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욕망이야말로 괴로움의 뿌리

담마다사 이병욱 2024. 2. 3. 10:58

욕망이야말로 괴로움의 뿌리
 
 
오늘 아침은 감자를 먹게 되었다. 평소 고구마를 먹는다. 오늘 아침에는 고구마가 준비되지 못해서 감자로 대체했다. 삶은 계란 하나, 감자 하나, 치즈와 토스트 하나, 그리고 꿀물이 곁들인 아침식사가 되었다.
 
감자는 에어프라이어에 구운 것이다. 온도를 200도로 하고 30분 가열했다. 마침내 노릇노릇한 감자가 완성되었다. 찜기에 찌는 찜감자보다 더 맛있고 달콤하다. 일상에서 변화가 있는 것이다.
 

 
나의 일상은 거의 변함 없다. 직장생활을 그만 두고 내 사업을 시작한 이래 십년 이상 똑 같은 일상이다. 집과 백권당을 왕래하는 일상이다. 2007년부터 시작되었으니 이제 17년 되었다.
 
일상은 밥 먹고 자는 것이다. 특히 밥 먹는 것이다. 하루 세 끼 먹는 것은 일상이다. 하루도 빠지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계속 될 것이다.
 
일상에는 밥만 먹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매일 반복적으로 하는 것은 모두 일상이 된다. 이를 영어로 루틴(Routine)이라고 한다. 매일 하루에 한 개씩 글을 쓰는 것도 일상이다. 매일 한시간 좌선 하는 것도 일상이다. 매일 한시간 빠알리 공부하는 것도 일상이다. 매일 머리맡에 있는 경전과 논서를 읽는 것도 일상이다.
 
일상은 우리말로 ‘틀에 박힌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매일 밥 먹듯이 하는 일이 일상이다. 요즘 나에게는 사대(四大)일상이 있다. 그것은 글쓰기, 좌선하기, 빠알리어공부하기, 경전읽기가 바로 그것이다.
 
일상의 힘은 위대하다. 매일 반복적으로 하다 보면 프로페셔널이 된다. 이른바 만시간의 법칙이 그것이다.
 
어떤 이가 매일 서너시간씩 집중해서 십년을 수련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도인(道人)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는 만시간의 법칙에 따른 것이다. 누구라도 하루에 서너시간씩 십년동안 꾸준히 한다면 프로가 되지 않을 자 없을 것이다.
 
글쓰기는 18년 되었다. 2006년부터 거의 매일 쓰다시피 했다. 이제까지 작성된 글은 7,400개가 넘는다. 한번 글을 쓰면 두 세시간 훌쩍 지나간다. 이쯤 되면 나도 프로페셔널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랬다. 지난 18년동안 글을 쓰면서 여러 단계 도약한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대일상에서 글쓰기는 생활화 되었다. 좌선하기는 4년 되었다. 빠알리어 공부하기는 고작 두 달 되었다. 경전읽기는 4년 되었다. 프로페셔널이 되려면 10년은 해야 할 것이다.
 
사소한 루틴의 힘은 대단하다. 운동선수가 매일 서너시간씩 집중해서 십년을 운동하면 세계적인 선수가 될 것이다. 매일 한시간씩 집중해서 십년을 좌선한다면 깨달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매일 삼십분이라도 경전과 논서를 읽는다면 삼장법사가 될 것이다. 매일 한시간 이상 빠알리어 공부를 한다면 빠알리어 대가가 될 것이다.
 
일상적인 일은 쉬는 날이 없다. 밥 먹는 것은 토요일이라고 해서 쉬지 않고 일요일이라고 해서 쉬지 않는다. 글쓰기 등 네 가지 일을 밥 먹듯이 하고 있는 요즘 주말은 없다. 토요일인 오늘도 백권당에 일찍 나와서 자판을 두드린다.
 
촌장쌍윳따(S42)를 읽다가
 
십년 이상 똑 같은 일상이다. 토요일도 없고 일요일도 없고 공휴일도 없다. 사무실 임대료와 관리비 나가는 것을 생각하면 놀려 둘 수도 없다. 마치 공장을 연중무휴 가동하듯이 백권당도 풀 가동한다.
 
머리맡에 있는 경전과 논서 읽는 것도 일상이다. 현재 ‘쌍윳따니까야’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고 있다. 머리맡에 있어서 읽는다. 책장에 있다면 읽기 힘들다. 읽는 것을 습관화 하기 위한 것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경전을 읽는다. 매일 조금씩 읽는다. 하루에 두 세경이 고작이다. 그럼에도 사소한 루틴의 힘은 대단하다. 마치 똑똑 한방울씩 내리는 물이 시간이 지나면 가득 차듯이 진도가 상당히 나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오늘 아침에 읽은 경이 마음에 와 닿았다. 주제별로 구성되어 있는 쌍윳따니까야는 지루한 반복이 특징이다. 그러나 지루하지 않은 것도 있다.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문구를 발견했을 때 새겨 두고 싶다. 오늘 아침에 읽은 것이 그랬다.
 
사람들은 근심하고 걱정한다.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식이 있다면 잘 있는지 걱정할 것이다. 마치 팔십 먹은 노모가 육십 먹은 아들 걱정하는 것 같다. 과연 이런 걱정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부처님 당시 어느 마을에 촌장이 있었다. 촌장은 부처님에게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하여 알려달라고 했다. 아마도 괴로운 일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은 사람들의 근기에 맞게 설법했다. 재가자에게는 재가자의 맞는 설법을 한 것이다.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은 사성제로 설명된다. 그러나 법을 잘 모르는 재가자에게는 눈높이 가르침을 설해야 한다. 그래서 문답식으로 알려 주었다.
 
촌장은 근심근정이 있었던 것 같다. 마을의 대표라고 볼 수 있는 촌장은 마을 사람들을 돌볼 의무도 있었던 것 같다. 마을 사람이 살해, 포박, 몰수, 모략 등을 당했을 때 근심걱정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부처님은 촌장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다. 촌장의 마음을 읽은 것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에게 사고가 났을 때 어떤 심정인지 물어 보았다. 이에 촌장은 “저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면 그들에 대하여 저에게 욕망과 탐욕이 있기 때문입니다.”(S42.11)라고 말했다. 이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이 문구를 읽고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책 없이 걱정만 한다면
 
걱정이 있을 때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진다면 걱정이 없어서 정말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걱정을 하면 더욱더 걱정이 되어서 더욱더 괴로워지게 된다.
 
걱정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해야 걱정을 없앨 수 있을까? 걱정의 본질을 알면 된다. 어떻게 아는가? 걱정을 하면 괴로움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경에서 촌장은 부처님의 질문에 “저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면 그들에 대하여 저에게 욕망과 탐욕이 있기 때문입니다.”(S42.11)라고 말했다. 이 말이 정답인 것이다.
 
에스엔에스에서 어떤 어르신은 걱정이 많다. 글을 읽어보면 요새 젊은 것들이 예의가 없다고 걱정한다. 최근 글을 읽어 보니 나라 걱정을 한다. 아마 '어떻게 지켜 온 나라인데 좌파에게 나라를 넘겨줄 수 없다'라는 식의 걱정인지 모른다.
 
걱정한다고 해서 걱정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자꾸 ‘걱정이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럴 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대책이 있어야 한다. 대책도 없이 “걱정이다”라는 말만 되풀이 했을 때 답답하기만 하다. 나라를 걱정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국충정으로 본다. 그러나 대책 없이 걱정만 한다면 괴로움만 있을 뿐이다.
 
촌장은 부처님의 질문에 금방 이해 했다. 그것은 욕망과 탐욕에 대한 것이다. 마을사람들의 안녕에 대한 걱정은 결국 자신의 욕망과 탐욕이었음을 말한 것이다.
 
욕망이야말로 괴로움의 뿌리
 
부처님은 남의 업에 개입하지 말라고 했다. 타인의 업에 개입하면 미쳐버리거나 곤혹스럽게 될 것이라고 했다. 마을의 촌장이라 하여 마을사람들의 안녕과 안위를 걱정만 한다면 괴로움만 생겨날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어떠한 괴로움이 일어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욕망을 뿌리로 하고 욕망을 인연으로 하여 생겨난 것이다. 욕망이야말로 괴로움의 뿌리이기 때문이다.”(S42.11)
 
 
어떤 괴로움도 욕망을 뿌리라고 했다. 이는 과거는 물론 미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괴로움은 욕망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괴로움이 어떻게 욕망이 될 수 있을까? 이런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장례식장에서 슬피 우는 사람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슬피 우는 사람이 있다. 노래하듯이 곡을 하며 크게 운다. 정말 괴로워서 우는 것 일수도 있다. 그러나 울기 위하여 우는 것 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욕망으로 우는 것이 된다.
 
멀리 떨어져 사는 부모나 자식을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 무소식이 희소식일 것이다. 그러나 아프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걱정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때부터 근심과 걱정이 시작된다. 나중에는 자신을 압도할지 모른다. 이는 욕망이 작동된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욕망이야말로 괴로움의 뿌리”라고 했다.
 
난다마따가 태연할 수 있었던 것은
 
탐욕이 남아 있는 한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도 탐욕에 따른 집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탐욕을 소멸한 사람에게는 더 이상 근심도 걱정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난다의 어머니 난다마따가 그랬다.
 
난다마따에게는 난다라는 사랑하는 외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난다는 왕에게 끌려 가서 살해당했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저는 아들이 붙잡힐 때나 붙잡혀 있을 때나 포박되었을 때나 상처받을 때나 살해될 때나 살해되었을 때 저는 저의 마음의 변화를 알지 못했습니다.”(A7.53)라고 말했다. 이런 어머니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난다마따는 매정한 어머니처럼 보인다. 그러나 난다마따는 재가여성수행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경에 따르면 ‘아나함’의 지위이었다. 탐욕과 성냄이 다한 불환자를 말한다.
 
불환자는 탐욕과 성냄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욕망이 일어나지 않고 성냄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하는 외동아들이 폭력으로 살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마음의 동요가 없었던 것이다.
 
니까야를 읽다 보면 연동되는 경이 있다. 이번에 촌장쌍윳따에서 읽은 ‘바드라까의 경’(S42.11)과 앙굿따라니까야에서 읽은 ‘난다마따의 경’(A7.53)이 그것이다. 근심과 걱정, 슬픔, 비탄, 절망이라는 괴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 연동된 것이다. 이는 이전에 경전을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놀랍게도 '괴로움은 욕망이다'라는 가르침이 똑같았다.
 
촌장이 마을 사람들의 안위와 안녕에 노심초사했다. 그러나 걱정한다고 해서 걱정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더 괴로움만 생겨날 것이다. 이런 경우 연민의 마음으로 그쳐야 한다. “하루빨리 고통에서 벗어나기를!”라며 바라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럼에도 남의 업에 개입하듯이 노심초사한다면 미쳐버리거나 곤혹스러워질 것이다.
 
촌장상윳따에서 새겨야 할 문구
 
촌장상윳따에는 새겨 두어야 할 것이 많다. 재가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상윳따처럼 보인다. 어떤 것인가? 주옥 같은 문구를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탐욕을 버리지 못해서 남을 화내게 하고 남이 화를 낸다고 자신도 화를 내게 되면, 그는 포악한 자라고 합니다.”(S42.1)
 
2) “뭇삶들이 아직 탐욕을 떠나지 못해 탐욕에 묶여 있는데, 그들 가운데 배우가 무대 가운데 극장 가운데 더욱 탐욕스러운 것을 가져와서 더욱더 탐욕스럽게 만듭니다.”(S42.2)
 
3) “전사가 전쟁터에서 전력을 다해서 싸우면 그의 마음은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을 구타하거나 결박하거나 절단하거나 박멸하거나 없애 버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이미 저열해졌고 불우해졌고 사악해졌습니다. 그 전력을 다해서 싸우는 자를 적들이 살해하여 죽인다면,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전사자의 지옥이 있는데 그곳에 태어납니다.”(S42.3)
 
4)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커다란 큰 돌을 깊은 호수 에 던져 넣었다고 합시다. 많은 사람이 모여 와서 그것을 두고 ‘커다 란 돌이여, 떠올라라. 커다란 돌이여, 떠올라라.’라고 기도하고 찬탄 하고 합장하고 순례한다면 촌장이여, 그대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커다란 큰 돌이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합장하고 찬탄하고 순례한 까닭에 물속에서 떠오르거나 땅 위로 올라올 것입니까?”(S42.6)
 
5)  “예를 들어 한 사람에게 세 개의 물단지가 있다고 합시다. 하나의 물단지는 흠이 없고 물이 흘러나오지 않고 새지 않습니다. 하나의 물단지는 흠이 없지만 물이 흘러나오고 샙니다. 하나의 물단지는 흠이 있고 물이 흘러나오고 샙니다. 촌장이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사람이 물을 붓고 싶을 때에 어디에 먼저 물을 붓겠습니까? 흠이 없고 물이 흘러나오지 않고 새지 않는 물단지입니까, 흠이 없지만 물이 흘러나오고 새는 물단지입니까 흠이 있고 물이 흘러나오고 새는 물단지입니까?”(S42.7)
 
6) “예를 들어 강력한 소라고동이 적은 노력으로도 사방으로 들리는 것처럼, 촌장이여,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이 이와 같이 수련되고 이와 같이 성장되면, 유한한 업의 세계 는 거기에 남아 있지 않고 거기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S42.8)
 
7) “가정이 패망하는 데는 여덟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가정은 국왕 때문에 패망합니다. 가정은 도적 때문에 패망합니다. 가정은 불 때문에 패망합니다. 가정은 물 때문에 패망합니다. 혹은 감추어진 것을 얻지 못하거나 나태하여 일을 포기한다든가 가정에 그들 재보를 흩어지게 하고 파괴하고 낭비해 버리는 쓰레기가 생겨난다든가 마지막 여덟 번째로 무상하다는 사실 때문에 패망합니다. 촌장이여, 가문이 패망하는 데는 여덟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S42.9)
 
8) “싸끼야의 아들을 따르는 수행승들에게 금과 은은 허용 되지 않습니다. 싸끼야의 아들을 따른 수행승들은 금과 은을 수용하지 않습니다. 싸끼야의 아들을 따르는 수행승들은 금과 은을 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보석과 황금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금과 은의 사용을 단념했습니다. 만약 누군가 금과 은을 허용할 수 있다면 그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도 허용할 수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을 허용한다면 당신은 그를 수행자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거나 싸끼야의 아들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고 확실히 여겨도 좋습니다.”(S42.10)
 
 
참으로 주옥 같은 가르침이다. 56개 주제별로 구성되어 있는 쌍윳따니까야에서 재가의 삶을 사는 재가자들에게 꼭 필요한 가르침이라고 본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은 반드시 출가자에게만 해당되는 가르침을 설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재가자를 위해서도 훌륭한 가르침을 설했다.
 
부처님이 재가자들에게 가르침을 설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재가는 출가의 어머니’라는 개념으로 보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마치 모든 아들과 딸은 어머니에게서 나오듯이 재가는 출가의 어머니인 것이다.
 
출가자는 재가자에서 나온다. 출가했다가 계를 지킬 자신이 없어서 환속하게 되면 재가의 삶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재가는 마치 집과 같은 것이다. 먼 길을 떠난 나그네가 돌아갈 집이 있어서 마음 놓고 여행하는 것과 같다.
 
쓸데 없는 근심과 걱정에서 해방되고자
 
오늘도 한편의 글을 썼다. 재가수행자에게 주말은 없다. 토요일이나 일요일도 평일과 똑같다. 그것은 갈 곳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다면 갈 곳이 없어서 답답하겠지만 다행스럽게도 재가수행자에게는 갈 곳이 있다. 이런 것도 어쩌면 삶의 축복일 것이다.
 
오늘 경전을 읽다가 큰 것을 하나 배웠다. 늘 새기고 싶은 문구이다. 그것은 “어떠한 괴로움이 일어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욕망을 뿌리로 하고 욕망을 인연으로 하여 생겨난 것이다. 욕망이야말로 괴로움의 뿌리이기 때문이다.”(S42.11)라는 가르침이다. 이런 문구 하나라도 새겨 두고 있다면 삶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쓸데 없는 근심과 걱정, 비탄, 슬픔, 절망에서 해방될 것 같다.
 
 
2024-02-0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