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과 2권을 다 읽고
동이 트는 새벽이다. 세상은 아직 잠들어 있다. 토요일 쉬는 날 사람들은 일주일의 피로를 잠으로 풀 것이다.
백권당의 아침이다. 이른 아침 방탄복 같은 외투를 입고 배낭을 메고 길로 나섰다. 늘 다니는 길이다. 오늘 만보기를 가동시켜 보니 1.8키로 거리에 26분 걸렸다. 그리고 2,565보이다. 평소보다 많이 걸린 것 같다.
오늘 써야 할 것은 정해져 있다. 어제 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을 다 읽었을 때 이 논서에 대하여 쓰고자 했다.
참으로 긴 여정이었다. 마치 대륙을 도보로 횡단하는 자가 마침내 목적지에 이른 것과 같다. 매일 조금씩, 두세 페이지씩 진도를 나가다 보니 다 읽게 되었다.
2022년 한국마하시선원 붓다의 날에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접한 것은 우연이다. 2022년 5월 코로나가 어느 정도 진정될 무렵 ‘한국마하시선원’에 간 것이 인연이 되었다.
일부 한국의 불자들은 이중과세하고 있다. 부처님오신날 마치 ‘이중과세’하듯이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나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이다. 음력으로 사월초파일날에는 한국불교의 사찰에 가고, 보름 후에 열리는 테라와다불교 ‘붓다의 날’ 행사에는 테라와다불교 사원에 가는 것을 말한다.
코로나는 끝났다. 그러나 2022년 봄에 코로나의 위험은 여전했다. 그럼에도 조금 누그러들 기미가 보이자 갖가지 모임이 열리기 시작했다. 테라와다불교도 예외가 아니다.
2022년 붓다의 날 행사 때 테라와다 사원에 가고자 했다. 서울 청파동에 있는 담마와나선원에 가고자 했으나 코로나로 인하여 행사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안양에 있는 한국마하시선원에서는 붓다의 날 행사를 한다고 공지가 떴다. 인터넷에서 본 것이다.
한국마하시선원은 집에서 가깝다. 안양 비산사거리 버스 정류장에서 관악역 부근에 있는 선원까지는 불과 다섯 정거장 밖에 되지 않는다.
2022년 5월 한국마하시 선원에서 붓다의 날 행사가 열렸다. 코로나가 극심했을 때는 행사가 열리지 못했다고 한다. 오랜만에 열려서일까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이에 대하여 ‘붓다의 날에 만난 일창스님 (tistory.com)’(2022-05-14)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다.
붓다의 날 행사가 끝났다. 일창스님에게 인사나 드리고 돌아가고자 했다. 김선량 선생의 안내로 4층에 있는 스님의 처소로 올라 갔다. 우 소다나 사야도와 함께 있는 공간이다.
한국마하시 선원 4층에서 일창스님을 처음 만났다. 우 소다나 스님도 함께 만났다. 김선량 선생의 소개로 만난 것이다.
일창스님은 초면임에도 마치 구면인 것처럼 이것저것 이야기 했다. 약속도 하지 않고 무턱대고 찾아 갔음에도 한시간 이상 시간을 내 주었다.
일창스님과 이야기가 끝났다. 일어서려는데 책을 몇 권 주었다. 그 중에 하나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이라는 제목의 책이다.
아무 준비 없이 한국마하시 선원에 갔었다. 점심공양을 하고 일창스님도 보았다. 그리고 책선물도 받았다. 나에게 있어서는 과분한 것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읽기 대장정에
위빳사나 수행방법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책의 표지가 두꺼운 하드커버로 되어 있고 또한 표지가 밤색인 책이다. 중랑구에 있는 김도이 선생 서재에도 꼽혀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종종 책을 선물로 받는다. 그러나 다 읽어 보지 않는다. 읽어 볼 시간이 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아니 읽어 볼 만한 흥미를 가지지 않는 것이 클 것 같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한동안 방치 되어 있었다. 언젠가는 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책을 읽을 시절 인연이 되었다. 2022년 11월 8일부터 읽기 시작한 것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읽기 대장정에 돌입했다. 그때 심정을 “오늘부터 책을 조금씩 보기로 했다. 책을 산 것이거나 선물 받은 것이거나 하루에 한페이지 보는 습관을 들이고자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책을 볼 수 없다. 책은 책장에 있는 장식용 물건이 아니다.” (2022-11-08) 라고 써 놓았다.
책을 선물 받은지 반년 만에 읽기 시작했다. 1권을 다 읽은 것은 2023년 8월이다. 2022년 11월부터 읽기 시작했으니 10개월 걸렸다. 2권은 2023년 9월부터 읽기 시작했다. 마침내 어제 2024년 1월 12일에 다 읽었다. 2권은 5개월 걸렸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과 2권은 2022년 11월부터 읽기 시작하여 2024년 1월까지 읽었다. 두 권을 1년 2개월 걸려서 읽었다. 선물로 받은지 1년 8개월만의 일이다.
황홀한 느낌이 한시간 내내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한번 읽어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번 읽어 본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두 번, 세 번 읽고자 한다. 왜 그런가? 내용이 심오하기 때문이다.
논서를 읽으면 이해가 된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경험된 것은 아니다. 경험되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심오하게 보인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으면서 감탄의 글을 종종 올렸다. 세상에 이런 수행방법이 있었던 것이다! 그 동안 궁금하게 여기던 것이 모두 해소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대하여 ‘이 시대 최고의 논서’라고 극찬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있다. 매일 한시간 좌선을 하고 있다. 물론 행선도 종종하고 있다. 작년 2023년 우안거 들어갈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7월 31일 이후 거의 매일 한시간씩 좌선 하고 있다.
생업을 가진 자가 수행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사무실 한켠에 명상공간을 만들어 놓고서 매일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이다.
어제와 그제 황홀감을 맛보았다. 앉아 있는 내내 행복한 느낌이 지속된 것이다. 이런 느낌은 전에 없던 것이다. 그래서 “혹시 약물 효과 때문 아닐까?”라고 의문해 보았다.
왼쪽 허벅지 부위에 통증이 있다. 간헐적으로 쑤시는 것이다. 더구나 발목 부위에 수포가 생겼다. 이를 보자 혹시 대상포진이 아닌지 의심 되었다.
병원에서 약을 타왔다. 신경통증과 관련된 약이다. 여러 종류의 약이다. 5개 가량 된다. 이런 약 중에는 정신을 몽롱하게 하는 것이 있을까? 어쨌든 약 먹은 날 이틀 동안 좌선 했을 때 황홀한 느낌이 한시간 내내 지속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위빠사나 어느 단계 위치에 있을까?
어떤 이는 책 읽는 것을 경계한다. 특히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에서 수행과 관련 된 부분을 읽지 말라고 한다. 왜 그런가? 책을 보고서 착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염려는 2권 말미에 일창스님이 쓴 글에서도 확인 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조금 염려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일부 수행자는 이 책의 제2권에서 자세하게 설명한 위빳사나 지혜의 단계에 대한 부분을 읽고 ‘나는 어떤 단계이지? 왜 이런 현상이 생겨나지 않지?’라고 숙고하기도 합니다. 혹 은 실제로는 그 단계가 아닌데도 스스로 ‘나는 이러한 단계야’라고 결정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여러 부작용 때문에 양곤의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센터에서는 수행과 관련된 것을 비롯하여 책들을 읽지 말고 계속해서 관찰하고 새기도록 지도합니다. 특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일창스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703쪽)
위빠사나 16단계 지혜가 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단계가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런데 수행을 하다 보면 자신이 어느 단계 위치에 있는지 궁금해진다는 것이다. 나에게도 이런 궁금함이 없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위빠사나 어느 단계 위치에 있을까? 종종 이런 생각을 해 본다. 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 단계 정도는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들어 보면 속된 말로 ‘택도 없다’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생멸에 대하여 끊임없이 생각해 본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위빠사나 수행의 진수를 보여 주는 것 같다. 이제까지 수많은 수행지침서를 읽었지만 이 책에 미치지 못했다. 이 책의 아류로 보였다.
결국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다 읽었다. 읽지 말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다 보고 만 것이다. 마치 수학문제를 답을 보고 푼 것과 같다. 수행으로 체험한 것 없이 책만 보고서 이해한 것이다.
양곤에 있는 마하시 선원에서는 책을 보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마치 먼저 문제에 대한 해답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착각이다. 책을 보고서 형성된 지식을 보고서 자신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스승이 없다. 생업을 가진 자가 시간을 낼 수 없기 때문에 사무실 한켠에 명상공간을 만들어 놓고 매일 오전 한시간씩 좌선을 하고 있다. 이런 때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어둠 속에 등불 같은 것이었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나의 스승이나 다름 없다. 책에는 너무나 상세하게 방법이 설명되어 있다. 스승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보다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설령 스승이 있다고 할지라도 과연 이런 논서를 보기나 했을까?
매일매일 희열이 넘쳐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만난 것은 커다란 행운이다. 2022년 5월 붓다의 날 행사 때 한국마하시 선원에 간 것이 행운의 시작이다. 일창스님과 면담한 것도 행운이지만 일창스님으로부터 책을 건네 받은 것은 더 큰 행운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평생 함께 할 책이다. 사부니까야 못지 않은 중요한 책이다. 청정도론에 버금가는 책이다. 이는 책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일창 스님은 이 책을 번역할 때 소감을 다음과 같이 표현 했다.
“사실 이 책은 그리 적은 분량도, 결코 쉬운 내용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전부터 다른 도반들도 권유하였고, 특히 우 소다나 사야도께서 ‘한국에도 위빳사나 수행의 바른 준거를 마련해 놓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하 시며 적극적으로 격려하셔서 하루에 몇 페이지씩, 약 삼 년간 꾸준히 번 역하여 부족하지만 이렇게 번역본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분량이 많고 내용이 어려워 처음에는 부담도 되었지만 자세하게 읽으며 번역할 때마다 마하시 사야도의 뛰어난 교학적 지식에 감탄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마치 당신의 실제수행에 바탕을 두고 설명하시는 듯, 실제수행과 절묘 하게 결부시켜 바르게 해석하시는 모습에 매일매일 희열이 넘쳐 났습니다. 매일매일 수행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사라졌고 매일매일 바른 안목이 생겨났습니다. 그러한 희열과 바른 안목은 제 자신의 수행에도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는 여러 수행자들에게도 그러한 희열과 바른 안목이 생겨나길 바랄 뿐입니다.” (일창스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703-704쪽)
일창스님의 후기에 따르면, 이 책을 번역하는 중에 희열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마하시 사야도의 뛰어난 안목에 감탄했다.
일창스님은 미얀마어로 된 논서를 우리말로 직접 번역했다. 이는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한 수행지침서와는 다른 것이다. 미얀마어를 배워서 번역한 것이다. 더구나 우 소다나 사야도의 도움을 받아 번역했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1943년에 출간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출간된 것이다. 부록을 보니 마하시 사야도는 이 책을 불과 7개월만에 썼다는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가 수행지침서를 써 달라고 요청 받은 것은 1941년이다. 간청을 받았을 때 자료 수집을 하고 살펴 보았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저술하기 시작한 것은 1942년 6월달이다. 그리고 1943년 1월에 완성되었다. 7개월만에 쓴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마하시 사야도는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7개월 걸쳐서 썼다. 일창스님은 3년 동안 번역했다. 일창스님은 언제 번역을 마쳤을까? 이는 후기에서 불기 2557년 3월이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2013년에 번역을 완성한 것이다.
수행 부분은 읽지 말라고 경고했음에도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이 한국에 소개 된지 이제 11년 되었다. 청정도론 못지 않은 위대한 논서이다. 어쩌면 그 이상인지 모른다.
위빠사나 수행자라면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어 보아야 한다. 스승이 없어도 이 책만 있으면 수행을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2권 수행관련 부분은 주의하라고 했다. 이는 체험 영역이기 때문이다.
흔히 이런 말이 있다. 하지 말라는 것은 더 하고 싶은 것을 말한다. 이는 호기심 때문이다.
한국불교에서 율장은 금서와 같다. 재가자는 읽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더 읽고 싶어진다.
오늘날 율장은 더 이상 금서가 아니다. 빠알리 율장은 번역되어서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대품, 소품, 비구계, 비구니계, 부기를 모두 번역했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재가자가 율장을 읽는 것을 장려한다고 한다. 율장을 읽으면 출가수행자들의 노고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계를 지키려는 노력을 말한다.
위빳나 수행방법론 2권에 실려 있는 수행관련 부분은 금서와 다름 없다. 수행하지 않은 자가 머리로 이해했을 때 착각할 수 있음을 말한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결국 다 읽고 말았다. 어쩌면 우려했던 사항이 발생한 것인지 모른다. 마치 산이 있어서 올라가듯이, 책이 있어서 읽은 것이다.
빨강색 형광메모리펜을 이용하여 칠하면서 읽었다. 다음에 읽을 때는 칠한 부분만 읽으면 될 것 같다. 읽다 보니 읽지 말라는 부분까지 읽었다. 생멸의 지혜부터 시작하여 열반에 이르기까지 방법에 대한 것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1년 2개월에 걸쳐서 읽었다. 머리맡에 놓고서 하루에 두세 페이지씩 읽었다. 새기면서 읽은 것이다. 꼭 기억하고 싶은 것은 글을 써서 남겼다. 이렇게 새기면서 읽다 보니 이론적으로는 다 알게 되었다.
이론과 실제는 다른 것이다. 아무리 경전을 많이 읽었어도 실천하지 않으면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다 읽어 버린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매일 한시간 좌선을 하고 있다. 작년 8월 이후 반년동안 지속되고 있다. 어제와 그제는 황홀했다. 이런 것을 위빠사나 지혜가 어느 단계인지로 파악하려 한다면 이는 우려할만한 것이다. 이는 그 단계가 아닌데도 스스로 ‘나는 이러한 단계야’라고 결정하는 것과 같다.
수행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이전과 이후로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과 2권을 1년 2개월에 걸쳐서 다 읽었다. 진도는 조금씩 나갔다. 하루에 두세 페이지가량 새기며 나갔다. 그리고 중요한 부위는 칠을 해 놓았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다 읽었다고 해서 끝난 것은 아니다. 확실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번 더 읽어야 한다. 복습하는 것이다. 두 번째 읽을 때는 속도가 날 것이다.
첫 번째 읽었을 때는 붉은 색 형광메모리 칠을 해 놓았다. 다음에 읽을 때는 칠한 부분만 보면 된다. 두 번째 볼 때도 중요한 부위가 있을 것이다. 그때는 노랑색 형광메모리 칠을 하려 한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위대한 논서이다. 청정도론 못지 않은 불멸의 논서이다. 위빠사나 수행자라면 반드시 보아야 할 필독서이다.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은 자와 읽지 않은 자로 나누어지게 될 것 같다는 것이다. 어쩌면 수행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이전과 이후로 갈릴 것 같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항상 머리맡에 놓고 보고자 한다. 어디를 열어 보아도 마음에 쏙쏙 든다. 읽으면 충만해진다. 이는 일창스님이 번역할 때 “매일매일 희열이 넘쳐났습니다.”(2권, 704쪽)이라고 써 놓았는데 똑같은 심정이다.
참으로 좋은 인연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만난 것은 니까야를 만난 것 못지 않은 행운이다. 이런 책을 선물해 준 일창스님에게 감사드린다. 이런 책을 번역한 스님에게 거듭 감사드린다. 이제 책을 다 읽었으니 한번 찾아 뵈어야겠다.
2024-01-1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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