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오늘은 어떤 그림을 그려 나갈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4. 5. 9. 09:51

오늘은 어떤 그림을 그려 나갈까?

 

 

지금 시각 오전 74, 하얀 여백을 대하고 있다. 오늘은 어떤 그림을 그려 나갈까? 생각해 둔 것이 있다. 자판을 쳐서 옮기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미래는 알 수 없다. 글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자판 치기에 달려 있다.

 

오늘 새벽 잠에서 깼을 때는 세 시대였다. 잠 자다가 자주 깨면 좋지 않다. 한번 잠이 깨면 잠들기 힘들다. 법정스님은 한번 깼으면 다시 잠들지 말라고 했다.

 

새벽에 밀린다팡하를 읽었다. 앞으로 한달 이내에 다 읽어야 한다. 교정본이다. 그럼에도 쓰기본능은 멈출 수 없다. 기억해 두고 싶은 문구를 새기고자 하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일등이다. 일찍 일어나는 것도 일등이고 집에서 나오는 것도 일등이다. 백권당에 도착하는 것도 일등이다. 준비해 간 아침을 오분 만에 먹고 이렇게 하얀 여백을 대하고 있다.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질문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질문을 잘해야 얻는 것도 많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밀린다왕은 질문의 천재와도 같다. 우리가 감히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물어 본다.

 

공덕과 악덕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큰가?

 

오늘 읽은 것 중에 밀린다왕의 인상적인 질문이 하나 있다. 그것은 존자 나가쎄나여, 공덕과 악덕 가운데 어떤 것이 더 큽니까?”라는 물음이다.

 

행위에 따라 갈 곳이 정해진다. 공덕을 쌓으면 선처에 태어나고 악덕을 쌓으면 악처에 태어난다. 그렇다면 공덕쌓기가 더 쉬울까 악덕쌓기가 더 쉬울까? 아마 후자일 것으로 본다.

 

대부분 사람들은 탐, , 치로 산다. 그래서 중생이다. 그런데 탐, , 치로 산다는 것은 감각적으로 산다는 말과 같다. 동물과 같은 삶이다. 오로지 즐기는 삶이다.

 

즐기는 삶은 공덕일까 악덕일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악덕이다. 이는 명백하다. 불자들의 생활경전이라 볼 수 있는 천수경에서도 십악참회라 하여 즐기는 삶을 악덕으로 보고 있다. 이는 탐애중죄금일참회라는 문구가 말해준다.

 

즐기는 삶은 감각을 즐기는 삶이기 쉽다. 이는 다름 아닌 탐욕이다. 아직 가지지 않은 것을 바라는 것이 욕망이고, 가진 것에서 더 가지고자 하는 것이 탐욕이다. 감각을 즐기는 삶은 욕망이기도 하고 탐욕이기도 하다. 그런데 탐욕은 불선업이라는 사실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악덕을 짓는다. 공덕을 짓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이때 공덕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그것은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을 말한다.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라도 지으면 선업이 된다.

 

밀린다왕은 공덕과 악덕 가운데 어떤 것이 더 큰 것인지 물어 보았다. 놀랍게도 나가쎄나 존자는 대왕이여, 공덕이 더욱 크고 악덕은 작습니다.”라고 답한다.

 

나가쎄나 존자의 답변은 의외이다. 상식적으로 악덕이 훨씬 더 클 것 같다. 그럼에도 공덕이 악덕 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고 했다. 왜 그럴까? 나가쎄나 존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대왕이여, 악덕을 행하면내가 악덕을 지었다.’고 후회합니다. 그래서 악덕은 증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왕이여, 공덕을 지으면 후회가 없어지고, 후회가 없어지면 희열이 생겨나고, 희열이 생겨나면 기쁨이 생겨나고, 기쁨이 생겨나면 몸이 편안해지고, 몸이 편안해지면 행복을 느끼고, 행복해지면 마음이 집중되고, 집중되면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러한 까닭에 공덕이 증대됩니다.”(Mil.84)

 

 

참으로 놀라운 가르침이다. 이런 문구를 보면 경전을 읽는 맛이 난다. 왜 그런가? 인식의 지평선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불선업을 행하면 후회하게 된다. 계속 후회하면 악업은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그 상태에서 사띠하여 멈추면 악업은 증가하지 않을 것이다.

 

선업을 지으면 마음이 기뻐진다. 보시를 하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내가 보시했다는 마음이 일어나서 기쁜 마음이 유지된다. 금강경에서는 무주상보시라 하여 상을 내지 말라고 했지만 이는 출세간적이다. 보시를 하면 보시를 했다는 마음으로 인하여 기쁘고 충만해 질 때 공덕이 된다.

 

선업공덕이라 해서 모두 증대되는 것은 아니다. 보시를 하고 지계를 하면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은 분명히 공덕의 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유지 되지 않는다. 단발성일 경우가 많다. 그 순간에 기쁨이 일어나는 것이다.

 

선업공덕의 마음이 지속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수행을 해야 할 것이다. 수행을 하면 기쁜 마음이 지속된다. 더 나아가 행복도 느끼고 평온해진다.

 

수행공덕은 보시와 지계와 비교 했을 때 시간적으로 꽤 오래 지속된다. 그래서 공덕을 지으면 후회가 없어지고, 후회가 없어지면 희열이 생겨나고, 희열이 생겨나면 기쁨이 생겨나고, 기쁨이 생겨나면 몸이 편안해지고, 몸이 편안해지면 행복을 느끼고, 행복해지면 마음이 집중되고, 집중되면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러한 까닭에 공덕이 증대됩니다.”(Mil.84)라고 말한 것이다.

 

지은 업에 의해서 다음 생이 결정된다. 이때 무거운 업이 결정적이다. 살인을 했다면 살인은 매우 무거운 업이 된다. 반대로 선정에 들었다면 선정 역시 매우 무거운 업이 된다.

 

다음생은 재생연결식에 의해서 일어난다. 마지막 죽음의 의식이 일어날 때 업,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 것이다.

 

무거운 업을 지었다면 그 업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난다. 살인을 저질렀다면 살인과 관련된 업이나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이 일어난다. 지옥이기 쉽다. 수행을 해서 선정 체험을 했다면 선정과 관련된 업이나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이 일어난다. 천상에 태어나기 쉽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선정에 들면 엄청난 선업을 짓는다고 한다. 왜 그런가? 선정삼매에 드는 시간만큼 공덕을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자와나라는 속행에 따른다.

 

보시 했을 때는 속행이 한번 밖에 일어나지 않는다. 한번 공덕을 짓는 것이다. 그러나 선정에 들었을 때는 선정에 든 시간만큼 속행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을 짓는다고 말한다.

 

모르고 지은 죄와 알면서 지은 죄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무거운 것인가?

 

흔히 이런 말을 듣는다. 모르고 지은 죄와 알면서 지은 죄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무거운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법문에서 자주 듣는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질문의 출처가 밀린다팡하라는 사실이다.

 

밀린다왕이 물었다. 왕은 존자 나가쎄나여, 알면서 악업을 저지르고 모르면서 악업을 저지르는데, 어느 쪽이 더욱 부덕한 것인가?”라고 물은 것이다. 이에 나가쎄나 존자는 대왕이여, 모르면서 악업을 저지르는 자가 더욱 부덕한 것입니다.”라며 다음과 같이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대왕이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뜨겁고 작열하고 불 타오르고 불꽃이 이는 철환(鐵丸)을 한 사람이 알고서 만지고 한 사람이 모르면서 만진다면, 누가 더욱 심하게 화상을 입겠습니까?”(Mil.84)

 

 

뜨거운 철환의 비유이다. 이런 비유는 뜨거운 난로 등 여러 가지로 변용되었다. 그런데 이미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출처를 밝히지 않고 사용되어 왔던 것이다.

 

밀린다왕이 질문한 것은 그리스 철학의 기반에 따른 것이다. 그리스에서도 이런 질문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알고서 악을 행하는 자는 알지 못하고 악을 행하는 자보다 낫다라는 소크라테스의 주장과 일치함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여기에는 알고서도 어쩔 수 없이 비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의 비극에 대한 그레코-부디즘적 연민이 깔려 있다.”(304번 각주)라고 했다.

 

여기 도둑이 있다. 그는 도둑질이 나쁜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가지고 싶어 하는 물건만 보면 손이 간다. 아마 이런 것이 알고서도 어쩔 수 없이 비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의 비극에 해당될 것이다.

 

밀린다왕의 불교는 그레코-부디즘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철학에 불교가 가미된 것이다. 그래서 밀린다왕의 질문에는 그리스철학의 기반이 깔려 있다. 그러나 불교는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이는 한역 나선비구경에서 어리석은 자는 악을 저지르고 스스로 뉘우치지 못하므로 재앙이 크고, 현명한 자는 악을 저지르고도 부당한 것을 알아 하루에 스스로 뉘우치는 까닭에 재앙이 적다.”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어느 스님은 무명이 대죄라고 했다. 이는 무지가 큰 죄라는 말과도 같다. 이때 무명이 대죄라는 말은 아마도 밀린다팡하에서 알거나 모르면서 악업을 짓는 것에 대한 질문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알면 죄를 짓지 않는다.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 법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죄를 짓는 것도 해당될 것이다. 가르침에 대하여 모르고 산다면 죄만 짓는 인생이 될 수 있다. 이는 훔친 것이 나쁜 것인 줄 알면서도 손이 가는 것과는 다르다. 모르기 때문에 뜨거운 철환에 손을 대는 것이다. 그래서 나가쎄나 존자는 모르면서 악업을 저지르는 자가 더욱 부덕한 것입니다.”라고 했다.

 

선업의 배로 저 언덕으로

 

밀린다팡하를 읽다 보면 새기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다. 이 모든 것을 글로 써야 하나 한계가 있다. ‘부처님 덕성의 새김에 대한 질문도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밀린다왕이 물었다. 왕은  “존자 나가쎄나여, 그대들은 이와 같이백년 동안을 악하고 불건전한 일을 행하더라도, 죽는 순간에 한번이라 도 부처님에 대한 새김을 확립할 수 있다면, 그는 천상에 태어날 것이 다.’라는 이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또한이 살생으로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라는 이 말도 믿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밀린다왕은 그레코-부디즘 신봉자였다. 그리스 철학에 기반한 합리주의자였던 것이다. 기독교가 그리스에 전파 되기 이전의 일이다. 그래서 이성에 기반하여 이해 가지 않는 것에 대하여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염불 한번 했다고 해서 천상에 태어나는 것에 대하여 믿을 수 없음을 말한다.

 

나가쎄나 존자는 밀린다왕의 어떤 질문이라도 소화해 낸다. 이해하기 쉽게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이번에도 비유를 들어 멋지게 방어했다. 나가쎄나 존자는 대왕이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작은 돌이라도 배가 없다면 물위에 뜰 수 있습니까?”라며 역질문한 것이다.

 

미얀마 사원에 가면 반야용선과 같은 배가 있다. 도르레를 이용하여 불상 높은 곳까지 올려 보낸다. 차욱타지 사원에서 보았다.

 

우리나라 사찰에도 반야용선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밀린다팡하를 보니 반야용선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다. 이는 나가쎄나 존자가 작은 돌이라도 배가 없다면 물위에 뜰 수 있습니까?”라며 역질문한 것이다.

 

어떤 돌이라도 배에 태우면 물에 떠 있다. 집채 만한 바위도 배 위에 있으면 물에 떠 있다. 그리고 저 언덕으로 건너갈 수 있다. 이때 배는 반야용선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백 대의 수레에 실은 돌들이라도 배에 실으면, 물에 뜰 수 있습니까?”라며 역질문한 것이다.

 

한역 나선비구경에서도 배에 실은 돌의 비유가 있다. 이는 배 가운데 백장의 큰 바위는 배로 인하여 가라앉지 않는다. 사람에게 본래 악이 있을지라도 한번 부처님을 새기면, 그로 인해 지옥에 들지 않고 문득 천상에 태어난다. 작은 돌이 가라앉는다는 것은 사람이 악을 저지르고 불경을 알지 못하여 사후에 지옥에 떨어지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나선비구경에서는 한번 부처님을 새기면 지옥에 들지 않고 문득 천상에 태어난다라고 했다. 마치 임종시에 아미타불염불을 하면 아미타 세계에 태어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라는 배에 탔기 때문이다.

 

반야용선을 타면 쉽게 저 언덕으로 건너갈 수 있다. 반야용선이 없다면 건너 갈수 없다. 아주 작은 악업을 지어도 악처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의 배에 탑승하면 물에 빠지지 않고 저 언덕으로 안전하게 건너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자력수행보다 타력수행이 하기 쉽다. 후대 대승불교에서 타력신앙이 유행한 이유가 될 것 같다.

 

나가쎄나는 존자는 타력적 측면에서 악업보다 선업이 강하다고 했다. 똑 같은 악업을 지었어도 가르침의 배에 실리면 저 언덕에 건너갈 수 있는 것이다. 마치 대승불교에서 일념으로 염했을 때 그 염하는 힘으로 저 언덕으로 건너 가는 것과 같다.

 

초기불교에 불수념이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의 타력신앙과는 다른 것이다. 이는 나가쎄나 존자가 대왕이여, 배처럼, 이와 같이 착하고 건전한 업을 보아야 합니다.”(Mil.80)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선업을 짓는 것 자체가 저 언덕을 건너 가는 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각주에서는 부처님에 대한 새김을 타력적 믿음이라고 보기보다는 자력적 선업의 일종이라고 설득하고 있다.”(291번 각주)라고 했다.

 

질문이 있어야 발전이

 

지금 시각은 오전 844, 글을 쓴지 1시간 40분이 지났다. 이제 정리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 할 일을 해야 한다. 두 건의 인쇄회로기판 설계 작업이 있다. 오늘과 내일 마쳐야 한다. 글도 쓰고 생업도 하는 등 마음이 급하다.

 

밀린다팡하를 접한 것은 행운이다. 마치 이제까지 읽은 니까야와 논서가 정리 되는 것 같다. 그것은 탁월한 질문에 따른 것이다.

 

질문이 있어야 발전이 있다. 질문이 없으면 항상 그 상태가 된다. 수행자는 끊임 없이 질문한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수행점검하는 것도 질의응답에 해당된다.

 

마음을 잃어 버린 것이 아니라 새김을 놓친 것

 

밀린다왕의 질문을 보면 놀라운 것이 많다. 나의 인식의 지평선을 넓혀 주기에 충분하다. 수백가지 질문이 있는데 모두 궁금했던 것들이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도 있다. 기억에 대한 것이 대표적이다.

 

자주 잊어 버린다.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무엇을 꺼내고자 했는지 잊어 버릴 때가 있다. 이럴 때 치매를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치매는 아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잃어 버린 것일까? 그렇지도 않다. 마음을 잃어 버린 것이 아니라 새김을 놓친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늘 싸띠(sati)하라고 말한다. 새김을 유지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새김은 싸띠를 번역한 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마음챙김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사띠의 번역어 마음챙김은 적당하지 않다고 했다. 우리말 새김으로 번역한 것은 과거에 대한 기억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조각(彫刻)이라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새김이라는 말은 기억의 뜻을 가진 싸띠의 번역어이다. 항상 새김을 유지하고 있어야 잊어 버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마음을 잊어 버렸다고 말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 같다. 이는 무심코 하늘을 바라본다든가 무심코 꽃을 보는 행위 등을 말한다. 팔을 뻗칠 때도 무심코 뻗친다.

 

어느 장로가 있었다. 어느 날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팔을 다시 한번 폈다가 접었다. 제자들은 이상스러운 행동에 물어 보았다. 그러자 장로는 새김을 놓쳤기 때문에 다시 하는 것이라고 했다.

 

새김을 놓치면 마치 치매환자처럼 된다. 바로 이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새김을 유지하고 있으면 잊어 버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마음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마음을 인식주체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인식 주체는 없다. 보고 듣고 마시는 등 인식주체가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그 대신 새김을 말한다. 매순간 새김 하는 것이다.

 

매순간 새김하면 잊어 버리지 않는다. 이런 새김에 대하여 밀린다팡하에서는 열일곱까지 형태가 있다고 했다.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대왕이여, 1)자각적 회상에서 새김이 생겨나고, 2) 외부적 시사에서도 새김이 생겨나고, 3) 강력한 의식에서도 새김이 생겨나고, 4) 이익의 식별에서도 새김이 생겨나고, 5) 불익의 식별에서도 새김이 생겨나고, 6) 유사성에서도 새김이 생겨나고, 7) 차별성에서도 새김이 생겨나고, 8) 대화의 이해에서도 새김이 생겨나고, 9) 특징에서도 새김이 생겨나고, 10) 기억에서도 새김이 생겨나고, 11) 기호에 서도 새김이 생겨나고, 12) 산술에서도 새김이 생겨나고, 13) 암송에서도 새김이 생겨나고, 14) 수행에서도 새김이 생겨나고, 15) 책의 참조에서도 새김이 생겨나고, 16) 관념의 연관에서도 새김이 생겨나고, 17)새김은 경험에서도 생겨납니다.”(Mil.78)

 

 

참으로 놀라운 내용이다. 아직까지 싸띠(새김)에 대한 이런 설명은 보지 못했다. 열일곱까지 형태의 새김에 대하여 십칠행상이라고 한다.

 

십칠행상 중에서 열일곱번째 새김은 경험에서도 생겨난다라고 했다.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보면 보았기 때문에 형상을 기억하고, 들었기 때문에 소리를 기억하고, 맡았기 때문에 냄새를 기억하고, 맛보았기 때문에 맛을 기억하고, 접촉했기 때문에 감촉을 기억하고, 의식했기 때문에 사실을 기억하듯, 경험에서도 새김이 생겨납니다.”(Mil.80)라고 했다.

 

초기불교에서 사띠의 개념을 이해하기 가장 어렵다. 수행처에서도 늘 알아차리라고 하는데 그 의미를 잘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래서일까 싸띠에 대하여 마음챙김이라고 번역 했는데 이는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마음챙김이라는 말에는 기억이라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기억을 잘 하려면 마음을 잘 챙기는 것이 아니라 잘 새겨야 한다. 이는 이전 것을 잘 기억하는 것이다. 기억이 있어야 수행이 되는 것이다. 기억이 없다면 치매환자처럼 바로 이전 것도 잊어 버린다.

 

기억은 마음이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대하여 어떤 변치 않는 영혼과 같은 것으로 본다면 마음이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으로 파악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그런 주체적인 마음은 없다. 이는 나가쎄나 존자가 대왕이여, 의식은 식별을 특징으로 하고, 지혜는 분명히 아는 것을 특징으로 하지만, 생명체 안에 있는 영혼의 존재는 되지 않습니다.”(Mil.86)라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기억은 마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싸띠가 있어서 기억하는 것이다. 찰나찰나 변하는 현상을 놓치지 않고 새겼을 때 오래 전의 일도 기억하게 된다. 어떤 변치 않는 마음이 있어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일어나는 현상을 놓치지 않고 싸띠했을 때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의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칠각지에서 염각지, 즉 새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생멸의 지혜를 시작으로 새김이 깨끗해졌을 때 새길 때마다 그 대상 들에 꽉 밀착하여 머무는 듯이 드러나는 새김이 매우 분명하게 생겨난다. 그때에는 생멸하는 물질과 정신 대상들이 새기는 마음 쪽으로 저절로 가까이 다가오는 것처럼 드러난다. 어느 대상 하나를 새겨 알고 나면 즉시 다른 대상 하나가 저절로 드러난다. 새기는 마음을 대상 속으로 푹 담그는 것처럼, 집어넣는 것처럼 드러난다. 그래서 그 새김(sati)에 대해 서 ‘apilāpanalakkhaa = 결합하는 법들을 대상으로부터 떨어지게 하 지 않게, 또한 새겨 알아지는 대상들도 새겨 아는 것으로부터 떨어지지 않게, 달아나지 않게 하는 특성이 있다'라고 주석서에서 설명하였다. 그렇게 매우 분명하게 생겨나는 사띠는 도의 지혜를 생겨나게 하기 때문에 새김 깨달음 구성요소(sati sambojjhaga)라고 한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 519)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법의 맛

 

지금 시각 933분이다. 50분이 지났다. 이제 진짜 마무리해야 한다.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니 한이 없다. 글을 쓰다 보면 자판 가는 대로 쓰게 된다. 어느 방향으로 갈지 알 수 없다. 글을 끝내 놓고 보아야 한다.

 

밀린다팡하 교정본을 보면서 법의 맛을 느낀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도 법의 맛만 못할 것이다. 이렇게 자판을 두들기고 있다 보면 아픈 것도 잊어 버린다.

 

 

2024-05-0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