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재가의 성자라도 사미에게 합장공경해야 하는 이유

담마다사 이병욱 2024. 6. 7. 09:10

재가의 성자라도 사미에게 합장공경해야 하는 이유

스님의 개가 보이지 않는다. 스님의 글이 보이지 않는다. 차단했음에 틀림 없다.

스님의 개가 새끼를 낳았다. 이에 대해 비난했다. 그리고 시비 거는 글을 올렸다. 스님이 아마 화가 난 것 같다.

스님은 참으로 독특했다. 스님은 참으로 파격적이다. 환갑이 되면 졸불교하겠다고 선언했다. 졸혼하듯이 불교와 졸업하겠다는 것이다.

스님의 암자에는 장독이 가득한다. 된장과 간장, 고추장 같은 장독을 말한다. 어느 날 스님은 사업계획을 발표했다. 장사업을 하겠다는 것이다. 아마 신도들이 대상일 것이다.

스님은 커피를 좋아한다. 스님은 커피사업에 대해서도 말했다. 카페를 만들어서 커피장사를 하겠다는 것이다. 역시 신도들이 대상이 될 것이다.

스님은 왜 스님이 되었을까? 스님의 출가목적은 무엇일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스님이 되었다는데 출가생활이 따분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공부가 다 되었기 때문일까?

한국불교에서 스님을 비난하거나 비판하면 허물이 된다. 대승보살계에 따르면 삼보를 비방하는 죄업이 된다. 보고도 못 본척 해야 하고 들어도 못 들은척 해야 할 것이다.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 스님을 믿어도 실망하기 쉽다. 스님의 계행이 엉망일 때 신도는 떠날 것이다. 이는 불교 교세의 약화로 이어진다. 스님이 속퇴하면 역시 신도들도 떨어져 나갈 것이다. 당연히 교세의 약화로 이어진다.

스님을 믿지 말고 부처님을 믿어야 한다. 한글삼귀의문에서 "거룩한 스님께 귀의 합니다."라는 문구는 거룩한 참모임(승가)에 귀의합니다."로 바뀌어야 한다.

한국불교에서 스님은 부처님 지위에 있다. 삼보 가운데 승가에 대하여 스님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누가 그랬을까?

중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음악시간에 한글삼귀의문과 사홍서원을 배웠다. 불교학교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노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전체조회 시간에 불렀다.

스님은 처음부터 승보인줄 알았다. 한글삼귀의문 영향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서 초기경전을 접하니 잘못된 것임을 알았다. 승보는 스님이 아니라 승가공동체였던 것이다!

불교는 어떤 종교인가? 한마디로 부처님의 종교이다. 이는 삼보를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과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승가공동체의 종교인 것이다. 그런데 승보에 스님이 있는 것이다.

한국불교에서 승보는 스님이다. 스님이 승보라면 스님은 부처님과 동급이 된다. 또한 승가공동체는 사라지고 만다.

한국불자들은 스님 보기를 부처님 보듯한다. 부처님 같은 스님의 계행이 엉망이라면 어떤 생각이 들까? 불교를 떠나게 될지 모른다. 타종교에 귀의한다면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제행무상이다. 어느 것 하나 영원하지 않다. 스님이라고 해서 항상 스님으로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것이다. 여러가지 사정으로 속퇴할 수도 있다. 스님을 승보로 본다면, 스님을 부처님처럼 여긴다면 삼보가 무너지게 된다. 불교가 망할 수도 있는 것이다.

불교의 목적은 무엇인가? 당연히 해탈과 열반의 실현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을 알아야 한다. 또한 부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알아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에 승속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누구나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면 해탈과 열반에 이를 수 있다. 당면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재가자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한다.

재가와 출가는 차이가 있다. 어떤 차이인가? 밀린다팡하에서 나가쎄나 존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왕이여,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나는 재가자이건 출가자이건 올바른 실천에 들어서면, 그들을 칭찬합니다. 수행승들이여, 재가자이건 출가자이건 올바른 실천에 들어서면, 그 올바른 실천을 원인으로 바른 방도, 착하고 건전한 원리를 성취합니 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왕이여, 그것은 이렇습니다. 올바로 실천 하는 자가 최상입니다. 대왕이여, 출가자라도 '나는 출가했다.'라고 생 각하고 올바로 실천하지 않으면 그는 수행자의 삶에서 멀어지고 성직자의 삶에서 멀어집니다. 하물며 흰옷을 입은 재가자가 말해서 무엇하 겠습니까? 대왕이여, 재가자라도 올바른 실천에 들어서면, 바른 방도, 착하고 건전한 원리를 성취합니다. 출가자라도 올바른 실천에 들어서면, 바른 방도, 작하고 건전한 원리를 성취합니다. 대왕이여, 출가자야 말로 수행자의 주인이고 우두머리입니다. 대왕이여, 출가는 많은 공덕, 무수한 공덕, 셀 수 없는 공덕을 지녔으므로 출가의 공덕을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대왕이여, 소원을 들어주는 마니보주를 '마니보주의 값이 이만하다.'라고 돈으로 가치를 평가할 수 없습니다. 대왕 이여, 이와 마찬가지로 출가는 많은 공덕, 무수한 공덕, 셀 수 없는 공덕을 지녔으므로 출가의 공덕을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Mil.244-245)

출가의 공덕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출가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재가의 성자라도 갓 출가한 사미에게 합장공경해야 한다. 이어서 나가쎄나 존자는 다음과 같이 대해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대왕이여, 대해의 파도를 '대해에 파도가 이 만큼 있다.'라고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대왕이여, 이와 마찬가지로 출가는 많은 공덕, 무수한 공덕, 셀 수 없는 공덕을 지녔으므로 출가의 공덕을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대왕이여, 출가자에게는 무엇이든 해야 할 일이 속히 성취되는 만큼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무슨 까닭입니까? 대왕이여, 출가자는 소욕이고 만족하고 멀리 떠나 있고 사귐을 여의였고 정근하며 애집이 없고 주처가 없고 계행을 구족하고 버리고 없애는 삶을 살고 두타행의 실천에 밝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출가자에게는 무엇이든 해야 할 일이 속히 성취되는 만큼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대왕이여, 마디가 없고평활하고 잘 닦이고 반듯하고 때묻지 않은 화살은 잘 쏘아지면 올바로 날아갑니다. 대왕이여, 이와 마찬가지로 출가자에게는 무엇이든 해야 할 일이 속히 성취되는 만큼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Mil.245)

출가의 장점은 해야 할 일이 오래 걸리지 않는 것이다. 해탈과 열반에 빨리 이를 수 있음을 말한다.

재가는 공작새와 같고 출가는 백조와 같다. 빠름에 있어서 공작새는 백조를 따라 잡을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재가의 성자일지라도 사미에게 합장공경해야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재가신도로서 흐름에 든 님이, 범부인 수행승이라도 '그는 거룩한 경지에 가깝다.' 라고 그에게 예경하고 일어나 맞이하는 것은 타당합니다. 재가신도로서 흐름에 든 님은 범부인 수행승이라도 '그는 번뇌를 부순 자들과 더불어 수행자의 지위에 도달했다. 나에게는 그러한 동아리가 없다.' 라고 그에게 예경하고 일어나 맞이하는 것은 타당합니다. 재가신도로서 흐름에 든 님은, 범부인 수행승이라도 '그는 최상의 대중과 가까이 하고 있다. 나에게는 그러한 경우가 없다.'라고 그에게 예경하고 일어 나 맞이하는 것은 타당합니다. 재가신도로서 흐름에 든 님은, 범부인 수행승이라도 '그는 빠띠목카 송출을 들을 수 있다. 나는 그것을 들을 수 없다.' 라고 그에게 예경하고 일어나 맞이하는 것은 타당합니다. 재가신도로서 흐름에 든 님은, 범부인 수행승이라도 '그는 다른 사람들을 출가시키고 구족계를 받게 하고 승자의 가르침을 성장시킬 수 있다. 나는 그것을 할 수 없다.'라고 그에게 예경하고 일어나 맞이하는 것은
타당합니다. 재가신도로서 흐름에 든 님은, 범부인 수행승이라도 '그는 수행 는 학습계율 가운데 사소한 것까지도 완전히 실천한다. 나는 그것들을 실천하지 않는다.'라고 그에게 예경하고 일어나 맞이하는 것은 타당 합니다.(Mil.163)

재가가 해야 할 일이 있고 승가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이를 본분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승가의 본분사는 어떤 것인가? 나가쎄나 존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양은 승자의 아들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모든 형성된 것들에 대한 성찰,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 새김의 확립과 관찰, 대상에서 본질의 파악, 번뇌와의 싸움, 목표의 실현, 이것이 승자의 아들이 해야 할 일이고, 공양은 나머지 신들과 인간이 해야 할 일입니다. 대왕이여, 지상의 왕자들에게는 코끼리 말, 전차, 활, 칼, 서사, 손가락계산, 정책, 전문, 관습, 전술, 용병술에 관한 훈련이 해야 할 일이고, 나머지 일반적인 평민이나 노예 는 경작, 상업, 목축이 해야 할 일입니다. 대왕이여, 이와 마찬가지로 공양은 승자의 아들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모든 형성된 것들에 대한 성찰,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 새김의 확립과 관찰, 대상에서 본질의 파악, 번뇌와의 싸움, 목표의 실현, 이것이 승자의 아들이 해야 할 일이고, 공양은 나머지 신들과 인간이 해야 할 일입니다.(Mil.178-179)

스님의 본분사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재가는 승가를 외호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스님이 본분사를 하지 않았을 때 어떻게 될까? 신도들은 떠나고 교세는 약화될 것이다.

2024-06-0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