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액면 그대로 비추어 주는 진리의 거울

담마다사 이병욱 2024. 3. 14. 10:06

액면 그대로 비추어 주는 진리의 거울
 
 
하루하루가 위태위태하다. 잘못하면 부서질 것 같다. 아침이 되면 멀쩡하다가도 저녁이 되면 피로가 몰려 온다.
 
어제 저녁 으슬으슬했다. 몸살 기미가 보였다. 이럴 때 선 조치를 해야 한다. 타이레놀 두 알을 먹었다. 그리고 전기매트를 다시 깔았다. 몸을 따뜻하게 하고 하루밤을 보냈더니 개운해졌다.
 

 
다시 새 아침을 맞았다. 매번 반복되는 일상이다. 늘 그렇듯이 삶은 계란 하나, 삶은 고구마 작은 것 하나, 그리고 치즈 하나가 곁들인 샌드위치 한 조각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그리고 원두콩을 절구질하여 원두커피를 만들어 마시고 있다.
 
보리수가 살아나고 있다. 이제 하루다 달라 보인다. 이제 제법 잎으로서 형태를 갖춘 것 같다. 이대로 죽어 버릴 줄 알았는데 부활한 것이다. 자그마한 보리수 잎파리가 아침 햇살에 빛난다.
 

 
어제 무리했던 것 같다. 오전에 글 하나 완성하고 좌선에 들어갔다. 오랜만에 한시간 채웠다. 이전에는 글이 너무 길어서 삼사십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밀린 일이 있다. 주문 받은 일감을 완성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피곤해도 일을 하기 시작하면 힘이 난다. 오후 내내 인쇄회로기판 라우팅 작업을 해야 했다.
 
아무리 바빠도 메일을 확인해야 한다. 놀랍게도 여섯 모델 주문이 와 있다. 이런 때 먼저 답신을 보내야 한다. 담당자에게 “감사합니다. 신속하게 진행하겠습니다.”라고 답신했다.
 
일감이 있으면 든든하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겹치기로 하는 것이다. 현재 일이 있는 상황에서 또 다른 주문을 받으면 든든하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많지 않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 없다. 사람이 일만 하고 살 수 없다. 일은 생계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해야 한다. 그러나 일만 하면 사람의 감정이 메마르기 쉽다. 이럴 때 보상을 해 주어야 한다.
 
직장인들은 일이 끝나면 회식을 종종한다. 일로 인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다. 이런 경우 상사가 안주가 되기 쉽다. 일인사업자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오늘 아침에도 글을 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다. 매일 글을 쓰는 것은 균형을 갖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일에 대한 보상으로 글을 쓰는 것이다. 또한 일에 대한 보상으로 명상을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일에 대한 보상으로 경전과 논서를 읽는 것이다. 이런 행위는 가장 착하고 건전한 것인지 모른다. 무엇보다 돈이 들지 않는다. 또한 시간이 낭비 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선업을 쌓는 것이다.
 
액면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
 
오늘 아침 경전을 읽다가 새겨 두고 싶은 문구를 발견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S55.8)한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을까 봐 벌벌 떠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죽는 것이 대수롭지 않다고 말했다. 부처님은 왜 이렇게 말했을까? 그것은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
 
 
아난다여, 인간으로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그때 그 때 마다 인간이 죽을 때에 내게 와서 그 의취를 물으려 한다면, 아난다여, 그것은 여래를 괴롭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고귀한 제자가 그것을 갖추어 그가 원한다면 이와 같이 ‘지옥도 부서졌고 축생도 부서졌고 아귀도 부서졌고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도 부서졌고 나는 이제 흐름에 든 님이 되어 더 이상 타락하지 않고 삶의 길이 정초되어 올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간다.’라고 스스로 자신을 예지할 수 있는 진리의 거울이라는 법문을 하겠다.”(S55.8)
 

 

 
부처님은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부처님에게 그 사람의 운명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그때 마다 부처님은 그 사람의 죽음 이후의 운명에 대하여 알려 주었다. 그러나 이런 것도 하루이틀이다. 매번 묻는 것에 답변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거울을 만들었다. 이를 담마다사(dhammādāsa), 즉 ‘진리의 거울’(法鏡)이라고 했다.
 
거울을 보면 액면 그대로 보인다. 조금도 더하고 뺄 것도 없다. 거울은 있는 그대로 비춘다. 진리의 거울도 이와 다르지 않다. 진리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면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있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누군가 알려 줄 수도 있지만 나의 정신능력보다 높지 않으면 정확하게 알려 주기 힘들 것이다.
 
상담사라는 직업이 뜨고 있는데
 
요즘 상담사라는 직업이 뜨는 것 같다. 금요니까야모임에서 상당수 사람들이 상담을 전문으로 하고 있다. 상담사가 되기 위한 자격증도 있다. 그렇다면 상담사의 정신능력은 어느 정도 되는 것일까?
 
상담사는 많이 배운 사람이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상담사는 많은 경험을 가진 자가 해야 할 것이다. 지식과 지혜를 갖춘 자가 상담사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지식이 일천하고 지혜가 없는 자가 상담을 하면 어떻게 될까?
 
상담자는 피상담자보다 정신적으로 우위에 있어야 한다. 마치 위빠사나 수행센터에서 스승이 제자보다 정신적인 능력이 우위에 있어야 하는 것과 같다. 왜 그런가? 스승은 이미 제자의 단계를 거쳐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가 말하는 것을 들으면 어느 단계에 있는지 알 수 있다.
 
깨달은 자는 깨달은 자를 알아 본다. 범부는 깨달은 자를 알아보기 힘들다. 정신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했다. 상담사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점을 보러 가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운명이 궁금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경우 점집에 있는 사람이 방문자보다 정신적 능력에 있어서 우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만일 점 보는 사람보다 방문자가 더 우위에 있다면 점을 보지 못하게 될는지 모른다.
 
진리의 거울로 비추어 보면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보기 힘들다. 그래서 상담사를 찾아가고 점 보는 사람을 찾아 간다. 불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스님을 찾아 갈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자라면 스승을 찾아 갈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그럴 필요가 없다.
 
부처님의 진리의 거울에 대한 법문을 들으면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있다. 어떤 법문인가? 그것은 불, 법, 승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과 계행에 대한 것이다.
 
불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어떤 이는 오계를 받으면 불자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계는 필요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불자가 되려면 무엇보다 삼보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불교인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방법이 있다. “당신은 불, 법, 승 삼보를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봅니까?”라고 물어 보는 것이다. 다음으로 진짜 불교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당신은 오계를 지킵니까?”라고 물어 보는 것이다.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심은 불교인으로서 충분조건이다. 오계는 필요조건이다. 그렇다면 충분조건과 필요조건을 모두 만족시킨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진짜 불교인, 진정한 불교인, 참불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진리의 거울에 대한 법문은 삼보와 계행에 대한 것이다. 이는 불교인으로서 충분조건과 필요조건을 모두 다 갖추었을 때 진리의 거울에 대한 법문이 완성된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내가 지금 죽는다면 나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부처님의 진리의 거울에 대한 가르침에 따르면 삼보와 계행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졌을 때 “지옥도 부서졌고 축생도 부서졌고 아귀도 부서졌고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도 부서졌다.”라고 했다.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어떤 이는 윤회를 부정한다. 죽음 이후를 말하지 않는 것을 넘어 부정하는 것이다. 죽음이니 내생이니 윤회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개념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 여기서 현실의 삶만 충실하면 된다고 말한다. 이른바 ‘행복론’을 말한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스님은 행복전도사와도 같다. 어느 정도일까? 방송이나 유튜브를 보면 비불교인도 스님의 말을 인용한다. 심지어 타종교인도 스님의 말을 인용한다. 그런데 스님은 윤회에 대하여 부정한다는 것이다.
 
스님은 왜 윤회를 부정하는 것일까? 그것은 스님은 전국구 스님이기 때문이다.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스님임을 말한다. 불교인을 포함하여 비불교인도 대상이 된다. 그래서 사람이 죽어서 소도 되고 개가 된다는 윤회를 말하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은 업과 업의 과보의 가르침을 설했다. 악업을 지으면 악처에 태어나고 선업을 지으면 선처에 태어난다고 말했다.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즉문즉설 스님은 윤회를 부정한다.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까지 한 번도 점을 보지 않았다. 앞으로도 볼 생각이 없다. 그렇다면 나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선처에 태어날까 악처에 태어날까? 그러나 부처님의 진리의 거울에 대한 법문을 보면 그럴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이는 부처님이 “나는 이제 흐름에 든 님이 되어 더 이상 타락하지 않고 삶의 길이 정초되어 올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간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자신운명을 예지할 수 있는 진리의 거울
 
누구든지 성자의 흐름에 들면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이 “흐름에 든 님이 되어 더 이상 타락하지 않고 삶의 길이 정초되어 올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간다.”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성자의 흐름, 즉 수다원이 되어야 한다.
 
사람은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범부와 성자를 말한다. 범부는 윤회하는 중생이고 성자는 윤회가 끝나는 부처님 제자를 말한다. 한번 성자의 흐름에 들면 아무리 못 잡아도 일곱 생 이내에는 완전한 열반에 들것이라는 사실이 부처님 가르침이다.
 
사람들은 미래에 대하여 불안해 한다. 왜 이런 불안이 생기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죽은 다음에 운명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리의 거울에 대한 법문을 보면 안심이 된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일단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라는 사악처에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담마다사, 즉 부처님의 진리의 거울에 대한 법문은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있는 법문이다.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과 계행을 지켜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사악처의 문은 닫히고 일곱 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든다. 이처럼 희망있는 메세지가 어디 있을까?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개척해 가야 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는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점을 볼 필요가 없다. 상담을 받을 필요도 없다. 왜 그런가 점 보는 사람보다 정신능력이 더 높고 또한 상담하는 사람보다 정신능력이 더 뛰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미래를 알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스스로 자신을 예지할 수 있는 진리의 거울”이라고 했다.
 
죽은 후에도 지속되는 개인의 업보
 
성자의 흐름에 든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쩌면 죽음은 축복이 될지 모른다. 일곱 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든다면 “인간으로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S55.8)라고 말할 수 있다. 설령 그가 사고로 지금 죽는다고 해도 두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했다.
 
 
마하나마여,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마하나마여,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대에게 악한 죽음이나 악한 임종은 없을 것입니다. 마하나마여, 몸은 물질로 이루어지고 네 가지 광대한 존재로 구성되어 부모에게서 태어나 음식으로 부양되고, 무상하고, 파괴되고, 분쇄되고, 찢겨지고, 흩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믿음으로 마음을 닦고, 계행으로 마음을 닦고, 배움으로 마음을 닦고, 보시로 마음을 닦고, 지혜로 마음을 닦았다면, 이 몸을 까마귀들이 삼키고, 독수리들이 삼키고, 매들이 삼키고, 개들이 삼키고, 승냥이들이 삼키고, 여러 종류의 야생동물들이 삼킨다고 해도, 그 오랜 세월 동 안 믿음으로 닦여지고, 계행으로 닦여지고, 배움으로 닦여지고, 보시로 닦여지고, 지혜로 닦여진 마음은 상승하여 승화됩니다.”(S55.21)
 
 
이 법문은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법문이다. 이는 믿음, 계행, 배움, 보시, 지혜라는 다섯 가지 공덕을 쌓았을 때 죽은 후에도 개인의 업보가 지속됨을 말한다.
 
몸은 늘 불안하다. 오늘 건강하다가도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아니 오전에 이상이 없다가도 오후에 어떤 상태가 될지 알 수 없다. 이런 때 믿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선업공덕에 대한 것이다. 경에서는 믿음의 공덕, 계행의 공덕, 배움의 공덕, 보시의 공덕, 지혜의 공덕을 들었다.
 
나는 지금 공덕을 쌓고 있는가? 하루하루 버티기 힘든데 언제 믿음의 공덕, 계행의 공덕, 배움의 공덕, 보시의 공덕, 지혜의 공덕을 쌓아야 할까? 더구나 몸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어서 무상하고, 파괴되고, 분쇄되고, 찢겨지고, 흩어지고 마는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불안정한 몸을 가지고 언제 공덕을 쌓아야 할까?
 
하루하루 버티기가 쉽지 않다. 결국 몸은 파괴되어 죽음에 이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동물의 먹잇감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안심하는 것은 선업공덕을 쌓아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단지의 비유를 들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버터가 든 단지나 기름이 든 단지를 깊은 호수에 집어 넣어 깨뜨리면, 그 단지의 파편이나 조각은 가라앉을 지라도 그 버터나 기름은 승화됩니다.”(S55.21)
 
 
기름은 물보다 가벼워서 물 위에 뜬다. 반면 단지는 무거워서 물 밑으로 가라앉는다. 이는 선업과 악업에 대한 것이다. 선업을 지으면 마음이 가벼워서 선처에 태어나고, 악업을 지으면 마음이 무거워서 악처에 태어남을 말한다.
 
선업공덕을 지은 자는 든든하다. 언제 죽어도 두렵지 않은 것이다. 지금 당장 죽어도 대수롭지 않다. 지금보다 더 좋은 세계에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업을 지었다고 모두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야만 보장되는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든 것과 들지 않은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크다. 왜 그런가? 제아무리 보시를 많이 하고 계행을 지켰어도 죽어서 어느 세계에 태어날지 모른다. 다만 선처에 태어날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선처에 태어나고 악처의 문을 닫으려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야 한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을까 봐 벌벌 떤다. 그럼에도 애써 잊으려고 한다. 마치 천년만년 살 것처럼 감각을 즐기며 살아간다. 그러다가 죽음에 이르면 어떤 마음이 들까? 아마 후회의 마음이 밀려 올지 모른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데.”라고.
 
자신을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어제와 같은 오늘이다. 오늘 같은 내일이 될 것이다. 몸은 불안정하여 늘 부서지려 한다. 억지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듯하다. 이런 나날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 없다. 이럴 때 자신의 모습을 진리의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거울은 액면 그대로 보여준다. 조금도 더함도 없고 뺌도 없다. 진리의 거울 역시 액면 그대로 보여준다. 그가 흔들림 없는 삼보에 대한 믿음과 계행을 지켜 성자의 흐름에 들었다면 그의 운명을 예지할 수 있다. 지금 죽어도 좋은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든자에게 죽음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범부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어느 세계에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는 미래의 운명이 보장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었다면 미래의 운명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 없다. 다른 것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 점집이나 상담소를 찾아가지 않아도 된다. 자신을 섬으로 하여, 자신을 등불로 하여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에게 의지하여 나아가면 된다.
 
성자의 흐름에 들려면 열반을 체험해야 한다. 그런데 한번 궁극적인 경지를 체험하면 그 궁극적인 경지를 체험한 자신이 의지처가 되고, 귀의처가 되고,  피난처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수호자이니 다른 누가 수호자가 되리.”(Dhp.160)라고 했다.
 
 
2024-03-1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