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볼 때는 볼 때뿐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24. 3. 2. 11:20

볼 때는 볼 때뿐이고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을까? 보는 것과 듣는 것을 동시에 할 수 있을까? 어떤 이는 가능할지 모르겠다. 운전하면서 대화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일 할 때 동시작업 할 때가 있다. 눈으로는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귀로는 유튜브 듣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 집중이 약한 상태이다. 라우팅, 즉 배선설계 할 때는 가능하지만 좀더 정밀한 작업 할 때는 불가능하다.
 
일감이 있어서 일을 할 때 일은 크게 세 가지 단계로 나누어 진행된다. 네트리스트 구성, 부품배치, 그리고 배선설계의 단계를 말한다. 이 중에서 집중도가 가장 높은 것은 네트리스트 구성단계이다.
 
일을 할 때 필요로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회로도이다. 고객으로부터 회로도 파일을 받아서 작업을 진행한다. 따라서 회로도는 모든 작업에 있어서 기본이 된다.
 
회로도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 회로도 자체는 고객사의 재산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회로설계 엔지니어의 노고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로설계를 한다는 것은 전자상품을 개발한다는 말과 동의어가 된다.
 
인쇄회로기판(PCB) 설계를 해서 먹고 산다. 인쇄회로기판 설계는 전자제품 개발단계에 있어서 한 부분에 해당된다. 기업에서는 사람을 고용해서 해결하기도 하지만 외주를 주기도 한다. 인쇄회로기판설계를 생업으로 해서 사는 것은 사실상 고객사의 외주작업에 참여하는 것과 같다.
 
인쇄회로기판설계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는 네트리스트를 형성하는 것이다. 부품 라이브러리를 만들고 이를 회로도에 입력하여 네트리스트를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이 단계에서 실수가 나면 어떻게 될까? 마치 잘못 연결된 것 같은 상태가 된다. 이런 것도 모른 채 설계를 끝난다면 품질사고로 이어진다.
 
품질사고나 나면 고객사는 신뢰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업체 교체 작업에 들어갈지 모른다. 이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눈에 불을 켠다. 한 눈 파는 일이 있을 수 없다. 조금이라도 실수 하지 않기 위해서 집중한다. 이럴 때 옆에서 나는 소리는 귀에서 들어 오지 않는다.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세 단계 일에서 가장 한가로운 작업은 배선설계하는 것이다. 부품 배치가 끝난 상태에서 캐드를 이용하여 배선만 형성해 주면 된다. 이때 두 눈으로는 모니터를 보고 귀로는 유튜브를 듣는다. 마치 농부가 호미를 들고 밭을 매면서 라디오를 듣는 것과 같다. 동시에 두 가지 작업이 가능한 것이다.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다. 그것은 집중력이 떨어졌을 때이다. 또한 단순한 반복작업 할 때 가능한 것이다. 마치 컨베이어 앞에 있는 조립자가 단순하게 반복되는 일을 하면서 음악을 듣는 것과 같다. 그러나 집중을 요하는 작업을 할 때는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은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늘 마음은 대상에 가 있다. 이는 법구경에서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 앉는 마음” (Dhp.35)이라고 묘사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마음은 제어하기 어렵다. 그래서 마음은 경망한 것이라고 했다.
 
마음은 제어가 되지 않으면 내 마음이 아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했을 때 불선법이 되기 쉽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지침서에서는 마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정의했다.
 
1) 마음은 길들이기 어렵다.
2) 마음은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진다.
3) 마음은 제멋대로이다.
4) 마음은 원래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 쿤달라 사야도,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248-252쪽)
 
 
마음은 내버려 두면 엉망이 된다. 마치 아이를 교육시키기 않으면 불량학생이 되는 것과 같고 기업을 관리하지 않으면 부도의 길을 가는 것과 같다. 그래서 마음은 제어 해야 한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훌륭하니 마음이 다스려지면 안락을 가져온다.”(Dhp.35)라고 했다.
 
내 마음은 정말 내 마음일까? 이 마음이 정말 내 마음이라면 나는 마음먹은 대로 해야 한다. 그러나 마음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마음은 제 멋대로인 것이다. 한 순간 행복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슬퍼진다. 이 순간에 행복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화를 낸다. 어느 것이 내 마음일까?
 
마음은 빠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 순간에는 한마음밖에 없는 것이다. 한순간에 행복과 슬픔이 동시에 있을 수 없다. 한 순간에 탐욕과 성냄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한 순간에는 행복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불행한 것이다. 마치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것 같다.
 
마음은 본래 청정한 것일까?
 
마음은 매우 변덕스럽다.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마음은 항상 불선한 대상에 가 있다. 마음이 항상 감각대상에 가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감각적 즐거움으로 살아 간다. 눈으로는 끊임 없이 매혹적인 형상을 찾고 귀로는 끊임없이 매혹적인 소리를 찾는다.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이처럼 감각대상만 찾아 다니다 보면 어떻게 될까? 결국 탐, 진, 치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불교에서 탐, 진, 치는 중죄에 해당된다. 이는 천수경에서 십악참회 게송을 보면 알 수 있다. 탐욕에 대해서는 탐애중죄라고 했다. 그런데 니까야에서도 중죄로 본다는 것이다. 탐, 진, 치에 대하여 살생하거나 도둑질하는 것과 같은 중죄로 보기 때문이다.
 
마음을 내버려 두면 불선한 대상에 가 있기 쉽다. 늘 감각적 대상에 가 있는 것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즐기는 것이다. 먹는 것을 즐기고 감촉하는 것을 즐긴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지침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마음은 여간해서는 선한 생각에 머물지 않는다. 마음은 선하지 않은 생각과 선하지 않은 대상에 빠져드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수행자 개인의 성품이 그런 것이 아니다. 원래 마음의 성품이 선하지 않은 행위를 좋아한다. 마음은 좋지 않은 것을 즐긴다. 마음을 내버려두면, 대부분 선하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다.”
(우 쿤달라 사야도,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251쪽)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마음에 대하여 본래 청정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마음은 본래 불선한 것이라고 말한다. 전자는 성선설과 같고 후자는 성선설과 같다. 어느 것이 맞을까?
 
내가 이 세상에 있게 된 것은 어떤 연유일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나는 오취온적 존재이다. 오온에 집착된 존재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게 된 것이다. 만일 내가 오온에 대한 집착을 놓아 버렸다면 나는 이 세상에 있지 않을 것이다.
 
오취온적 존재이기에
 
부처님은 고성제에서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했다. 부처님은 생, 노, 병, 사 사고를 말씀하시고서 이어서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를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 (sa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S56.11)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들은 오취온적 존재임을 말한다.
 
고성제에서는 우리가 오취온적 존재라고 했다. 이는 오온에 집착된 존재로 태어났음을 뜻한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 없다. 이 세상에 온 이상 괴로움과 죽음은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12.2)라고 했다.
 
찬송가 중에 ‘나는 행복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런 말은 부처님 가르침에 맞지 않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이 세상은 괴로운 곳이라고 했다. 이는 십이연기에서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12.2)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태어남에는 자신에게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온에 대한 집착, 즉 오취온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온에 대하여 집착을 가지고 있는 한 나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번 생뿐만 아니라 다음 생에도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세세생생 윤회하면서 괴로움의 바다에서 절망하며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괴로움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부처님은 문제만 제기 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해법도 제시했다. 그래서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한 것뿐만 아니라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며 사성제를 설한 것이다.
 
이제 문제를 알았다. 그리고 해법을 알았다. 이제 실천만 하면 괴로움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오온에 대한 집착만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개념적으로만 알고 실천하지 않으면 항상 그 상태로 있을 것이다.
 
괴로움과 절망에서 벗어나려면 수행을 해야 한다. 어떤 수행을 해야 하는가? 위빠사나 수행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왜 그런가? 마음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면밀한 관찰을 통해서 가능하다.
 
여기 마음의 지도가 있는데
 
머리맡에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이 있다. 머리맡에 있어서 손만 뻗치면 열어 볼 수 있다. 스탠드 불을 켜고 가장 편한 자세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새겨 두고 싶은 내용이 많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아직 내 것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한번 다 읽었다. 거의 1년 2개월 걸렸다. 그런데 한번 더 읽고 있다는 것이다. 알아야 할 내용도 많고 새겨야 할 내용도 많다. 마치 사진 찍은 것처럼 새겨 두고 싶은 것도 있다. 그런 내용 중에 하나가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형색을 대상으로 제일 처음 눈 감각문에 인식과정이 생겨난다. 이때에는 빠라맛타 실재성품으로서 형색을 대상으로 한다. 그 다음 마음 문(門) 인식과정이 생겨나는데 이때에도 빠라맛타 실재성품으로서 형색을 대상으로 한다. 그 다음에는 명칭이라는 빳냣띠를 대상으로 한다.”(303번 각주,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280쪽)
 
 
인식과정에 대한 설명이다. 눈이 대상과 마주쳤을 때 과정에 대한 것이다. 처음에는 맨느낌이어서 있는 그대로 보지만 나중에는 인식작용이 일어나서 구별해서 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왜곡이 일어난다.
 
테라와다불교는 매우 구체적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론적이고 체계적인 말과 같다. 마음에 대한 것도 그렇다. 마음을 막연하게 “마음이 모든 것을 다 만들어 낸다.”라고 말하지 않고 마음을 분석하여 마음의 지도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지도가 있으면 찾아가기 쉽다. 요즘은 네비게이션이 있어서 따라만 가면 된다. 마음의 여행도 지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지도 없이 간다면 헤매기 쉽다. 아비담마와 같은 논서가 있다면 마치 네비게이션으로 여행하는 것과 같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매우 훌륭한 네비게이션과도 같다. 니까야와 같은 초기경전과 아비담마와 같은 논서를 바탕으로 하여 도와 과의 길을 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도와 과의 길을 가려면 마음의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막연하게 “이것뿐입니다. 이것뿐이라까요?”라며 책상을 탕탕 치며 말하는 것과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마음의 구조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설명해 놓았기 때문이다. 물론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진실된 것이다.
 
허상에 지배 당하면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본다. 귀가 있어서 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다름아닌 감각을 즐기는 것이다.
 
감각을 즐기면 대상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마음에 왜곡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만의 안경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탐욕이 일어나고 성냄이 일어난다. 대상이 좋으면 거머쥐려 하고 대상이 싫으면 밀쳐 내려 하는 것이다. 이런 행위는 불선업이 되기 때문에 어리석은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감각적으로 살아간다. 이는 탐, 진, 치로 살아감을 말한다.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보지만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서 소리를 듣지만 제대로 듣지 못한다. 자신의 생각대로 보고 듣는 것이다.
 
여기 여자가 있다. 여기 남자가 있다. 사람들은 여자를 보고 남자를 본다. 사람들은 정말 여자를 보고 남자를 보고 있을까? 오온에 대하여 집착이 있다면 제대로 볼 수 없다. 모두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 사람들은 허상을 본다. 과거 나를 모욕했던 사람의 이름이나 얼굴이 떠 오르면 불쾌하고 불편한 마음이 일어난다면 이는 허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허상은 실재하지 않는다.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마음에 만들어 놓은 허상에 놀아난다. 마치 화가가 호랑이 그림을 그려 놓고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는 것과 같다. 마치 아이가 귀신 나오는 영화를 보고 귀신을 무서워하는 것과 같다.
 
허상은 마음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허상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허상을 빠알리어로 ‘빤냣띠’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개념 또는 관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늘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개념을 말하지 말고 느낌을 말하십시오.”라는 말이다. 이 말은 빳냣띠를 말하지 말고 빠라맛타를 말하라는 말과 같다. 여기서 빠라맛타는 실재라고 번역된다.
 
빤냣띠는 개념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실재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여자, 남자라는 말은 언어적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호랑이나 귀신도 언어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여자, 남자, 호랑이, 귀신은 모두 명칭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들으면 실재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는 마음 속에 허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개념은 살아 있는 것이 된다.
 
귀신은 있을까 없을까? 이에 대하여 어느 스님은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면 있는 것이고 귀신이 없다고 생각하면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치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위빠사나 스승들은 명확하게 말한다. 귀신은 허상이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을 말한다. 그것은 개념이다. 언어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실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생멸이 없는 빤냣띠(槪念)
 
사람들은 매혹적인 대상이 보았을 때 오랫동안 이미지를 간직하고자 한다. 여행지에서 스펙터클한 풍광을 보았을 때 오랫동안 기억하고자 할 것이다. 어떤 남자가 매혹적인 여자를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이런 것에 대하여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여자, 남자라는 모습의 실체들은 직접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여자 등은 보는 것 등이 생겨난 후 그 다음에 생각하고 숙고하는 세 번째 인식과정에 이르러야 알 수 있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280쪽)
 
 
눈으로 여자를 보았을 때 허상을 보기 쉽다. 이는 세 번째 인식과정을 거친 후에 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형상만 보일 것이다. 그 다음에는 ‘여자다’라는 인식이 일어날 것이다. 처음에 본 것은 실재를 본 것이고 다음에 본 것은 개념을 본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실재를 보지 못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개념적으로 본다. 자신의 마음 속에 형성된 하나의 이미지로 보는 것이다. 이런 이미지는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 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지는 죽지 않는다.
 
개념적으로 형성된 것은 죽지 않는다. 여자, 남자, 호랑이, 귀신은 명칭을 떠 올리는 순간 살아 있다. 그러나 실재하는 것은 관찰 할 때만 존재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실재하는 것은 생멸함을 말한다.
 
생멸하는 것은 실재이고 생멸하지 않는 것은 개념이다. 마음 속에 이미지가 있다면 이는 생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름을 떠 올리면 살아 있는 것이 된다. 창조주라는 명칭도 개념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실재하는 것이 근본 성품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실재하는 성품을 보기 위한 것이다. 어떤 것인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대상이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집중을 해서 면밀하게 관찰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선입관이 들어가면 제대로 볼 수 없다.
 
욕망이 개입 되었을 때
 
실재를 뜻하는 빠라맛타와 개념을 뜻하는 빤냣띠는 대조적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빠라맛타가 드러나면 빤냣띠는 보이지 않음을 말한다. 반대로 빤냣띠가 드러나면 빠라맛타가 보이지 않음을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빠라맛타를 보고자 한다. 이는 대상을 개념적으로 보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여자, 남자, 호랑이, 귀신이라는 명칭으로 또는 이미지로 보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여자를 보아도 오온으로 보고 귀신이라는 이미지가 떠 올라라도 허상인 줄 안다.
 
범부는 제대로 보지 못한다. 자신이 인식한대로 본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는 것과 같다. 그래서 범부는 빤냣띠로만 본다. 그래서 명칭으로만 보거나 이미지로만 본다. 개념으로만 보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를 보면 여자로 보고 귀신이라는 이미지를 보면 귀신으로 본다. 이는 허상을 보는 것이다. 실재하지 않는 것을 진짜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부처님은 있는 그대로 보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제대로 볼 수 있을까? 이는 부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으로 알 수 있다. 
 
 
자, 말룽끼야뿟따여, 그대에게 보이고, 들리고, 감각되고 인식된 것에 관하여 말한다면,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며, 들린 것 안에는 들린 것만 것 있을 뿐이며, 감각된 것 안에는 감각된 것만이 있을 뿐이며, 인식된 것 안에는 인식된 것만이 있을 뿐이다.”(S35.95)
 
부처님은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이 있을 뿐이며, 들린 것 안에는 들린 것만 것 있을 뿐이라고 했다. 이는 빠라맛타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넘어 서면 어떻게 될까? 본 것이나 들은 것에 대하여 애착이 생기면 빤냣띠로 보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늘 있는 그대로 보라고 했다. 이는 실재를 보라는 것과 같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생멸하는 성품을 보라는 것과 같다. 왜 그런가? 빠라맛타는 생멸하는 실재 성품이기 때문이다.
 
빠라맛타가 아닌 것은 모두 빤냣띠가 된다. 빤냣띠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멸이 없다. 언어적으로 형성된 모든 것들은 개념이다. 따라서 생멸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빤냣띠가 된다.
 
빤냣띠는 자신의 마음이 개입 된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욕망이 개입된 것이다. 그래서 여자를 보았을 때 여자라 보이고 남자를 보았을 때 남자로 보인다. 호랑이를 보았을 때 무서하고 하고 귀신의 이미지를 떠 올리면 무서워하게 된다. 자신의 욕망이 만든 허상에 지배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묻는다.
 
 
말룽끼야뿟따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에게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고, 예전에도 결코 본 적이 없고, 지금도 보지 못하고,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도 할 수 없는, 시각에 의해 인식될 수 있는 형상들에 대한 욕망이나 탐욕이나 애착이 있는가?”(S35.95)
 
 
대상에 집착하는 것은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상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이는 대상이 생멸하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대상을 있는 그대로 제대로 볼 수 있을까?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형색을 보게 될 때 단지 보는 것에만 멈추게 해야 한다. 보이는 형색을 계속해서 생각하여 번뇌들을 생기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번뇌가 생겨날 기회를 얻지 못하도록 보이는 형색을 관찰해야 한다. 그렇게 관찰하면 형색 물질을 바른 성품대로 알 수 있다. 어떻게 아는가? ‘보이는 성품일 뿐이다’라고, ‘생겨나서는 사라지는 것이다’라고, ‘새기는 동안에 사라지고 소멸해 버린다’라고 안다. 그래서 ‘항상하지 않다. 괴로움이다. 나가 아니다’라고 구분하여 결정할 수 있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389쪽)
 
 
 
대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번뇌가 일어난다. 여자나 남자를 보았을 때 이를 빠라맛타로 보지 않고 빤냣띠로 보면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다. 호랑이를 호랑이라는 개념으로 보았을 때 번뇌가 일어나고, 귀신을 귀신이라는 이미지로 보았을 때 역시 번뇌가 일어난다. 그러나 허상을 허상이라고 알면 더 이상 번뇌는 일어나지 않는다.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보았을 때 욕망이 개입되면 번뇌가 된다. 단지 보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볼 때는 볼 때뿐이 되어야 한다. 욕망이 개입 되지 않고 보는 것이다. 이는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 대상의 성품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생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찰나에 일어났다가 찰나에 사라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찰나생찰나멸하는 것에는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는 것에 집착하고 있다면 이는 괴로운 것이다. 여자나 남자, 호랑이나 귀신이라는 명칭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실재하지도 않고 실제로 있지도 않은 허상에 매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관찰하라고 했다.
 
 
마음 속에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어떠한 모습이나 형체로 집착하여 머물지 않는다.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더라도 새길 때 드러나던 대로만 드러난다. 사라져 버리는 것으로, 무상(anicca)한 것으로, 괴로움(dukkha)인 것으로, 무아(anatta)인 것으로만 드러난다. 따라서 ‘누구를 보았다. 아주 좋아할 만한 사람이다. 아주 싫은 사람이다’라는 등으로 그 형색에 관련하여 생각하고 숙고하는 번뇌들이 생겨나지 못한다. 이렇게 번뇌들 이 생겨나지 못하도록 볼 때마다 관찰해야 한다는 뜻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389쪽)
 
 
대상을 빤냣띠로 보면 번뇌가 일어난다. 이는 대상에 대한 욕망으로 인한 집착된 마음이다. 이를 더 확장하면 오온에 대한 집착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괴로움과 절망이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S56.11)라고 했다.
 
볼 때는 볼 때뿐이고
 
오늘도 장문의 글을 썼다. 아침 8시부터 쓰다 보니 11시가 다 되었다. 무려 세 시간 동안 자판을 친 것이다. 과연 이런 긴 글을 누가 읽어 줄까?
 
오늘도 내일도 쓸 뿐이다. 이렇게 토요일인 오늘은 쓰기 좋은 날이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정신 없이 여백을 채워 나간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고서 새겨 두고자 하는 내용을 발견했다. 읽고 또 읽었다. 마치 사진 찍은 것처럼 기억해 두고자 한다. 이번 것도 그랬다. 그것은 볼 때는 볼 때뿐이고 들을 때는 들을 때뿐이라는 것이다. 볼 때 욕망이 개입되어 버리면 빤냣띠가 되어 버려서 번뇌가 발생한다. 볼 때는 볼 때뿐으로 그쳐야 한다.
 
2024-03-0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