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알아야 할 것과 몰라도 되는 것들

담마다사 이병욱 2024. 3. 30. 10:48

알아야 할 것과 몰라도 되는 것들
 
 
햇살 가득한 백권당의 아침이다. 일터에 왔을 때 가장 먼저 보리수를 살핀다. 부활한 보리수 잎이 갈수록 커간다. 새로 잎이 나기도 한다. 나날이 성장하고 있다. 잎이 무성한 그날을 기다려 본다.
 

 
아침에는 커피를 마셔야 한다. 백권당표 절구커피이다. 손수 절구질해서 만든 커피를 말한다. 쓰지도 않고 달지도 않고 시지도 않는다. 오늘 따라 입에 짝짝 달라 붙는다. 커피 중에 최상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최상은 어떤 것일까?
 
 
두 발 가진 자 가운데는 왕족이
네 발 가진 것 가운데는 황소가,
아내 가운데는 젊은 아내가
아들 가운데는 맏아들이 가장 낫네.”(S1.14)
 
 
이 게송은 하늘사람이 읊은 것이다. 부처님 당시 농경사회의 삶에 모습에 대한 것이다. 이를 세속적인 삶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속을 초월한 관점에서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두 발 가진 자 가운데는 올바로 깨달은 님이
네 발 가진 것 가운데는 잘 길들여진 것이,
아내 가운데는 유순한 부인이
아들 가운데는 효자가 가장 낫네.”(S1.14)
 
 
부처님이 읊은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속적 것과 대조적이다. 초기경전에 악마가 등장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 드러내 보이기 위한 것이다. 두 발 가진 자 가운데는 깨달은 자가 최상이라고 했다.
 
최상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있다. 향기 중에 최상은 재스민향이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떠한 꽃의 향이 있든지 그들 가운데 재스민 향을 최상이라 한다.”(S22.102)라는 경전적 근거에 따른다. 재스민향 보다 최상은 아마도 커피향 같다. 그것도 절구커피향이다. 절구질 할 때 튀는 향을 말한다.
 

 
커피는 향으로도 먹고 맛으로도 먹는다. 맛에는 단맛, 쓴맛, 신맛, 떫은맛, 매운맛, 짠맛이 있다. 단맛과 쓴맛과 신맛이 적절히 섞여 있는 절구커피야말로 최상이다. 그러나 법의 맛에는 미치지 못한다.
 
가르침의 보시는 일체의 보시를 이기고
가르침의 맛은 일체를 이긴다.
가르침의 즐거움은 일체의 즐거움을 이기고
갈애의 부숨은 일체의 괴로움을 이긴다.”(Dhp.354)

 

 
가르침의 맛은 일체를 이긴다고 했다. 법의 맛을 알면 배고프지 않는다. 왜 그런가?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기쁨의 맛이야말로 최상의 맛이다. 기쁨을 먹고 살면 배고픈지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법의 맛이야말로 최상이다.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늘 가르침과 함께 한다. 아무리 바빠도 경전과 논서는 꼭 본다. 이는 보지 않을 수 없도록 해 놓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늘 바쁘다. 그렇다고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화장실은 가야 한다. 시간이 없어서 책을 보지 않고 시간이 없어서 자기계발을 하지 않으면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게으르지 않고자 한다. 유튜브에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머리맡에 있는 경전과 논서를 읽는다. 머리맡에 있어서 읽게 된다. 따로 떨어져 있다면 읽지 않게 될 것이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 떠올랐다.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을 곧바로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이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님입니다.”(Stn.558)
 
 
수타니파타 ‘쎌라의 경’(Sn.3.7)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맛지마니까야 ‘브라흐마유의 경’(M91)에 실려 있는 게송과도 병행한다.
 
부처님이 부처가 된 것은 알아야 할 것을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닦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가 되었다고 선언한다.
 
살아가면서 알아야 할 것이 있고 몰라도 되는 것이 있다. 부처님 가르침은 알아야 한다. 교도소 생활은 몰라도 되는 것이다.
 
알아야 할 것은 사성제이다. 닦아야 할 것은 팔정도이다. 버려야 할 것은 갈애이다. 이 세 가지를 실천하면 붓다, 부처가 된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알아야 할 것은
 
위빠사나 수행에서도 알아야 할 것이 있고 닦아야 할 것이 있고 버려야 할 것이 있다. 이를 마하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다가 발견했다. 그것은 숙지구분지(ñātapariññā), 조사구분지(tīraapariññā), 제거구분지(pahānapariññā)를 말한다.
 
세 가지 구분지가 있다. 여기서 구분지는 빠린냐를 번역한 것이다. 일창스님이 번역한 것이다. 이 세 가지에 대하여 초기불전연구원의 청정도론에서는 안 것의 통달지, 조사의 통달지, 버림의 통달지라고 번역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의 청정도론에서는 지식에 의한 완전한 앎, 탐구에 의한 완전한 앎, 버림에 의한 완전한 앎이라고 번역했다.
 
숙지구분지를 뜻하는 냐따빠린냐는 무엇을 말할까? 마하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따르면 “여기서 정신-물질 구별의 지혜, 조건파악의의 지혜, 이 두 가지 지혜를 숙지구분지라고 한다.”(1권, 418쪽)라고 했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따르면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중에서 1단계인 정신-물질 구별의 지혜와 2단계인 조건파악의의 지혜에 대하여 숙지구분지라고 했다. 또한 3단계의 명상의 지혜와 4단계의 생멸의 지혜에 대하여 조사구분지라고 했다. 그리고 나머지 위빠사나 지혜에 대해서는 제거구분지라고 했다.
 
숙지구분지(ñātapariññā)에 대하여
 
매일 좌선을 하고 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좀처럼 진전이 없다.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삼사십 앉아 있는 것이 고작이다. 그것도 멍때리기 하며 앉아 있는 것과 같다.
 
좌선을 할 때는 배의 부품과 꺼짐을 봐야 한다. 마하시 방식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이다. 이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보기 위한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 가장 첫 번째 단계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보는 것이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수행에 진전이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은 1단계 수행이 가장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몸과 마음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더 이상 이 몸과 마음에 대하여 내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는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단지 생멸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수행은 알고 보는 것이다. 알기만 한다면 이는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된다. 개념적으로 아는 것이다. 개념은 언어가 개입된 것이므로 실재가 아니다. 얼마든지 생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수행은 알기도 해야 하고 보기도 해야 한다. 보는 것은 실재를 보는 것을 말한다. 개념적으로 아는 것과는 달리 실재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는 지혜의 영역에 속한다.
 
위빠사나 수행은 지혜를 얻기 위한 수행이다. 이론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재로 해 보는 것이다. 마치 물에 들어가서 수영을 해보는 것과 같다. 자전거를 직접 타보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해서 일어나는 현상을 면밀하게 관찰해야 한다.
 
숙지구분지는 위빠사나 1단계와 2단계 지혜에 해당된다고 했다. 주석에서는 숙지구분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물질과 정신이란은 고유성품법들의 고유특성을 주시함에 의해, 즉 새김에 의해 알아야 할 물질-정신 법들을 향해서 관찰하는 통찰지가 숙지구분지(ñātapariññā) 라고 하는 특별통찰지이다.”(Pm.ii.387,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376-377쪽)
 
 
대복주서에 따르면 숙지구분지에 대하여 물질-정신 법들을 관찰함으로 인하여 얻어지는 지혜라고 했다. 대역을 보면 숙지구분지에 대하여 “법체로는 정신-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와 조건파악의 지혜 두 가지이다.”(1권 376-377쪽)라고 했다.
 
숙지구분지는 위빠사나 1단계와 2단계 지혜임에 틀림 없다. 이는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성품을 보는 것이다. 어떤 것인가? 빠라맛타담마, 즉 구경법을 말한다.
 
구경법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와 같은 것이다. 또한 탐욕, 성냄 등 마음부수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구경법은 사념처를 통해서 관찰된다.
 
구경법을 보려면 관찰해야 한다. 어떻게 관찰하는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새기는 것이다. 이렇게 관찰하다 보면 그 어떤 것도 무상한 것이고,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고, 무상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지혜를 가졌을 때 내가 있다는 개념은 발 붙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언어적 개념으로 형성된 것이 실재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당연히 창조주도 있을 수 없다.
 
곧바른 앎이란 어떤 것인가?
 
청정도론은 마치 수행 백과사전과도 같다. 용어도 잘 설명되어 있다. 숙지구분지에 대해서는 곧바른 앎이라고 했다. 여기서 곧바른 앎은 수타니파타 쎌라의 경에서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을 곧바로 알았고”(Stn.558)라는 말과 일치한다.
 
곧바른 앎이란 어떤 것인가? 주석에 따르면 사성제를 아는 것이다. 이는 세속적 지식과는 다른 것이다. 불교적 지식은 곧바른 앎을 통해서 알려진 것이다. 그래서 냐따빠린냐, 숙지구분지라고 한다. 그래서 ‘지식에 의한 완전한 앎(한국빠알리성전협회)’또는 ‘안 것의 통달지(초기불전연구원)’라고 번역되었다.
 
숙지구분지를 뜻하는 냐따빠린냐는 곧바른 앎에 대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이는 빠띠삼비다막가에서 “수행승들이여, 일체를 곧바로 알아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일체를 곧바로 알 수 있는가? 시각을 곧바로 알아야 한다.”라고 했다. 시각 등 여섯 감역에서 곧바로 아는 것을 말한다.
 
위빠사나 1단계와 2단계는 곧바로 아는 것이다. 이를 시각 등에서 곧바로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수행을 통해서 가능하다. 언어적 개념 없이 아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쌍윳따니까야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의 경(abhiññeyyasutta)’(S35.46)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수행승들이여, 곧바로 알아야 할 일체는 무엇인가? 시각도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이며 형상도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이며 시각의식도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이며 시각접촉도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이며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S35.46)
 
 
여섯 감역 중에서 시각에 대한 것이다.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은 시각, 형상, 시각의식, 시각접촉, 시각접촉에 따른 느낌을 말한다.
 
들어가고 또 들어가고
 
들어가고 또 들어간다. 명상에서만 들어 가는 것은 아니다. 교학에서도 들어가고 또 들어간다. 곧바른 앎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따르면, 모두가 한꺼번에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시각, 형상, 시각의식, 시각접촉, 시각접촉에 따른 느낌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이 중에서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것만 관찰하면 된다.
 
접촉이 부명하게 드러나면 접촉을 새겨 알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새겼을 때 나머지 것들 도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는 “어떤 이에게 접촉이 분명하게 된다. 접촉이 분명하게 된 그 수행자도 온전히 접촉만 생겨나지는 않는다. 그 접촉과 함께 바로 그 접촉을 대상을 느끼는 느낌도 생겨난다. 인식하는 인식도 생겨난다. 격려하고 애쓰는 의도도 생겨난다. 단지 아는 의식이 생겨난다고 이렇게 다섯 가지 접촉제5법만 파악한다.”(DA.ii.314)라고 주석에서 설명 했다. 그래서 “분명한 접촉을 관찰하면 나머지 법들은 저절로 포함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1권, 417쪽)라고 했다.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을 알았을 때 다음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다음에는 완전히 알아야 할 것이다. 쌍윳따니까야 ‘완전히 알아야 할 것의 경(pariññeyyasutta)’(S35.47)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이는 시각, 형상, 시각의식, 시각접촉, 시각접촉에 따른 느낌을 완전히 아는 것을 말한다.
 
완전히 알았다면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쌍윳따니까야 ‘버려야할 것의 경(pahātabbasutta)’(S35.48)에서는 시각, 형상, 시각의식, 시각접촉, 시각접촉에 따른 느낌에 대하여 버려야 할 것이라고 했다.
 
사성제를 세 번 열두 번 굴려서
 
수행을 왜 하는가?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알 수 있다. 괴롭기 때문에 수행을 한다. 괴로움을 소멸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괴로움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은 사성제를 세 번 열두 번 굴려서 부처가 되었음을 선언했다. 그리고 사성제를 열두 번 굴렸다.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는 알아야 할 것을 아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이다.’라고 아는 것이다. 이는 일전(一轉)에 대한 것이다. 알아야 할 것을 아는 것은 곧바로 아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을 곧바로 알았고,”(Stn.558)가 된다.
 
문제는 문제를 알았을 때 풀 수 있다. 알아야 할 것을 알았다는 것은 문제가 무엇인지 아는 것과 같다. 다음 단계는 수행의 단계이다. 그래서‘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상세히 알려져야 한다.’ ,‘이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는 제거되어야 한다.’, ‘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는 실현되어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는 닦여져야 한다.’라고 했다. 이것은 이전(二轉)에 해당된다. 이는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 (Stn.558)가 된다.
 
수행자는 결실이 있어야 한다. 수행을 해서 도와 과를 이루는 것이다. 이는 ‘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가 상세히 알려졌다.’, ‘이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가 제거되었다.’, ‘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는 실현되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는 닦여졌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는 삼전(三轉)에 해당된다. 또한 “버려야 할 것을 이미 버렸습니다.” (Stn.558)에 해당된다. 수행의 완성이다. 부처가 된 것이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세 번 열두 가지 형태로 굴려서 부처가 되었다. 이는 알아야 할 것을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닦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렸기 때문이다.
 
알아야 할 것과 있고 몰라도 되는 것
 
세상을 살다 보면 알아야 할 것도 있고 몰라도 되는 것도 있다. 알아야 할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다. 특히 사성제을 알아야 한다. 사성제를 알면 부처가 된다.
 
세상에는 알아야 할 것도 있지만 몰라도 되는 것도 있다. 교도소 생활이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된다. 교도소 생활이 어떤 것인지 체험하기 위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알아야 할 것은 착하고 건전한 것이다. 몰라도 되는 것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출가자들은 몰라도 되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 같다. 어떤 스님들은 세상사람들도 하찮게 여기는 것을 본업으로 하고 있다. 심지어 처자식을 두기도 한다.
 
세상에는 알아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이전에 모두 경험했던 것인지 모른다. 어쩌면 몰라도 되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그대들은 고통을 경험하고 고뇌를 경험하고 재난을 경험하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S15.10)라고 했다.
 
 
2024-03-3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