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상구보리하화중생을 동시성으로 보는 이유

담마다사 이병욱 2024. 2. 13. 14:38

상구보리하화중생을 동시성으로 보는 이유
 
 
요리할 때 조미료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조금만 더 치면 치지 않은 것만 못하다. 사람의 몸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몸은 먹는 것에 따라 상태가 달라진다. 조금만 이상한 것이 들어가면 반응을 보인다. 자주 먹지 않은 것이 들어 갔을 때 특히 그렇다. 그래서 먹는 것만 먹는 모양이다.
 
하루 만에 컨디션을 회복했다. 그제 급작스럽게 속이 좋지 않아 설사했다. 명절 때 잘못 먹은 것이 있는 것 같다. 생굴이 의심스럽다. 평소 먹지 않는 것이다.  그것도 과식했다.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큰 일 난다. 이는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음식절제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큰 대가를 치른다.
 
배에 탈이 나면 빠져 나오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전통적인 방법에 대한 것이다. 된장국을 먹으면 즉효약이다. 이 방법을 써서 났지 않은 것이 없다. 어제도 이 방법으로 빠져 나왔다.
 
몸이 갑자기 무너질 때가 있다. 감기에 걸린 것처럼 오한이 나는 경우도 있다. 마치 코로나 걸렸을 때처럼 앉아 있을 수도 없고 서 있을 수도 없었을 때 지옥을 체험한다.
 
오한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이 있다. 일단 타이레놀 하나를 먹는다. 그 다음은 전기장판을 깔고 몸을 따뜻하게 해 준다. 밤에 잘 때는 수면제 반알 정도 복용하면 좋다. 이렇게 해서 빠져 나왔다.
 
매일 글을 올린다. 사적인 이야기나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올린다. 담마와 곁들여서 올린다. 보는 이로 하여금 시간낭비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유익한 것 하나는 얻어야 할 것이다.
 
어제 김도이 선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처음 있는 일이다. 선생은 내 글을 보고 전화를 했다. 걱정이 되었던 것 같다. 건강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작성된 글은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동시에 올린다. 페이스북에서는 공감표시로 어떤 사람이 관심 보이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무런 표시를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없다. 김도이 선생도 그런 사람중에 속한 것 같다.
 
김도이 선생은 올린 글을 다 읽어 보고 있다고 했다. 이런 말을 접할 때 인터넷의 위력을 실감한다. 네트워크만 깔려 있으면 산간벽지는 물론 해외에서도 실시간으로 접속이 가능한 것이다.
 
인터넷에 올린 글은 내것이 아니다. 인터넷에 공유하는 순간 모든 사람들의 것이 된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글을 쓰는 행위는 ‘공익을 추구하는 삶’이라고 볼 수 있다.
 
유튜브에 최동석 소장의 영상이 있다. 최소장은 정치인 유형에 대하여 사익형인지 공익형인지 판단해 준다. 과거 그 사람의 말이나 글, 영상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왜 그런가? 그가 남겨 놓은 말, 글, 영상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사익형 인간인가 공익형인간인가?
 
공익형 인간이 되고자 한다. 사익만 추구한다면 이렇게 인터넷에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몇 시간 들여서 힘들게 글을 작성하는 것은 공유하기 위한 것이다. 더구나 담마까지 곁들여 글을 작성한다. 2006년부터 해 오던 것이다.
 
종종 감사의 메시지를 받는다. 올린 글이 가슴을 울렸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처지와 비교해서 틀림 없는 사실임을 알았을 때 댓글을 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럴 때 글 쓰는 맛을 느낀다.
 
만약 내가 사익형 인간이라면 애써 힘들게 시간 낭비해 가며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한번 글을 쓰기 시작하면 두세 시간은 훌쩍 지나가 버린다. 하루 일과에서 두세 시간은 큰 것이다. 자영업을 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글 쓰는 이유 중에 하나는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한 것도 있다.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머리 속에 있는 것이 흰 여백에 탁탁 박힌다. 생각한 대로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오기까지 십년 이상 걸렸다. 그것도 단지 두 개의 손가락으로 치는 독수리타법이다.
 
매일 경전을 읽는다. 이제 경전읽기는 생활화 되었다. 읽을 때는 새기며 읽고자 한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중에도 떠오르고 좌선 중에도 떠오른다. 길을 가다가도 문득문득 떠오른다. 이런 것은 좋은 것이다. 항상 부처님의 담마와 함께 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행위는 크게 두 가지로 본다. 그것은 사익추구와 공익추구를 말한다. 개인적으로도 이익이 되고 사회적으로도 이익이 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최상의 삶이 된다. 그리고 최상의 사회적 실천이 된다.
 
어떤 이는 사회참여를 한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헌신하다시피 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이익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 같다.
 
어떤 사람은 겨울에 춥게 산다고 한다. 북한동포들이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대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지나친 것이다.
 
타인을 이익 되게 하는 것은 선한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사회참여에 열중했을 때 부처님은 누구 손을 들어 줄까?
 
여기 네 종류의 인간이 있다. 첫째로 자식의 이익도 실천하지 않고 타인의 이익도 실천하지 않는 자, 둘째로 타인의 이익은 실천하지만 자신의 이익은 실천하지 않는 자, 셋째로 자신의 이익은 실천하지만 타인의 이익은 실천하지 않는 자, 자신의 이익도 실천하고 타인의 이익도 실천하는 자를 말한다.
 
네 종류에 인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두 번째 유형이다. 이와 같은 유형에 대하여 부처님은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는 실천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이러한 앞의 두 사람 가운데 보다 훌륭하고 훨씬 탁월하다.”(A4.95)라고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자신의 이익을 실천하는 사람이 타인을 이익을 위해서 실천하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다.
 
봉사활동에 열심인 사람들이 있다. 이런 봉사 저런 봉사에 대한 성과를 올려 놓는다.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에 대한 실천을 하지 않고 타인에 대한 실천에만 올인한다면 자신의 이익에 대한 실천만 하는 사람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상식적이기도 하지만 때로 역설적이기도 하다. 극적인 반전을 보는 것 같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남을 돕는 행위는 훌륭한 것으로 보지만 사적이익을 추구하는 것만 못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적이익은 자신의 정신적 능력을 계발 시키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정신적 능력 계발 없이 사회참여에만 몰두 했을 때 깃발만 나부끼는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떤 정신적 능력을 계발해야 하는가? 아마도 칠성재가 가장 좋은 예인 것 같다. 일곱 가지 정신적 재물을 말한다. 이는 “믿음의 재물, 계행의 재물,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재물, 배움의 재물, 보시의 재물, 일곱 번째로 지혜의 재물이 있네.”(A7.6)라는 부처님의 성제자 재물로 알 수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에 대한 실천도 하지 않고 타인의 이익에 대한 실천도 하지 않는다. 대부분 사람들은 믿음, 계행, 부끄러움, 창피함, 배움, 보시, 지혜라는 정신적 능력도 계발하지 않고 그저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아 간다. 이처럼 감각만을 즐기는 살 때 타인의 이익에 대한 실천은 없다고 볼 수 있다.
 
네 종류 사람 중에서 최악은 자신도 이익되게 하지 못하고 타인도 이익되게 하지 못하는 삶이다. 부처님은 이런 종류의 인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서 설명했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화장용 장작은 양끝이 불타고 중간은 악취가 나기 때문에 마을에서도 장작으로 사용하지 않고 한적한 곳에서도 장작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실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이와 같다고 나는 말한다.”(A4.95)
 
 
화장용 장작더미가 있다. 화장을 하고 난 다음 남은 장작더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아마 누구도 가져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네 종류의 인간 중에서 최악에 대하여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실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최악이 있으면 최선이 있다. 네 종류의 인간 중에서 최선의 인간 유형은 어떤 것일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서 설명했다.
 
 
수행승들이여, 소에서 우유가, 우유에서 크림이, 크림에서 신선한 버터가, 신선한 버터에서 버터기름이, 버터기름에서 버터크림이 나오는데, 그것들 가운데 버터크림을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실천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도 실천하는 사람은 이러한 네 사람 가운데 최상이고 수승하고 가장 훌륭하고 훨씬 탁월하다.”(A4.95)
 
 
유제품 중에 버터크림이 있다. 가장 나중에 정제된 것이다. 그야말로 진수라고 볼 수 있다. 네 종류의 인간 중에서 최상이다. 그래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실천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도 실천하는 사람은 이러한 네 사람 가운데 최상이고 수승하고 가장 훌륭하고 훨씬 탁월하다.”라고 했다.
 
나는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 대부분 첫 번째 종류이기 쉽다. 오로지 감각만을 즐기는 사람을 말한다. 감각만을 즐기기 때문에 남을 이익되게 하는 것도 없다. 이 보다 조금 나은 사람은 남들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자신의 정신적 능력을 계발하지 않고 사회참여에 올인 했을 때 개인적으로 홀로 수행하는 자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글을 쓰는 행위는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신도 이익되게 하고 타인도 이익되게 한다는 것이다. 마치 유제품이 정제되고 정제되어 나온 버터크림 같은 것이다. 누구나 좋아하는 것이다. 이른바 보살행인 것이다.
 
대승 이념 중에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이 있다.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먼저 깨달음을 얻고 그 다음에 중생교화를 해야 한다는 말로 받아 들여진다. 그러나 어떤 이는 동시적으로 설명한다. 자신의 수행도 하면서 동시에 타인에게 이익을 주는 것을 말한다.
 
상구보리하화중생에서 상구보리를 우선시 둔다면 네 종류의 인간에서 세 번째의 인간유형에 해당된다. 자신을 이익을 위해서는 실천하지만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는 실천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상구보리하화중생을 동시성으로 둔다면 네 번째 인간유형에 해당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실천하고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도 실천하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다. 이렇게 본다면 상구보리하화중생에 대하여 동시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매일 어마어마한 양의 글을 쓴다. 이렇게 글 쓰는 행위는 자신의 이익을 실천하기 위한 것도 되고 동시에 타인의 이익을 실천하기 위한 것도 된다. 상구보리하화중생을 동시에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블로그 프로필란에 “자신도 이익되게 하고 타인도 이익되게 하는 블로거가 되겠습니다.”라고 써 놓았다.
 
 
2024-02-1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