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늙음은 부끄러운 것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24. 3. 3. 11:19

늙음은 부끄러운 것인가?

 

 

일요일 평온한 백권당의 아침이다. 집에서 가져온 삶은 고구마와 감자, 그리고 치즈를 올려 놓은 샌드위치 한조각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지난 일년 이상 늘 하던 것이다. 너무 많지도 않고 너무 적지도 않은 적당한 식사이다.

 

아침이 되면 몸 상태를 살핀다. 어디 아픈지는 없는지 점검해 보는 것이다. 아직 아픈 데는 한군데도 발견되지 않는다. 최상의 컨디션이라 말할 수 있다.

 

사람은 힘이 있으면 남용한다. 조폭주먹이 근질근질한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건강하면 건강을 남용한다. 어떤 것인가? 과음이 대표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과음해서 몸을 망가지게 하는 것이다.

 

이 건강은 언제까지 유지 될지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늙어감에 따라 기능이 약화된다는 것이다. 어느 시점에 이르렀을 때 아프지 않은 데가 없을 것이다. 그 결과 삶의 질은 떨어진다. 죽지 못해서 사는 삶이 될 수 있다.

 

건강은 질병에 종속되기 마련이다. 젊음은 늙음에 종속되기 마련이다. 삶은 죽음에 종속되기 마련이다. 눈을 돌려 주변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천년만년 살 것처럼 오늘도 내일도 건강의 교만, 젊음의 교만, 삶의 교만으로 살아간다.

 

누가 내 청춘을 가져갔는가?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 늙어지면 못노나니. 민요가사의 일부이다. 사람들은 건강할 때 즐겨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사람들은 젊을 때 즐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젊음과 건강이 유지 되지 않는다.

 

 

세월은 스쳐가고 밤낮은 지나가니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세속의 자양을 버리고 고요함을 원하리.”(S1.4)

 

 

쌍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이런 게송을 볼 때마다 시를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페이스북에는 자칭타칭 시인들이 많다. 그들은 서로 시인이라 불러 준다. 그러나 그들의 시를 보면 그다지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다. 긴 글을 시처럼 보이기 위해 편집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이런 시들만 보다가 위와 같은 게송을 보면 차이를 느낀다.

 

오늘날 니까야 경전에 실려 있는 게송은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어 온 것이다. 이런 시를 접했을 때 가슴을 울렸음에 틀림 없다. 게송에서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 (vayoguā anupubba jahanti).라고 표현한 것은 새겨 두고 싶은 구절이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 있다.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울을 보면 왠 노인네 얼굴이 보이지만 마음은 항상 청춘이다. 그러나 청춘은 나를 배신했다. 늘 이십대 청춘일 것만 같았는데 이순이 넘어 버렸다. 누가 내 세월을 가져갔는가?

 

청춘만 나를 배신한 것은 아니다. 장년도 나를 배신했다. 이제 중년도 나를 배신했다. 나를 노년으로 밀어냈다. 마치 떠밀려 간 것 같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 가르침에 답이 있다. 그것은 세속의 자양을 버리고 고요함을 원하리.(lokāmisa pajahe santipekkho)라는 말이다.

 

네 가지 종류의 식사

 

세속의 자양이란 무엇일까? 이는 빠알리어 lokāmisa를 말한다. 이 말은 ‘loka+āmisa’의 형태이다. 여기서 자양이라는 말은 아미사(āmisa)를 번역한 것이다.

 

자양을 뜻하는 아미사는 윤회의 원인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양분이라고고도 말한다. 어떤 자양분인가? 이는 네 가지 식사로 설명할 수 있다. 음식, 느낌, 의도, 의식의 식사를 말한다.

 

매일매일 식사를 하며 살아간다. 하루도 먹지 않을 수 없다. 마치 거대한 항공모함과 같은 이 몸을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연료를 공급해 주어야 한다. 밥과 같은 물질적 식사를 말한다. 그런데 식사에는 물질적 식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과의 사이에 접촉이 없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접촉할 때마다 좋거나 싫은 느낌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는 접촉에 따른 느낌의 식사에 해당된다.

 

매일매일 글을 쓴다. 하루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허전하다. 마치 숙제를 숙제하지 않고 놀고 있는 것과 같다. 이렇게 글 쓰는 행위는 아마 의도의 식사에 해당될 것이다.

 

매일매일 경전을 보고 있다. 머리맡에 니까야 경전과 논서인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이 있어서 열어 본다. 하루라도 책을 보지 않으면 허전하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서 직무유기하는 것 같다. 이렇게 책을 읽는 행위는 아마 의식의 식사에 해당될 것이다.

 

매일 밥을 먹는다. 밥 먹는 행위를 중단한다면 죽음에 이를 것이다. 죽지 않기 위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 먹는다. 그러나 사람은 먹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느낌의 식사, 의도의 식사, 의식의 식사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네 가지 식사는 존재를 세세생생 윤회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는 식사가 대사(大事)라고 말한다. 잘 차려진 한끼 식사를 먹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일 것이다. 그러나 이를 탐욕과 성냄으로 먹으면 윤회의 원인이 된다. 더구나 느낌과 같은 감각적 식사를 하면 역시 윤회하는 원인이 된다. 신구의 삼업의 원인이 되는 의도의 식사를 하면 역시 윤회하는 원인이 된다. 매사를 분별하는 의도의 식사를 하면 역시 윤회의 원인이 된다.

 

이 세상에서 죽을 것 같은 괴로움을 겪은 자들은 더 이상 태어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밤에 잠 들 때 아침을 보지 않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네 가지 식사를 매일매일 하는 한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세속의 자양을 버리고 고요함을 원하리.”(S1.4)라고 했다.

 

늙음은 부끄러운 것인가?

 

세월은 나를 버렸다. 청춘도 나를 버리고 장년도 나를 버리고 중년도 나를 버렸다. 나는 이제 노년에 이르렀다. 더욱더 노년이 되면 어떻게 될까? 갖가지 질병으로 인하여 삶 자체가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이런 게송을 말했다.

 

 

부끄러워할지어다, 가련한 늙음이여!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는 늙음이여

잠시 즐겁게 해주는 사람의 영상

늙어감에 따라 산산이 부서지네.”(S48.41)

 

 

늙음은 가련한 것이다. 더구나 부끄러운 것이라고 했다. 더 나아가 추악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가련하다거나 부끄럽다거나 추악한 것은 아니다.

 

오랜 만에 뵙는 어른을 보았을 때 충격을 받는다. 그야말로 형편없이 늙어 버렸기 때문이다. 예전의 그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나의 미래를 보는 것 같다.

 

누구나 늙는다. 누구나 추한모습으로 늙어 간다. 그래서인지 왕년 스타는 자신의 늙은 모습을 보여 주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종종 TV나 유튜브에서 접한다. 그야말로 형편없이 늙은 모습을 보여 주었을 때 위 게송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번역서마다 번역이 다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에잇 나쁜 늙음이여라고 했다. 빅쿠보디 영역을 보면 “Fied on you”라고 했다. 영어 ‘Fied’잡색의, 얼룩의, 다색의뜻이다. 얼굴에 검버섯 난 모습이 연상된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사람의 몸에 대하여 매혹적인 꼭두각시라고 번역했다. 빅쿠보디는 “the charming puppet”라고 번역했다. 같은 구조로 되어 있고 같은 뜻이다. 이 말은 빠알리어 빠알리어 manorama bimba를 번역한 것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잠시 즐겁게 해주는 사람의 영상이라고 번역했다.

 

빠알리어 빔바(bimba)는 영어로 ‘an image; figure’의 뜻이다. 몸을 이미지나 형상으로 본 것이다. 그럼에도 꼭두각시 또는 puppet(인형)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누구나 노인이 된다. 누구나 늙으면 추한 모습이 된다. 이에 대하여 한국빠알리성전협회 각주를 보면 주석을 인용하여 가련한 늙음이여, 저주 받은 것이여, 그것은 그대의 것이다. 저주하는 자가 그대를 받아라.”(Srp.III.245)라고 설명해 놓았다. 빅쿠보디 영역과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서에는 이런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명학공원에서

 

부처님도 늙어 갔다. 이는 경에서 아난다가 이제 세존의 안색은 청정하거나 고결하지 못하고 사지가 모두 이완되어서 주름이 지고 몸은 앞으로 기울고 시각능력, 청각능력, 후각능력, 미각능력, 촉각능력의 모든 능력이 변화의 조짐을 보입니다.”(S48.51)라고 말한 것에서도 볼 수 있다. 아마 부처님 나이가 80세에 달했을 때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매일 명학공원으로 산책 나간다. 축구장 크기만한 명학공원에는 운동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마치 트랙을 돌듯이 걷는다. 대부분 나이 든 노인들이다. 지팡이를 짚고서 절뚝절뚝 걷는 사람들도 볼 수 있다. 근처 요양원에서 휠체어를 타고 온 사람들도 있다. 미래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사람들은 노인들이 옆에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수십명 먹는 카페테리아에서도 함께 앉아 먹는 것을 싫어한다. 보기도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냄새도 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일을 겪었을 때 어떤 마음이 들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나이를 먹어 노인이 되었을 때 갖가지 질병에 시달린다. 감각기능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먹고 싶은 것도 먹지 못하고 보고 싶은 것도 보지 못한다. 부처님도 그랬다. 이럴 때 부처님은 부끄러워할지어다, 가련한 늙음이여!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는 늙음이여.”라고 말했다.

 

늙음은 부끄러워할 것도 아니고 추악한 것도 아니다. 이는 주석에서 그것은 그대의 것이다. 저주하는 자가 그대를 받아라.”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형편 없이 늙어 버린 그 사람이 추악한 것이 아니라 늙음에 대하여 부끄러워하고 추악하게 보는 사람에게 말한 것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에잇 나쁜 늙음이여라고 했다. 빅쿠보디 역시 “Fied on you”라고 했다. 주석의 설명 없이 본문의 게송만 본다면 독자들은 오해할 수 있다. 늙음은 나쁜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석에서는 가련한 늙음이여, 저주 받은 것이여라고 말하는 자에 대하여 그것은 그대의 것이다. 저주하는 자가 그대를 받아라.”(Srp.III.245)라고 설명해 놓았다.

 

새겨두고 싶은 문구

 

흔히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십년만 젊었더라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말은 할 필요가 없다. 실현되지도 않을 뿐더러 설령 십년전으로 되돌아 간다고 해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살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완고해진다. 나이가 육십이 넘었다면 고치기 힘들다. 그래서일까 어떤 이는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라고 말한다.

 

한번 성격이 형성되면 여간해서는 고쳐지지 않는다. 그 모습 그대로 평생간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면 바뀔 수 있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환골탈태하게 된다. 몸은 그대로이지만 정신은 완전히 바뀌어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기 위한 목적도 있다. 이는 범부에서 성자로 계보가 바뀌는 것과 같다. 마치 강아지가 사람으로 바뀌는 것처럼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과연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매일 초기경전을 보고 있다. 니까야를 보다 보면 새겨두고 싶은 문구를 발견한다. 이런 것이다.

 

 

지나간 일을 슬퍼하지 않고

오지 않은 일에 애태우지 않으며

현재의 삶을 지켜 나가면

얼굴빛은 맑고 깨끗하리.”(S1.10)

 

 

참으로 아름다운 게송이다. 하루 한끼밖에 먹지 않는 수행승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수행승은 항상 현재를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과거나 미래에 끄달리지 않는다.

 

수행승은 하루 한끼만 먹어도 얼굴빛이 깨끗하다. 이는 청정한 삶을 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얼굴이 맑은 것이다. 이는 근심걱정이 없는 것과 같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 수 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미래는 이미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 없이

그것을 알고 수행하라.”(M131)

 

 

숲속에 홀로 사는 수행승의 얼굴이 맑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항상 현재를 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현재 감각을 즐기라는 것이 아니다. 눈으로 형상을 즐기고 귀로 소리를 즐기고 몸으로 감촉을 즐기는 것이 아니다.

 

수행자는 감각을 즐겨서는 안된다. 수행자는 감각을 관찰해야 한다. 그래서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온에서 일어나는 생멸현상을 매순간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것이다.

 

현존(現存)에 대하여

 

요즘 유튜브에서 명상관련 영상을 종종 보게 된다. 서양 명상가 중에는 현존(現存)을 말한다. 지금 여기서 이 순간을 잘 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은 이미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유튜브에서 에크하르트 툴레의 현존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여기를 무한히 반복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은 알 수 없었다. 마치 자칭타칭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이 책상을 탕탕 치면서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뿐이라니까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부처님은 이천오백년 전에 이미 현존을 말했다. 동양의 선사들이나 서양의 수행자들이 현존에 대하여 말하지만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런데 미얀마의 사야도가 설명해 놓은 것을 보면 매우 구체적이다. 왜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으면 안되는 것인지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설명해 놓은 것이다.

 

마음이 항상 현재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는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으면 안된다. 마음은 항상 현재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과거를 돌이키지 말라)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눈 감성물질, 보였던 얼굴··발 등의 형색 물질, 보는 성품, 이러한 등의 다섯 취착무더기(五取蘊)의 법들은 사라져 버렸다. 현재는 없다. 따라서 사라져 버린 그러한 법들을 갈애, 사견으로 집착해서 생각하며, 그리워하며 지내면 안 된다. 어떻게 갈애로 집착하는가? ‘내 눈은 깨끗했다. 내 눈은 좋았다. 아주 작고 미세한 것도 볼 수 있었다. 얼굴도 예뻤다. 눈동자, 눈썹, , 발들도 아름다웠다. 살과 피부도 희고 깨끗했다. 아름다운 옷들과 장식들을 구족했었다. 과거에 누구를 보았다. 그를 보아서 매우 좋았다라는 등으로 과거에 보았던 것을 집착해서 좋아하고 행복해하며 생각하고 회상한다. 어떻게 사견으로 집착하는가? ‘내가 본다. 중생이 본다. 나를 본다. 중 생을 본다라고 생각하면서 볼 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항상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또는 죽으면 다른 한 생으로 건너갈 중생으로, 죽으면 완전히 사라져 버릴 중생으로 생각하고 있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 303)

 

 

(미래를 기대하지 말라)

 

나중에 생겨날 법들도 지금 아직 생겨나지 않았다. 지금은 아직 없다. 그러한 법들을 기대하고 바라는 것은복권 당첨 되면 어떻게 써야지라고 생각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지내는 것과 같다. 피부가 부드럽고 계속 아름답기를, 아름다운 것만을 보게 되기를. 좋은 것만을 사용하고, 좋은 이들과만 만나게 되기를. 그렇게 본 것이 무너지지 않기를이라는 등으로 앞으로 볼 것에 관련하여 기대하고 바라면서 지내면 안 된다. 앞으로 듣게 될 것들 등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으로 알 아야 한다. 특히 앞으로 생각해야 할 것에 대해서관찰이 좋기를, 특별 한 현상들이 드러나기를, 특별한 지혜들이 생겨나기를이라고 기대하고 바라면서 지내도 안 된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 303-304)

 

 

(생겨날 때마다 그것만을 놓치지 않고 새겨라)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닿을 때, 가고 있을 때, 서 있을 때, 앉아 있을 때, 누워 있을 때, 굽힐 때, 필 때, 생각할 때, 그 순간 생겨나고 있는 현재의 법들을물질과 정신, 무상··무아라고 알고 보도록 관찰해야 한다. 만약 관찰하지 못 한다면 그러한 법들을항상하다. 행복하다. 좋다. 아름답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실체가 있는 어떠한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집착하고 애착하는 갈애가 생겨날 것이다. 잘못된 견해인 사건이 생겨날 것이다. 그러면 마음은 갈애와 사견에 따라서 감각욕망의 사유 등만을 생각하며 생겨날 것이다. 어떻게 생겨나는가? 볼 때 새기지 않으면누구를 보았다. 여성을 보았다. 남성을 보았다. 그는 누구의 아들이다. 딸이다. 누구의 아버지다. 어머니다. 무슨 일로 왔다. 그의 마음성품이 어떠하다. 말하는 모습이 어떻다라는 등으로 생각하고 망상하기도 한다. 이 정도뿐만 아니다. 좋아할 만한, 애착할 만한 것을 보면그의 얼굴이 아주 깨끗하구나. 말하는 모습이 아주 점잖구나. 가는 모습이 아주 우아하구나. 그와 대화를 나누면 아주 좋겠구나, 가까운 친구가 되면 좋겠구나라는 등으로 감욕망의 사유가 끝이 없이 생겨나기도 한다. 싫어하는 대상을 보게 되면 그의 모습은 너무 추하다. 마음의 품성이 나쁘다. 나에게 불이익이 되는 것만 일삼고 있다. 그가 죽으면 좋겠다. 어떻게 해야 죽을까(byāpāda 분노)’, ‘그가 고통에 빠지면 좋겠다. 어떠한 고통에 빠지기를, 어떻게 해야 괴롭힐 수 있을까(vihisā 해침)'라는 등으로 분노의 사유, 해침의 사유들이 끝이 없이 생겨나기도 한다. 그러한 마음을 ‘Sahīra =갈애와 사건으로 잡아당겨진, 따라가 포함되어진’ (마음)이라고 한다. ‘Sakuppa = 갈애와 사건 때문에 무너져 버린’ (마음)이라고 한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 304-305)

 

 

이 부분을 몇 번 읽었다. 읽고 또 읽어서 새기고자 한다. 이렇게 글로 남겨 놓으면 더욱더 새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료가 된다. 나중에 인용할 때 활용되는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는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왜 마음이 과거나 미래로 가지 않게 해야 되는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이제까지 이런 설명을 보지 못했다. 유튜브에서 자칭타칭 깨달은 자들이 책상을 탕탕 치면서 이것입니다. 이것뿐입니다.”라고 말만 할 뿐 설명을 하지 못한다. 에크하르트 툴레는 오로지 현존만 말한다. 어떤 차이일까? 이는 아마도 수행에서 오는 체험의 차이일 것이다.

 

독거노인을 보면

 

수행을 하면 마음은 항상 현재에 머물러 있다.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으면 이는 빤냣띠에 대한 것이다. 이는 언어적 개념에 대한 것으로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 대해서는 사라져 버린 그러한 법들을 갈애, 사견으로 집착해서 생각하며, 그리워하며 지낸다.’라고 했다. 또한 과거에 보았던 것을 집착해서 좋아하고 행복해하며 생각하고 회상한다.”라고 했다. 이럴 때 다음과 같은 게송이 생각난다.

 

 

젊어서 청정한 삶을 살지 않고

재산도 모으지 못했으니

쏘아져 버려진 화살처럼,

누워서 옛날을 애도한다.”(Dhp.156)

 

 

요즘 유튜브에서 독거노인tv를 보고 있다. 칠십이 된 독거노인은 마침내 라오스에 갔다. 남은 여생을 라오스에서 보내기로 한 것이다.

 

라오스에서는 월 150만원이면 왕족처럼 살 수 있다고 한다. 가정부를 들여 놓고 사는 것이다. 그런데 독거노인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위 게송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홀로 된 노인은 마치 쏘아져 버려진 화살과도 같은 신세이다. 누구도 숲속에 버려진 화살를 재활용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옛날을 회상하는 것이다. 어떤 것인가? 주석에서는 그들은 자신들이 행하고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고 놀고 한 것에 대하여 우리는 이와 같이 먹었고, 이와 같이 마셨다.’라고 통곡하고 애통해하며 회상하고 누워 있게 된다.”(DhpA.III.132-133)라고 했다.

 

미래를 바라지 말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복권 당첨 되면 어떻게 써야지.”라며 시간 보내며 세월을 낭비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막연한 기대는 헛된 망상이나 다름 없음을 말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하시 사야도는 수행과 관련해서도 설명했다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다 보면 잘 될 때가 있고 잘 안될 때가 있다. 그런데 잘 되었을 때를 기대하는 것은 망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관찰이 좋기를, 특별 한 현상들이 드러나기를, 특별한 지혜들이 생겨나기를이라고 기대하고 바라면서 앉아 있다는 것이다.

 

항상 현재를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세간에서 말하는 이 순간을 즐겨라!”라는 말은 안니다. 출세간의 도와 과를 지향한다면 지금 이 순간은 즐거움이나 행복한 상태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오온에서 일어나는 생멸현상을 관찰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순간 생겨나고 있는 현재의 법들을물질과 정신, 무상··무아라고 알고 보도록 관찰해야 한다.”라고 했다.

 

갈애와 사견이 있는 한

 

숲속의 수행자는 얼굴이 맑고 깨끗하다. 하루에 한끼만 먹고 살아도 근심과 걱정이 없다. 이는 지나간 일을 슬퍼하지 않고 오지 않은 일에 애태우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수행자는 매 순간을 관찰해야 한다. 매순간을 새기고 알어차리며 사는 것과 같다. 이는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살아 가면서 근심과 걱정이 끊임 없이 일어난다. 이는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거나 미래는 개념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실재하지 않는 것은 관찰할 수 없다. 그럼에도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갈애와 사견으로 보았다.

 

갈애와 사견이 있는 한 마음은 과거와 미래에 가 있다.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다는 것은 망상에 해당된다. 왜 그런가? 오온을 덩어리로 보기 때문이다. 오온을 정신과 물질로 분석하여 새겨야 하나 그렇게 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하다. 행복하다. 좋다. 아름답다.”라는 등의 망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으면 괴롭다. 이는 나라는 존재가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나 미래를 그때그때 분석해서 관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개념적으로만 볼 수 있다. 그래서 내가 행복하다거나 내가 괴롭다라고 말한다.

 

추하다고 보는 자가 추한 것

 

오늘도 긴 글을 썼다. 가능하면 글을 짧게 쓸려고 노력하지만 표현하다 보면 열 페이지가 훌쩍 넘는다. 그럼에도 이렇게 오전에 그야말로 미친듯이 써 놓으면 나중에 도움이 된다. 새기고 싶었던 것을 글로 표현한다. 이렇게 글로 씀으로써 의미가 더욱 드러난다. 특히 늙음에 대한 것이 그렇다.

 

흔히 늙음은 추한 것이라고 말한다. 냄새 난다고 가까이 가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노인이 추한 것이 아니다. 추하다고 보는 자가 추한 것이다. 그래서 가련한 늙음이여, 저주 받은 것이여, 그것은 그대의 것이다. 저주하는 자가 그대를 받아라.”(Srp.III.245)라고 했다. 늙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오늘도 내일도 글을 쓴다. 이렇게 일요일 오전 자판을 치다 보니 오전이 다 지나간다. 남들이 보기에 돈도 되지 않는 일에 올인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돈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다.

 

글은 돈의 가치로 환산할 수 없다. 책장 가득한 책 역시 돈의 가치로 환산할 수 없다. 그럼에도 굳이 가치를 부여한다면 책 한권은 아파트 한 채의 가치와 같다라고 말한다. 현재까지 121권을 만들었기 때문에 아파트 121채를 가진 것과 같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아직까지는 쏘아져 버려진 화살은 아니다.

 

 

2024-03-0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