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

담마다사 이병욱 2024. 5. 5. 10:19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
 
 
나는 시간 속에서 살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를 살고 있다. 그러나 과거는 지나간 것이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현재를 살고 있지만 잡을 수 없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은 어쩌면 시간을 붙들어 매기 위한 몸부림인지 모른다.
 
헤라이클레토스의 함정
 
요즘 밀린다팡하를 읽는다. 교정본 ‘시간의 품’을 보면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는 것에 대하여 상속(相續: santati)으로 설명하고 있다.
 
불교는 기독교와 다르다. 또한 불교는 기독교의 원류가 되는 그리스철학과 다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리스철학에서도 무상관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무상관과 다르다. 상속에 대한 것이 대표적이다.
 
헤라이클레이토스는 ‘누구도 같은 강을 건널 수 없다’고 했다. 이는 ‘모든 것이 지속적인 흐름이면 누구도 같은 강을 한번도 건널 수 없다.’라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밀린다팡하에서 전재성 선생이 각주(181번)한 것을 보면“모든 것이 지속적인 흐름이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라는 ‘헤라이클레토스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고 했다.
 
밀린다왕은 나가쎄나 존자에게 질문했다. 왕은 간난아기 때와 성장했을 때의 자신은 다르다고 했다. 이는 헤라이클레토스의 주장을 바탕에 깔고 질문한 것이다. 이에 나가쎄나 존자는 ‘등불의 비유’로 설명했다.
 
여기 밤새도록 타고 있는 등불이 있다. 이때 등불은 동일 등불일까? 그렇지 않다. 연료와 심지를 조건으로 타오르고 있는 불꽃은 이전과 이후는 같지 않다. 그렇다고 다르지도 않다.
 
지금 타고 있는 불꽃은 이전 불꽃과 비교하여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이를 한자어로 불일불이 (不一不異) 라고 한다. 그런데 밀린다팡하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간다. 이는“그러므로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닙니다. 이전의 의식은 최후의 의식에 섭수됩니다.”(Mil.40)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헤라이클레이토스의 함정에 빠지면 허무주의가 된다. 그러나 부처님의 불일불이 사상에 따르면 ‘염염상속(念念相續)’된다. 이는 다름 아닌 윤회를 말한다.
 
윤회는 왜 하는가? 이는 의도와 관련 있다. 그래서 나가쎄나 존자는 “대왕이여, 만약에 내가 집착을 가지고 있으면 결생할 것이고, 내가 집착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결생하지 않을 것입니다.”(Mil.48-49)라고 말했다.
 
불교에서는 삼세를 말한다. 삼세에 걸쳐서 윤회하는 것이다. 그런데 집착하지 않으면 결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는 윤회가 끝남을 말한다.
 
사람들은 윤회의 주체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어떤 변치 않는 영혼이 있어서 윤회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유아윤회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연기법적으로 윤회할 뿐이다.
 

 
시간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시간 속에서 삶을 살고 있다.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다. 오늘이 있어서 내일이 있게 된다. 이렇게 이 나이 먹도록 살아 왔다. 그렇다면 시간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무엇이든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일까 창조가 있으면 종말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최초의 시작점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당연히 끝도 알 수 없다.
 
범부는 끊임없이 윤회한다. 마치 물레방아가 돌듯이 끊임 없이 돌고 돈다. 물레방아에 시작점은 없다. 당연히 끝점도 없다. 그렇다면 최초의 시작점은 무엇일까?
 
불교에서는 최초의 시작점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굳이 시작점을 말하라고 한다면 무명(avijjā)을 들 수 있다.
 
무명이란 무엇일까? 문자적으로는 밝지 못한 것을 말한다. 이는 한자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밀린다팡하에서는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의 뿌리는 무명입니다.”(Mil.50)라고 했다.
 
범부는 삼세에 걸쳐서 살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삶은 무명에서 기인했다는 사실이다. 칸트의 시간에 대한 경험론과는 다른 것이다. 이런 무명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각주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무명(無明: avijjā)은 치암무명대명(癡闇無明大冥)이라고 불린다. 무지(無知)가 단순히 인식론적인 무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인 무지를 뜻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연기법이나 사성제에 대해서 무지하다면 그는 그것에 대한 무지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는 연기법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조차 모른다. 그래서 그의 무지는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무지에 대한 무지이다. 이것이 시간의 뿌리라는 사실은 무명이 우주만물을 창조된 최초의 시작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밀린다팡하 207번 각주)
 
 
참으로 새기고 싶은 내용이다. 무명에 대하여 이토록 명쾌하게 설명해 놓은 것을 보지 못했다.
 
무명과 무지는 동의어이다. 그런데 무지에 대하여 인식론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 실존적인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무지는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십이연기 정형구가 있다. 무명에 대한 것을 보면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 무명이라고 했다. 그런데 무지에 대하여 연기법이 있는지 조차 모르는 것도 무지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무지에 무지가 되어 중층 무지가 된다.
 
모르기 때문에 괴롭다.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캄캄한 방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면 두렵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다. 그러나 불을 켜는 순간 일시에 밝아 진다. 무명이 사라진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알면 두렵지 않다. 어둠에서 등불을 들고 가는 것과 같다. 그러나 가르침을 모르면 어둠에서 헤매는 것과 같다.
 
유일신교에서는 최초의 시작점을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S15.1)라고 했다. 이는 나가쎄나 존자가 왕에게“닭에서 알이 나오고, 알에서 닭이 나오고, 닭에서 알이 나오듯, 이와 같이 그 상속에서 끝이 있습니까?”(Mil.51)라고 역질문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부동(不動)의 동자(動者)
 
서양의 유일신교에서는 최초의 시작점을 말한다. 이는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不動)의 동자(動者)’로 설명된다. 그러나 약점이 있다. 이에 대하여 밀린다팡하 각주에서 전새성 선생은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알렉산더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는 만물의 제일원인으로서 인과적 효능을 가지는 ‘부동(不動)의 동자(動者)’를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그것은 완벽히 아름답고, 불가분하며 완벽한 관조만을 관조하는 자, 즉 본인만을 관조하는 자이자, 능동적 이성이다. 밀린다 왕은 최초의 원인을 생각하면서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적 유의 철학을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자연적인 원인들은 동인을 낳는 원인이 아니라 제일원인이 개입하기 위한 기회원인들이 될 뿐이다. 이것은 절대적인 형이상학이 빠지기 쉬운 함정을 잘 대변 하고 있다.”(밀린다팡하 210번 각주)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에 따르면 이는 세상 모든 것들의 제일의 원인이 된다. 창조주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논리로 일관하면 삼라만상 모든 것들은 신의 창조물이 된다. 이에 “절대적인 형이상학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모든 것을 개념화 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언어적 개념으로 형성된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오로지 이름이나 명칭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생멸하지 않는다. 생멸하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형이상학이 그렇다는 것이다.
 
 
 
최초의 시작점은 시설될 수 없다. 이에 대하여 나가쎄나 존자는 수레바퀴의 비유를 들었다.
 
수레바퀴는 시작점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물레방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좀도 구체적으로 감역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시각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대왕이여,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이러한 수레바퀴를 언급하셨습니다.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세 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겨난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고, 집착을 조건으로 행위가 생겨나고, 행위에서 시각이 생겨난다.’라 고212)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그 상속에서 끝이 있습니까?”(Mil.51)
 
 
가요 중에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이라는 노래가 있다. 눈이 있어서 봄으로 인하여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이후 조건발생한다. 그 결과 업을 짓게 된다. 끊임 없는 연속이다. 돌고 도는 물레방아 같은 것이다.
 
부처님은 윤회의 시작점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이는 창조주를 시작으로 보는 유일신교와는 다른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윤회의 시작을 무명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가쎄나 존자는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의 뿌리는 무명입니다.”(Mil.50)라고 했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갈애이다. 그래서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점을 알 수 없다.”(S15.1)라고 했다.
 
윤회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그것은 무명과 갈애이다. 무명은 과거에 대한 원인이고 갈애는 미래의 원인이 된다.
 
윤회의 바퀴를 멈추려면
 
무명과 갈애로 돌고 돈다. 여섯 감역에서 갈애를 일으키면 윤회의 원인이 된다. 윤회의 바퀴를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버지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어머니의 어머니는 누구일까? 아마 일곱 세대 이상 올라가면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계속 추적해 가고자 한다면 어떻게 될까?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 잠부디빠에서 풀과 나뭇가지와 잎사귀를 따다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아놓고 ‘이분은 나 의 어머니, 이분은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식으로 헤아려 나간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사람의 ‘어머니의 어머니’ 식의 헤아림이 끝나기 전에 여기 잠부디빠의 풀과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이 모두 소모되어 없어져 버릴 것이다.”(S15.1)
 
 
누구나 자신의 조상이 있다. 모계 방향으로 조사해 가다 보면 어디에 이를까? 최초의 시작점을 향해 ‘무한소급’하려 한다면 우주 잎사귀는 남아 나지 못할 것이다.
 
존재의 근원에 대하여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부동의 동자를 상정하는 것이다. 유일신교의 창조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 원인과 조건과 결과라는 연기법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윤회는 집착에 따른다. 그래서 "만약에 내가 집착을 가지고 있으면 결생할 것이고, 내가 집착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결생하지 않을 것입니다.”(Mil.48-49)라고 했다. 집착을 없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연기법을 역순으로 올라가면 되면 된다.
 
갈애는 집착의 원인이 된다. 느낌은 갈애의 원인이 된다. 느낌 단계에서 새기고(sati) 올바로 알아차리면(sampajana) 윤회의 수레바퀴가 멈춘다.
 
존재 자체가 괴로움
 
시간 속에서 삶을 살고 있다. 나는 무명과 갈애로 사는 한 시간의 수레바퀴를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 그에 따라 괴로움도 영원히 계속 될 것이다. 왜 그런가? 이는 “집착의 대상이 되는 현상에서 즐거움을 보는 자에게 갈애가 성장한다.”(S12.55)라는 가르침에 따른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존재 자체가 괴로움이다. 그래서 오온에 대하여 “존재의 다발은 모두 괴로움의 다발이 생겨나는 종자”(Mil.52)와 같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범부들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세상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과거, 미래,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물레바퀴처럼 돌고 돈다.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이다.
 
 
2024-05-0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