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약설지자(略設知者)와 상설지자(常設知者)와 제도가능자

담마다사 이병욱 2024. 1. 27. 10:41

약설지자(略設知者)와 상설지자(常設知者)와 제도가능자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밤낮으로 읽고 있다. 위빠사나 수행자에게는 최고의 수행지침서이다. 이제까지 청정도론이 최고인줄 알았는데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자리를 물려 준 것 같다.
 
어제 저녁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다가 약설지자에 대한 대목에 이르러 내가 왜 더딘지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설법만 듣고서도 성자의 경지에 들어서는데 나는 그렇지 못한 것으로 보아 전생에 수행을 해보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었다.
 

 
흔히 생이지자(生而知者)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학이지자(學而知者)와 대비되는 말이다. 지혜는 타고남을 말한다. 학습으로 얻어지는 지식과는 다르게 태어날 때부터 지혜를 갖춘 자를 말한다.
 
유교에 생이지자가 있다면 불교에는 약설지자가 있다. 유교에 학이지자가 있다면 뷸교에는 제도가능자가 있다.
 
수행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수행할 인연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치 물가로 데려 갈 수 있으나 물을 먹일 수 없는 것과 같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따르면 세 가지 수행자 타입이 있다. 약설지자(略設知者), 상설지자(常設知者), 제도가능자를 말한다. 여기에서 약설지자와 상설지자는 타고난 지혜를 가진 자이다. 법문을 들으면 깨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제도가능자는 계, 정, 혜 삼학을 닦아야 한다.
 
약설지자와 상설지자는 생이지자와 같고 제도가능자는 학이지자와 같다. 타고난 지혜를 가진 자는 인연이 되면 곧바로 깨닫지만, 학습으로 지식을 배운 자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아마도 전생에 수행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로 판단할 수 있다.
 
약설지자와 상설지자와 제도가능자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간략한 언급으로 아는 자의 경(ugghaitaññūsutta)’(A4.133)을 보면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cattārome, bhikkhave, puggalā santo savijjamānā lokasmi. katame cattāro? ugghaitaññū, vipañcitaññū, neyyo, padaparamo — ime kho, bhikkhave, cattāro puggalā santo savijjamānā lokasmin”ti {pu. pa. 152 ādayo} . tatiya.
 
 
수행승들이여, 간략한 언급으로 아는자, 상세한 설명으로 아는 자, 지도를 필요로 하는 자, 말만을 최상으로 하는 자가 있다.”(A4.133)
 
 
경에 따르면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 1) 간략한 언급으로 아는자(ugghaitaññū), 즉 약설지자가 있고, 2) 상세한 설명으로 아는 자(vipañcitaññū), 즉 상설지자가 있고, 3) 지도를 필요로 하는 자(neyya), 즉 제도가능자가 있고, 4) 마지막으로 말만을 최상으로 하는 자(padaparama), 즉 제도불가능자가 있다.
 
주석에서는 네 종류의 사람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어떤 사람인가? 이는 “간략한 언급으로는 자는 변죽만 울려도 즉시 원리를 꿰뚫어 아는 자를 말한다. 상세한 설명으로 이는 자는 상세하게 의미를 분석을 할 때에 원리를 꿰뚫어 아는 자를 말하고, 지도를 필요로 하는 자는 설명하고 질문 그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키고 선지식에 의지하고 섬기고 공경하여 점차적으로 아는 자를 말하고, 말만을 최상으로 하는 자는 말만을 많이 배우고 많이 기억하고 많이 말하더라도 태생적으로 원리를 꿰뚫지 못하는 자를 말한다.”(Mrp.III.131)라는 설명으로 알 수 있다.
 
약설지자와 상설지자는 전생에 수행자로 살았을 것이다. 전생에 수행한 인연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수행을 완성하는 것이다. 반대로 제도가능자는 전생에 수행을 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래서일까 모든 것이 새롭다. 모두 처음 접해 보는 것이다. 마치 초등학교 단계부터 학습을 하듯이 계, 정, 혜 삼학을 공부하는 것이다.
 
약설지자와 상설지자와 제도가능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 먼저 약설지자와 상설지자에 대한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약설지자의 경우에는 아주 간략한 법문을 듣는 사이에 매우 빠르게 위빳사나 지혜, 도의 지혜들이 생겨난다. 따라서 사마타 선정에 자주 들어갈 기회가 없다. 자주 선정에 들어서 힘을 실어 줄 필요도 없다. 약설지자, 상설지자 두 종류의 사람은 모두 법을 듣는 사이에 위빳사나 지혜, 도의 지혜들이 생겨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계를 돌이켜 반조해서 힘을 실어 줄 필요도 없다. 설하는 사람과 설하는 법에 대해 존경하는 신심만으로 기쁨(pamojja), 희열(pīti) 등이 생겨나서 저절로 힘이 실어진다. 그래서 약설지자에게는 계와 사마타 선정이, 상설지자에게는 계가 ‘특별 히 도움을 준다. 특별히 적당하다’라고 설하지 않은 것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120-121쪽)
 
 
약설지자와 상설지자는 마치 생이지자처럼 타고난 지혜를 갖춘 자이다. 전생에 수행해 본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전생에 이미 선정수행을 했고 또한 계행도 청정했을 것이다. 이처럼 무탐, 무진, 무치라는 세 가지 원인으로 결생 했을 때 약설지자와 상설지자가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약설지자는 법문만 들어도 깨닫는다. 이에 대하여 “위빳사나 지혜, 도의 지혜들이 생겨난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아마 복습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전생에 이미 체험한 것을 이 생에서 다시 공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요즘 빠알리문법공부를 하고 있다. 3개월 과정 기초문법강의를 줌으로 듣고 있다. 외국어를 배울 때 문법은 필수이기 때문에 예습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듣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익혀야 한다. 그래서 교재 ‘빠알리 프라이머’를 예습하고 있다.
 
학습 할 때 예습하고 수업에 임하면 수월하다. 미리 다 공부한 것이기 때문에 확인만 하면 된다. 아마 약설지자와 상설지자는 전생에 이미 공부를 한 사람들일지 모른다. 간략한 법문만 들어도 위빠사나 지혜가 생겨나고 더 나아가 도와 과를 이루기 때문이다.
 
약설지자와 상설지자가 다른 점은 무엇일까? 지혜를 타고난 것에서는 차이가 없다. 다만 선정과 계에 대한 것은 다르다. 약설지자는 선정없이 곧바로 위빠사나 지혜가 생겨난다. 이는 계학과 정학이 이미 구족된 자이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상설지자는 계학만 구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정학과 혜학을 쌍으로 닦아야 한다.
 
제도가능자는 어떤 자를 말할까? 이는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알 수 있다.
 
 
제도가능자의 경우에는 오랫동안 수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가끔씩은 자신의 계를 반조해야 한다. 잘못한 것을 알게 되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후회를 잘하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때 당시에는 계가 청정하더라도 그 이전에 범했던 것을 상기해서 걱정하기도 한다. (그러한 걱정을 없애지 못하면 그러한 마음 불편함, 걱정 등으로 인해 위빳사나가 무너진다. 아주 오랫동안이든, 처음 수행을 시작해서든, 제가 청정한 것을 보고 알아야만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움이 생겨난다. 마음에 들고 흡족함이라는 기쁨(pāmojja), 희열(pīti)이 생겨난다. 마음의 편안함이라는 경안(passaddhi)도 생겨난다. 마음의 행복함(sukha)도 생겨난다. 마음의 행복 때문에 삼매(samādhi), 통찰지(paññā)들이 아주 강하게 생겨난다. 따라서 그 이전에 오랜 기간 동안이든, 수행을 갓 시작한 순간부터이든 우선 청정한 계가 제도가능자에게는 특별히 도움을 많이 준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120-121쪽)
 
 
제도가능자는 학이지자와 같다. 이 생에서 학습에 의해서 지혜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마치 초등학교를 다니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과 같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계, 정, 혜 삼학에서 계학부터 시작하여 정학과 혜학 모두를 다 닦는 것과 같다.
 
제도가능자는 오랫동안 수행해야 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약설지자는 고등학교 과정없이 막바로 대학과정을 공부하는 것과 같고, 상설지자는 중학교 과정없이 고등학교와 대학과정을 공부하는 것과 같다. 이에 반하여 제도가능자는 전생에 한번도 수행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초등학교, 중등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모두 거쳐서 대학과정을 공부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오랫동안 수행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는 약설지자, 상설지자, 제도가능자에 대한 여러 설명이 있다. 주석서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약설지자는 사마타가 선행하는 위빳사나가 적당하다. 제도가능자에게는 위빳사나가 선행하는 사마타가 적당하다. 상설지자에게는 쌍을 이루는 사마타-위빳사나 적당하다.”(NettiA, 212-213)
 
 
주석에 따르면 어느 경우에서든지 최종적으로 위빠사나를 닦아야 한다. 위빳사나를 닦지 않고서는 도와 과에 이를 수 없다. 다만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달리 한다.
 
약설지자는 사마타가 선행하는 위빠사나가 적당하다고 했다. 이미 전생에 사마타 수행을 했기 때문에 사마타가 선행한다고 했다. 상설지자는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쌍으로 닦는 것이 좋다고 했다. 전생에 계학이 완성된 것으로 본다.
 
전생에 전혀 수행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한다. 새로 시작할 때 사마타부터 닦아야 할까? 위빠사나부터 닦아야 할까? 주석서에 따르면 이번 생에 처음 수행하는 수행자는 위빠사나부터 닦아야 한다고 했다. 사마타는 나중에 닦아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제도가능자에게는 “위빳사나가 선행하는 사마타가 적당하다.”라고 했다.
 
나는 전생에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알 수 없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수행이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 전생에 수행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주석서에 따르면 처음부터 사마타 수행을 할 필요는 없다. 처음부터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되는 것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보면 희망이 있다. 전생에 수행자로 살지 않은 자도, 즉 지혜를 타고 나지 않은 범부도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지혜가 생겨날 수 있음을 말한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따르면 범부로서 올라 갈 수 있는 최상의 위빠사나 지혜는 11단계인 형성평온의 지혜이다.
 
제도가능자는 제도가능성이 있는 자를 말한다. 말을 물가로 데려 가면 물을 마실 수 있는 케이스에 해당된다. 약을 주면 약효가 있는 사람이 이에 해당된다. 최악은 약을 주어도 약발이 들지 않는 사람이다. 네 종류의 사람 중에서 말만을 최상으로 하는 자(padaparama), 즉 제도불가능자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약설지자와 상설지자와 제도가능자는 여러 가지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차이는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있다.
 
약설지자는 간략하게 설한 경이나 게송만 들어도 단번에 이해가 되어 도와 과에 이른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무아상경을 설했더니 거룩한 님(아라한)이 되었다는 문구를 보면 알 수 있다. 혜학만 닦으면 되는 것이다.
 
상설지자는 경전을 늘 들어야 도와 과에 이를 수 있다. 이는 전생에 공부가 부족해서 생긴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미 계행은 구족되었기 때문에 정학과 혜학을 쌍으로 닦는 것이다.
 
제도가능자는 전생에 공부가 전혀 되지 않은 자라고 볼 수 있다. 이번 생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접했을 때 잘 다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공부하기로 마음 먹었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 전생에 바라밀공덕을 쌓았기 때문일 것이다.
 
제도가능자는 시절인연이 있어서 이번 생에 공부하게 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기 때문에 계학, 정학, 혜학 이렇게 삼학을 닦아야 한다. 그래서 시간이 많이 걸린다.
 
사람마다 근기가 다르다. 마치 사람 얼굴이 모두 다르듯이, 마치 사람 성향이 모두 다르듯이 배움의 근기도 다른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도를 말했을 때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드물다. 상당수는 반신반의할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크게 웃어버릴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고 있다. 시절인연이 되어서일까 스스로 공부하고 있다. 이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다.
 
불교를 종교로 가진 것은 2004년도의 일이다. 그때 능인불교교양대학에 다닌 것이 시초가 되었다. 사십대 중반까지는 오로지 집과 직장만을 왕래했다. 그런 세월을 이십년 살았다.
 
늦게 불교에 입문했다. 처음에는 대승불교를 접했다. 불교는 본래 이런 것인 줄 알았다. 그러다가 초기불교를 알게 되었다. 마치 새로운 하늘과 땅이 열리는 것 같았다. 2009년 이후 오로지 초기불교만 공부하는 세월을 살게 되었다.
 
나는 전생에 불교와 인연이 있었을까? 그것은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중학교 때 불교학교를 다녔다는 사실이다. 그때 당시 종로구 연지동에 있었던 동대부중에 배정받은 것이다.
 
중학교 때 배운 불교가 인연이 되었다. 결국 사십대 중반에 불교를 다시 접하게 되었다. 이후 지금까지 20년동안 오로지 불교에 올인하고 있다. 이런 것도 불교와의 인연에 해당될 것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다 보면 나는 제도가능자에 해당된다. 일단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경전과 논서를 읽고 더구나 개인수행까지 하는 것을 보면 제도가능자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약설지자나 상설지자는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위빠사나 지혜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잘 될 수가 없다. 첫 숟가락에 배부를 수 없다. 이제 시작했으니 지금부터 시작이다. 이번 생에 도와 과에 이르지 못하면 다음 생을 기약해야 한다. 이번 생에 발판이라도 마련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다음 생에는 약설지자 또는 상설지자로 시작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2024-01-2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