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여인은 감각적 욕망 그 자체일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4. 3. 29. 10:10

여인은 감각적 욕망 그 자체일까?
 
 
엘리베이터에 그 사람이 탔다. 이른 아침 일터로 가는 길에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군복 입은 사람이 탄 것이다. 그 사람이 무엇을 할지는 알고 있다. 경비실 뒤로 담배 피우러 가는 것이다.
 
소형아파트에 살고 있다. 스물두 평임에도 엘리베이터식이다. 층고는 무려 이십오 층에 이른다. 소형이어서일까 신혼부부나 젊은 부부가 꽤 된다. 또 한편으로 독거노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산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한때 피웠으나 혼자 일하면서 그만 두었다. 선천적으로 체질에 맞지 않음에도 다른 사람이 피우는 것을 보고 따라 했다. 특히 회의가 끝날 때 강하게 당겼다. 직장 다닐 때의 일이다.
 
엘리베이터에 담배 냄새가 풍긴다. 순간적으로 기분이 상했다. 담배 피우는 사람에 대한 혐오의 마음이 일어났다. 서너 명의 골초들 중에 하나이다. 그들은 하루에도 수도 없이 들락날락 한다.
 
군복 입은 그 노인을 볼 때 마다 싫어하는 마음이 생겨난다. 그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타면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담배 피우는 것에 대한 혐오의 마음이 앞서는 것이다. 과연 그 사람이 문제인가 내가 문제인가?
 
쌍윳따니까야를 읽다가
 
어제 새벽 쌍윳따니까야를 읽다가 인상적인 구절을 발견했다. 이전에도 글쓰기 소재로도 활용했던 것이다. 담배 피우는 사람을 싫어하는 나에게 딱 들어 맞는 가르침이다. 다음과 같은 부처님 게송이다.
 
 
“세상 만물이 감각적 욕망이 아니라
의도된 탐욕이 감각적 욕망이네.
세상에 참으로 그렇듯 갖가지가 있지만,
여기 슬기로운 님이 욕망을 이겨내네.”(S1.34)
 
 
세상만물이 감각적 욕망이 아니라고 했다. 이 말 뜻은 무엇일까?  각주를 보면 “감각적 쾌락의 종류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욕망이 문제가 되므로 욕망을 없애는 것이 현자의 할 일”(KPTS 본 1권, 260번 각주)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저기 아름다운 여인이 지나간다. 남자는 여인에게 시선을 보낸다. 머리 끝에서부터 발 끝까지 스캔한다. 남자는 여인에게 끌리는 것이다. 이럴 때 여인에게 문제가 있을까 남자에게 문제가 있을까?
 
성범죄가 있다. 범행을 저지른 자는 여자가 유혹했다고 말한다. 야한 모습에 끌려서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야한 옷을 입은 여자가 잘못인가 범행을 저지른 남자가 잘못한 것인가?
 
여자가 옷을 야하게 입을 수 있다. 몸매가 좋아서 섹시하게 보일 수도 있다. 성범죄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이런 것을 염려해서 차도르를 착용하게 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부처님은 “세상 만물은 감각적 욕망이 아니다. (na te kāmā yāni citrāni loke)”(S1.34)라고 했다. 만약에 여인이 감각적 욕망 그 자체라면 남성에 의한 성범죄는 정당화될 것이다. 이런 이유로 여자는 얼굴과 몸을 가리는 검은 옷을 입고 다녀야 할 것이다.
 
여인은 감각적 욕망 그 자체일까?
 
어느 스님은 도시에서 눈을 둘 곳이 없다고 말했다. 여름철 노출의 계절에 여인들의 얇은 옷을 보았을 때 곤혹스럽고 난감하다고 말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젊은 사람들은 대체로 여인을 성적대상으로 보는 것 같다. 어느 조사에 따르면 젊은 남성은 거의 하루종일 여자생각만 하며 지낸다고 했다. 이런 성적 상상력은 나이가 들면 누그러질 것이다. 그러나 성적본능은 나이가 들어서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부처님은 여인을 대하는 방법에 대해서 설법했다. 늘 새김과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이다. 가장 가슴에 와 닿는 가르침이 있다. 이는 “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어머니 같은 여인에 대하여 어머니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누이 같은 여인에 대하여 누이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딸 같은 여인에 대하여 딸을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라." (S35.127)라는 가르침을 말한다. 여인을 가족처럼 대하는 것이다.
 
여인을 가족처럼 대하면 성적 욕망은 없을 것이다. 변태를 제외하고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극복이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최후의 수단으로 “그대들은 이 몸은 발바닥부터 머리 가운데 아래 피부 끝까지 여러가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개별적으로 이 몸에는 머리카락, 몸털,…관절액, 오줌이 있다고 이와 같이 깊이 관찰해야 한다.”(S35.127)라고 말했다. 부정관을 통해서 욕망을 극복하는 것이다.
 
문제는 욕망이다.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인 것이다. 그 여인은 아무 잘못이 없다. 옷을 야하게 입은 그 여인의 문제가 아니다. 여인은 감각적 욕망 그 자체가 아니다. 그럼에도 여인을 성적대상으로 여긴다면 내 마음이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의도된 탐욕이 감각적 욕망이네. (saṅkapparāgo purisassa kāmo)”(S1.34)라고 말했다.
 
모든 것은 접촉으로부터
 
쌍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게송은 앙굿따라니까야에서도 발견된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사람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사유의 탐욕이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세상에서의 아름다운 것들이 아니네.”(A6.63)
 
 
두 게송의 빠알리 원문은 같다. 다문 1구와 2구가 순서만 바뀌었을 뿐이다.
 
감각적 욕망은 사유의 탐욕이라고 했다. 사유의 탐욕은 ‘상깝빠라가(saṅkapparāga)’를 번역한 말이다. 여기서 빠알리어 상깝빠는  ‘thought, intention, purpose’의 뜻이다. 의도가 실린 것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 탐욕을 내는 내가 문제임을 말한다.
 
여기 매혹적인 대상이 있다. 그것이 사람일 수도 있고 사물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 대상에 대하여 욕망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접촉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원인이다.”(A6.63)라고 말했다.
 
모든 것은 접촉으로부터 시작된다. 접촉이 없다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매혹적 대상을 보았을 때 접촉이 일어난다. 눈으로 형상을 보았을 때 접촉이 일어난다. 귀로 소리를 들었을 때도 접촉이 일어난다. 여섯 감각기관이 여섯 감각대상과 접촉이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 매혹적인 대상이 있다. 그것은 사람일 수도 있고 보석일 수도 있다. 이는 눈이 있어서 접촉이 일어난 것이다. 문제는 욕망이 일어나는 것이다. 접촉이 원인이 되어서 욕망이라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나에게 욕망이 일어났다. 이를 대상 탓으로 돌린다면 자신의 잘못을 남 탓으로 보는 것과 같다. 마치 미니스커트 입은 여인이 잘못이라고 보는 것과 똑같다.
 
부처님은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을 설했다. 이는 사성제로 설명된다. 욕망의 발생과 소멸도 사성제로 설명된다.
 
매혹적 대상을 보았을 때 욕망이 생겨난다. 이럴 때 욕망이 일어났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욕망이다.”라고 아는 것이다. 다음 단계는 욕망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
 
욕망이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은 접촉에 따른다. 접촉이 없었으면 욕망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의도된 탐욕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대상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문제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해결할 수 있다. 욕망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그 다음 단계는 욕망의 소멸이다. 어떻게 소멸하는가? 이는 “접촉의 소멸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소멸이다.”(A6.63)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욕망은 접촉으로 인해 발생된다. 처음부터 접촉이 없었으면 욕망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접촉하지 않을 수 없다. 눈이 있어서 보이기 때문이다.
 
욕망의 소멸은 접촉하지 않는 것에서 실현된다. 이미 접촉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접촉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욕망의 소멸에 대한 길로 설명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등 팔정도로 설명했다.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항상 내가 문제였다
 
여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만 보면 밥맛 떨어진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잘못이다.
 
여기 매혹적인 대상이 있다. 그 사람은 나를 유혹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에게 그 사람을 차지 하고자 하는 욕망이 일어났다면 내가 잘못한 것이다. 그 사람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부처님은 “세상 만물은 감각적 욕망이 아니다.”(S1.34)라고 했다. 이는 세상만물 자체가 욕망이 아니라는 말과 같다. 대상에 대하여 욕망하는 나의 마음이 문제인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의도된 탐욕(saṅkapparāga)’이라고 했다.
 
눈과 귀 등으로 대상을 접한다. 접촉함으로 인하여 느낌, 지각, 의식이 발생한다. 이때 의도가 실리면 업(業)이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나는 의도가 행위라고 본다. 의도하고 나서 신체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행위한다.”(A6.63)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은 명쾌하다. 대상자체가 욕망이어서 욕망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의도가 있어서 행위가 따른다. 반복적 의도적 사유에 따라 욕망이 일어난다.

문제는 문제를 파악하면 해결된다. 문제는 상대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었던 것이다. 접촉된 것에 대하여 좋거나 싫은 느낌이 발생되는데 이 때 갈애 하게 되면 의도가 실리는 것이다. 그 결과 업을 짓는다. 그 업은 불선업일 수도 있고 선업일 수도 있다.
 
현자는 업을 짓지 않는다. 대상을 접해도 의도를 내지 않는 것이다. 그저 “그러려니”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업을 짓지 않는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항상 내가 문제였다.
 
 
2024-03-2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