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그렇네” “그렇군” “그랬구나”라며 작용심(作用心: kiriya citta)만 있으면

담마다사 이병욱 2024. 1. 20. 12:33

그렇네” “그렇군” “그랬구나”라며 작용심(作用心: kiriya citta)만 있으면
 
 
한잔의 커피가 향기롭다. 커피는 맛과 향으로 마신다. 커피는 온몸으로도 마신다. 목구멍을 넘기는 순간 충만하게 만든다. 따스한 원두 커피 한잔에 행복해졌다. 이 느낌을 영원히 지속할 수는 없는 것일까?
 
오늘 아침 컨디션은 좋다. 몸과 마음이 편안하니 날아 갈 듯 하다. 백권당으로 향하는 아침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안양천 징검다리를 건널 때 흰 백로가 날아 오른다. 추운 겨울이지만 평화로운 광경이다. 이 행복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는 것일까?
 

 
누구나 행복을 바란다. 지금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계속 지속되기를 바란다. 지금 괴로운 사람은 이 괴로움에서 한시바삐 벗어나서 행복한 상태가 되고자 한다.
 
사람들은 행복을 말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이란 무엇일까? 아마 그것은 소소한 행복이기 쉽다. 소확행, 즉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바라는 것인지 모른다. 자신과 가족의 안위가 가장 클 것이다.
 
행복은 일시적 즐거운 느낌에 지나지 않는 것
 
행복이라는 말의 다른 명칭은 ‘즐거움’이다. 이렇게 본다면 행복과 즐거움은 동의어이다. 왜 행복이 즐거움인가? 그것은 오욕락에서 찾을 수 있다.
 
아침에 커피 한잔 마시는 것도 행복이고 몸과 마음도 편안한 것도 행복이다. 행복은 즐거운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영원하지 않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행복은 조건이 바뀌면 변한다. 지금 즐거운 느낌도 상황이 바뀌면 괴로움으로 바뀐다. 마치 아기가 웃다가 울다가 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은 일시적 행복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은 즐거움에 대한 것이다. 이런 즐거운 느낌은 오래가지 못한다. 조건이 바뀌면 언제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일시적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행복해지고자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은 일시적인 행복한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행복이라고 말하지만 조건만 바뀌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변덕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행복을 찾는다.
 
부처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수행승
 
 
행복은 즐거운 느낌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느낌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는 느낌을 말한다. 이 세 가지 느낌은 초기경전 도처에 나온다.
 
세 가지 느낌 중에서 잘 느껴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는 느낌을 말한다. 이를 덤덤한 느낌, 무덤덤한 느낌이라고 말한다. 느껴지지 않는 느낌도 느낌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무덤덤한 느낌을 최상의 느낌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 빤짜강가라는 수행승이 있었다. 수행승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행복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우다인 존자에게 말했다.
 
 
존자 우다인이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종류의 느낌에 관해 설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존께서는 두 가지 종류의 느낌, 곧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에 관해 설하셨습니다. 존자 우다인이여, 세존께서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고요하고 미묘한 즐거움 이라고 설하셨습니다.”(S36.19)
 
 
수행승 빤짜강가는 부처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이는 무덤덤한 느낌에 대한 것이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 즉 중립적인 느낌에 대하여 고요하고 미묘한 즐거움이라고 최상의 느낌으로 본 것이다.
 
칠식(七識)과 팔식(八識)은 없다
 
부처님 당시 일부 제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것 같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M38)’에 따르면 어부의 아들 사띠(sati)라는 수행승이 부처님에게 들은 것이라면서 “의식이 유전하고 윤회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M38) 라고 떠들고 돌아다닌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면 사견이 된다. 이럴 경우 악처에 떨어진다. 이럴 때 동료 수행승들이 바로 잡아 준다. 그래도 이해하지 못하면 부처님에게 데리고 가서 듣게 한다.
 
수행승 사띠는 부처님에게 “이 어리석은 자여! (te moghapurisa)”(M38) 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는 부처님의 가장 큰 욕이다.
 
부처님은 수행승 사띠에게 “싸띠여, 어떠한 것이 의식인가?”(M38)라며 물어 보았다. 이에 수행승은 “세존이시여, 그것은 말하고 느끼고 여기 저기 선행과 악행의 결과를 체험하는 것입니다.”(M38)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부처님은 “이 어리석은 자여, 내가 누구에게 그런 가르침을 설했다는 것인가?”(M38)라며 강하게 질책했다.
 
흔히 이런 말을 듣는다. 보고 듣고 냄새 맡는 그 무엇이 있다고 말한다. 그 무엇에 대하여 그 놈, 참나, 본마음 등으로 설명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변하지 않는 항상한 자아가 있다는 말이 있다는 말과 같다.
 
부처님은 여섯 가지 감역에서 느낀 것 외에 다른 마음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이는 육식을 넘어서 칠식이나 팔식이 없음을 말한다. 그런데 수행승 사띠는 어떤 변치 않는 마음이 있어서 그 마음이 살아 있을 때 선행과 악행의 결과를 체험하면서 윤회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수행승 사띠는 부처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마치 오늘날 칠식이나 팔식이 있는 것처럼 본 것이다. 더구나 변치 않는 어떤 마음이 있어서 그 마음이 윤회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에 부처님은 “어리석은 자여, 의식도 조건적으로 함께 생겨난다는 것, 즉, 조건 없이는 의식도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법문으로 설하지 않았던가?”(M38)라며 강하게 질책했다.
 
부처님 가르침은 연기법에 기반한다. 그런데 연기법은 조건발생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연기를 뜻하는 빠알리어 빠띳짜사뭅빠다(paiccasamuppāda)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이 말은 조건하여(paicca) 함께 발생한다(samuppāda)라는 뜻이다. 그래서 연기(緣起)라고 한다.
 
연기법의 다른 말은 조건법이다. 이는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서 조건만 취한 것이다. 그런데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보면 어떤 것이든지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따른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에서 벗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당연히 “말하고 느끼고 여기 저기 선행과 악행의 결과를 체험하는” 그 어떤 것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의식이 윤회한다는 말은 사견(邪見), 삿된 견해가 된다. 칠식과 팔식은 없는 것이다!
 
108가지 다양한 느낌이 있는데
 
부처님 당시 수행승들은 부처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는 수행승들을 봤을 때 가만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수행승 빤짜깡가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을 최상의 느낌이라고 말하고 다녔을 때 가만 두고 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부처님에게 알렸다.
 
부처님은 해결사와 같다. 수행승들이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을 속시원하게 풀어 주었다. 부처님은 먼저 수행승 빤짜깡가가 말한 두 가지 느낌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수행승 빤짜깡가가 말한 두 가지 느낌은 결론적으로 맞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는 느낌의 다양성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부처님이 두 가지 느낌, 세 가지 느낌, 다섯 가지 느낌, 열 여덟 가지 느낌, 서른 여섯 가지 느낌, 그리고 백팔 가지 느낌이 있다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다양한 느낌이 있다. 부처님은 백팔 가지 느낌이 있다고 했다. 이는 쌍윳따니까야 ‘백여덟 가지 느낌에 관한 법문의 경’(S36.22)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는 부처님이 느낌에 대하여 방편으로 설하신 것이다. 그래서 백팔 느낌에 대하여 “서른 여섯 가지 과거의 느낌, 서른 여섯 가지 미래의 느낌, 서른 여섯 가지 현재의 느낌이다.”(S36.22)라고 했다.
 
오욕락 보다 더 큰 즐거움
 
느낌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을 말한다. 그런데 제 3의 느낌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제3의 느낌은 “고요하고 미묘한 즐거움”이라고 오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사람들은 제3의 느낌을 잘 모른다. 아무 느낌이 없는 상태, 즉 무덤덤한 상태를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라고 하는데 이는 평온한 상태를 말한다.
 
평온은 언제 깨질지 모른다. 조건에 따라 바뀌는 것이다. 그럼에도 수행승 빤짜깡가는 제3의 느낌에 대하여 “고요하고 미묘한 즐거움”이라고 오해했다.
 
부처님은 빤짜깡가의 오해를 풀어 주기 위해서 느낌에 대하여 법문 했다. 먼저 두 가지 느낌, 세 가지 느낌이 있다고 했다. 다음으로 다섯 가지 느낌을 설명했다. 이는 오욕락에 대한 것이다.
 
오욕락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에 대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감각적 즐거움이다. 사람들은 이런 감각적 느낌을 즐기는 것을 행복이라고 말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나 이성과 보드라운 잠자리를 갖는 등을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즐거움 보다 더 즐거운 것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아난다여, 이와 같이 ‘뭇삶이 최상의 즐거움과 만족을 누린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S36.19)라고 했다.
 
부처님은 오욕락 보다 더 큰 즐거움이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그러한 즐거움보다 더욱 탁월하고 더욱 미묘한 다른 즐거움 이 있다.”(S36.19)라고 말했다.
 
오욕락 보다 더 큰 즐거움은 어떤 것일까? 이는 부처님이 “세상에 수행승이 감각적 쾌락을 버리고 불건전한 상태를 버리고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멀리 여임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에 든다. 아난다 며, 그러한 즐거움보다 더욱 탁월하고 더욱 미묘한 다른 즐거움은 그러한 것이다.”(S36.19)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은 역설적이다. 이는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오욕락을 최상의 즐거움이고 최상의 행복이라고 말할 때 역설적으로 “감각적 쾌락을 버리고”라 하여, 오욕락을 버리는 것이 최상의 즐거움이고 최상의 행복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선정의 행복이다.
 
일반사람들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오욕락은 거친 것이다. 황제식과 같은 식사를 할 때도 거친 것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목구멍을 넘기는 순간 끝이다. 이는 일시적인 행복한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선정의 행복은 다르다.
 
선정의 행복은 감각적 행복에 비하여 꽤 오래 간다. 왜 그런가? 미세하기 때문이다. 거친 감각적 행복은 일시적인 것인 즐거운 느낌에 지나지 않은 것에 지나지 않지만 감각적 쾌락을 버린 선정의 행복은 미세한 느낌에 대한 것으로 꽤 오래 간다.
 
매일 좌선을 하다 보면
 
매일 좌선을 하고 있다. 작년 7월 31일 이후 매일 오전에 한시간씩 좌선을 한다. 현재 5개월 째 지속하고 있다.
 
좌선을 하다 보면 행복을 느낄 때가 있다.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매번 느낌이 다르지만 어떤 날은 매우 강하게 느낄 때가 있다. 이런 경우 황홀하다고 말할 수 있다.
 
좌선하다 황홀경을 맛보면 강렬하다. 그 맛을 보기 위해서 앉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매번 오는 것은 아니다. 언제 올지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오욕락에 따른 감각적 쾌락에 대한 즐거움 보다는 휠씬 더 강렬하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선정의 행복을 말했다. 부처님은 초선정에서부터 시작하여 아홉 번째 선정인 상수멸정까지 말했다. 그런데 부처님은 아홉 가지 선정에 대하여 모두 “그러한 즐거움보다 더 더욱 탁월하고 더욱 미묘한 다른 즐거움은 이런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현재 선정의 즐거움은 이전 선정의 즐거움보다 더 낫다는 것이다.
 
좌선하다 보면 얕게나마 집중의 즐거움을 맛본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뭇삶이 최상의 즐거움과 만족을 누린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S36.19)라는 말과 “그러한 즐거움보다 더욱 탁월하고 더욱 미묘한 다른 즐거움 이 있다.”(S36.19)라고 말한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지게꾼의 행복
 
수행승 빤짜깡가는 무덤덤한 느낌에 대하여 고요하고 미묘한 즐거움이라고 알고 있었다. 이는 아마도 선정의 즐거움을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은 평온에 대한 것이다. 이는 어리석은 자의 평온에 지나지 않는다. 조건이 바뀌면 언제든지 깨진다. 마치 지게꾼의 행복 같은 것이다.
 
어느 지게꾼이 있었다. 그는 산에서 나무를 해 왔다. 도중에 쉬고자 했다. 그는나무 그늘 아래에서 낮잠을 잤다. 바람은 살랑살랑 불었다. 햇볕은 따뜻했다. 한숨 낮잠을 자고 난 지게꾼은 행복했다. 세상에 이런 행복이 없었던 것이다. 지게꾼의 행복이다.
 
지게꾼의 행복은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조건이 바뀌면 언제 괴로운 느낌이 될지 모른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이 고요하고 미묘한 즐거움이라고 하지만 이는 범부의 행복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선정에 든 자도 행복을 느낀다. 어쩌면 지게꾼의 행복과 같은 것인지 모른다. 이는 부처님이 “탁월하고 더욱 미묘한 다른 즐거움”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즐거운 느낌만을 행복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평온한 느낌도 행복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어쩌면 범부가 느끼는 무덤덤한 느낌과 유사한 것인지 모른다.
 
행복이라고 해서 똑 같은 행복은 아니다. 행복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마찬가지로 평온이라고 해서 똑 같은 행복은 아니다. 범부의 평온이 있고 깨달은 자의 평온이 있다.
 
진정한 행복은 괴로움이 없는 상태
 
수행승 빤짜깡가는 제3의 느낌에 대하여 최상으로 보았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는 무덤덤한 느낌, 즉 평온에 대하여 고요하고 미묘한 것으로 최상으로 본 것이다. 마치 지게꾼이 나무 그늘 아래서 잠을 한 숨 잔 것 같은 행복을 말한다. 범부의 행복이다.
 
깨달은 자는 늘 평온하다. 그런데 깨달은 자의 평온은 범부의 평온과는 달리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조건에 따라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으로 바뀌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깨달은 자의 평온에 대하여 외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라고 했다.
 
 
벗들이여, 세존은 오로지 즐거운 느낌만이 즐거움이라고 시설하지 않는다. 벗들이여, 즐거움이 성취되는 경지마다 어떠한 경지이든 그것을 여래는 즐거움에 포함시켜 시설한다.”(S36.19)
 
 
이 말은 주석을 보아야 이해하기 쉽다. 주석에 따르면 “느껴진 즐거움이든 느껴지지 않은 즐거움이든 여래는 괴로움이 없는 것을 즐거움으로 시설한다.”(Srp.III.80)라고 설명되어 있다.
 
부처님은 즐거운 느낌을 행복이라고 했다. 그런데 행복에는 감각적 행복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정의 행복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선정의 행복도 단계가 높아질수록 즐거움도 괴로움도 없는 상태가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최상의 행복
 
사리뿟따 존자는 행복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래서 “벗들이여, 이 열반은 행복입니다. 벗들이여, 이 열반은 행복입니다.”라고 말하고 다녔다. 마치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라며 노래하고 다니는 것과 같다.
 
어느 수행승이 사리뿟따 존자에게 물었다. 열반은 행복을 느낄 수 없음에도 행복하다고 말한 것이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사리뿟따 존자는  “벗이여, 바로 거기에 느낌이 없는 것이 행복입니다.”(A9.34)라고 말했다.
 
사리뿟따 존자의 답변은 역설이다. 일반사람들이 알고 있는 행복과는 다른 것이다. 일반사람들은 지금 여기에서 즐거운 느낌을 가질 때 행복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리뿟따 존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것이 행복이라고 했다.
 
사리뿟따 존자는 느낌이 없는 것이 행복이라고 했다. 이 말은 “느껴진 즐거움이든 느껴지지 않은 즐거움이든 여래는 괴로움이 없는 것을 즐거움으로 시설한다.”(Srp.III.80)라는 주석과 일치한다.
 
지각과 느낌이 소멸되었을 때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바로 열반의 상태를 말한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에 대하여 행복이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법구경에서는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Dhp.204)라고 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다. 이는 다름 아닌 평온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평온에는 두 가지 평온이 있다는 것이다. 범부의 평온과 깨달은 자의 평온을 말한다.
 
깨달은 자의 평온은 무너지지 않는다
 
범부의 평온은 무덤덤한 상태를 말한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는 제3의 느낌을 말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범부의 평온은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조건이 바뀌면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으로 바뀐다. 그럼에도 수행승 빤짜깡가는 이를 “세존께서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고요하고 미묘한 즐거움 이라고 설하셨습니다.”(S36.19)라고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깨달은 자의 평온은 무너지지 않는다. 어떠한 조건에서도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으로 바뀌지 않는다. 왜 그런가? 강력한 새김이 있기 때문이다.
 
깨달은 자는 늘 새김(sati)과 알아차림(sampajāna)이 유지되고 있다. 어떤 조건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늘 평온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조건에 따라 변하는 범부의 평온과는 다른 것이다.
 
그 사람이 범부인지 깨달은 사람인지 알아 보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새김과 알아차림이 있는지 아는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떤 경우에서라도 평온을 유지하고 있다면 새김과 알아차림이 있는 것이다.
 
범부는 선업도 짓고 악업도 짓는다. 불교인들은 가능하면 선업을 짓고자 한다. 선업 공덕으로 보다 나은 존재로 태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라한은 악업은 물론 선업도 짓지 않는다. 왜 그럴까? 늘 새김과 알아차림이 있기 때문이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늘 듣는 말이 있다. 그것은 싸띠라는 말이다. 이 말은 언제어느 상황에서나 새김과 알아차림을 유지하라는 말과 같다. 이 말은 늘 평온을 유지하라는 말과 같다.
 
평온을 유지하려면 새김과 알아차림이 있어야 한다. 이는 느낌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느낌이 없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라는 것이다. 즐거운 느낌을 극대화 하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느끼지 않는 것이 최상의 행복임을 말한다. 새김과 알아차림이 있는 한 평온은 무너지지 않는다.
 
부처님 가르침이 파격적이고 역설적인 것은
 
사람들은 행복을 바란다. 이는 다른 말로 즐거운 느낌을 바라는 것과 같다. 괴로운 느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범부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행복해질 수 없다. 왜 그런가? 이는 부처님이 모든 느낌은 괴로운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파격적이다. 일반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을 초월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역설적이다. 이는 “모든 느낌은 괴로움이다.”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모든 느낌은 괴로움이다고 말했을 때 이를 받아 들일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자신의 상식으로는 이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수행을 하면 알 수 있다.
 
모든 현상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당연히 즐거운 느낌 또한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 가지 느낌, 즉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대하여 “그런데, 수행승이여, 어떠한 것이 느껴지든 그것은 괴로움 안에 있다고 했다.”(S36.11)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모든 느낌은 괴롭다고 했다. 당연히 즐거운 느낌도 괴로운 느낌이 된다. 행복은 즐거운 느낌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행복도 괴로운 것이 된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은 괴로운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러나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행승이여, 어떠한 것이 느껴지든 그것은 괴로움 안에 있다는 사실은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는 것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S36.11)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 즐거운 느낌도 형성된 것이다. 오욕락도 형성된 것이고 선정의 행복도 형성된 것이다. 형성된 것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어떠한 것이 느껴지든 그것은 괴로움 안에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 가르침은 파격적이고 또한 역설적이다.
 
오로지 작용만 하는 작용심(作用心: kiriya citta)만 있다면
 
여기 행복전도사가 있다. 전국을 돌아 다니며 행복특강을 한다. 그런 행복은 세속의 행복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세속의 행복은 무상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더구나 행복은 즐거운 느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또한 행복은 일시적 느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한다. 행복한 느낌에 “죽어도 좋아!”라며 목숨을 걸기도 한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어떤 느낌도 괴로운 것이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느껴지지 않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라고 했다. 지각과 느낌이 소멸된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 이렇게 본다면 함부로 행복을 말해서는 안된다. 아라한이 되지 않고서는 함부로 행복을 말해서는 안됨을 말한다.
 
최상의 행복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무덤덤한 것인지 모른다. 범부의 평온 같은 것이다. 그러나 조건에 따라 흔들리기 쉽다. 반면에 깨달은 자의 평온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흔들리지 않는다.
 
깨달은 자는 어떻게 평온을 유지할까? 그것은 강력한 새김과 알아차림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법이든 불선법이든 대상을 접했을 때 “그렇네”, “그렇군”, “그랬구나”라고 한다. 어떤 경우에서라도 흔들리지 않는다. 오로지 작용만 하는 마음, 작용심(作用心: kiriya citta)만 있는 것이다.
 
 
 
2024-01-2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