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담마다사 이병욱 2024. 3. 4. 12:15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 말은 아마도 유일신교 경전에 있는 말 같다. 그런데 이런 뉘앙스의 말은 불교경전에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리의 흐름이 이 사람을 이끌어간다.”(A6.44)라는 말이다.

 

새벽에 잠에서 깨었을 때 진리의 말씀이 떠오른다. 마치 오래된 기억이 떠오르는 것과 같다. 경전을 읽었을 때 새기고자 하는 구절이 떠오르는 것이다. 이럴 때 가만 있을 수 없다. 메모를 해놓아야 한다. 그러나 필기구가 없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스마트폰 메모앱을 활용하는 것이다.

 

 

능력 또는 근기의 다양성

 

진리의 흐름이 이 사람을 이끌어 간다고 했다. 이 말은 앙굿따라니까야 미가쌀라의 경’(A6.44)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부처님이 재가의 여신도 미가쌀라에게 말한 것이다.

 

미가쌀라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계행이 엉망이라고 생각되는 삼촌은 성자의 흐름에 들어 일래자로 죽었기 때문이다. 이에 미가쌀라는 부처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물어 보았다.

 

재가의 계율과 출가의 계율은 다르다. 출가자가 구족계를 받으면 엄격하게 적용된다. 그러나 재가의 계율은 그다지 엄격하지 않다. 출가자가 오계를 어기면 승단추방죄가 될 정도로 엄격하게 적용되지만 재가자에게는 단지 도덕적인 허물이 되는 것일 수 있다.

 

미가쌀라의 삼촌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는 저의 삼촌 이씨닷따는 청정하지 못한 삶을 살았고 자신의 아내에게 만족하는 삶을 살았습니다.”(A6.44)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미가쌀라의 삼촌 이씨닷따는 청정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이는 재가의 삶을 살다 보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예를 들어 술을 마셔야 할 때는 마셔야 하는 것이다. 모임이나 회합에서 술을 권할 때 마실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때 오계에서 불음주계를 어기는 것이 된다. 또한 농사를 짓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축생을 죽여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것도 오계를 어기는 것이 된다.

 

재가자가 출가자처럼 살기는 힘들다. 그래서 보름에 한번 사원에 가서 하루만이라도 출가자처럼 사는 포살을 하게 된다.

 

미가쌀라의 아버지는 재가자이지만 청정하게 살았다. 그런데 아버지와 삼촌은 일래자로 죽어서 천상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미가쌀라가 보았을 때는 불공평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에게 청정한 삶을 산 사람과 청정하지 못한 삶을 산 사람이 모두 미래 동일한 운명을 받는 것입니까?”라며 따지듯이 물어보았다. 이에 부처님은 미가쌀라의 지혜 없음을 말하면서 사람의 다양성에 대하여 어떠한 앎을 지니고 있는가?”(A6.44)라며 역질문을 했다.

 

삶의 다양성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주석에서 사람들의 예리하거나 둔감한 것을 통해서 다양한 능력에 대한 앎을 말한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삶의 다양성이라는 것은 결국 개인적은 능력 또는 근기의 차이에 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었을 때 바로 열반에 들고자 했다. 그러나 싸함빠띠 하느님(Brahma)의 청원을 듣고 진리를 설하기로 했다. 그것은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예리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S6.1)이 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범부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들이기는 쉽지 않다. 왜 그런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법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세상의 흐름대로 탐, , 치로 살아가지만 수행자들은 무탐, 무진, 무치로 살아간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 가르침은 감각이 예리한 사람, 지혜가 갖추어진 사람에게 받아 들이기 쉬운 것이 된다.

 

부처님은 인간에게는 다양성이 있다고 했다. 미가쌀라의 삼촌처럼 청정하지 않게 살았어도 성자의 흐름에 들어 일래자로 죽은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다양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미가쌀라의 삼촌에게 예리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으로 본다.

 

사람들은 뒷담화 하기를 좋아한다. 그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 안주 먹듯 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범부가 범부를 평가하면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다. 왜 그런가? 번뇌로 가득한 자가 사람을 평가 했을 때 제대로 된 평가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번뇌가 없는 자가 사람을 평가하면 정확하다. 왜 그런가? 자아개념 없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람들에게 대하여 함부로 평가하지 말라고 했다.

 

범부가 평가하면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람들을 평가하면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S6.44)라고 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나 또는 나와 같은 자만이 사람에 대하여 평가할 수 있다.”(S6.44)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의 경지에 이른 자만이 사람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음을 말한다.

 

부처님은 미가쌀라의 삼촌 이씨닷따를 평가했다. 이씨닷따가 일래자가 되어 죽은것에 대하여 그에게 들은 바가 있고, 많이 배워 이룬 것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저 앞 사람에 비해 보다 훌륭하고 탁월하다.”(S6.44)라고 했다. 이는 사람에게는 다양성이 있음을 말한다.

 

진리의 흐름이 사람을 이끈다

 

미가쌀라의 삼촌 이씨닷따는 계행이 청정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일래자가 된 것은 타고난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래자가 될 근기를 타고 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진리의 흐름이 이 사람을 이끌어 간다. (puggala dhammasoto nibbahati)”(S6.44)라고 말했다.

 

진리의 흐름이 사람을 인도한다고 했다. 이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이 말을 접하자 진리가 너희들을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유일신교 경전의 문구가 떠 올랐다. 또한 진리가 편안하게 해준다.”라는 말도 떠 올랐다. 이어서진리가 자유롭게 해준다.”라든가, “진리가 보호해준다.”라는 말이 연이어 떠올랐다.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부처님 말씀이다. 그런데 부처님 말씀을 빠알리어로는 담마(Dhamma)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때 담마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부처님 말씀으로서의 담마도 있고, 진리로서의 담마도 있고, 원리로서의 담마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담마라는 말은 진실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은 진실을 추구했을 때 청정해진다. 청정한 상태가 되었을 때 진리의 상태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진리의 상태가 되었을 때 가장 안전하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는 부처님이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탁월한 곳에 이르지 저열한 곳에 이르지 않으므로, 탁월한 곳으로 가는 자이지 저열한 곳으로 가는 자가 아니다.”(S6.44)라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여러 가지 혜택이 있다. 가장 큰 혜택은 일곱 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 운명에 있는 것이다. 다음은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는 아난다여, 고귀한 제자가 그것을 성취하여 그가 원한다면 스스로 자신을 이와같이 '지옥도 부서졌고, 축생도 부서졌고, 아귀도 부서졌고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곳도 부서졌고 나는 이제 흐름에 든 님이 되어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삶의 길이 정초되어 올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간다.'라고 예지할 수 있는 진리의 거울이라는 법문은 이러한 것이다.”(D16.39)라는 법의 거울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윤회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이 생이 끝나면 어떤 세계에서 태어날지 모른다. 과거의 업이 어떻게 작용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생에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확실하게 악처에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진리가 나를 보호하는 것이 된다.

 

진리의 흐름에 들면 진리가 나를 보호해 준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지옥이나 아귀, 축생, 아수라에 떨어질 일이 없기 때문에 악처로부터 보호된다. 그러나 아무리 보시를 많이 하고 아무리 계행을 잘 지켜도 성자의 흐름에 들지 못하면 어떤 세계에 떨어질지 모른다. 그래서 테라가타에서는  “가르침은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수호한다.(Dhammo have rakikhati dhammacāri)”(Thag.303) 라고 했다.

 

테라가타에서는 진리를 따르는 자는 진리가 보호해 준다고 했다. 마치 법을지키면 법이 보호해 주는 것과 같다. 신호등을 지켰을 때 보호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또한 진리의 흐름이 이 사람을 이끌어 간다.”(A6.44)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니까야에서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부처님의 게송을 듣고 아라한이 된 재가자

 

진리의 흐름에 들어야 한다. 진리의 흐름에 들면 진리가 나를 인도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진리의 흐름에 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리의 흐름에 들 수 있는 조건이 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산띠띠 장관의 일화가 소개 되어 있다.

 

산띠띠 장관은 큰 공을 세웠다. 왕은 7일간의 영화를 하사했다. 장관은 일주일 내내 술에 취해서 지냈다.  7일째 되는 날 장관은 코끼리를 타고 목욕하러 갔다. 그때 부처님이 지나갔다.

 

장관은 부처님에게 예를 올렸다. 코끼리를 탄 상태에서 고개만 까닥인 것이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산띠띠 장관이 오늘 면전에서 게송 하나 듣고 아라한이 될 것이라고 했다.

 

외도들은 부처님을 비난했다. 외도들은 이렇게 코가 삐뚤어지게 술에 취한 사람이 바로 오늘 법을 듣고 재가자로 반열반에 들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라며 비난한 것이다.

 

부처님은 산띠띠 장관에게 게송 하나를 읊었다. 이는 과거에 있었던 것을 완전히 말려 버리고, 미래에 그대에게 아무 것도 생겨나지 않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대가 현재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평안하게 유행할 것입니다.”(Stn.949)라는 게송을 말한다.

 

산띠띠 장관은 부처님의 게송을 듣고 아라한이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더구나 재가자로서의 아라한이다. 이에 대하여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단지 법문을 듣는 것만으로 도와 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법문을 듣는 순간에 이미 정신과 물질을 관찰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와 과의 지혜가 차례로 생겨나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 되었다고 알아야 한다.”(1, 108)라고 했다.

 

누구나 성자의 흐름에 들 수 있다. 그러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기 위한 예리한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리한 지혜의 능력을 갖춘 자는 게송만 듣고서도 성자의 흐름에 들 수 있다. 이는 지혜가 타고 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럴 때 계행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특히 재가자의 계행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최종생자인 존재라고 해도 비구의 계가 무너지는 것은 도와 과의 장애가 된다. 재가자의 계가 무너지는 것은 장애가 되지 않는다.”(1, 111)라고 했다.

 

최종생자는 이번 생에서 아라한으로 생을 마치는 자를 말한다. 출가자는 계행이 청정해야 아라한이 되어서 불사가 된다. 이는 구족계를 받았기 때문에 계행을 지켜야 하기 때문으로 본다. 그러나 재가자는 구족계를 받지 않고 오계만 지키면 된다. 그런데 재가자가 최종생자라면 재가자의 계가 무너지는 것은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악처에 떨어질 정도의 장애는 아닐 것이다.

 

초기경전 인연담을 보면 부처님 법문을 듣고 성자의 흐름에 들었다는 이야기를 자주 접한다. 특히 법구경 인연담에서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위빳사나 방법수행론에서는 게송을 듣고 산띠띠 장관은 아라한이 되었고 빠따짜라 여인도 수다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몸, 느낌, 마음, 법이라고 하는 네 가지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관찰하지 않고 위빳사나 지혜, 도의 지혜 등을 생겨나게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1, 109)라고 했다.

 

진리의 행자(隨法行者)와 믿음의 행자(隨信行者)

 

사람의 능력은 모두 다 다르다. 이는 사람은 다양성이 있기 때문이다. 법문을 한번 들어서 아는 사람도 있고 법문을 여러 번 들어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 이는 각자 근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의 능력이 다른 것은 근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근기를 말하는 것일까? 이는 믿음의 능력, 정진의 능력, 새김의 능력, 집중의 능력, 지혜의 능력을 말한다. 이를 오근이라고 한다.

 

오근에 따라 능력의 차이가 발생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러한 다섯 가지 능력을 평등하고 원만히 갖추면 거룩한 님이고, 그 보다 약하면 돌아오지 않는 님이고, 그 보다 약하면 한 번 돌아오는 님이고, 그 보다 약하면 흐름에 든 님이고, 그 보다 약하면 진리의 행자이고, 그 보다 약하면 믿음의 행자이다.”(S48.12)라고 했다.

 

부처님은 근기를 아라한, 아나함, 사다함, 수다원, 진리의 행자, 믿음의 행자 순으로 나열했다. 이는 근기에 따라 또는 능력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여기서 진리의 행자와 믿음의 행자는 어떤 것인가? 이는 진리의 행자(隨法行者)는 가르침을 한두 번 듣고는 길에 들어서지만 믿음의 행자(隨信行者)는 공부하고 질문하고 나중에 입문한다.”(Patis.149)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수법행자와 신법행자는 능력 또는 근기가 다르다. 수법행자, 즉 진리의 행자는 법문을 한두 번 들으면 도와 과를 이룬다고 했다. 이는 지혜가 타고 났기 때문이다. 전생에 무탐, 무진, 무치의 수행을 했기 때문에 이 세 가지를 원인으로 해서 이번 생에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법문이나 게송을 한번만 들어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신법행자, 즉 믿음의 행자는 끊임 없이 공부하고 질문해야 알 수 있다. 이는 능력 또는 근기가 약하기 때문이다.

 

번뇌는 단칼에 잘라 내야

 

매일 경전을 보고 있다. 매일 좌선을 한다. 그러나 진척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어떤 단계에 해당될까? 아마 신법행자에 해당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도 과하다고 본다. 왜 그런가? 범부이기 쉽기 때문이다.

 

범부는 능력 또는 근기가 없는 자에 해당된다. 이는 다섯 가지 능력, 즉 믿음의 능력, 정진의 능력, 새김의 능력, 집중의 능력, 지혜의 능력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경전 보기도 힘들고 명상한다고 하여 앉아 있기도 힘들다. 성과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수법행자나 수신행자만 되어도 진리의 길을 갈 수 있다. 두 행자의 차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진리의 행자에게 길은 날카롭고 지혜는 용감하게 작용한다. 그는 종려나무의 줄기를 날카로운 칼로 자르듯 힘들이지 않고 노력 없이 번뇌를 자른다. 믿음의 행자에게 그의 길은 날카롭지 않고 지혜는 용감하지 않다. 그는 종려나무의 줄기를 무딘 칼로 자르듯 힘들여 노력을 기울여 번뇌를 자른다. 그러나 번뇌를 자르면 그것의 다양성은 없어지고 남은 번뇌는 소멸된다.”(Srp.III.235)

 

 

진리의 행자(隨法行者)는 종려나무를 한번에 자르는 자와 같다고 했다. 이는 능력 또는 근기가 타고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의 행자(隨信行者)는 힘들여 노력하는 자라고 했다. 이는 다섯 가지 능력 또는 근기가 약하기 때문이다.

 

초기경전을 읽어 보면 아무나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다섯 가지 능력 또는 근기를 타고 나야 한다. 그런데 사부니까야 주석서이자 수행지침서와 같은 청정도론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인가? 진리의 행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예를 들어 남자가 땅 위에 서서 잘 드는 칼을 들어서 커다란 대나무 덤불을 잘라내는 것처럼, 이와 같이 계행의 땅에 입각해서 선정의 돌로 연마된 통찰의 지혜라는 칼을 정진력으로 책려된 예지적 지혜의 손으로 움켜잡고 일체의 자신의 상속 중에 생겨난 갈애의 결박을 풀고 절단하고 파괴해 야 한다. 길의 찰나에 그는 결박을 벗어나고, 경지의 찰나에 그는 결박을 벗어난 자가 되어 신들을 포함한 세상에서 최상의 공양받을 만한 님이 된다.”(Vism.1.7)

 

 

번뇌를 어떻게 끊어야 할까? 마치 난마처럼 얼키고 설킨 번뇌를 풀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마치 엉킨 실타래를 푸는 것과 같다. 이런 때는 단칼에 풀어야 한다. 하나하나 푸는 것이 아니라 예리한 칼로 잘라 버리는 것이다. 이는 번뇌의 뿌리를 잘라내는 것과 같다

 

번뇌는 단칼에 잘라 내야 한다. 수법행자가 부처님 법문이나 게송을 들었을 때 단번에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는 것은 얼키고 설킨 번뇌를 단칼로 잘라 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석에서는 그는 종려나무의 줄기를 날카로운 칼로 자르듯 힘들이지 않고 노력 없이 번뇌를 자른다.”라고 했다.

 

일곱 가지 거듭 관찰

 

이번 생에서 도와 과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경전과 주석서를 보면 능력 또는 근기를 타고 나야 한다. 최소한 수신행자 정도는 되어야 한다.

 

범부라면 도와 과를 이루기 힘들 것이다. 왜 그런가? 도를 알려 주어도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를 물로 데려 갈 수 있지만 물을 먹일 수는 없는 것과 같다. 이렇게 본다면 도와 과는 수신행자 이상이어야 할 것이다.

 

도와 과를 이루려면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한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구체적으로 설명해 놓았다. 그 중에서도 일곱 가지 거듭 관찰이 있다. 어떤 것인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일곱 가지라는 것은 무상(anicca), 괴로움(dukkha), 무아 (anatta), 염오(nibbidā), 애착 빛바램(virāga), 소멸(nirodha), 다시 내버림(painissagga) 거듭관찰들이다.”라고 했다.

 

일곱 가지 거듭관찰은 익숙한 것도 있고 생소한 것도 있다. 특히 다시 내버림(painissagga)’은 생소한 것이다. 이 단어와 관련된 경은 ‘Vin.III,173; M.III,31; S.V,421 sq.; A.I,100, 299; IV,148, 350; Ps.I,194’라고 빠알리어 사전에 설명되어 있다.

 

다시 내버림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빠알리어 ‘painissagga’가 들어가는 경 중에 완전히 버림의 경(painissagga sutta)’(A3.177)이 있다. 경에 따르면 완전히 버리기 위해서 세 가지를 닦아야 한다고 했다. 어떤 것인가? 이는 있음을 여읜 삼매, 인상을 여읜 삼매, 바램을 여읜 삼매이다.”(A3.177)라고 했다.

 

도와 과를 이루려면 버려야 한다. 경에서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 분노, 원한, 위선, 잔인, 질투, 인색, 환상, 간계, 고집, 격정, 아만, 교만, 광기, 방일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고 했다. 이와 같은 불선법을 버리기 위해서는 세 가지 원리, 즉 있음을 여읜 삼매, 인상을 여읜 삼매, 바램을 여읜 삼매를 닦아야 한다고 했다.

 

진리에 대한 열정

 

오늘도 쓰다 보니 오전이 다 지나간다. 오늘은 짧게 쓰리라고 다짐하지만 막상 자판을 치다 보면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그것은 쓸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또한 표현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글쓰기로 인하여 오전이 다 지나간다. 오로지 책상에 앉아서 쉼 없이 자판을 두드린다. 책상에는 참고로 하는 경전이 가득하다. 전에 보았던 것, 생각나는 것을 글로 표현하려다 보니 시간과 정력을 필요로 한다.

 

글을 쓸 때는 힘이 솟는다. 거의 네 시간 쓰는 것에 집중하지만 조금도 피곤하지 않다. 아픈 데가 있다면 아픈 줄도 모른다. 이렇게 쓰는 것도 진리에 대한 열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 나는 것을 글로 구현하고자 한다. 스마트폰 메모앱에 키워드만 적어 놓으면 이것을 인연으로 해서 글이 풀려 나간다. 꼼짝도 하지 않고 여러 시간 글쓰기에 매진하다 보면 일종의 희열을 느낀다. 이런 것도 어쩌면 글쓰기 삼매에서 오는 것인지 모른다.

 

진리의 흐름이 사람을 이끌어간다는 말에 힘을 받았다. 경전에서 한번 본 것이 마음에 꼽혀 오전을 모두 보내게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진리의 힘은 위대하다. 한 존재로 하여금 몰입하게 만들어 물불을 가리지 않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왜 진리에 의지해야 하는가? 진리가 나를 편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진리가 나를 보호해주기 때문이다. 지옥 같은 삶, 죽지 못해서 사는 삶일지라도 진리의 문에 들어서면 안심이다.

 

이제 글을 마쳐야 한다. 이런 글을 쓸 때 미친듯이 쓴다고 표현한다. 이 말은 죽기살기로쓰는 것과 같다. 이런 열정이 없다면 한 줄도 쓸 수 없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열정이다.

 

지금 이 순간을 거듭관찰해야 한다. 정신과 물질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아니짜(무상), 둑카(과로움), 아낫따(무아), 닙비다(염오), 비라가(사라짐), 니로다(소멸), 빠띠니삭가(완전히 버림)로 거듭 관찰해야 한다. 이렇게 그때그때 관찰하면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2024-03-0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