 예외가 아니다. 기록을 찾아 보았다.
티스토리에 글을 올리고 있다. 티스토리에 대한 믿음이 점차 낮아져 간다. 검색기능이 형편 없기 때문이다. 블로그 내 검색이 잘 되지 않는다. 있으나마나한 검색창이다.
다음 블로그가 티스토리로 이전되었다. 2022년의 일이다. 그런데 퇴보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검색기능이 먹통 된 것이나 다름 없다. 오래 전에 써 놓았던 글을 찾아 볼 수 없다. 이런 때 블로그 이전을 생각하게 된다.
오로지 다음 블로그에 글을 써 왔다. 그러나 다음 블로그는 문을 닫았다. 망한 것이나 다름 없다. 티스토리로 이전하라고 해서 이전했다. 그러나 여러가지 불편한 점이 많다. 검색도 되지 않고 댓글 제어 기능도 없다. 동영상 올리기도 힘들다. 아이디와 비밀번호 혼란도 극에 달한다. 늦었지만 네이버에서 새로 시작하는 것도 생각중이다.
쌍윳따읽기 시동에 대한 글은 다음에서 발견했다. 블로그 내 검색이 먹통이다 보니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한 것이다. 그 결과 ‘상윳따니까야 읽기 시동을 걸고 (tistory.com)(2023-7.10)라는 제목의 글을 발견했다. 거의 일년만에 완독한 것이다.
쌍윳따니까야 일년만에 완독
무엇이든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다. 상윳따니까야 읽기를 시작했을 때 이를 글로 남겼다. 글의 말미에 “오늘 상윳따니까야 읽기 시동을 걸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머리맡에 놓고 틈만 나면 수시로 열어 볼 것이다. 그리고 새기며 읽어야 한다. 감동을 받으면 글로 표현해야 한다.” (2023-7.10)라고 써 놓았다.
쌍윳따니까야는 일년만에 완독되었다. 시작을 알리는 글에서와 같이 머리맡에 놓고 읽었다. 그리고 새기고 싶은 구절이 있으면 글로 남겼다. 그 결과 수많은 관련 글을 쓰게 되었다. 이럴 때 다음과 같은 법구경 게송이 떠오른다.
“ ‘그것이 내개 닥치지 않는다.’라고
선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야 하리.
물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지면
물단지가 가득 차듯,
슬기로운 자는 조금씩 조금씩 모은
선으로 가득찬다.”(Dhp. 122)
이 게송은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 대신에 악을 대입하면 ‘악으로 가득찬다.’가 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선이나 악이나 매일 조금씩 하다 보면, 마치 물단지에 물이 가득 차듯 선이나 악으로 가득차게 됨을 말한다. 누적의 힘이다.
경전을 읽을 때는 욕심 내지 않는다. 소설 읽듯이 하루 밤 만에 읽지 않는다. 머리맡에 놓고 한경 내지 두 경 읽는다. 이렇게 읽다 보면 물방울이 물단지에 가득 차듯 언젠가 다 읽게 된다. 그래서 읽기를 시작했을 때에 “마치 오토바이 여행자가 대륙을 횡단하는 것 같다. 가다 보면 멀리 가 있을 것이다. 어느 때 뒤돌아 보면 멀리 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욕심 부리지 않고 하루 한페이지라도 읽다 보면 어느 때 종착지에 도달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023-7.10)라고 써 놓았다.
읽겠다고 스스로 선언해야
쌍윳따니까야는 방대하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출간된 통합본을 보면 2,800페이지가 넘는다. 그것도 두 단 칼럼이다. 폰트 사이는 작다. 종이는 매우 얇다. 인조가죽 케이스에 금칠 되어 있다. 마치 바이블처럼 한 손에 쏙 들어 온다. 머리맡에 읽기에 좋다. 그러나 글자가 작아서 돋보기를 보아야 한다. 특히 각주가 그렇다.
지난 일년동안 쌍윳따니까야만 읽은 것은 아니다. 생업과 병행 했다. 그리고 위빠사나 수행도 병행했다. 경 암송하기, 글쓰기, 모임 참석하기 등 수많은 일과 병행하며 읽은 것이다.
경전읽기는 결심을 하지 않으면 읽기 힘들다. 경전을 읽겠다고 스스로 선언하는 것이다. 이런 것도 ‘결정바라밀(adhiṭṭhānapāramī)’에 해당될 것이다.
결정바라밀이란 무엇인가? 빠알리 사전을 찾으니 자타카 ‘J.I,23’을 보라고 한다.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리고 또한 그는 ‘부처님이 되는 원리 는 이러한 것만이 아닐 것이다.’라고 더 찾아 보다가, 여덟 번째로 결정에 의한 초월의 길을 발견하고, 이렇게 자신을 훈계했다. ‘현명한 자인 쑤메다여, 그대는 지금부터 결정에 의한 초월의 길도 닦아야 한다. 결정하면, 그결정에서 흔들리지 마라. 산이 모든 방향에서 바람이 불어와도 흔들리지 않고 요동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그대 도 자신의 결정에 흔들림 없으면, 부처님이 될 수 있을 것이다.’그는 여덟 번째로 결정 에 의한 초월의 길을 확고하게 닦기로 결의 했다.”(Jat.1.23)
쑤메다 존자의 서원에 대한 것이다. 결정바라밀은 십바라밀 가운데 하나이다. 쑤메다 존자는 부처가 되기 위해서 1)보시에 의한 초월의 길, 2)계행에 의한 초월의 길, 3)출리에 의한 초월의 길, 4)지혜에 의한 초월의 길, 5)정진에 의한 초월의 길, 6)인내에 의한 초월의 길, 7)진실에 의한 초월의 길, 8)결정에 의한 초월의 길, 9)자애에 의한 초월의 길, 10)평정에 의한 초월의 길을 닦았다.
자타카에서 십바라밀은 대승불교의 육바라밀의 모티브가 된다. 그런데 자타카에서 바라밀행을 보면 목숨 걸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외적 소유를 버리는 것이 일반적 보시에 의한 초월의 길이고, 사지를 버리는 것이 우월적 보시에 의한 초월의 길이고, 목숨을 버리는 것이 최승적 보시에 의한 초월의 길이다. “(Jat.1.25)라고 했다.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는 십바라밀행
십바라밀을 행하는 자는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부처가 되기로 서원 했기 때문이다. 다시 태어나도 보살행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 종류의 초월의 길을 가게 된다. 보시바라밀을 예로 든다면 외적 소유를 버리는 것, 사지를 버리는 것, 그리고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자타카에는 십바라밀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대승에서의 육바라밀에서와 차원이 다른 것이다. 목숨까지 버리는 것이다. 열 가지 초월의 길에 대한 핵심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1)보시에 의한 초월의 길
“옹기에 물이 가득 찼는데,
누군가가 뒤집으면,
물이 남김없이 쏟아져서,
거기에 아무것도 없게 되듯,”
“요구하는 자를 보면,
천한 자이든 귀한 자이든 중간이건,
뒤 집어진 옹기처럼,
남김없이 그대의 보시를 베풀어라.”
2)계행에 의한 초월의 길
“야크가 실로 꼬리털이
무엇인가에 걸리면,
거기서 죽음을 기다릴지언정,
꼬리털을 해치지 않는 것처럼,”
“네 가지 단계에서
그와 같이 계행을 성취하되,
야크가 꼬리털을 수호하듯,
계율을 언제나 수호하라.”
3)출리에 의한 초월의 길
“감옥에 사는 사람이
오랜 세월 고통을 겪다가
거기에 탐착하지 않고,
벗어남을 추구하는 것처럼.”
“그대는 일체의 존재를
감옥에서의 삶처럼 보라.
존재에서 벗어나기 위해
존재로부터 출리를 감행하라.”
4)지혜에 의한 초월의 길
“수행승이 탁발하며
비천하거나 고귀하거나 중간이거나
어떠한 가정이든,
빠짐없이 양식을 얻는 것처럼.”
“항상 그대도 마찬가지로
지혜로운 분들에게 두루 물어서
지혜에 의한 초월의 길을 가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5)정진에 의한 초월의 길
“백수의 왕인 사자가
앉거나 서거나 걸을 때에,
항상 마음을 책려하여
용맹스런 정진을 도모하듯,”
“마찬가지로 일체의 존재에서
그대도 확고한 정진을 도모하라.
정진에 의한 초월의 길을 가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6)인내에 의한 초월의 길
“깨끗한 것이라도
더러운 것이라도
모든 것이 버려져도,
땅은 인내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모든 경우에
존경을 받아도 멸시를 받아도 참고,
인내에 의한 초월의 길을 가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7)진실에 의한 초월의 길
“신들을 포함한 세계에서
새벽별은 견줄 데가 없으니,
시간에서나 계절에서나
그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 것처럼,”
“그대도 또한 진실에서
그 궤도를 벗어나지 마라.
진실에 의한 초월의 길을 가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8)결정에 의한 초월의 길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
흔들리지 않고 확립되어,
강한 바람에도 동요 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처럼,”
“그대도 또한 결정을 하는
모든 경우에 동요하지 마라.
결정에 의한 초월의 길을 가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9)자애에 의한 초월의 길
“선인에게든 악인에게든
물이라는 것은 실로
티끌과 때를 씻어내고
평등하게 청량을 주는 것처럼,”
“이익이 되는 자에게나
불익이 되는 자에게나
그대는 평등하게 자애를 닦아라.
자애에 의한 초월의 길을 가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10)평정에 의한 초월의 길
“깨끗한 것이든 더러운 것이든
양자들 모두 버리더라도,
성내거나 탐욕을 보이지 않고,
땅이라는 것은 실로 평정한 것처럼,”
“즐겁든 괴롭든
그대 또한 항상 평정을 유지하라.
평정에 의한 초월의 길을 가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Jat.1.20-25)
열 가지 초월의 길에 대한 게송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문구가 있다. 그것은 “옛적의 위대한 선인들이 실천하고 궁행했던 길이다. (Pubbakehi mahesīhi asevitanisevitaṁ) ”라는 문구를 말한다. 보살행을 닦는 사람들이 실행했던 실천덕목임을 말한다.
십바라밀 게송을 요약하면
십바라밀은 부처가 되는 길이다. 그래서 깨달음을 성숙시키는 행위라고 했다. 그런데 열 가지를 보면 키워드가 있다는 것이다.
1)보시에 대해서는 “뒤 집어진 옹기처럼”아낌 없이 보시하라고 했다.
2)계행에 대해서는 “야크가 꼬리털을 수호하듯” 계행을 수호하라고 했다.
3)출리에 대해서는 “감옥에서의 삶처럼 보라”라고 하여 존재에서 벗어나라고 했다.
4)지혜에 대해서는 ‘지혜로운 분들에게 두루 물어서”라고 하여 마치 차제걸이(次第乞已)하듯이 물어 보라고 했다.
5)정진에 대해서는 사자처럼 용맹정진하라고 했다.
6)인내에 대해서는 “존경을 받아도 멸시를 받아도 참고”라 하여 땅처럼 인내하라고 했다.
7)진실에 대해서는 “그 궤도를 벗어나지 마라”라고 하여 새벽별처럼 궤도를 벗어나지 말라고 했다.
8)결정에 대해서는 “모든 경우에 동요하지 마라”라고 하여 바위산이 강한 바람에 동요가 없는 것처럼 자리를 지키라고 했다.
9)자애에 대해서는 “평등하게 청량을 주는 것처럼”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평등하게 자애를 닦으라고 했다.
10)평정에 대해서는 “성내거나 탐욕을 보이지 않고”라 하여 깨끗한 것이나 더러운 것이나 땅처럼 평정한 마음을 내라고 했다.
열 가지 초월의 길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다. 그것은 출리바라밀이다. 게송에서는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존재에서 벗어나라고 했다. 존재에서 두려움을 느껴야 함을 말한다.
열 가지 초월의 길은 부처가 되는 길이다. 보살행을 하는 자라면 세세생생 닦아야 한다. 그것도 목숨 걸고 닦아야 한다. 이는 “목숨을 버리는 것이 최승적 보시에 의한 초월의 길이다. “(Jat.1.25)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보살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으면 또 다른 존재로 태어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설령 축생으로 태어난다고 해도 보살행을 한다. 이는 토끼의 전생담을 보면 알 수 있다. 배고픈 자를 위해서 “내가 자신을 희생하여, 숯불 가운데로 뛰어들겠습니다. 나의 몸이 익으면, 그대가 그 살코기를 먹고 수행자의 삶을 사십시오.”(Jat.316)라며 기꺼이 먹이가 되어 주는 것이다.
보살은 진리에 목숨을 건다. 설산동자의 투신설화가 이를 잘 말해준다. 보시, 계행, 출리, 지혜, 정진, 인내, 진실, 결정, 자애, 평정에도 목숨 걸어야 한다. 목숨 걸고 죽기살기로 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경전을 읽지 않는 자의 유형을 보면
매일매일 조금씩 읽다 보니 쌍윳따니까야를 일년만에 다 읽게 되었다. 그런데 쌍윳따니까야만 읽은 것이 아니다. 맛지마니까야도 머리맡에 놓고 매일매일 조금씩 읽어서 다 읽었다. 디가니까야도 그렇다. 앙굿따라니까야는 통합본 교정작업할 때 다 읽었다. 이렇게 본다면 사부니까야는 다 읽은 것이 된다. 쿳다까니까야 계열의 경전도 번역된 것은 다 읽었다.
경전을 읽다 보면 때로 비난의 글을 접할 때가 있다. 수행은 하지 않고 경전만 읽는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의 심리는 어떤 것일까? 아마 경전을 읽어 보지 않았을 것이다. 경전을 읽어 보았다면 수행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스님은 윤회가 없다고 주장한다. 스님은 왜 이런 사견에 빠졌을까? 아마 그것은 경전을 읽어 보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읽어 보았더라도 보고 싶은 것만 보았을 것이다. 특히 초기경전을 읽어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니까야를 읽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허무주의에 빠진 것으로 본다.
어떤 이는 경전 읽는 것에 대하여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정도로 본다. 이런 사람도 경전을 읽어 보지 않았을 것이다. 초기경전, 니까야를 읽어 보았다면 ‘견지망월(見指忘月)’이라는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이는 ‘부처님은 한말씀도 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왜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은 오로지 마음으로 뜻으로 스승에게서 제자로 전승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어로 되어 있는 경전은 진리를 표현할 수 없어서 진실한 가르침이 아니라 방편일 뿐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밤부터, 잔여 없는 열반의 세계로 완전한 열반에 든 밤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 그러므로 여래라고 한다.”(It.121-122)
부처님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정각의 그날 밤부터 열반의 그 날 밤까지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은 경이나 응송, 게송 등 구분교로 가르침을 설한 것이다.
어떤 이는 자신의 스승의 가르침을 부처님 가르침처럼 여긴다. 스승이 말한 것을 금과옥조 삼아서 자신의 것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거기에 부처님 가르침은 보이지 않는다.
읽고 싶은 것만 읽었을 때
경전읽기는 일상이 되었다. 머리맡에 놓고 매일 읽는다.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할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불교학자나 출가수행자들도 머리맡에 놓고 매일 읽는 것일까? 그것 역시 알 수 없다.
종종 이런 의문이 든다. 이는 ‘불교학자나 스님들은 경전을 다 읽었을까’에 대한 의문을 말한다. 아마 부분적으로는 읽었을 것이다. 필요로 하는 경만 읽는 것을 말한다.
초기경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 보기로 결정한 것은 이삼년 된다. 이전까지는 필요한 것만 보았다. 필요로 하는 경만 찾아 본 것이다. 어느 순간 이런 방식이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알았다.
필요로 하는 경만 읽다 보면 견해에 치우친다. 마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보는 것과 같다. 보기 싫은 것에는 눈을 감고 듣기 싫은 것에는 귀막는 것과 같다.
경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없다. 신통에 대한 것도 보게 되고 초월적인 이야기에 대한 것도 보게 된다. 그런데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된다면 보는 경은 몇 개 되지 않을 것이다.
여기 수행자가 있다. 그는 오로지 수행과 관련된 경만 본다. 대념처경이나 호흡새김에 대한 경 등 수행에 대한 것만 보는 것이다. 읽고 싶은 것만 읽으면 반쪽짜리 불교인이 되기 쉽다.
교학과 수행을 양날개로 하여 통찰이라는 비상(飛上)이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해탈과 열반의 실현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학과 수행을 함께 해야 한다. 부처님 그분이 누구이고, 부처님이 그분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 이것이 빠리얏띠(pariyatti), 교학이다. 그 다음에 가르침을 실천해야 한다. 이것이 빠띠빳띠(patipatti), 수행이다. 이렇게 교학과 실천이 있어야 통찰이 있게 된다. 이것이 빠띠웨다(pativedha), 증득이다.
새는 양날개로 날아간다. 불교는 교학과 수행이란은 양날개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증득이 있게 된다. 수행자는 교학과 수행을 양날개로 하여 통찰 또는 증득이라는 비상(飛上)이 있게 된다.
수행자라면 경전을 늘 가까이 해야 한다. 부처님이 직접 설한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해(pariyatti)해서,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시켜 바른 도를 실천(patipatti)하는 것이다. 이렇게 교학과 수행을 겸비하여 정진했을 때 통찰(pativedha)이라는 선물을 받게 될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목숨 걸고자 한다.
2024-06-1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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