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디지털논리 진리표로 본 진실과 허위의 언어적 개념

담마다사 이병욱 2024. 3. 21. 11:41

디지털논리 진리표로 본 진실과 허위의 언어적 개념
 
 
부처님법 만나기가 어렵다고 한다. 이를 한자어로 ‘백천만겁난조우’라고 한다. 천수경에서는 “무상심심미묘법 백천만겁난조우”라 하여 개경게에서 발견된다.
 
부처님법에 대하여 무상(無上)이라고 말한다. 위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부처님 법에 대하여 ‘무상정등각’이라고 한다. 이 말은 아눗따라삼마삼보디(anuttara sammāsambodhi)를 한역한 것이다.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는 궁극의 진리이다. 이것 이상 더 이상 진리가 없음을 말한다.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진리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고 선언했다.”(S56.11)라고 온 세상에 선언했다.
 
부처님 법에 대하여 심심(深深)하다고 말한다. 이는 깊고 깊다는 뜻이다. 이는 한량없이 깊은 가르침임을 말한다. 범부는 알 수 없는 궁극적 진리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라따나경에서는 “싸끼야 족의 성자가 삼매에 들어 성취한 지멸과 소멸과 불사와 승묘, 이 사실과 견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Stn.225)라고 했다.
 
부처님 법에 대하여 미묘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미묘하다는 말은 심오하다는 말과 같다. 그 깊이와 크기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가르침임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라따나경에서는 “심오한 지혜를 지닌 님께서 잘 설하신, 성스런 진리”(Stn.230)라고 했다.
 
부처님 법에 대하여 백천만겁난조우라고 했다. 뱁겁을 지나도 만나기 어려움을 말한다. 여기서 겁은 한우주기를 뜻한다. 우주가 성주괴공하는 것을 뜻하는 시간단위이다. 그런데 백겁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주가 생성되었다고 파괴되기를 백번 반복하는 것을 말한다.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정법
 
과거에 출현한 부처님들이 있었다. 위빠시 부처님은 91겁전에 출현했다. 이후 31겁 전에 씨키 부처님이 출현했다. 무려 60겁의 간극이 있다. 이후 벳싸부 부처님이 31겁전에 출현했다. 31겁 때 두 분의 부처님이 출현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출현한 것은 아니다. 한 부처님이 출현한 후에 정법이 변질되어서 사라졌을 때 또 한분의 부처님이 출현한 것이다. 이는 두 개의 태양이 없는 것과 같다. 왜 그런가? 정법은 언제나 하나이기 때문이다.
 
정법이 살아 있는 한 새로운 부처님은 출현하지 않는다. 정법이 변질되어 사라졌을 때 또 다시 새로운 부처님이 출현한다. 그러나 언제 출현할지 알 수 없다.
 
정법이 사라지면 암흑의 세상이나 다름 없다. 한량없는 세월이 지났을 때 부처가 출현한다. 그런데 정법이 머무는 기간은 길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백세가 지나면 변질되어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까꾸산다 부처님은 현겁에 출현했다. 그런데 현겁에 출현한 부처님은 까꾸산다 부처님을 포함하여 꼬나가마나, 깟싸빠, 고따마 부처님 이렇게 네 분이다. 그리고 미래에 멧떼이야 부처님(미륵불)이 출현할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현겁에 네 분의 부처님이 출현했기 때문에 현겁에 대하여 ‘행운의 겁’이라고 한다.
 
행운의 겁 시기에 살고 있다. 이는 정법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법이란 무엇인가? 이는 율장부기에서 부처님이 열 가지 이유로 학습계율을 시설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율장부기에서 학습계율을 시설하는 열 가지 이유가 있다. 아홉 번째 항목을 보면 “올바른 가르침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율장부기 7장, 열가지 이유)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올바른 가르침은 삿담마(saddhamma)를 번역한 말인데 한자어로는 정법(正法)이라고 말한다. 이 정법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해 놓았다.
 
 
“Smp.225에 따르면, 정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1) 교법상의 정법(pariyattisaddhamma): 삼장의 모든 부처님 말씀, 2) 행도상의 정법(paipattisaddhamma): 열세 가지 두타행, 열네 가지 의무, 여든 두 가지 대의무, 계행-삼매-통찰, 3) 증득상의 정법(adhigamanasaddhamma): 네 가지 고귀한 길(四向)과 네 가지 경지(四果)와 열반을 뜻한다.”(한국빠일라성전협회 통합본 율장 6426번 각주)
 
 
세 가지 정법의 조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교법, 행도, 증득에 대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교학과 수행과 과위를 말한다.
 
교학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구전되고 기록되어서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왔다면 이는 정법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빠알리 삼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행도는 수행에 대한 것이다. 어떤 수행인가? 이는 서른일곱 가지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원리(37조도품)에 대한 것이다. 원리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네 가지 새김의 토대(사념처), 네 가지 올바른 노력(사정근), 네 가지 신통의 기초(사신족), 다섯 가지 능력(오근), 다섯 가지 힘(오력), 일곱 가지 깨달음의 고리(칠각지), 여덟 가지 고귀한 길(팔정도)이다.”(M16)라고 했다. 특히 이중에서 팔정도가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구체적인 수행방법에 대한 것이다.
 
증득은 사향사과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과위를 얻기 위해서는 열반의 증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열반 없는 사향사과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은 정법시대인가? 부처님이 입멸한지 이천오백년이 넘었는데도 지금은 정법시대라고 볼 수 있을까? 빠알리 경전이 있고 팔정도 수행이 있고 사향사과의 열반의 증득이 있다면 정법시대라고 볼 수 있다.
 
정법은 오래가지 않는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정법은 변질된다. 나중에는 정반대의 가르침이 되어 버릴 수 있다. 무아의 가르침이 유아의 가르침으로 변질되는 것이 대표적이다.
 
윤회를 부정하는 스님들
 
페이스북은 삶의 축소판이라고 볼 수 있다. 가상공간이기는 하지만 갖가지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님들도 많다는 것이다.
 
어느 스님은 본마음과 참나를 말한다. 초기경전 어디를 찾아 보아도 이런 말은 없다. 그럼에도 본래 마음이 있어서 이 마음이 모든 것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또한 본마음, 참나에 대하여 본래부처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내가 부처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말은 초기경전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본마음, 참나, 본래불이라는 말을 들어 보면 힌두교의 교리를 연상케 한다. 이는 다름 아닌 정법이 오염된 것이다. 오염을 넘어서 변질되었다. 더 나아가 정법과는 정반대의 교리가 되었다. 이는 정법이 사라진 것을 의미한다.
 
정법시대는 교법, 행도, 증득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어느 것 하나라도 만족하지 않으면 정법시대라고 볼 수 없다. 이 중에서 가장 핵심은 열반이다.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목적이 있다. 그것은 열반의 증득이다. 열반이 증득되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일곱 생 이내에 윤회가 끝이 난다. 그러나 변질된 불교에서는 열반을 말하지 않는다.
 
열반 없는 불교는 상상할 수 없다. 열반이 없다면 범부로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범부로 살면 세세생생 윤회할 수밖에 없다.
 
최근 실상사에서 법회가 열렸다. 향봉스님을 초대하여 법문을 들은 것이다. 이 자리에서 향봉스님은 윤회는 없다는 말을  했다.
 
스님은 왜 윤회가 없다고 없다고 했을까? 아마 무아라는 말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으로 본다. 무아이기 때문에 윤회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윤회의 주체가 없기 때문에 윤회가 없다는 주장을 한 것으로 보인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스님이 있다. 스님은 즉문즉설에서 윤회를 부정했다. 부처님은 윤회를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스님은 왜 이렇게 말했을까?
 
즉문즉설스님은 스타스님이나 다름 없다. 불교계를 넘어 일반국민들도 즐겨 법문을 듣는다. 심지어 타종교인도 법문을 듣는다. 그래서일까 유튜브를 보면 어떤 강사는 즉문즉설 스님의 말을 인용하기도 한다.
 
즉문즉설 스님은 전국적 스타가 되었다. 불자들뿐만 아니라 일반국민들, 타종교인들에게도 멘토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런 스님이 “사람이 죽어서 개가 되고 돼지가 됩니다.”라고 말 할 수 있을까?
 
누구도 죽어서 돌아 온 사람이 없다. 누구도 내생이 있는지 없는지 말할 수 없다. 이는 누구도 윤회가 있는지 없는지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특히 과학적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내생과 윤회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왜 그런가?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본 것만 믿는다.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다. 내생과 윤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과학적 사고방식을 가진 스님도 내생과 윤회에 대하여 함부로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전국민을 대상으로 법문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불교인들만을 대상으로 한다면 ‘사람이 개가 되고 개가 사람이 된다.’라는 윤회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본다.
 
허정스님은 향봉스님에 대하여 비판적인 글을 썼다. 심지어 승복입은 단멸론자라고 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한국스님들은 윤회를 부정할까? 이에 대하여 “한국스님들은 초기경전을 읽어 보지 않은 것이 큰 이유 같습니다.”라는 댓글을 남겼다.
 
불교에 입문해서 배운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경전을 근거해서 글을 쓰는 것이다. 만약에 내가 생각한 것을 쓴다면 이것은 견해가 되어 버린다. 개인적인 견해를 말한다. 그런데 정견의 입장에서 본다면 견해는 모두 사견이라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의 견해와 같은 사견을 말한다.
 
향봉스님의 법문이나 즉문즉설 스님의 윤회에 대한 법문을 들어 보면 사견임을 알게 된다. 부처님이 말씀하지 않은 말을 한 것이다. 이는 자신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 또한 이는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 보이는 것과 같다. 더 나아가 경전을 보지 않았다는 말과 같다.
 
경전에서 확인되는 윤회
 
요즘 쌍윳따니까야를 읽고 있다. 이제 56번째 모음 하나만 남았다. 이 모음 하나만 읽으면 사부니까야를 다 읽게 된다. 그런데 니까야를 읽다 보면 부처님은 도처에서 윤회를 말씀 했다는 사실이다. 다음과 같은 가르침도 대표적인 예이다.
 
 
수행승들이여,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꿰 뚫지 못하면, 나나 그대들이나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한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면, 나나 그대들이나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한다.”(S56.21)
 
 
부처님은 분명히 윤회를 말했다. 사성제의 진리를 꿰뚫지 못하면 세세생생 윤회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유전하고 윤회한다. (sandhāvita sasarita)라고 했다.
 
빠알리어 삼사라(sasara)는 윤회로 번역된다. 문자적으로는 ‘perpetual wandering’의 뜻이지만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round of rebirth’로 설명되어 있다. 삼사라는 끊임 없이 재생 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분명히 윤회를 말했다. 이는 경전에서 확인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윤회를 부정하는 스님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한마디로 경전을 읽어 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생각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진실과 허위가 섞여 있는 개념
 
스승의 말이라고 하여 다 믿어야 할까? 부처님은 스승의 말이라고 해도 의심해 보라고 했다. 이는“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라.”라는 말과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 끄달리지 마십시오.”(S3.65)라고 했다.
 
스승에게는 권위가 있다. 스승의 말 한마디는 부처님의 말 한마디와 무게를 같이 한다. 그래서일까 어떤 이들은 자신이 신봉하던 스님의 말을 금과옥조로 여긴다.
 
페이스북에서 어떤 재가자와 스님은 C스님을 추모한다. 염불선으로 유명한 스님이다. 그런데 추모가 지나친 것 같다. 부처님 보다 더 높은 반열에 올려 놓았기 때문이다. 마치 일본 종파불교에서 개산조를 부처님 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올려 놓은 것과 같다.
 
C스님의 법문을 들어 보았다. 유튜브에서 본 것이다. 스님의 입에서 본마음이란은 말이 나왔을 때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빗나간 견해인 것이다.
 
스님의 말은 진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스님의 말만 추종하여 따를 뿐 증득이 없다면 진리라고 말할 수 없다.
 
전해서 들은 것은 진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스승으로부터 들은 것 역시 진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왜 그런가?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는 실재가 아님을 말한다.
 
언어적으로 형성된 개념은 진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몸으로 체험한 것은 진리가 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등 정신과 물질로 구분하여 알고 보았을 때 이는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본마음, 참나와 같은 개념을  말한다면 이는 진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논리의 앤드 트루스 테이블(And Truth Table)에 대입해 보면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교과목 중에 디지털논리가 있었다. 디지털 논리는 일과 제로를 기본으로 한다. 이른 바 이진논리인 것이다. 여기서 일은 있음에 대한 것이고 제로는 없음에 대한 것이다. 또한 일은 진리에 대한 것이고 제로는 허위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디지털논리에 트루스 테이블(Truth Table)이라 하여 진리표가 있다. 진리표는 일과 제로에 대하여 네 가지 경우의 수에 대한 것이다. 이 중에서 앤드 트루스 테이블(And Truth Table)을 보면 진리가 성립되기 두 가지 조건이 모두 일(1)이 되어야 한다.
 

 
진리표에서는 두 가지 조건이 모두 일(1)이 될 때 일이 된다. 진리로서 조건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이쪽이나 저쪽이나 모두 진리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진리표에서 한쪽은 일이고 다른 쪽은 제로(0)인 경우가 있다. 이때 결과는 제로가 된다. 마찬가지로 한 부분만 진리이고 다른 부분은 진리가 아닌 경우에는 진리가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소문으로 들은 것이 있다. 이를 백프로 다 믿어야 할까? 신문기사로 접한 정보가 있다. 모두 사실일 수 있을까? 스승으로부터 들은 것이 있다. 모두 진실만을 말한다고 볼 수 있을까?
 
부처님은 소문에 끄달리지 말라고 했다. 성전의 권위에도 끄달리지 말라고 했다. 스승이 말에도 끄달리지 말라고 했다. 부처님은 왜 이렇게 말했을까? 그것은 개념에 대한 것이다.
 
언어적으로 형성된 개념은 진실을 전달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허위라고 말할 수 없다. 언어적 개념에는 진실과 허위가 섞여 있다. 마치 선천적으로 눈먼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과 같다.
 
누군가로부터 들은 말이나 경전에 쓰여 있는 말이나 스승에게 들은 말은 언어적 개념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개념은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부분적으로는 맞고 부분적으로는 허위이기 때문이다. 이는 디지털논리에서 앤드 트루스 테이블로도 확인된다.
 
들어서 아는 것은 진리가 될 수 없다. 개념적으로 아는 것도 진리가 될 수 없다. 진리는 체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본마음, 참나, 본래불과 같은 개념은 진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열반은 증득 되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눈먼 거북이 비유
 
천수경을 독송할 때 “무상심심미묘법 백천난겁만조우”로 시작한다. 그런데 이 말은 니까야에 이미 있는 말이라는 것이다. 어떤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인간의 지위를 성취하는 것도 이와 같이 어렵다. 수행승들이여, 이렇게 오신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이 세상에 출현하는 것도 이와 같이 어렵다. 수행승들이여, 여래가 설한 가르침과 계율이 세상에 출현하는 것도 이와 같이 어렵다.”(S56.48)
 
 
부처님은 부처가 출현하는 것이 어렵다고 했다. 또한 가르침(Dhamma)과 계율(Vinaya)이 출현하는 것도 어렵다고 한다. 어느 정도인가? 이는 눈먼 거북이 비유로 알 수 있다.
 
맹구우목의 비유가 있다. 맹구우목의 비유도 니까야가 원조이다. 맛지마니까야 129번 경에서도 발견되고 쌍윳따니까야 진리의 모음(S56)에서도 발견된다. 어떤 것인가? 이는 “수행승들이여, 그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올라서 그 하나의 구멍이 뚫린 멍에에 목을 끼워 넣는 것이 수행승들이여, 한 번 타락한 어리석은 자가 사람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보다 빠르다고 나는 말한다.”(S56.47)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한번 축생으로 떨어지면 인간 몸 받기 힘들다. 왜 그럴까? 축생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악업을 계속 지을 수밖에 없어서 인간과 같은 선처에 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눈먼 거북이 비유를 들었다.
 
우주는 일겁마다 성주괴공한다. 이 기간 동안 성자의 흐름에 들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주석에 따르면 “말세에 흐름에 든 지위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은 다음의 우주기가 시작될 때에 기초적인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KPTS본 7권 634번 각주)라고 했다.
 
성자의 흐름에 들려면 열반을 체험해야 한다. 열반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정법이 살아 있어야 한다. 이는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정법이 살아 있을 때 인간으로 태어나 있어야 하고, 부처님이 출현해야 하고,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조건을 갖추기가 매우 어려움에 대하여 맹구우목의 비유를 들었다.
 
동타지옥(同墮地獄)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행운이다. 더구나 정법시대에 태어난 것도 행운이다. 백천만겁난조우라 아니할 수 없다. 윤회를 탈출 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에 해당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 같다.
 
윤회를 부정하는 스님들이 있다. 경전을 읽어 보지 않은 무지로 본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사람들은 이런 스님들의 말을 믿고 따른다. 모두 동타지옥(同墮地獄)이 될 것이다.
 
진리는 두 개가 될 수 없다. 개념적으로 말해진 것은 진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염불선이 진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향봉스님의 말이 진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즉문즉설 스님의 말이 진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트루스테이블에 대입해 보면 모두 진리가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왜 그런가? 일 플러스 제로는 일이 아니라 제로이기 때문이다.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을 합하면 진리가 아니라 진리가 아닌 것이 된다.
 
트루스테이블에 따르면, 일 플러스 일이 되어야 일이 된다. 이는 진리와 진리를 더했을 때 진리가 되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라도 진리가 아닌 것이 섞여 있다면 결코 진리가 될 수 없다.
 
 
2024-03-2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