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는 한송이 타오르는 불꽃
스님의 개가 태어났다. 이를 축하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는 것은 축하할 일이지만 또 한편으로 측은한 느낌이 든다. 개는 개로서 개의 일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스님의 개는 일년도 안되어서 새끼를 뱄다. 스님은 작년 추석전에 새끼 밴 사실을 알았을 때 탄식했었다.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산에 들어 왔는데 또다시 인연 맺은 것에 대하여 자괴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스님의 강아지는 모두 다섯 마리이다. 공통적으로 점이 있어서 점박이라고 칭할 수 있다. 얘네들은 어디서 왔을까? 얘네들의 아비 개는 어떤 개일까?
흔히 경멸할 때 애비 없는 자식이라고 말한다. 아비가 누군지 모르고 태어난 것에 대한 경멸이다. 그러나 경멸을 받아야 할 사람은 자식이 아니라 어미이다. 여러 남자들과 관계를 했을 때 누구의 씨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개는 아비가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어디서 관계를 했는지 알 수 없다. 설령 아비 개를 안다고 해도 어미 개처럼 보살펴 주는 것도 아니다. 씨를 한번 뿌리고 나면 그만이다.
홀로 사는 스님에게 가족이 생겼다. 산속에서 자유를 즐기던 스님에게 강아지들이 출현한 것이다. 적적한 산중에서 개를 벗삼아 살았는데 새로운 식구가 늘어났다. 마치 손자 보듯 보살피려 하는 것 같다.
스님의 강아지는 다 키울 수 없을 것이다. 두 달 정도 지나면 어디론가 보낼 것이다. 신도들이 대상이 되기 쉽다. 작년에도 그랬다. 일년도 안되어서 똑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그때 스님은 중성화 수술을 천명했었다. 그러나 지켜지지 않았다. 개가 발정기가 되었을 때 내버려 둔 모양이다. 그 결과 점박이 강아지 다섯 마리가 나오게 되었다. 이를 축하해야 할까 측은해 해야 할까? 후자에 가깝다.
태생의 자만
이 세상에서 가장 천하게 보이는 동물이 개이다. 공원에 산책 나온 개를 보면 안쓰럽다. 무엇보다 목줄에 묶인 것이 안되어 보인다. 이에 반하여 생태하천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물오리를 보면 의연해 보인다.
사람도 천한 사람이 있다. 천한 행위를 하면 천한 것이다. 탐, 진, 치로 사는 범부들이 그렇다. 귀한 사람은 고귀한 행위를 하기 때문에 성스러운 것이다. 수행자의 삶이 그렇다.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어야 하리.
어떠한 땔감에도 불이 생겨나듯
비천한 가문에도 지혜로운 현자가 생기네.
부끄러움으로 자제하는 자가 고귀하네.”(S7.9)
어느 바라문이 불의 신에게 헌공하고 있었다. 마침 부처님은 그 옆에 있었다. 바라문은 헌공을 마치고 제사음식을 주고자 다가 왔다. 먼저 “그대는 어떤 가문 출신입니까?”라며 물어 보았다. 그런데 부처님이 두건을 벗자 삭발한 머리가 드러났다. 이에 바라문은 실망하여 “이 자는 빡빡 깍은 까까중이네.”라며 경멸의 말을 했다. 왜 그랬을까?
부처님 당시에 바라문 수행자가 있었다. 가난한 바라문도 있었다. 불의 헌공을 마친 바라문은 같은 계급의 바라문에게 음식을 공양하고자 했다. 그런데 머리를 보니 아니었던 것이다.
출가수행자들은 삭발한다. 부처님도 삭발했다. 그런데 부처님의 교단에는 사성계급의 구별이 없었다는 것이다. 누구나 부처님 교단에 들어 오면 동등한 처지가 된다. 그렇다면 바라문은 왜 “이 자는 빡빡 깍은 까까중이네.”라며 경멸의 말을 했을까? 그것은 부처님의 교단에도 노예출신의 수행승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땔감의 불꽃도 동일
바라문들은 가문을 중요시했다. 이는 사성계급의 최상층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아닌 태생의 자만에 해당된다. 그래서 “바라문들이야말로 최상의 계급이고, 다른 계급은 저열하다.”(M93)라고 말했다.
태생의 자만을 가진 바라문은 노예출신을 경멸했다. 같이 밥을 먹으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근처에 가지도 않았다. 머리를 삭발한 사람을 보았을 때 아마도 틀림없이 노예출신일 것이라는 편견을 가졌을 것이다.
부처님의 교단에는 바라문이나 왕족도 있다. 그러나 노예가 들어가 있는 한 모두 최하층계급으로 간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마치 바라문 출신의 여자가 노예출신의 남자와 결혼하면 둘 다 노예로 보던 관습이 있었기 때문으로 본다.
바라문은 돌아가고자 했다. 이에 부처님은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어야 하리. 어떠한 땔감에도 불이 생겨나듯 비천한 가문에도 지혜로운 현자가 생기네.”(S7.9)라며 게송으로 말했다.
비천한 가문은 노예계급을 뜻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어떠한 땔감에도 불이 생겨난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어떤 의미일까? 이는 계급의 차별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왜 그런가? 어떤 땔감의 불꽃도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쌀라야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쌀라야나여, 만약에 귀족가문, 왕족 가문,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난 자들이 사라수, 사라라수, 전단수, 또는 발담마수의 부싯목을 가져와서 불을 지펴서 불빛을 밝힌다면, 바로 그 불꽃만이 화염이 있고, 광채와 광명이 있어, 바로 그 불꽃으로만 불을 만들 수 있습니까? 그리고 만약에 짠달라 가문, 사냥꾼 가문, 죽세공 가문, 마차수리공 가문, 도로청소부 가문에서 태어난 자들도 개 먹이통, 돼지 먹이통, 세탁통이나 엘란다 나무의 부싯목을 가져와서 불을 지펴서 불빛을 밝힌다면, 바로 그 불꽃만이 화염이 없고, 광채와 광명이 없어, 그 불꽃으로는 불을 만들 수 없습니까?”(M93)
불은 화염과 광채와 광명을 특징으로 한다. 왕족의 전단향나무의 불꽃이나 노예의 돼지먹이통나무의 불꽃이나 화염과 광채와 광명은 똑같다는 것이다. 설령 소똥 말린 것을 연료로 해도 그 불의 화염과 광채와 광명은 똑같음을 말한다.
왕은 자신의 교만을 제거하기 위해서
부처님의 교단에는 차별이 없었다. 사성계급의 차별이 없었던 것이다. 누구나 부처님의 교단에 들어가면 동등했다. 심지어 하인이 먼저 들어 왔을 때 주인보다 구참이 되었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승가가 형성되었다. 싸끼야족 사람들도 앞다투어 출가했다. 그 중에는 ‘밧디야’라는 왕도 있었다. 그런데 왕의 이발사인 우빨리도 함께 출가 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왕은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저희 싸끼야 족들은 교만합니다. 세존이시여, 여기 이발사 우빨리는 오랜 세월 우리의 하인이었습니다. 그를 먼저 출가시켜주십시오. 우리는 그에게 인사를 하고, 일어서 맞이하고, 합장하고, 공경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하면 우리 싸끼야족들의 싸끼야족 교만이 제거 될 것입니다.”(Vin.II.183)라고 말했다.
왕은 자신의 교만을 제거하기 위해서 자신의 하인을 먼저 출가시켰다. 이렇게 되면 하인이 선임이 되는 것이다. 이런 관행은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 어느 승가에서나 먼저 들어온 사람이 구참이 된다. 태생을 따지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세 가지 교만을 본다. 그것은 태생의 교만, 배움의 교만, 부자의 교만을 말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교만은 계급화 되어 있어서 차별화를 시도한다.
많이 배운 자는 많이 배운 자끼리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 많이 가진 자는 많이 가진 자끼리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 가문이 있는 자는 가문이 있는 자와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 현시대에도 카스트가 있는 것이다.
많이 배웠다고 하여, 많이 가졌다고 하여, 가문이 있다고 하여 다른 것은 아니다. 인간이라는 종은 똑같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은 모두 평등함을 말한다.
인간은 한종만 있을 뿐
누구도 입에서 나온 자는 없다. 부처님 당시 바라문들은 입에서 출생했다고 하지만 인간이라는 종에 있어서는 똑같다. 이는 여인의 배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아닌 축생은 다르다. 인간과 같은 종이 아님을 말한다.
여기 노새가 있다. 노새는 조랑말과 당나귀가 교배해서 태어난 것이다. 이때 노새는 조랑말에 속할까 당나귀에 속할까? 아무 데도 속하지 않는다. 더구나 노새는 임신하게 되면 죽게 된다.
인간과 개는 다른 종이다. 인간과 개과 교배하여 새로운 종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네 발 달린 짐승들도 그대는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출생에 따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Stn.603)라고 했다. 네 발 달린 개는 개의 특징이 있는 것이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는 물고기의 특징이 있다. 하늘을 날아 다니는 새는 새의 특징이 있다. 이는 모든 종이 특징의 다양성이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서로 다른 종으로 구분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떠할까?
인간은 머리카락이나 머리, 눈, 코, 입, 입술에는 특징의 다양성이 없다. 모두 똑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또한 “목이나 어깨에도 없고 배나 등에도 엉덩이에도 가슴이나 음부에도 없고 성적 교섭의 방식에도 없습니다.”(Stn.608)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들 사이에는 특징이 다르지 않음을 말한다.
동물을 보면 갖가지 종이 있다. 생태하천에서는 물오리와 백로와 잉어를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종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개는 개로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럴진대 네 가지 계급으로 나누어 차별화 하려 한다면 마치 동물처럼 다양한 종으로 나누려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만의 고유한 특징이 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어느 계급이든지 다 똑같다. 어느 계급이든지 여자의 자궁으로부터 출산된다. 그럼에도 태생의 교만, 배움의 교만, 부자의 교만이 있어서 차별화를 시도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수행자는 한송이 타오르는 불꽃
부처님 가르침은 혁명적이다. 이는 “비천한 가문에서도 지혜로운 현자가 생기네. (nīcākulīnopi muni dhitimā)”(S7.9)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낮은 계급에서도 용기가 넘치는(dhitimā) 성자가 출현할 수 있음을 말한다. 계급 차별 없는 부처님의 교단에서 가능한 일이다.
가문이 좋지 않아도, 세속적 학위가 없어도, 부자가 아니어도 누구나 성자가 될 수 있다. 성자가 된다는 것은 타오르는 불꽃과 같은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내면의 제사를 지내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내부에 광명을 지피우고 거룩한 님으로서 청정한 삶을 이끄네.”(S7.9)라고 했다.
수행자는 한송이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은 존재이다. 이는 바라문이 나무를 지피어 불의 제사를 지내는 것과 비교된다. 이것은 다름 아닌 내면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불꽃인가? 이는 “항상하는 불꽃과 항상하는 삼매”(S7.9)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여기서 ‘항상하는 불꽃(niccaggini)’은 일체지로 항상 타오르는 불꽃을 말한다.
내면의 목욕과 내면의 제사
매일 아침 샤워한다. 하루일과를 샤워로 시작하는 것이다. 샤워하고 나면 몸과 마음이 가쁜하다. 그런데 내면의 샤워도 있다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찌뿌둥할 때가 있다. 이럴 때 샤워 하는 것도 좋지만 경전을 펼쳐 들면 샤워하는 것과 같다. 게송 몇 개만 읽어 보아도 찌뿌둥했던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하물며 수행자의 삶을 어떠할까?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잘 말해준다.
“바라문이여, 가르침은 계행을 나루터로 하는 호수이니,
오염되지 않아 참사람에 의해 참사람에게 가려지네.
그곳에서 지혜를 성취하고 목욕하면,
몸을 적시지 않고 저 언덕으로 건너가네.”(S7.9)
바라문은 불의 제사를 지내고 난 다음 목욕하고자 했다. 몸에 묻은 재와 검댕이를 씻어 내고자 한 것이다. 이를 본 부처님은 몸을 적시지 않는 목욕을 말했다. 그것은 내면의 목욕이다.
내면의 목욕은 어떤 것인가? 이는 “가르침은 계행을 나루터로 하는 호수이다(dhammo rahado sīlatittho)”라는 말로 알 수 있다. 가르침의 호수에서 목욕하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나에게는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의 가르침[八正道]은 호수인데, 그곳에서는 수많은 중생이 목욕한다.”(Srp.I.237)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물 없는 곳에서 목욕하는 것과 같다. 물이 묻지 않는 목욕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팔정도의 호수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는 고작 너댓명이 몸의 검댕이를 씻어내고자 하천에서 목욕하는 것과 다르다. 가르침의 호수에서는 수만명이 한꺼번에 목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고행과 청정한 삶은 물이 필요 없는 목욕이네.”(S1.58)라고 했다.
내면의 목욕이 있다면 내면의 제사가 있다. 이는 디가니까야 5번경에서 볼 수 있다. 이는 “바라문이여, 청정한 마음으로 학습계율 곧,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삼가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을 삼가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삼가고, 거짓말 하는 것을 삼가고, 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가 있는 것에 취하는 것을 삼가는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 세 가지 확립과 열여섯 가지 요건을 갖춘 제사의 성취보다 덜 번거롭고 덜 성가실 뿐만 아니라 더욱 더 큰 과보와 더욱 더 큰 공덕을 낳는 또 다른 제사입니다.”(D5)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더 공덕이 되는 큰 내면의 제사는 계, 정, 혜의 제사이다. 이와 같은 삼학의 제사에 대하여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이러한 제사의 성취와는 다른 보다 뛰어나고 탁월한 제사의 성취는 없습니다.”(D5)라고 했다.
어쩌다 개의 태에 들게 되었을까?
스님의 개가 새끼를 낳았다. 다섯 마리 점박이 새끼를 낳았다. 스님은 새끼들이 어미개의 젖을 빠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올려 놓았다. 이럴 때 “쟤네들은 어디서 왔을까?”라고 생각해 본다. 그런 한편 생명의 무서움을 느낀다.
나는 어디서 왔을까?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러나 축생들은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한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대부분 사람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어떤 선인이 바라문 선인들에게 “존자들은 어떻게 입태되는지 확실히 압니까?”(M93)라며 물었다. 이에 바라문 선인들은 “이 세상에서 부모가 교합해야 하며, 어머니가 경수를 가져야 하며, 태어날 준비가 된 존재가 있어야 하는데, 이처럼 세 가지가 모이면 입태가 이루어집니다.”(M93)라고 말했다.
태어날 준비가 된 존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어떤 선인은 이번에는 “존자들께서는 그 태어날 준비가 된 존재가 귀족인지, 바라문인지, 평민인지, 노예인지 확실히 압니까?”(M93)라고 물어 본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태어날 준비가 된 존재는 어느 사람 태에 들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바라문 선인들은 “존자여, 우리는 그 태어날 준비가 된 존재가 귀족인지, 바라문인지, 평민인지, 노예인지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M93)라고 말한다.
태어남은 알 수 없다. 태어나 보니 사람이고 태어나 보니 개인 것이다. 사람도 사람 나름이다.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날 수도 있고 비천한 노예 가문에서 태어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바라문이다’라며 태생의 교만을 부릴 수 있을까?
사람이 죽으면 어떤 존재로 태어날지 알 수 없다. 인간의 태에 들 수도 있지만 개의 태에 들 수도 있다. 어느 태에 들지 모르는 것이다.
스님의 개는 새끼 다섯 마리를 낳았다. “얘네들은 어디서 왔을까?”라며 의문해 본다. 작년에 이어 똑 같은 질문이다.
스님의 개는 일년도 안되어서 또 다시 새끼를 낳았다. 그토록 인연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또 다시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이에 사람들은 안타까워 한다. 일부는 축하하기도 한다.
고물거리는 강아지를 보면 귀엽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하다. 어쩌다 개로 태어났을까? 어쩌다 개의 태에 들게 되었을까? 세상에 천하고 천한 개로 태어나 목줄과 함께 일생을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다.
2024-04-2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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