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나게 추운 아침에
세상이 꽁꽁 얼었다. 어제에 이어서 영하 십도의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오늘 아침 안양천 징검다리를 건널 때 하천이 얼기 시작했다.
날씨가 추울 때 견디기 힘든 사람들이 있다. 가난한 자들과 아픈 사람들은 힘든 계절이다. 가진 것도 없고 더구나 몸이 아플 때 눈물 날 것이다.
지난달 백권당 관리비 고지서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해마다 꾸준히 난방비가 오르고 있는데 이번에는 심한 것 같다. 관리비가 임대료보다 더 높게 나왔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작년에 이어 두 번째이다.
추위가 극성일 때 따뜻한 나라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이들은 태국 치앙마이와 같은 따뜻한 나라에서 겨울 한철을 보낸다. 세상에 가장 편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나날을 보낼 때 부러움을 너머 시기와 질투를 야기할지 모른다.
지금은 힘든 시기이다. 눈물 날 정도 힘든 날에도 한가닥 희망은 있다. 그것은 봄이다. 지금 이 추위도 따뜻한 봄이 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잊어 버릴 것이다.
작년 여름은 더웠다. 열대야는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여름 밤에 잠 못 이루는 날이 지속되었을 때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런데 열대야의 괴로움은 정신적 상처로 남아 가을이 지나도록 가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 추위가 절정이다. 눈물 날 정도로 추운 날이 지속되다 보니 끔찍했던 열대야는 더 이상 트라우마가 되지 않았다. 극이 극을 몰아낸 것 같다.
“도와 과를 이루십시오.”
추울 때나 더울 때나 한결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열정이다. 열대의 밤일 때나 눈물 날 정도로 추운 이 때나 머리맡에서 매일 본 것이 있다. 그것은 위빳사나수행방법론이다.
매일 위빳사나수행방법론을 읽는다. 두 번째 읽는다. 이미 한번 완독 했다. 1년 2개월에 걸쳐서 다 읽은 것이다. 그럼에도 한번 더 읽는다. 그것은 읽을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위빳사나수행방법론을 새겨 읽었다. 매일 조금씩 두세 페이지 진도를 나가면서 뼈속까지 기억하고자 했다. 어느 한 구절 놓칠 수가 없다. 금과옥조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오늘 새벽에 읽은 것은 도와 과에 대한 것이다. 계청정에서 도와 과를 이룰 수 있는 조건에 대한 설명을 읽었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도와 과를 이루십시오.”라는 말이다. 마치 대승불교에서 불자들이 “성불하십시오.”라고 말하는 덕담과도 같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목적중의 하나는 도와 과를 이루는 것이다. 이는 사향사과의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런데 사향사과는 열반을 이루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열반의 경지를 체험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열반이다. 불교인들이 수행하는 목적은 아홉 가지 출세간법을 이루기 위한 것인데 열반이 바탕이 된다.
도와 과에 장애가 되는 것이 있는데
도와 과는 열반을 체험하는 것이다. 열반을 체험해야 사향사과의 성자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위빳사수행방법론에서 계청정에 대한 것을 보니 도와 과를 얻을 수 없는 다섯 가지 장애가 있다고 했다. 이는 1) 업 장애, 2) 번뇌 장애, 3)과보 장애, 4) 성자비방 장애, 5) 명령어김 장애를 말한다.
도와 과를 이루는데 방해가 되는 장애 중에서 ‘과보 장애(vipākantara)’가 있다. 과보 장애란 무엇일까? 위빳사나수행방법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원인 없는 재생연결로 태어난 것, 두 가지 원인을 가진 재생 연결로 태어난 것을 과보 장애라고 한다. 이것은 도의 장애에만 해당된다. 천상의 장애는 아니다. ‘이렇게 원인 없는 재생연결, 두 가지 원인을 가진 재생연결로 태어난 이는 태어날 때 지혜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도와 과를 얻을 수 없다. 하지만 선업이 있으면 사람이나 욕계천신으로 태어날 수 있다’라고 알아야 한다.”(위빳사나수행방법론 1권, 104쪽)
이 글을 보면 비관적 느낌이 든다. 현재 수행한다고 앉아 있는데 나에게는 해당되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도와 과를 이루기 위한 지혜의 씨앗이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흔히 이런 말을 듣는다. 종종 유튜브에서 법문을 듣다 보면 “이번 생에서 한 수행하는 사람들은 전생에서 수행한 사람들입니다.”라는 말이다. 이런 말을 들을 때 맥 빠진다. 나에게는 해당되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위빳사나수행방법론에 따르면 이번 생에 도와 과를 이루는 자는 전생에 수행자로 살았음에 틀림 없다. 전생에 수행하면서 지혜의 종자를 심어 놓았기 때문에 그것을 원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그 지혜의 종자로 인하여 이번 생에서 수행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윤회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일부 스님들도 윤회를 믿지 않는다. 오로지 보이는 것만 믿는 것 같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업도 있는 것이 된다.
업이 있으면 윤회가 있을 수밖에 없다. 놀랍게도 마하시 사야도는 위빳사나수행방법론에서 윤회를 인정했다. 이는 과보 장애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지혜종자를 가지고 태어나야 이번 생에 도와 과를 이룰 수 있음을 말한다.
지혜의 씨앗, 지혜종자가 없으면 이번 생에 도와 과를 이루기 힘들다고 했다. 이런 말은 마하시사야도만 말한 것이 아니다. 청정도론에도 실려 있다. 청정도론 계청정과 관련된 것을 보면 “지혜를 갖춘 자는 세 가지 원인에 의한 업생적 결생의 지혜로 지혜를 갖춘 자이다.”(Vism.1.7)라고 했기 때문이다.
지혜종자를 갖추어야만 이번 생에 도와 과를
지혜종자를 갖추어야만 이번 생에 도와 과를 이룰 수 있다. 마하시 사야도가 위빳사나수행방법론에서 언급한 것이다. 청정도론에도 똑 같은 내용이 있다. 그런데 청정도론은 니까야 주석서이기도 하기 때문에 경전에도 이런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도 알 수 있다.
Sīle patiṭṭhāya naro sapañño,
cittaṃ paññañca bhāvayaṃ;
Ātāpī nipako bhikkhu,
so imaṃ vijaṭaye jaṭaṃ.
“계행을 확립하고 지혜를 갖춘 사람이
선정과 지혜를 닦네.
열심히 노력하고 슬기로운 수행승이라면,
이 매듭을 풀 수 있으리.”(S1.23)
이 짧은 게송은 청정도론의 주제가 된다. 그래서 청정도론 시작에도 나오고 끝에도 나온다. 이는 계, 정, 혜 삼학에 대한 것이다. 핵심은 “지혜를 갖춘 사람 (naro sapañño)”라는 말이다.
이 게송은 부처님이 하늘사람과 대화에서 말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안팍으로 매듭을 풀 수 있는지에 대하여 물어 본 것에 대한 답이다. 부처님은 분명히 “나로 사빤뇨” 즉, 지혜를 갖춘 자만이 얼키고 설킨 윤회의 매듭을 풀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지혜를 갖춘 자는 어떤 자일까? 이는 나로 사빤뇨(sapañño)라는 빠알리어를 풀이해 보면 알 수 있다. 사빤뇨라는 말은 사빤냐(sapañña)의 복수형이다. 사빤냐는 ‘지혜를 잘 구족한 자’라는 뜻이다. 한역으로는 유혜자(有慧者)가 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태어나면서부터 지혜를 갖춘 자라는 뜻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생이지자(生而知者)가 되는 것이다.
사빤냐는 유혜자 또는 생이지자라고 볼 수 있다. 지혜의 종자, 지혜의 씨앗을 가지고 태어난 자를 말한다. 이는 전생에 지혜의 씨를 뿌려 놓은 것이다. 전생에 행자로 산 것이다.
전생에 수행자로 산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 수행자로 살아가기 쉽다. 마치 전생에 화가로 산 사람이 현생에서 화가로 사는 것과 같고, 전생에 음악가로 산 사람이 음악적 재능을 가지는 것과 같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지혜를 갖춘 사람이 선정과 지혜를 닦네.”(S1.23)라고 한 것이다.
무탐, 무진, 무치라는 세 가지 원인
아비담마 이론에 따르면 현생에서 도와 과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세 가지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했다. 그것은 무탐, 무진, 무치라는 세 가지 원인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선업과보에 대한 것이다.
흔히 착하게 살라는 말을 한다. 더 좋은 말은 지혜롭게 사는 것이다. 착하게 사는 것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은 지혜롭게 사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착하게 사는 것 이상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지혜롭게 사는 것이다. 착하게만 산다면 두 가지 원인 즉 무탐과 무진만 갖추는 것이 된다. 지혜롭게 산다면 무탐과 무진에다 무치가 하나 더 추가 되는 것과 같다.
불교를 지혜의 종교라고 한다. 착하게만 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혜를 갖추라고 말한다. 그런데 불교의 지혜는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지혜와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지혜를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깨달음은 단번에 성취되지 않는다. 깨달음은 단계적으로 성취된다. 이번 생에 깨닫지 못했으면 다음 생으로 넘어간다.
이번 생에 도와 과를 이루려거든 전생에 지혜수행을 했어야 한다. 전생에 지혜수행을 하지 않은 자가 이번 생에서 도와 과를 이룰 수 없다. 이는 경전에서 게송으로도 언급되어 있고, 청정도론에도 언급되어 있고,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전생에 수행자로 산 사람은 무탐, 무진, 무치라는 세 가지 원인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는 지혜종자가 있는 것이다. 지혜의 씨앗이 있어서 이번 생에 수행자로 살면 싹이 나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지혜종자가 없으면 도와 과를 이룰 수 없다.
정말 법문 듣는 것만으로도 도와 과를 이룰 수 있을까?
법구경 인연담을 보면 부처님이 설법할 때 도와 과를 이루었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전생에 지혜수행을 했을 것이다. 지혜의 종자가 심어져 있었기 때문에 한번 들으면 그것을 인연으로 도와 과를 얻는 것이다.
정말 법문 듣는 것만으로도 도와 과를 이룰 수 있을까? 이런 의문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산따띠 장관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재가자 산따띠 장관이 부처님 설법을 듣고 아라한이 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다음과 같다.
“단지 법문을 듣는 것만으로 도와 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법문을 들으면서 물질과 정신을 관찰하고 새기며 위빳사나 지혜, 도와 과의 지혜가 차례로 생겨나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 되었다고 알아야 한다.”라고 했다.” (위빳사나수행방법론 1권, 108쪽)
부처님 설법만을 듣고 도와 과를 이룬다는 말은 많다. 법구경 인연담을 보면 “이 가르침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흐름에 든 경지를 성취했다.”(DhpA.III.259)라고 설명되어 있다. 법문을 들으면서 물질과 정신을 관찰하고 새기며 위빳사나 지혜, 도와 과의 지혜가 차례로 생겨난 것을 의미한다.
도와 과는 우리 몸과 마음을 관찰하지 않고서는 생겨날 수 없다. 부처님 법문을 듣는 도중에 도와 과가 이루어지는 것은 그 짧은 시간에 물질과 정신을 관찰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무상, 고, 무아의 지혜를 말한다. 그래서 대념처경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게송을 듣고 도와 과에 이르렀다고 해도 몸, 느낌, 마음, 법 중에 어느 한 법이라도 고찰하지 않고서는, 관찰하고 새기기 않고서는 통찰지수행(pañña bhāvana)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산따띠 장관이나 빠따짜라 여인도 이 새김확립이라고 하는 길, 방법, 도에 의해 슬픔과 비탄을 극복했다고 알아야 한다.”(DA.ii.339, 위빳사나수행방법론 1권, 108쪽
재가자 산따띠 장관은 부처님 설법을 듣고 아라한이 되었다. 아기를 잃은 빠따짜라 여인은 부처님 설법을 듣고 수다원이 되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 설법을 듣고 지혜의 눈이 열린 것이다.
부처님이 최초로 설법할 때 꼰당냐는 수다원이 되었다. 이는“생겨난 모든 것은 소멸되기 마련이다.”(S56.11)라며 지혜의 눈이 생긴 것과 같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경우에서든지 몸과 마음을 관찰하여 도와 과에 이르렀음을 말한다. 그것은 몸, 느낌, 마음, 법 중에 하나를 새기는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더 이상 슬퍼하지 않는다
대념처경을 보면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이다. 이는 “이것이 뭇삶을 청정하게 하고, 슬픔과 비탄을 뛰어넘게 하고, 고통과 근심을 소멸하게 하고”(D22)라는 말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도와 과를 이루면 더 이상 슬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 무척 추운 날씨이다. 백권당에서 이렇게 자판을 두들기고 있을 때 더 이상 춥지 않다. 이 순간만큼은 더 이상 근심이나 슬픔은 없다. 이것은 위대한 부처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사람들은 감각적 즐거움에 목숨을 건다. 그래서 “죽어도 좋아!”라고 말한다. 그러나 도만 못할 것이다. 도를 이루면 오늘 죽어도 좋다. 그래서 “오늘 아침 도를 이루면 내일 죽어도 좋은 것이다. 그래서 “최상의 원리를 보지 못하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최상의 원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5)라고 했다.
2024-01-2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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