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범부는 장애를 가진 것과 같아서

담마다사 이병욱 2024. 4. 25. 11:26

범부는 장애를 가진 것과 같아서
 
 
하루 일과 중에서 가장 성스런 시간이 있다. 그것은 아침 글 쓰는 시간이다. 흰 여백을 마주하고 앉아 있으면 마치 시험을 보는 것 같다. 오늘은 잘 쓸 수 있을까?
 
스토커 꼬깔리까
 
머리맡에 쌍윳따니까야를 읽고 있다. 기억하고 싶은 문구가 있으면 새기고자 한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 와 닿았다.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려서
누가 그것을 올바로 규정할 것인가?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리는 자는
생각건대 장애가 있는 범부에 불과하네.”(S6.7)
 
 
이 게송은 ‘꼬깔리까의 경 1’에 실려 있다. 외톨이 하느님(Brahma) 쑤브라흐만이 수행승 꼬깔리까 앞에서 읊은 것이다.
 
수행승 꼬깔리까는 악인이다. 악인의 대명서 데바닷따의 제자이기도 하다. 수타니파타 ‘꼬깔리야의 경’(Sn.3.10)에 실려 있는 그 꼬깔리까를 말한다.
 
악인은 악인끼리 어울리고 관계를 맺는다. 이는 부처님이 “뭇삶들은 세계에 따라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S14.12)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저열한 경향을 가진 들과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S14.12)라고 했다. 데바닷따와 꼬깔리까가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수행승 꼬깔리까는 사리뿟따 존자를 비난했다. 사리뿟따 존자가 나쁜 마음을 품어 욕망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떠들고 돌아 다닌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비난은 꼬깔리까의 열등적 자만에 따른 것이다.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스토커가 된 것이나 다름 없다.
 
스토커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 스트커가 될 수 있다. 이른바 광팬이 스토커가 되는 것이다.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 주지 않았을 때 스토커가 되는 것이다.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리고자 했을 때
 
꼬깔리까의 행위는 하늘사람도 지켜 보고 있었다. 떠돌이 하느님 쑤브라흐만이 이를 지켜 보다가 게송으로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게송에서 ‘헤아릴 수 없는 것(appameyya)’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게송은 매우 압축적이다. 사구게로 이루어진 게송의 의미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주석이 있다. 삼장에 통달한 수행승이 자신의 견해를 써 놓은 것이다. 주석에 따르면 “‘헤아릴 수 없는 것(appameyya)’이란 번뇌를 소멸한 자에 대한 불가측정량을 말한다.”(Srp.I.214)라고 설명해 놓았다.
 
번뇌를 소멸한 자는 아라한을 말한다. 아라한의 마음은 범부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역은 성립한다. 왜 그럴까? 정신능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속담에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사람이 어떤 마음을 먹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보다 정신능력이 더 높은 사람이다.
 
범부는 깨달은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다. 이는 부처님이  “바라문이여, 참사람이 아닌 사람이 참사람이 아닌 사람에 대하여 ‘이분은 참사람이다.’라고 알 수 있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불가능합니다.”(A4.187)라고 말한 것에서도 확인 된다.
 
범부의 마음과 성자의 마음은 다르다. 그런데 성자도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마음도 다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길과 경지를 알 때는 그것은 무한적 대상을 갖는다. 그래서 그 경우 범부는 흐름에 든 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한번 돌아오는 님(一來者), 돌아오지 않는님(不還者), 거룩한 님(阿羅漢)의 마음을 알지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거룩한 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안다. 다른 자도 위에 있는 자는 아래에 있는 자의 마음을 안다. 이와 같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Vism.13.110)라고 했다.
 
사람의 정신능력은 모두 다 다르다. 정신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지도한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수행점검 해주는 이유에 해당된다. 그래서 수다원은 사다함의 마음을 모르고, 사다함은 아나함의 마음을 모르고, 아나함은 아라한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다. 하물며 범부가 어떻게 아라한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악인 수행승 꼬깔리까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리고자 했다. 지혜제일이라 불리우는 아라한 사리뿟따 존자의 마음을 헤아리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사리뿟따 존자는 욕망에 지배 받고 있다고 헤아렸다.
 
수행승 꼬깔리까는 범부 단계였음에 틀림 없다. 왜 그런가? 헤아릴 수 없는 자의 마음을 헤아려서 욕망에 지배 받고 있다고 규정한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생각건대 장애가 있는 범부에 불과하네.”(S6.7)라고 했다.
 
범부의 마음과 아라한의 마음
 
범부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주석에서는 “헤아릴 수 있는 것은 탐진치를 말한다.”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범부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리는 자에 해당된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헤아릴 수 있는 것은 탐진치를 말한다.”(Srp.I.214)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범부는 탐, 진, 치로 사는 자를 말한다.
 
범부와 아라한은 어떻게 다를까? 번뇌가 판단 기준이다. 그 사람이 탐, 진, 치로 산다면 범부이고, 그 사람이 무탐, 무진, 무치로 산다면 번뇌 다한 아라한인 것이다.
 
범부는 아라한의 마음을 모른다. 왜 그럴까? 아라한은 무아의 성자이기 때문이다. 아라한에게는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는 갈애와 자만과 견해가 소멸되었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이다. 아니 아라한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범부의 마음은 헤아릴 수 있다. 범부는 탐, 진, 치로 살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탐욕스러운지 알 수 있고, 그가 얼마나 성냄의 사는지 알 수 있고, 그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 수 있다.
 
꽉 막힌 장애가 있는 범부
 
게송에서 “생각건대 장애가 있는 범부에 불과하네.”(S6.9)라는 말이 크게 와 닿는다. 왜 그런가? 범부에 대하여 장애가 있는 자로 보기 때문이다.
 
흔히 장애를 말한다. 신체적 장애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정신적 장애도 있다. 흔히 정신이상자에 대하여 정신적 장애를 가졌다고 한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범부에 대하여 장애를 가진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특히 오장애라고 해서 감각적 욕망(kāmāchanda), 악의(vyāpāda), 해태와 혼침(thīna-middha), 들뜸과 후회(uddhacca-kukucca), 회의적 의심(vicikichā)을 말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감각을 즐기며 살아간다. 다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감각을 즐기는 것이다. 이를 오욕락이라고 한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이처럼 감각적 욕망을 가진 것에 대하여 장애로 본다는 것이다. 마치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것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악한 마음을 품는 것, 게으른 것, 들뜨는 것, 법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도 장애로 본다.
 
다섯 가지 장애가 장애가 된다면 범부는 모두 장애자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장애는 덮여 있는 것이다. 마치 뚜껑이 덮여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장애가 있는 범부’에 대하여 ‘nivuta puthujjana’라고 했을 것이다.
 
빠알리어 ‘nivuta’는 ‘nivarati’의 과거분사형으로 ‘enveloped; hammed in; surrounded’의 뜻이다. 그래서일까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꽉 막힌 범부”라고 번역했다. 빅쿠보디는 “obstructed worldling”이라고 번역했다. 여기서 ‘worldling’은 속인 또는 속물의 뜻이다.
 
꽉 막힌 범부, 장애가 있는 범부는 아라한의 마음을 측량할 수 없다. 범부가 아라한에 대하여 “그는 이만큼 계행을 가졌고, 그는 이 만큼 삼매를 가졌고, 그는 이 만큼 지혜를 가졌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측량하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
 
탐욕은 한계를 만드는 것
 
부처님은 네 가지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했다. 이는 부처의 경계(buddhavisaya), 선정의 경계(jhanavisaya), 행위의 과보(kammavipāka), 그리고 세상에 대한 사변(lokacintā)을 말한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서는 안되는데, 만약 생각한다면 미치거나 곤혹스럽게 된다.”(A4.77)라고 했다.
 
깨달은 자는 깨달은 자를 알아 본다. 그러나 범부는 깨달은 자의 마음을 알아 볼 수 없다. 범부가 어떻게 삼매의 경지를 알 수 있겠는가? 한번도 경험해 보지 않는 자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단지 추론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범부가 깨달은 자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것은 깨달은 자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는 것과 같다. 왜 그런가? 범부는 탐, 진, 치로 살지만 깨달은 자는 무탐, 무진, 부치로 살기 때문이다. 유아의 범부가 무아의 성자의 마음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범부와 아라한의 마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존자여, 탐욕도 한계를 만드는 것이고 미움도 한계를 만드는 것이고 어리석음도 한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번뇌가 소멸한 수행승들에게 그것들은 버려지고, 뿌리째 뽑히고, 종려나무 그루터기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다시 생겨나지 않게 됩니다. 존자여, 한량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 가운데, 흔들리지 않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최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흔들리지 않는 마음에 의한 해탈에는 탐욕이 텅 비고 미움이 텅 비고 어리석음이 텅 비어 있습니다.”(S41.7)
 
 
탐욕은 한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범부는 탐욕으로 살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탐욕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성자는 탐욕이 뿌리째 뽑혔기 때문에 탐욕의 한계를 만들지 않는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한량없는 마음이 된다. 이는 다름 아닌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이다.
 
범부가 성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범부의 입장에서 성자의 마음을 헤아려서 욕망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해코지 하고 다닌다면 구업을 짓는 것이 된다.
 
선악을 구별하는 자에 대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려서
누가 그것을 올바로 규정할 것인가?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리는 자는
장애가 있는 어리석은 자라 생각하네.”(S6.8)
 
 
이번 게송은 전 게송과 비교하여 단어 하나가 바뀌었다. 장애가 있는 범부에서 장애가 있는 어리석은 자로 바뀐 것이다. 여기서 어리석은 자는 ‘akissava’를 번역한 것이다. 이 말은 지혜롭지 못한 자를 뜻한다. 이는 ‘kissava’가 지혜와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법구경에서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음을 알면 그로써 현명한 자가 된다.”(Dhp.63)라고 했다. 반면에 “어리석은 자가 현명하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자라고 불린다.”(Dhp.63)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어리석은 자는 지혜롭지 못한 자가 된다.
 
게송에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리는 자는 장애가 있는 어리석은 자라 생각하네.”(S6.8)라고 했다. 장애가 있는(nivuta) 어리석은 자(akissava)는 어떤 자인가? 이는 한국빠알리성전협회 각주에 따르면 “ ‘kissava’는 무엇을 듣는 것에 의해서 선악을 구별한다는 민속적인 어원에서 나온 단어이다.”(KPTS본 1권 1379번 각주)라고 설명해 놓았다. 그러나 초기불전연구원본과 빅쿠보디 영역본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하나의 각주로 인하여 영감 받을 때가 있다. 어리석은 자에 대하여 선악을 구별하는 자로 설명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출세간적이다.
 
육조단경에 ‘불사선불사악(不思善不思惡)’이라는 말이 있다. 무문관 23칙이기도하다. 불교사전에서는 “선악 (善惡)의 사량 (思量), 곧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생각을 끊은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육조단경에 따르면 사량분별하지 않기 위해서는 악은 물론 선도 생각하지 말라고했다. 그런데 육조단경 보다 훨씬 더 오래 전에 성립되었던 초기경전에도 이와 유사한 말이 있다는 것이다. 쌍윳따니까야 1권에 “공덕마저 버리고 악함도 버려 청정하게 삶을 살며 지혜롭게 세상을 사는 자가 그야말로 걸식 수행승이네” (S7.20)라는 게송이 바로 그것이다.
 
청정한 삶을 사는 수행승은 걸식에 의존한다. 무소유의 걸식이야말로 청정한 삶을 실현하기 위한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청정한 삶을 살아야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
 
완전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업도 짓지 말아야 한다. 악업은 물론 선업도 짓지 않는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선심도 내지 않고 불선심도 내지 말아야 한다.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作用心: kiriya citta’을 내야 한다.
 
작용만 하는 마음을 내면 그 어떤 업도 짓지 않게 된다. 단지 “그렇네, 그렇군, 그랬구나”라며 마음을 내기 때문에 악업은 물론 선업도 짓지 않게 된다.
 
흔히 세상사람들은 선업공덕을 지으라고 말한다.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는 세간적 공덕이다. 출세간에서는 어떤 공덕도 짓지 않는다. 왜 그런가? 윤회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걸식하는 수행승에 대하여 “공덕마저 버리고 악함도 버려 청정하게 삶을 살며 지혜롭게 세상을 사는 자”(S7.20)라고 했다.
 
깨달음 판별 열 가지 잣대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 개는 개만 보이고 사람은 사람만 보인다. 범부는 범부를 알아 볼 수 있고 깨달은 자는 깨달은 자를 알아 볼 수 있다.
 
범부는 깨달은 자의 마음을 모른다. 반대로 깨달은 자는 범부의 마음을 안다. 범부는 깨달은 자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고, 반대로 깨달은 자는 범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왜 그런가? 탐, 진, 치로 판별하기 때문이다.
 
범부가 깨달은 자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이는 무탐, 무진, 무치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마치 텅 빈 것처럼 보인다. “그 흔들리지 않는 마음에 의한 해탈에는 탐욕이 텅 비고 미움이 텅 비고 어리석음이 텅 비어 있습니다.”(S41.7)라고 했다.
 
깨달은 자는 범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이는 “탐욕도 한계를 만드는 것이고 미움도 한계를 만드는 것이고 어리석음도 한계를 만드는 것입니다.”(S41.7)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렇게 범부와 각자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은 한소식했다고 말한다. 그 사람은 정말 깨달았을까? 그 사람이 한소식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범부는 깨달은 자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고 했는데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을까? 초기경전에 따르면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다음과 같은 열 가지 잣대를 들이미는 것이다.
 
 
1) 이 존자는 분노하고 있다.
2) 이 존자는 원한을 품고 있다.
3) 이 존자는 위선을 품고 있다.
4) 이 존자는 잔인하다.
5) 이 존자는 질투하고 있다.
6) 이 존자는 인색하다.
7) 이 존자는 기만하고 있다.
8) 이 존자는 허상을 품고 있다.
9) 이 존자는 삿된 욕망을 가지고 있다.
10) 이 존자는 새김을 잃고 있다.
 

 
이것이 깨달은 자인지 아닌지 판별기준이 된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선언의 경’(A10.84)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판별 기준의 핵심은 탐, 진, 치에 대한 것이다.
 
열 가지 판단 기준은 분노, 원한, 위선, 잔인, 질투, 인색, 기만, 허상, 삿된 욕망, 새김에 대한 것이다. 이는 드러난 것이다. 범부라도 눈으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다.
 
열 가지 판단 기준은 한계가 있고 헤아릴 수 있어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법(Dhamma)과 율(Vinaya)로 판단해야 한다. 그래서 “여래가 설한 가르침과 계율에 비추어 분노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것은 퇴전이다.”(A10.84)라고 했다. 여기서 분노 대신에 다른 아홉 가지 용어가 공통적으로 적용되면 열 가지 판단기준이 된다.
 
그는 자칭타칭 깨달은 자라고 말한다. 정말 그는 깨달았을까? 열 가지 리트머스 시험지로 판별할 수 있다. 또 한 가지는 경전에 근거하여 말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경전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만 말하면 그는 깨달은 자가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가는 가르침
 
항상 부처님 가르침과 함께 하고 있다. 새벽 쌍윳따니까야를 읽었을 때 새겨 두고 싶은 게송이 있었다. 이렇게 장문의 글로 또다시 표현하게 되었다. 그것은 범부와 깨달은 자의 차이점에 대한 것이다.
 
범부는 장애가 있는 자이다. 그래서 “장애가 있는 범부에 불과하네.”(S6.7)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깨닫지 못한 자들은 모두 장애가 있는 장애인이라고 볼 수 있다. 범부는 어리석은 자라고 했다. 이는 “장애가 있는 어리석은 자라 생각하네.”(S6.8)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선악 구별하면 지혜롭지 못한 자라는 것이다.
 
흔히 착하게 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지혜롭게 살라고 말한다. 그런데 출세간적 지혜는 선악의 구별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업을 짓지 않아 다음 생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누군가 선악 구별을 한다면 지혜롭지 못한 자라고 볼 수 있다. 우리편은 선이고 상대편은 악이라고 규정했을 때 폭력이 발생하고 전쟁이 일어난다. 이는 탐, 진, 치에 따른 것이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탐, 진, 치로 대표되는 번뇌의 소멸이다. 이와 같은 무탐, 무진, 무치의 가르침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간다. 세상 사람들이 탐, 진, 치로 살 때 불교인들은 무탐, 무진, 무치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여 역류도(逆流道:  paisotagāmī)라고 한다.
 
 
2024-04-2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