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여행자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담마다사 이병욱 2024. 3. 6. 10:42

여행자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혼자 있어도 늘 바쁘다. 이것 저것 할 것이 많다. 하루 해가 금방 지나간다. 아침인가 싶으면 저녁이다. 늘 자리에 누워 있는 것 같다. 삶도 이런 것일까? 결국 죽음의 침상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고 했다. 이 말은 어떤 뜻일까? 나의 삶이 불확실하다는 것은 정해진 수명이 없다는 말과 같다. 결국 이 말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말과 같다. 확실한 것은 죽는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젊음, 이 건강, 이 삶이 천년만년 지속될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천년만년 살 것처럼 하루를 헛되이 보낸다. 그렇게 내버려 둘 수 없다.

 

글을 씀으로 인하여 삶의 흔적을 남긴다. 이런 세월이 십년이 넘었다. 정확하게 십팔년되었다. 이제 이십년 가까이 된다. 이렇게 매일 흔적을 남기다 보니 글이 쌓이고 쌓여 하나의 탑을 이루었다. 이를 금자탑이라고 한다면 자만일 것이다.

 

오늘도 무언가 하나를 써야 한다. 이렇게 차분히 책상에 앉아 여백을 맞이한다. 그리고 자판을 때린다. 그러면 흰 여백에 문자가 , 하고 박힌다. 의무적으로 하는 일이다.

 

매일 의무적으로 하는 일이 있다. 글쓰기, 좌선하기, 빠알리어공부하기, 경전과 논서읽기, 그리고 책만들기를 말한다. 이와 같은 오대사업은 바쁘다. 하루가 부족하다.

 

오대사업은 일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루 24시간은 너무 부족하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글쓰기와 좌선과 경전읽기는 멈추지 않는다. 빠알리어공부와 책만들기는 틈나는 대로 해야 한다.

 

일감이 있으면 일을 해야 한다. 아무리 오대사업이 중요해도 먹고 사는 것만 못하다. 일감이 들어 오면 제일순위가 된다. 그럼에도 매일 아침 글쓰기는 멈추지 않는다.

 

불교에서 청정한 삶(brahgmacariya)이란?

 

오늘 아침에 읽은 것이 마음에 남았다. 기억해 두고 싶은 내용이다. 글로서 써 놓으면 확실한 내것이 된다. 어떤 것인가?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이다.

 

 

바라문이여, 수행승이 거룩한 님, 번뇌를 부순 님, 청정 한 삶을 성취한 님, 해야 할 일을 해 마친 님, 짐을 내려놓은 님, 자신의 이상을 실현한 님, 윤회의 결박을 끊어 버린 님, 올바른 궁극의 앞에 의해서 해탈한 님이라면 바로 이와 같습니다. 그에게 예전에 거룩한 지위를 성취하기 위한 의욕이 있었더라도 거룩한 님이 되면 거기에서 유래한 의욕은 소멸되며, 그에게 예전에 거룩한 지위를 성 취하기 위한 정진이 있었더라도 거룩한 님이 되면 거기에서 유래한 정진은 소멸되며, 그에게 예전에 거룩한 지위를 성취하기 위한 마음이 있었더라도 거룩한 님이 되면 거기에서 유래한 마음은 소멸되며, 그에게 예전에 거룩한 지위를 성취하기 위한 탐구가 있었더라도 거룩한 님이 되면 거기에서 유래한 탐구는 소멸됩니다.”(S51.15)

 

 

거룩한 님, 즉 아라한이 되면 의욕, 정진, 마음, 탐구는 소멸된다는 것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먼저 부처님과 바라문의 대화를 알아야 한다.

 

고대인도에서 바라문은 사성계급의 최상층이었다. 마치 조선시대 양반과 같은 계급이다. 그들은 부처님의 교단을 이해하지 못했다. 탁발하며 무소유의 삶을 사는 것에 대하여 잘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존자 아난다여, 무엇을 위해 수행자 고따마 아래에서 청정한 삶을 삽니까?”라고 물어 보았다.

 

청정한 삶은 빠알리어 브라흐마짜리야(brahgmacariya)를 번역한 말이다. 이 말은 청정범행이라고도 번역된다. 바라문의 인생사주기에 있어서 학습기에 해당된다.

 

불교에서는 청정한 삶을 사는 것을 최상으로 여긴다.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해탈과 열반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청정한 삶을 뜻하는 브라흐마짜리야는 바라문 사주기에 있어서 학습기가 연장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에서 브라흐마짜리야는 평생 함께 하는 것이다. 평생 청정한 삶을 사는 것이다.

 

찬다(열의)의 쓰임새에 대하여

 

바라문과 아난다의 대화는 계속 이어진다. 아난다는 바라문의 질문에 바라문이여, 의욕을 끊기 위해 수행자 고따마 아래서 청정한 삶을 삽니다.”라고 말한다.

 

의욕은 어떤 것일까? 의욕이 있어야 사는 것인데 의욕을 끊어야 청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했다. 모순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석을 보면 단번에 이해가 간다. 주석에서는 의욕을 뜻하는 찬다(chanda)는 갈애를 뜻하는 딴하(tahā)와 의미가 같다고 했다.

 

찬다와 딴하는 다른 말이다. 두 말 똑같이 의욕의 뜻이 있지만 찬다는 대체로 긍정적으로 쓰이고 딴하는 부정적으로 쓰인다. 또한 찬다는 때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지만 갈애는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찬다는 수행용어라고도 볼 수 있다. 열의, 의지, 의도라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찬다가 반드시 긍정적으로 쓰이는 것은 아니다. 때로 부정적으로도 쓰인다. 이는 찬다의 쓰임새가 다른 마음부수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흔히 아비담마를 마음의 지도라고 말한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찬다는 52가지 마음부수 중의 하나이다. 이는 52가지나 되는 마음의 작용중의 하나라는 말이다.

 

마음부수는 세 종류의 그룹으로 나뉜다. 중립적인 마음부수, 해로운 마음부수, 아름다운 마음부수를 말한다. 이 중에서 찬다는 중립적인 마음부수에 해당된다. 중립적이라는 말은 상황에 따라 해로운 마음부수 또는 아름다운 마음 부수에 속할 수 있음을 말한다. 마치 즐겁지도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마음이 조건에 따라 즐거운 마음 또는 괴로운 마음으로 바뀌는 것과 같다.

 

찬다는 선법도 아니고 불선법도 아니다. 찬다는 중립적인 마음이다. 조건에 따라 바뀐다. 그래서 찬다가 긍적적으로 쓰이면 열의가 되고 부정적으로 쓰이면 욕망이 된다.

 

찬다에 대하여 아비담마를 찾아 보았다. 미얀마 멤 틴 몬이 편역한 붓다아비담마에 따르면 중립적인 마음부수에 대하여 “13가지 중립적인 마음부수는 아름다운 마음(sobhaa citta)과 아름답지 않은 마음(asobhaa citta) 둘 다와 결합할 수 있다.”(104)라고 했다. 마치 강대국 사이에 있는 중립국을 연상케 한다.

 

중립적인 마음부수는 13가지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도 특수한 마음부수 6가지가 있다. 이는 위딱까(사유), 위짜라(숙고), 아디목카(결정), 위리야(정진), 삐띠(희열), 찬다(열의)를 말한다.

 

6가지에 대하여 왜 특수하다고 했을까? 이는 6가지 마음부수는 아름다운 마음과 아름답지 않은 마음 둘 다와 결합할 수 있지만, 그것들 모두와는 결합하지 않는다.”(109)라고 했다. 이 말은 어떤 뜻일까? 한마디로 동시에 선법과 불선법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초기불교를 접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그것은 한순간에는 두 가지 마음이 일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6가지 중립적은 특수한 마음부수는 동시에 선법과 불선법 두 가지에 적용될 수 없다. 그래서 선법에 적용되면 열의가 되어 긍정적인 것이 되고, 반대로 불선법에 적용되면 갈애가 되어 부정적인 것이 된다.

 

어떤 일을 하든지 열의가 있어야

 

불교 공부는 경전 읽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각주에 있는 주석도 읽어 보어야 한다. 더 좋은 것은 논서를 읽어 보는 것이다.

 

아비담마는 마음의 지도 같은 것이다. 마음을 분석적으로 설명해 놓은 논서이다. 이런 논서는 동아시아불교에서 보기 힘들다. 구사론이 있지만 접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빠알리 삼장에 속해 있는 논서는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어서 누구나 쉽게 마음의 구조를 알 수 있다. 찬다에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열의는바람, 욕구혹은의지로 번역된다. 열의의 주된 특성은하려는 바람이다. 또한 집착이 없는어떤 것에 대한 바람도 열의이다. 열의는 윤리적으로 중립적인 심리학 용어이다. 그것은집착이 있는 욕구인 해로운 탐욕과 구별되어야 한다.”(붓다아비담마, 112)

 

 

찬다는 긍정적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갈애를 뜻하는 딴하와는 다른 것이다. 딴하는 부정적 의미로만 사용될 뿐이지 긍정적 의미로는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찬다는 조건에 따라 긍정으로도 사용되고 조건에 따라 부정으로도 사용된다.

 

어떤 일을 하든지 열의가 있어야 한다. 글을 쓰는 것도 열의가 있어야 하고 좌선을 하는 것도 열의가 있어야 한다. 내가 하는 다섯 가지 사업도 열의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래서 모든 행위는 열의와 함께 시작된다. 예를 들어 일어서는 행위는 일어 서려는 바람과 함께 시작된다. 1,000마일의 여행은 한 걸음부터 시작된 다. 여기서 첫 번째 걸음이 열의이다. 가려는 바람이 없이 갈 수 없고 어딘가 도착하려는 바람이 없다면 어떤 장소에도 도달할 수 없다.”(붓다아비담마, 112)라고 했다.

 

열의는 장려되어야 한다. 열의가 강화 되면 의지가 된다. 그래서 열의는 성공으로 이끈다. 수행을 할 때도 열의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네 가지 성취수단(사신통)’에서 정진, 새김, 마음과 함께 열의를 포함해 놓았다.

 

뗏목 비유의 올바른 뜻은?

 

아난다는 바라문에게 열의를 끊기 위해 청정한 삶을 산다고 말했다. 이에 바라문은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해 어떠한 방도가 있는지 묻는다. 아난다는 의욕을 끊기 위해서는 네 가지 신통의 기초(사신통)을 닦아야 한다고 설명해 준다.

 

네 가지 신통의 기초는 의욕, 정진, 마음, 탐구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사신통은 네 가지를 닦아야 된다는 것이다. 의욕에 대한 것을 보면 의욕의 집중에 기반한 노력의 형성을 갖춘 신통의 기초를 닦습니다.”(S51.15)라고 했다. 이 말은 사신통의 정형구에 해당된다.

 

사신통을 닦기 위해서는 열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열의를 끊어야 한다고 말했다. 마치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뗏목의 비유를 보면 이해하기 쉽다.

 

가르침을 배우는 목적은 저 언덕에 건너 가기 위한 것이다. 가르침의 뗏목을 타고 건너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언덕으로 건너 갔을 때 뗏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더 이상 필요 없으니 불살라 버려야 할까?

 

금강경에 뗏목의 비유가 있다. 금강경에서는 “가르침마저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가르침이 아닌 것임에랴(法相應捨 何況非法)”라고 했다. 여기서 가르침()이란 부처님 가르침을 말한다부처님의 가르침마저 놓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잘못된 것이다. 왜 그런가? 어떤 경우에서라도 부처님 가르침을 버려서는 안된다.

 

버려야 할 것은 가르침(Dhamma)에 대한 집착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금강경 뗏목의 비유의 모티브가 되는 맛지마니까야 22번 경에서 수행승들이여, 그 사람은 저 언덕에 도달했을 때 ‘이제 나는 이 뗏목을 육지로 예인해 놓거나물속에 침수시키고 갈 곳으로 가면 어떨까?’라고 생각했다수행승들이여이와같이 해야 그 사람은 그 뗏목을 제대로 처리한 것이다이와같이수행승들이여건너가기 위하여 집착하지 않기 위하여 뗏목의 비유를 설했다.”(M22)라고 설했다.

 

어떤 것이든지 집착하면 불선법이 되고 불선업이 된다. 뗏목에 집착하지 않듯이 가르침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뗏목의 비유의 올바른 뜻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참으로 뗏목에의 비유를 아는 그대들은 가르침마저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가르침이 아닌 것임에랴.(M22)라고 말했다. 금강경에 실려 있는 법상응사하황비법(法相應捨 何況非法)에 대한 오리지널 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갈애를 갈애로 끊을 수 없다

 

네 가지 신통의 기초를 닦을 때는 의욕(찬다)를 필요로 한다. 이는 의욕을 끊기 위해서 의욕을 내는 것과 같다. 그러나 바라문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존자 아난다여, 그러한 경우에는 그것은 끝이 없고 끝낼 수가 없습니다.”(M51.15)라고 말했다.

 

바라문은 아난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바라문의 입장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바라문은 아마 찬다를 딴하로 오해했던 것 같다. 왜 그런가? 갈애는 마셔도 마셔도 갈증만 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욕으로써 의욕을 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S51.15)라고 말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감각적 욕망으로 살아간다. 이는 탐, , 치로 살아가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삶은 갈애가 원동력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즐거움을 추구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세상사람들이 바라는 행복은 감각적 행복이기 쉽다는 것이다. 이는 눈, 귀 등으로 감각을 즐기는 오욕락을 말한다.

 

세상사람들은 오욕락을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오욕락은 만족이 없다는 사실이다. 마치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 같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갈애이다.

 

바라문은 찬다(의욕)을 딴하(갈애)로 보았다. 그래서 갈애를 갈애로 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마치 알코올 중독자가 알코올로 알코올을 끊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감각적 욕망에는 끝이 없다. 그런데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면 할수록 갈증만 난다는 것이다. 마치 갈증이 나서 소금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그래서 갈애를 갈애로 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 주석에서는 침이나 코가 묻은 오점을 동일한 더러운 것으로 씻는다면 깨끗해질 수 없고 오히려 더욱 더러워지고 악취가 나게 된다.”(DhpA.I.50)라고 했다.

 

여행자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욕망을 욕망으로 끊을 수 없고 분노를 분노로 끊을 수 없다. 욕망과 분노를 끊으려면 놓아 버려야 한다. 어떻게 놓아 버려야 하는가? 수행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아난다는 바라문에 하나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아난다가 바라문에게 물었다. 아난다는 바라문이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내가 예전에 승원에 가고 싶은 의욕이 있더라도, 그 승원에 도착했을 때에는 그 때문에 생겨난 의욕은 소멸합니까?”(S51.15)라며 물었다.

 

여행자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더 이상 의욕이 일어나지 않는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고 하여 의욕을 가지고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더 가고자 하는 의욕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의욕뿐만 아니라 정진도 소멸하고 마음도 소멸하고 탐구도 소멸한다. 아난다는 이렇게 여행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했다.

 

거룩한 자, 즉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은 여행을 마친 자와 같다. 더 이상 의욕, 정진, 마음, 탐구라는 네 가지 신통의 기초를 닦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닦을 것이 없기 때문에 거룩한 님, 번뇌를 부순 님, 청정 한 삶을 성취한 님, 해야 할 일을 해 마친 님, 짐을 내려놓은 님, 자신의 이상을 실현한 님, 윤회의 결박을 끊어 버린 님, 올바른 궁극의 앞에 의해서 해탈한 님”(S51.15)이라고 했다.

 

아라한은 더 이상 배울 것도 없고 더 이상 닦을 것이 없기 때문에 무학도(無學道)’라고 한다. 그래서 아라한은 불선업을 짓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업도 짓지 않는다. 번뇌가 다한 아라한은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렇네, 그렇군, 그렇구나라는 작용만하는 마음(kiriya citta)만 있는 것이다.

 

깨달은 자의 마음과 범부의 마음은 다르다. 바라문은 범부의 입장에서 보았다. 그래서 의욕으로써 의욕을 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라고 말했다. 마치 탐욕으로써 탐욕을 끊고 분노로써 분노를 끊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원한을 원한으로써 원한을 해소할 수 없다. 이는 결코 이 세상에서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 원한의 여읨으로 그치나니 이것은 오래된 진리이다.”(Dhp.5)라고 했다.

 

원한을 내려 놓아야 원한을 해소할 수 있다. 어떻게 해소하는가? 주석에서는 원한을 여의고 인내와 자애그리고 새김의 확립을 통해서 원한을 소멸시키고 그치게 할 수 있다.”(DhpA.I.50)라고 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애수행을 해야 한다.

 

 

혼자 있어도 바쁘다

 

오늘도 신나게 글을 하나 썼다. 매일 아침 이렇게 쓰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런 나날이 십팔년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글을 쓰면 펄펄 난다는 것이다. 자리에 앉아서 화장실도 가지 않고 오로지 모니터만 바라보고 자판을 친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다. 이 글을 인터넷에 올리고 나면 좌선을 해야 한다. 글쓰기 하면서 형성된 집중을 고스란히 좌선에 가져 가고자 하는 것이다.

 

오후에는 생업을 해야 한다. 일감을 준 사회친구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지면서 네트리스트 구성하는 작업부터 해야 한다.

 

빠알리어 공부도 하고 경전읽기도 해야 하고 책만들기도 해야 한다. 혼자 있어도 바쁘다.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인가?

 

 

2024-03-0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