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안수정등(岸樹井藤) 모티브가 되는 경을 발견하고

담마다사 이병욱 2024. 1. 17. 10:19

안수정등(岸樹井藤) 모티브가 되는 경을 발견하고
 
 
새해 17일 되었다. 조금 지나면 1월이 다 간다. 일년 365일에서 4%가 지난 것이다. 나의 새해 결심은 흔들림 없는가?
 
매년 맞는 새해이다. 예전에는 새해맞이 결심이 없었다. 올해부터는 결심한 것이 있다. 그것은 부끄러움 없이 사는 것이다. 자신을 속이지 않고 사는 것이다.
 
네 가지 일상은 잘 돌아 가고 있다. 글쓰기 일상, 좌선하기 일상, 빠알리공부하기 일상, 경전과 논서 보기 일상을 말한다. 작년에 이어 새해에서도 밥 먹듯이 하는 일상이다.
 
나이 들어서 공부하기가 쉽지 않다. 매일 꾸준히 하지 않으면 도중에 그만 두고 만다. 관성에 따른 것이다. 반대로 매일 밥 먹듯이 공부하면 역시 관성에 의해서 계속하게 된다.
 
윤회의 바다에서 빠져서
 
대부분 사람들은 나이 들어 공부하지 않는다. 공부가 다 된 사람처럼 살아간다. 그러나 대부분 감각을 즐기며 살아간다. 주로 먹는 것을 즐긴다. 술로 세월을 사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시각으로 인식되는 형상들은 훌륭하고 아름답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자극하고 애착의 대상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이 거룩한 이의 규범에는 바다라고 한다.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는 대부분 침몰하 여 실타래처럼 엉키고, 종기로 덮인 것과 같고, 갈대나 골풀과 같이 되어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곳으로 태어나는 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S35.229)
 
 
대부분 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고 했다. 왜 그런가? 여섯 가지 감역에서 애착의 대상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시각이나 청각 등 여섯 감역은 바다와 같은 것이어서 윤회의 바다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바다는 감각 영역의 바다이다. 시각으로 아름다운 형상을 보았을 때 감각적 욕망을 즐긴다면 시각의 바다에 빠진 것이다. 그런데 그 바다에는 파도와 소용돌이와 상어와 나찰과 같은 무서운 것이 있다고 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시각의 바다, 청각의 바다 등 여섯 감역의 바다에서 빠져 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은 윤회의 바다에서 탈출한다. 어떻게 탈출하는가?
 
중학교 때 불교학교에서
 
중학교 때 불교학교에 다녔다. 동대부중을 말한다. 그때 1973년에 속된 말로 뺑뺑이로 들어간 것이다. 학교는 종로5가 가까이에 있는 연지동에 있었다. 지금은 동대문구로 이사 갔다.
 
불교학교에서는 일주일에 한시간 불교시간이 있었다. 그때 불교선생, 즉 교법사는 조용길 선생이었다. 조용길 선생이 말한 것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조용길 선생은 칠판에 그림을 그렸다. 구덩이 빠진 자가 줄을 잡고 꿀을 핥아 먹고 있는 그림이다.
 
구덩이 아래에는 네 마리의 독사가 있었다. 줄은 곧 끊어질 것 같았다. 두 마리의 쥐가 갉아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용길 선생은 그림을 그려 가며 실감나게 이야기 했다. 이야기를 듣자 갑갑한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는 것이다. 참으로 답답했었다. 중학교 1학년 어린 학생의 마음에 ‘삶이란 무엇인가?’라며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수정등(岸樹井藤)이야기
 
세월이 흘렀다. 중학교 때 나를 갑갑하게 만들었던 이야기는 나중에 알고 보니 안수정등(岸樹井藤)이야기였던 것이다. 참고로 안수정등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岸樹井藤)
 
한 나그네가 광야를 거닐다가 코끼리를 만나 도망치고 있었다.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인 눈빛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고 있다. 마을은 아득하고 나무 위건 돌 틈이건 안전한 곳은 없다. 숨을 곳을 찾아 사방으로 내달리다 겨우 발견한 곳이 바닥이 말라버린 우물이다.
 
저곳이면 그래도 괜찮겠지, 우물 곁 등나무 뿌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다가 그는 다시 소스라치게 놀랐다. 컴컴한 바닥에 시커먼 독룡이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서야 먹잇감을 노리며 사방에서 혀를 널름거리는 네 마리의 독사가 눈에 들어왔다. 다시 위로 올라가야 할까, 그는 하얗게 질려버렸다. 쫓아온 코끼리가 코를 높이 치켜들고 포효하고 있었다. 올라오기만 하면 밟아버릴 태세다.
 
믿을 것이라고는 가느다란 등나무 뿌리 한 줄기뿐이다. 그러나 그 뿌리마저 흰 쥐와 검은 쥐가 나타나 번갈아가며 갉아먹고 있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 두려움과 공포에 질린 얼굴 위로 무언가 떨어져 입으로 흘러들었다. 꿀이었다. 등나무 덩굴 위에 벌집이 있었던 것이다. 똑, 똑, 똑, 똑, 똑, 다섯 방울의 달콤함과 감미로움에 취해 그는 눈을 감아버렸다.
 
바람에 나무가 흔들릴 때마다 벌들이 쏟아져 나와 온몸을 쏘아대고, 두 마리 쥐가 쉬지 않고 뿌리를 갉아먹고, 사방에서 독사들이 쉭쉭거리고, 사나운 들불이 일어나 광야를 태우는 데도 그는 눈을 꼭 감고 바람이 다시 불기만 기다렸다. 다섯 방울의 꿀맛만 기억하고, 그 맛을 다시 볼 순간만 기약한 채 그는 모든 고통과 두려움을 잊고 있었다. 나의 삶도 이 나그네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岸樹井藤, 불설비유경, 부처님 생애, 조계종 교육원)
 
 
안수정등이야기에 대한 해설이 있다. 광야는 사바세계를 말하고, 사나운 코끼리는 세월의 덧없음을 말하고, 우물은 우리가 처한 삶의 현장을 말하고, 등나무 덩굴은 생명줄을 말하고, 흰 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을 말하고, 네 마리 독사는 사대를 말하고, 들불은 늙음과 병고를 말하고, 우물바닥은 오욕락을 말한다.
 
안수정등의 모티브가 되는 경을 발견했는데
 
중학교 1학년 때 덩굴줄의 비유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갑갑했다. 앞으로 갈 수 없고 뒤로도 갈 수 없어서 꽉 막힌 것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것이다. 이렇게 마음이 들자 사는 것이 의미가 없어졌다.
 
중학교 때 답답했던 마음은 해결되지 않았다. 중학교를 졸업하자 잊어 버렸다. 그러나 때때로 그 상황이 떠 올랐다.
 
세월이 수십년 흘렀다. 중학교를 졸업한지 31년 만에 불교교양대학에 입학했다. 2004년3월의 일이다. 정식으로 불자가 된 것이다. 이전에는 정서적 불자였다.
 
불자가 되고 나서부터 불교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원장스님의 강의를 듣고 이해 했다. 불교교양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부터는 스스로 공부했다.
 
처음에는 대승으로 시작했다.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절했다. 신묘장구대다라니 108독 철야기도회도 참석했다. 그러다가 초기불교를 알게 되었다. 2009년 이후 초기불교만 공부하게 되었다.
 
며칠 전에 머리맡에 상윳따니까야를 읽다가 안수정등과 유사한 내용을 발견했다. 어쩌면 대승경전 불설비유경에 실려 있는 안수정등의 모티브가 되는 경인지 모른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면 그 사람은 광채가 치열하고 맹독을 내뿜는 네 마리의 뱀을 두려워하고 다섯 명의 살인자인 원수를 두려워하고 여섯 번째의 칼을 뽑아든 강도 살인자를 두려워하고 마을을 약탈하는 도둑들을 두려워하여 여기저기로 도망가다, 거기서 크고 넓은 물을 만났는데, 이 언덕은 공포와 위험으로 가득하고 저 언덕은 안온과 평화로 가득 찼으나 타고 건너야 할 배나 걸어서 왕래할 수 있는 다리가 없는 것을 보았다고 하자.”(S35.238)
 
 
이 가르침은 상윳따니까야 ‘독사뱀의 비유에 대한 경 (Āsīvisopama Sutta)’(S35.238)에 실려 있다.
 
경에서는 네 마리 뱀이 등장한다. 이는 안수정등에서 네 마리 독사와 일치한다. 경에 따르면 “네 마리의 뱀은 네 가지 광대한 존재, 즉 땅의 세계, 물의 세계, 불의 세계, 바람의 세계를 말한다.”(S35.238)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불설비유경의 해설과 일치한다.
 
경에서는 다섯 명의 살인자가 등장한다. 이에 대하여 “다섯 명의 살인자인 원수는 존재의 집착다발, 즉 물질의 집착다발, 느낌의 집착다발, 지각의 집착다발, 형성의 집착다발, 의식의 집착다발을 말한다.”(S35.238)라고 했다. 불설비유경에서는 이런 내용은 없다.
 
경에서는 살인 강도가 등장한다. 이에 대하여 “여섯 번째의 칼을 든 살인 강도는 환락과 탐욕을 말한다.”(S35.238)라고 했다. 불설비유경에는 없는 내용이다.
 
경에서는 마을이 등장한다. 이에 대하여 “텅 빈 마을이라는 것은 여섯 가지 내적인 감역을 말한다.”(S35.238)라고 했다. 이 말 역시 불설비유경에는 없는 내용이다.
 
경에서는 도둑이 등장한다. 이에 대하여 “마을을 약탈하는 도둑이라는 것은 여섯 가지 외적인 감역을 말한다.”(S35.238)라고 했다. 이 말 또한 불설비유경에는 없는 내용이다.
 
불설비유경에서는 길을 가는 나그네가 등장한다. 그런데 ‘독사뱀의 비유에 대한 경’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 되어 있다. 이는 “삶을 바라고 죽음을 원하지 않고 즐거움을 바라고 괴로움을 싫어하는 한 사람”(S35.238)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가르침을 모르는 일반사람들은
 
대부분 사람들은 행복을 바란다. 그런데 일반사람들에게 있어서 행복은 감각적 즐거움과 동의어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행복이 계속 되기를 바란다. 그것도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란다. 이는 다름아닌 탐욕이다. 그리고 영원주의적 관점이다.
 
행복을 추구하면 영원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 행복은 즐거운 것이고, 즐거운 것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은 욕망에 기인한다. 감각적 욕망으로 살아가는 세상사람들은 탐, 진, 치로 살아 갈 수밖에 없다.
 
부처님 가르침을 모르는 일반사람들은 우물에 빠진 자와 같다. 그래서 불설비유경에서는 “광야는 사바세계를 말하고, 사나운 코끼리는 세월의 덧없음을 말하고, 우물은 우리가 처한 삶의 현장을 말하고, 등나무 덩굴은 생명줄을 말하고, 흰 쥐와 검은 쥐는 낮과 밤을 말하고, 네 마리 독사는 사대를 말하고, 들불은 늙음과 병고를 말하고, 우물바닥은 오욕락을 말한다.”라고 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는 일반사람들은 쫓기는 신세와도 같다. 그래서 네 마리의 뱀, 다섯 명의 살인자, 여섯 번째의 칼을 든 살인 강도, 텅 빈 마을, 마을을 약탈하는 도둑이 등장한다.
 
불설비유경의 안수정등과 ‘독사뱀의 비유에 대한 경’에서는 감각을 즐기며 살아가는 일반사람들의 모습을 여러 비유로 보여 주고 있다. 전자는 우물에 빠진 것으로 묘사 되어 있고, 후자는 쫓기는 신세로 표현되어 있다.
 
저 언덕으로 건너 가는 방법에 대하여
 
중학교 때 안수정등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답답했다. 왜 그랬을까? 문제만 제기하고 답을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수정등이야기가 실려 있는 불설비유경에는 어떤 결론이 있을까?
 
안수정등을 키워드로 하여 검색해 보았다. 한역으로 되어 있는 경을 발견했다. 삼장법사가 현장스님이 번역한 한역이다. 비유한 것에 대한 설명이 있지만 답답한 마음을 풀어 줄만한 인상적인 구절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오욕에 집착없어야 비로소 해탈한 사람”이라는 등의 말은 있다.
 
상윳따니까야에도 안수정등과 유사한 가르침이 있다. 그런데 문제제기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빠져 나오는 방법이 설명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인 것?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면 그 사람은 이와 같이 ‘여기 커다란 물이 있는데 이 언덕은 위험하고 두렵고 저 언덕은 안온하고 두려움이 없지 만이 언덕으로부터 저 언덕으로 가는 나룻배도 없고 다리도 없다. 내가 풀과 나무와 가지와 잎사귀를 모아서 뗏목을 엮어서 그 뗏목에 의지하여 두 손과 두 발로 노력해서 안전하게 저 언덕으로 건너가면 어떨까?’라고 생각할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그래서 그 사람은 풀과 나무와 가지와 잎사귀를 모 아서 뗏목을 엮어서 그 뗏목에 의지하여 두 손과 두 발로 노력해서 안전하게 저 언덕으로 건너갔다면, 건너서 저 언덕으로 가서 거룩한 이로서 땅 위에 섰을 것이다.”(S35.238)
 

 

 
경에서는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 가는 방법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해 놓았다. 이는 우물에 빠진 자가 탈출할 수 있는 방법과도 같은 것이다.
 
경에서 커다란 물이 있다. 이에 대하여 “커다란 물이라는 것은 네 가지의 거센 흐름, 즉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거센 흐름, 존재의 거센 흐름, 견해의 거센 흐름, 무명의 거센 흐름을 말한다.”(S35.238)라고 했다.
 
경에서 이 언덕이 있다. 이에 대하여 “두렵고 위험한 이 언덕이라는 것은 바로 개체를 말한다.”(S35.238)라고 했다. 이는 오온으로 이루어진 개인의 정체성을 말한다.
 
경에서 저 언덕이 있다. 이에 대하여 “안온하고 평온한 저 언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열반을 말한다.”(S35.238)라고 했다.
 
경에서 뗏목이 있다. 이에 대하여 “뗏목이라는 것은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S35.238)라고 했다. 뗏목은 팔정도를 말하는 것이다.
 
경에서 두 손과 두 발이 있다. 이에 대하여 “두 손과 두 발로 노력한다는 것은 바로 정진과 노력을 말한다.”(S35.238)라고 했다.
 
경에서 건너간 자가 나온다. 이에 대하여 “ ‘건너서 피안으로 가서 땅 위에 서 있는 거룩한 님’이라는 것은 아라한을 말한다.”(S35.238)라고 했다.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중학교 때 갑갑했었던 마음이 지금 풀린 것이다. 무려 51년 만에 풀렸다. 불교에 입문한지 20년만에 풀렸다. 안수정등, 우물에 빠진 사나이가 어떻게 빠져 나갈 수 있는 것에 대한 의문이 풀린 것이다.
 
두 손과 두 발로 노력해서
 
어떤 철학자는 건너가자고 말한다. 여기에 머물지 말고 저기로 건너가자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초월’이다.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기가 쉽지 않다. 단지 작은 하천을 건너가는 것이 아니다. 한강과도 같은 너른 강도 아니다. 마치 바다와 같은 큰 강을 건너야 한다.
 
인도에서 갠지스 강은 우기에 매우 넓다. 주석에 따르면 1요자나의 거리라고 했다. 이는 14키로 정도 되는 거리에 해당된다. 폭우가 쏟아지면 소용돌이 치는 거센 흐름이 된다.
 
바다와 같이 큰 강을 건너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건너 가는 것을 포기한다. 그럼에도 건너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이에 대하여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에서는  “사람이 뗏목을 엮는 사이에 다리를 만들어 늪지를 떠나서 바다와 하천을 건너는 사람들, 그들은 지혜로운 자, 건너는 자들이네.”(D16.33)라고 했다
 
저 언덕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언덕이 아니다. 아득히 먼 곳에 있는 소용돌이 치는 거센 물살이 있는 바다와 같은 강을 말한다. 헤엄쳐서는 건널 수 없다. 뗏목을 만들어서 건너야 한다. 그래서 “그 사람은 풀과 나무와 가지와 잎사귀를 모아서 뗏목을 엮어서 그 뗏목에 의지하여 두 손과 두 발로 노력해서 안전하게 저 언덕으로 건너갔다.”(M22)라고 했다.
 
저 언덕을 피안이라고 한다. 도달하기 힘든 곳을 말한다. 그런데 저 언덕으로 건너 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저 언덕에 건너 가서 우뚝 선 자라고 했다. 아라한을 말한다.
 
저 언덕은 뗏목을 타고 건너가야 한다. 여기서 뗏목은 팔정도를 의미한다. 그런데 두 손과 두 발로 노력해서 간다고 했다. 이는 정진을 말한다.
 
저 언덕에 우뚝 서려면 정진이 있어야 한다. 노력 없이 초월할 수 없다. 그래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에 대하여 ‘초월의 길’이라고도 한다.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 가는 것은 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 죽기살기로 정진하지 않으면 결코 넘어갈 수 없다. 그래서 열 가지 빠라미(parami)에 대하여 열 가지 초월의 길이라고 말한다.
 
죽기살기로 저 언덕으로 건너 가야
 
 새해가 16일 지났다. 오늘로 17일 째이다. 내일 성도절은 내 생일이다. 오늘까지 새해 다짐한 것이 변함 없다. 조금 있으면 월말이 될 것이다. 일년에서 십이분의 일이 지나갈 것이다. 그때도 다짐이 변함 없다면 성공이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다. 삼일을 견디면 관성에 의하여 육일 갈 것이다. 한달을 버티면 두 달이 갈 것이다. 한해를 잘 보낸다면 역시 관성에 의해서 삼년이 잘 지나 갈 것이다.
 
매일 밥 먹듯이 하는 것이 있다. 요즘 일상은 매일 글 한편 쓰기, 매일 오전에 한시간 좌선하기, 매일 한시간 이상 빠알리어 공부하기, 매일 잠자기 전과 잠에서 깨어 났을 때 머리맡에 있는 경전과 논서를 읽는 것이다.
 
매일 네 가지 서브루틴을 실행하고 있다. 작년부터 해 오던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해야 할 것이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해야 할 일이다.
 
사람들은 나이를 먹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일 밖에 하지 않는 듯 하다. 마치 축생과도 같은 삶이다. 자신을 향상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입구와 출구가 있는 유기체(有機體), 즉 단백질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삶의 방향은 정해졌다. 이제 주욱 그 길로 나아가면 된다. 가르침의 뗏목을 타고 나아가는 것이다. 두 손과 두 발로 노력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저 언덕으로 가는 것이다.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야 한다. 소용돌이 치는 거센 물살을 헤쳐 나가야 한다. 마치 우물에 빠진 자가 우물에서 벗어 나오듯이 빠져 나와야 한다. 살인자에게 쫓아 오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달아나야 한다. 죽기살기로 저 언덕으로 건너 가야 한다.
 
 
2024-01-1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