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코코넛 즙을 마셔 보았는가?

담마다사 이병욱 2024. 2. 21. 10:39

코코넛 즙을 마셔 보았는가?
 
 
오늘도 우요일(雨曜日)이 되었다. 큰 우산을 받쳐 들었다. 외투를 입고 목티를 두르고 장갑을 끼였다. 머리는 외투 모자로 보호하고 마스크까지 했다. 이렇게 단단하게 준비하고 걸어가니 무적(無敵)이 된 것 같다. 다만 도로에서 세차게 달리는 차량을 조심해야 한다. 흙탕물 맞을 수 있다.
 
요 며칠 계속 비가 내리고 있다. 겨울에 내리기 때문에 겨울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2월도 이제 하순에 접어 들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봄비라고 말할 수 있다.
 
비가 내리면 마음도 어둡다. 우요일이 계속되면 우울한 날이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진리를 추구는 자에게 우울함은 있을 수 없다. 경전이나 논서를 펼쳐 드는 순간 새로운 하늘과 땅이 된다. 항상 빛나는 광요일(光耀日)만 있을 뿐이다.
 
오늘은 무엇을 써야 할까? 마치 점심 때가 되었을 때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라며 고민하는 것 같다. 그러나 걸어 오면서 생각해 둔 것이 있다. 아니 오늘 아침 일어 났을 때 이미 결정된 것이 있다. 그것은 빠라맛타(paramattha)와 빤냣띠(paññatti)에 대한 것이다.
 
이론과 실제
 
빠라맛타는 실재를 말한다. 빤냣띠는 개념을 말한다. 마치 이론과 실제를 말하는 것 같다. 어떤 이론이 있어서 이를 적용했을 때 실제가 된다. 학문서적이나 실용서적에서 볼 수 있다.
 
불교학의 사회화 이론과 실제, 어느 불교학 교수가 지은 책이다. 불교의 사회이론에 대한 것이다. 또한 불교사회이론을 어떻게 현실 생활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학술적으로 고찰한 책이다.
 
최근 유튜브에서 최동석 소장의 영상을 보았다. 최소장은 자신의 유튜브채널에서 자신의 인사조직론 이론으로 정치인을 재단한다. 독일 유학에서 배운 이론을 현실 정치에 적용한 것이다.
 
최동석 소장에 따라면 정치인은 이론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론이 없으면 휘둘릴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바람이 부는 대로 방향을 바꾸는 팔랑개비와 같은 것이다.
 
이론이라는 말은 철학이라는 말로 바꾸어도 좋을 것 같다. 자신만의 독특한 이론이 있을 때 이를 자신만의 독특한 철학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에게도 이론이 있을까? 나에게도 철학이 있을까? 학문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론이나 철학이 있을 수 없다. 다만 간접적으로 경험해서 아는 이론과 철학은 있다.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매일 경전을 읽는다. 몇 년 되었다. 글쓰기하면서부터 경전을 근거로 했기 때문에 경전과 접하면서 산 세월은 십 년 이상 되었다.
 
경전을 접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치 새로운 하늘과 땅이 열리는 것 같았다. 더구나 논서를 읽었을 때 체계화 되었다. 가장 바탕이 되는 것은 연기법이다.
 
불교 이론의 핵심은 연기법이다.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연기법이다. 그러나 세세하게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왜 그런가? 초기경전을 읽어 보아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각주에 있는 주석까지 훑어 보았을 때 체계가 잡힌다.
 
불교는 체계적인 종교이다. 이는 불교가 매우 과학적인 종교임을 말한다. 이론이 있기 때문이다. 연기법을 근간으로 한 불교 교리가 있어서 이 틀 안에 집어 넣으면 불교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은
 
요즘 유튜브에서 마음공부에 대한 영상을 자주 접한다. 왜 마음공부라고 했을까? 불교공부라는 말도 있는데 마음공부라고 한 것은 어떤 이유일까? 아마도 부처님 가르침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튜브에서 접하는 마음공부 영상을 보면 이론이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그 사람 입만 쳐다 보는 것이 된다. 그들은 한결 같이 “이것”만 알면 된다고 말한다. 대체 이것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유튜브 광고를 보면 “이것”을 말한다. 이것만 먹어 보면 된다는 것이다. 이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그래서 호기심에 들어가 보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이것을 말하는 자들은 사람들을 끌게 하게 하기 위한 것인지 모른다.
 
부처님은 이것을 말하지 않았다. 본래 깨달음이라는 것은 언어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지만 부처님은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다. 때로 비유로도 설명하고 때로는 방편으로도 설명했다.
 
부처님이 이것을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연기송을 보면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곧바로 이어서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로 시작되는 십이연기를 구체적으로 설했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에게는 이론이 없다. 마치 이론이 없는 자가 정치를 하는 것과 같다. 이론을 모르는 자들이 정치를 했을 때 오락가락 한다. 마치 바람에 방향을 바꾸는 팔랑개비와 같다.
 
이론을 모르는 자들은 이것을 말한다. 그들은 “이것 뿐입니다. 이것 뿐이라니까여?”라며 말한다. 때로 책상을 탕탕 치면서 “이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한다. 대체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것을 말하는 자들은 때로 호통친다. 말귀를 못 알아 듣는 것 같아 답답해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사람 입을 아무리 쳐다봐도 알 듯 모를 듯 하다. 왜 그런가? 이론이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체계적이고 이론적
 
초기불교를 알게 된 것은 2008년도의 일이다. 그때 당시 한국명상원에서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 ‘빠띳짜사뭅빠다(십이연기)’를 들은 것이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세상에 이런 법문도 있었던 것이다! 경전과 논서를 바탕으로 하여 법문한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을 접하자 새로운 하늘과 땅이 열리는 듯 했다. 기존 한국불교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너무나 체계적이었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매우 이론적이었음을 말한다. 그 진수는 십이연기에 있다.
 
마하시 사야도는 이 시대 최고의 위빠사나 스승이다. 무엇보다 최고의 불교 이론가라는 사실이다. 이는 마하시 사야도가 지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보면 알 수 있다.
 
현재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두 번째 읽고 있다. 머리맡에 있어서 틈만 나면 펼쳐 본다. 밑줄로 울긋불긋하다. 그러나 접할 때마다 늘 새롭다. 이번 생에 이런 논서를 만난 것은 행운이라 아니할 수 없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위빠사나 이론과 실제에 대한 논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이것만 말하는 자들과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에게는 이론이 없지만 위빠사나에는 이론이 있는 것이다.
 
이론은 이론으로만 끝나서는 안된다. 과학자가 이론을 정립한 후에 실험을 통해서 증명하듯이, 위빠사나 이론도 수행을 해서 증명된다. 논서에 써진 내용대로 따라하면 되는 것이다.
 
어떤 학문이든이 이론과 실제가 있다. 이론만 있고 실제가 없으면 공허한 것이다. 이론은 없고 실제만 있다면 오래 가지 못한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로에는 이론과 실제가 있다. 이는 빠라맛타와 빤냣띠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빤냣띠는 어떤 것일까?
 
빠라맛타는 위빠사나 수행에서 가장 중요시된다. 왜 그런가?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이론을 실제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빤냣띠는 어떤 것일까? 이는 개념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단지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실재를 보기 위한 것이다. 이는 개념적으로 아는 것과 다르다. 실제로 수행을 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이와 같은 빠라맛타와 빤냣띠에 대하여 매우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입으로만 “이것을”외치는 자들과 다른 것이다. 어떤 것인가?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알 수 있다.
 
 
마술사가 진흙, 종이, 돌 등을 주문이나 묘약 등으로 금, 은, 루비로 만 들어서 보여 주면 보는 이들은 그것을 진짜 금, 진짜 은, 진짜 루비라고 생각한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금, 은, 루비라고 생각하는 것들(의미, 성품)은 옳지 않은 모습으로 취해지기 때문에 비실재의(abhūtattha, 非實在義) = 비진실의(asaccikaṭṭha, 實義)= 옳지 않은 의미라고 한다. 날씨가 더울 때 물을 찾아 나선 사슴들은 멀리서 보이는 신기루를 물이 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할 때도 물이라고 생각하는 의미는 옳지 않은 모습으로 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실재의 = 비진실의 = 옳지 않은 의미일 뿐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생각되는 ‘명칭 빤낫띠’, 여자·남자. 손·발 등의 뜻 빤낫띠’ 등의 여러 가지도 비실재의 = 비진실의 = 옳지 않은 의미일 뿐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253쪽)
 
 
빤냣띠에 대한 설명이다. 언어적으로 표현된 것은 모두 개념일 뿐이다.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비실재의(abhūtattha, 非實在義) 또는 비진실의(asaccikaṭṭha, 實義)라고 한다. 실제로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진실된 것이 아닌 것이다.
 
빠라맛타는 어떤 것일까?
 
실제로 실재하는 것이 진실된 것이다. 어떤 것인가? 이는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오온에서 생멸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빤냣띠는 개념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생멸이 없다. 단지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 눈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 이것은 실재하는 것이다. 개념이 아니다. 어떤 이는 이런 것도 마음에서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하여 일체유심조개념으로 보지만 위빠사나에서는 실재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실재하는 것이라고 일컬어지는 빠라맛타에 대한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눈으로 형색물질을 보는 이는 ‘모양을 본다’, 혹은 ‘보이는 형색이 있다’라고 안다. 이렇게 알 수 있는 형색물질은 금, 은, 루비라고 생각되는 환술로 만들어 낸 것, 물이라고 생각되는 신기루처럼 옳지 않은 것이 아니다. 아는 그대로 옳기도 하다. 실제로 존재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보이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으면 보는 것이 생 겨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눈으로 보이는 형색물질은 실재의 (bhūtattha, 實在義) = 진실의 (saccikaṭṭha, 眞實義)이다. 진실의(saccika- ttha 眞實義)라면 수승의(paramattha, 殊勝義)라고도 할 수 있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254쪽)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본다. 이때 눈으로 본 것은 실재하는 것이다. 이는 언어적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빤냣띠가 아니다. 그래서 “왜냐하면 보이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으면 보는 것이 생 겨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소리가 들리는 것은 귀와 소리라는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 소리는 개념이 아니라 실재이다. 코로 냄새 맡는 것도 실재이다. 몸으로 감촉을 느끼는 것도 실재이다. 이렇게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 빠라맛타이다.
 
빠라맛타는 실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빠라맛타는 언어적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생멸한다. 찰나생찰나멸하는 것이다. 눈으로 대상을 보았을 때 찰나적으로 생겨났다가 찰나에 사라진다. 이처럼 빠라맛타는 생멸하기 때문에 진짜 있는 것이고 진실된 것이다. 그래서 빠라맛타에 대하여 실재의 (bhūtattha, 實在義), 진실의 (saccikaṭṭha, 眞實義)라고 하는 것이다.
 
여자와 남자
 
유튜브에서 본 영상이 있다. 어떤 이가 화두를 들었는데 어느 날 깨쳤다고 한다. 절에 들어가서 화두를 들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기연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 하나의 게송을 읊었는데 바람은 불고 소나무는 푸르다는 것이었다.
 
바람이 불 때 피부로 느낀다. 이것은 진실된 것이다. 실재로 있는 것이다. 몸으로 접촉되어어서 느낀 것이다. 바로 이것이 빠라맛타이다. 이런 수승의는 진실된 것이다. 실제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빠라맛타의 특징은 생멸한다는 것이다.
 
바람이 불 때 감촉을 느낀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느낌이 생멸함을 말한다. 이렇게 진실된 것은 생멸한다. 실재하는 것은 생멸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래가지 못한다. 조건에 따라 발생했다가 조건이 다하면 사라진다. 이것이 빠라맛타이다.
 
여기 여자가 있다. 또 여기 남자 있다. 여기에 있는 여자와 남자는 실재하는 것일까? 빠라맛타와 빤냣띠로 설명하면 여자와 남자는 실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미지로만 존재한다. 또한 언어적 개념으로만 존재한다. 왜 그런가? 이는 생각으로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개념적으로 아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 남자 등으로 생각할 수 있는 어떠한 것에서 볼 수 있는 형색이라는 것을 빼어내 버리면 볼 수 있는 여자, 남자 등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1권, 257쪽)라고 했다.
 
눈으로 보이는 것은 형색(형상)이 대상이 된다. 여기에다 ‘여자다’ 또는 ‘남자다’라고 붙이면 더 이상 실재하는 것이 아니게 된다. 왜 그런가? 형색이라는 물질은 볼 수가 있지만 여자, 남자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개념적으로 또는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
 
어떤 것이 실재하는가?
 
언젠가 BTN사이트에서 간화선 학술세미나를 보았다. 그때 어느 스님은 간화선 체험하는 것에 대하여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자전거는 타 봐야 아는 것이고, 수영은 해 보아야 할 수 있는 것이고, 사과는 맛을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스님은 이론보다 수행을 강조했다. 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했다. 아무리 자전거 타는 법을 이론적으로 알고 있어도 타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했다. 아무리 수영하는 방법을 책으로 알고 있어도 실제로 물에 들어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듣자 마음이 답답해졌다. 스님의 말에는 이론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스님이 말한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스님이 말한 것은 빠라맛타와 빤냣띠에 대한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빠라맛타와 빤냣띠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고서 알게 되었다.
 
한국불교에서는 이론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오로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체험해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마치 이것을 말하는 자가 이것타령하는 것 같다. 이론이 없으니 답답한 것이다.
 
초기불교에는 이론이 있다. 놀랍게도 매우 체계적인 이론이다. 37조도품이 대표적이다. 논서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매우 체계적으로 설명해 놓았다. 아비담마 논서가 대표적이다. 청정도론과 같은 수행지침서겸 주석서를 보면 불교가 매우 이론적이고 체계적임을 알 수 있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으면 “이것이 불교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유튜브에서 이것타령하는데 이것이 모두 이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들어가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바로 빠라맛타에 대한 것이다. 실재하는 것을 말한다. 생멸하며 실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빠라맛타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은 다음과 같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이에게 흰색, 붉은색, 원, 사각형 등의 여러 색깔과 모양을 다른 이가 아무리 설명하고 보여주더라도 그는 사실대로 할 수가 없다. ‘본다’는 성품에 관해서도 아무리 설명해도 사실대로 알 수가 없다. (태어날 때부터) 냄새를 맡지 못하는 이에게 향기로운 냄새, 썩은 냄새와 함께 ‘냄새 맡는다’라는 성품에 대해서 아무리 설명해도 그 는 사실대로 알 수가 없다. 아직 (한번도) 먹어 보지 못했던 빵, 과일의 특별한 맛을 아무리 설명해도 사실대로 알 수가 없다. 두통, 치통, 복통 등을 자신이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했다면 다른 이가 아무리 설명해도 그러한 병들 때문에 생기는 고통스러운 느낌들을 사실대로 알 수가 없다. 위빳사나 지혜, 선정, 도와 과 등을 아직 증득하지 못한 이는 여러 문헌에서 아무리 설명해도 사실대로 알 수가 없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261쪽)
 
 
빠라맛타는 직접 경험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이론으로 아는 것과 다르다. 이론으로만 안다면 지식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체험으로 알게 되면 지혜가 된다. 위빠사나 지혜는 체험으로 아는 것이다. 그래서 “위빳사나 지혜, 선정, 도와 과 등을 아직 증득하지 못한 이는 여러 문헌에서 아무리 설명해도 사실대로 알 수가 없다.”라고 했다.
 
코코넛 열매 즙을 마셔보니
 
도는 있을까? 과는 정말 있는 것일까? 누구나 이런 의문을 해 볼 수 있다. 왜 그런가? 자신이 체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험한 사람에게는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래서 출세간법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도의 지혜, 과의 지혜, 반조의 지혜 등에 의해서도 직접 보고 경험하여 알 수 있다. 이렇게 직접 보고 알만하고, 직접 보고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물질과 정신 등의 법들을 직접의(paccakkhattha, 直接義), 최승의 (uttamattha, 最勝義), 수승의 (paramattha, 殊勝義)라고 부른다. 스스로 경험하여 직접 알 수 있는 그러한 법들은 사실대로 확실히 존재하는 것에 따라서 알 수 있기 때문에 옳은 성품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262쪽)
 
 
재작년 12월에 스리랑카에 갔었다. 스리랑카에 가면 코코넛 열매를 거리에서 판매한다. 차를 타고 가다 갈증이 나면 차를 멈추고 노점에서 코코넛을 사 먹는다. 코코넛 수액을 마시는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 마셔 본 것이다. 이런 맛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아마 ‘마셔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출세간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들은 도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노자 도덕경에 따르면 대부분 사람들은 크게 웃어 버릴 것이라고 한다. 소수의 사람들은 반신반의할 것이라고 한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귀를 기울일 것이라고 한다.
 
위빠사나에서는 도와 과를 말한다. “도와 과를 이루십시오.”라는 말은 인사말과도 같다. 그러나 도와 과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남의 이야기나 다름 없다. 그런 것이 있는 줄 조차 모른다.
 
초기경전을 보면 신통에 대한 정형구가 있다. 이런 문구를 보면 반신반의한다. 왜 그런가?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황당하다는 반응과 함께 신통이 들어간 경을 빼버린다. 자신의 눈과 귀로 확인되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보고 들은 것만 진실이라고 말한다. 정말 진실일 수 있다. 여자나 남자와 같은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선정을 체험하고 도와 과에 이르렀다면 어떻게 될까? 이를 실재하는 것으로 볼 것이다.
 
도와 과를 이룬 사람에게는 도와 과는 더 이상 빤냣띠, 즉 개념이 아니다. 들어서 아는 것도 아니고 소문으로 아는 것도 아니도 전승되어서 아는 것도 아니다. 마치 사과 맛을 직접 보듯이 체험하여 아는 것이다. 이는 들어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체험으로 아는 지혜에 해당된다. 그래서 위빠사나 16단계 지혜라는 체계가 성립되었을 것이다.
 
매일 한시간 좌선 하는 것은
 
요즘 유튜브에서 깨달음과 관련된 영상을 종종 본다. 대개 이것을 말하는 자들이 많다. 어떤 이는 현존을 말한다. 그러나 한결같이 이론이 없다. 그저 “이것뿐입니다. 이것뿐이라니까요”라며 우기는 것 같다.
 
이론을 알고 실제를 알면 완전한 지혜가 된다. 이론만 알고 있다면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론도 없고 실제도 없는 영상들이 많다는 것이다. 말로만 떠드는 것이다. 듣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 몇 년을 들어 보아도 제자리일 것이다.
 
이론과 실제를 알아야 한다. 이는 빠라맛타(실재)와 빤냣띠(개념)에 대한 것이다. 지식으로 아는 모든 것은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빠라맛타를 아는 것은 지혜의 영역에 해당된다. 왜 그런가? 실재를 알면 생멸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매일 한시간 좌선을 한다. 작년 우안거 시작될 때부터 시작하고 있다. 일이 많으면 삼십분 앉아 있는다. 이렇게 앉아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인가? 아니다. 생멸을 보기 위한 것이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기 위한 것이다.
 
왜 생멸을 보아야 하는가? 그것은 지혜를 얻기 위한 것이다. 생멸을 보는 것에 위빠사나 지혜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상, 고, 무아에 대한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은 빠라맛타를 보기 위한 것이다.
 
 
2024-02-2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