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자칭타칭 깨달았다고 하는 자들의 막행막식을 보면

담마다사 이병욱 2024. 1. 7. 10:23

자칭타칭 깨달았다고 하는 자들의 막행막식을 보면
 
 
거뜬히 배낭 메고 나서는 아침이다. 일요일 아침 일어나기 싫다. 이불에 그대로 있고 싶다. 바깥 날씨는 춥다. 방바닥은 따뜻하다. 이런 때 페이스북을 보거나 유튜브를 보면서 이불 속에 있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자리를 박찼다.
 
샤워를 하면 새로운 기분이 된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다. 극적변환이다. 하루일과는 샤워와 함께 시작된다.
 
옷을 단단히 입었다. 내복을 입었다. 기초공사를 튼튼히 하는 것이다. 기모가 있는 쉐타를 입었다. 기모는 옷 안쪽에 털모양의 보플이 있는 두꺼운 옷을 말한다.
 

 
기모에 대하여 사전을 찾아 보았다. 혹시 일본말인지 염려 되었다.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기모는 한자어이다. 기모는 일어날 ‘기(起)’자에 털 ‘모(毛’자의 합성어이다. 영어로 냅핑(Napping)이라고 한다.
 
거뜬히 배낭 메고 나서는 아침
 
겨울에는 기모 의류를 입어야 한다. 특히 야외 활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필수적이다. 걸어서 출퇴근 하는 사람에게도 기모는 필수적이다. 기모 쉐타에 기모 바지를 입으면 든든하다.
 
날씨가 춥다. 스마트폰 첫화면에 영하 3도로 찍혀 있다. 체감온도는 영하 6도이다. 늘 그렇듯이 목티를 두르고 마스크를 한다. 그리고 외투에 달려 있는 모자를 쓴다. 장갑도 끼여야 한다.
 
마치 전장에 나가는 것 같다. 춥지 않도록 단단히 껴 입었다. 눈만 보인다. 아무리 추워도 안심이다. 배낭을 메고 1.3키로 20분을 걸어 가야 한다.
 
백권당 가는 길에 안양천을 건너야 한다. 안양 비사사거리 부근에 있는 안양천을 말한다. 징검다리를 건너서 간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초생달이 있다. 차가운 겨울 날씨에 날카로워 보인다. 마치 비수같다. 찌르면 피가 날 듯이 날카롭다. 지는 것인지 차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백권당이 가까워져 간다. 날은 급속히 밝아져 간다. 오피스텔 꼭대기층에서 평촌방향으로 바라 보았다. 7시가 다 되었음에도 해는 뜨지 않았다. 동남쪽 하늘이 벌겋다. 새벽노을이다. 승리자가 된 듯 하다.
 

 
백권당 문을 열었다. 불을 켜면 식물들이 맞이 해 준다. 반려식물이다. 하루일과 중에서 대부분 보내는 곳이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불어도 매일 온다. 달리 갈 곳이 없다.
 

 
나이 들어서 갈 곳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직장이 있는 사람은 직장에 가면 될 것이다. 직장이 없는 사람은 집에 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자영업자에게는 일터가 있다.
 

 
백권당은 일터 플러스가 되었다. 일감이 있으면 일을 하고, 일감이 없으면 글을 쓴다. 일터가 되기도 하고 서재가 되기도 하다. 요즘에는 명상하기와 빠알리어 공부하기 일상이 추가 되었다. 명상공간도 되고 공부방이기도 하다.
 
백권당은 다목적 공간이다. 쓰임새에 따라 용도를 달리한다. 이런 일상은 2007년 입주이래 17년동안 지속되고 있다. 오로지 한 장소에서 17년동안 하루 해를 보고서 하루 해를 보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말한다. 17년 동안 내리 한장소에 있었다. 17년 동안 한 장소에서 글을 썼다. 그러다 보니 늘어나는 것은 글이다. 매일 쓰다 보니 쌓이고 쌓여서 7,400개가 넘었다.
 
오늘도 하나의 글을 써야 한다. 준비해 놓은 소재가 있다. 그것은 깨달음에 대한 것이다. 깨달은 자의 삶에 대한 것이다.
 
아라한은 무엇으로 살아갈까?
 
작년 말에 금요니까야모임 시간이 있었다. 어떤 이가 “깨달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죠?”라고 물어 보았다.
 
깨달은 자는 공부를 다 한 자이다. 그래서일까 아라한에 대하여 무학(無學)이라고 말한다. 더 이상 배울 것도 없고 더 이상 닦을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라한은 무엇으로 살아갈까?
 
아라한의 인생관이 있다. 이는 마하시 사야도의 십이연기법문집에서 본 것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많은 중년기의 사람과 노인에게 삶은 좌절, 실망, 괴로움에 지나지 않습니다. 삶의 조건은 갈수록 나빠지고, 건강은 점점 나빠지며 완전한 무너짐과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무명과 집착 때문에 생을 즐거워합니다. 반면 아라한은 무명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삶을 지루하고 따분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삶에 염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라한이 죽음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죽고자 하는 욕구는 아라한이 이미 정복한 공격적인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아라한이 바라는 것은 완전한 열반[般涅槃]에 드는 것으로, 이러한 바람은 근로자가 일당이나 월급을 받고자 하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근로자는 생계수단을 위해 불가피하게 일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과 고난에 처하기를 바라지 않지만 그렇다고 직장을 잃는 것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돈으로 급여 받는 날만 손꼽아 기다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라한도 완전한 열반을 얻는 순간만을 기다립니다.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십이연기)
 
 
이것이 마하시 사야도의 아라한 인생관이다. 아라한은 살아도 그만이고 죽어도 그만이라는 것이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죽음은 어쩌면 축복일지 모른다. 그래서 근로자가 월급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처럼 아라한은 완전한 열반의 순간만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아라한 인생관을 보면 마치 죽기 위해서 사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라한에게 있어서 생사는 초월되었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말 자체는 성립되지 않는다.
 
아라한은 모든 번뇌가 소멸된 자이다. 당연히 아라한에게 자아가 있을 수 없다. 자아가 있다면 언어적으로만 있을 것이다. 이런 아라한은 살아 있어도 살아 있다고 볼 수 없다.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니다. 오온이 있는 한 여분의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Nābhinandāmi maraaṃ,
nābhinandāmi jīvita;
Kāla
 ca paikakhāmi,
nibbisa bhatako yathā.
 
나는 죽음을 바라지도 않고
나는 삶을 바라지도 않는다.
나는 고용된 자가 보수를 바라듯,
나의 시간을 기대한다.”(Thag.606)
 
 
테라가타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이 게송은 아라한의 인생관을 잘 표현하고 있다. 마하시 사야도는 이 게송에 근거하여 아라한의 인생관을 이야기했다.
 
머리맡에 있는 쌍윳따니까야를 읽다가
 
요즘 머리맡에 있는 쌍윳따니까야를 읽고 있다. 잠자기 전과 잠에서 깨어난 후에 읽는다. 며칠전 눈에 띄는 경을 발견했다. 그것은 깨달은 자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어쩌면 아라한의 인생관과 유사한 것이다. ‘데바다하의 경’(S35.134)이 바로 그것이다.
 
부처님이 수행승들에게 말했다. 부처님은 방일하지 말라고 했다. 여섯 가지 감역에서 게으르지 말라는 것이다. 감관을 수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들이 거룩한 님으로서 번뇌가 부수어지고 청정한 삶을 이루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 존재의 결박을 부수고 올바른 궁극의 앞으로 해탈했다고 하더라도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들도 여섯 가지 접촉의 영역에서 방일해서는 안된다고 나는 말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들에게 방일하는 것은 이미 끝났으므로 그들은 방일할 수가 없는 것이다.”(M35.134)
 
 
부처님의 가르침은 허를 찌르는 것 같다. 예상 밖의 말을 하는 것이다. 마치 극적 반전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깨달은 자는 아라한을 말한다. 아라한은 공부가 다 된 자를 말한다. 그래서 더 이상 배울 것도 없고 닦을 것도 없다. 이런 아라한은 어떻게 살아 가야 할까?
 
이것입니다. 이것뿐이라니까요.”
 
막행막식이라는 말이 있다. 깨달은 자는 걸림이 없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자칭타칭 깨달았다고 하는 자는 계율을 무시하고 막행막식하는 모양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무엇을 깨달았다는 말인가? 자칭타칭 깨달았다고 말하는 자의 말을 믿어도 될까?
 
유튜브를 보면 ‘이것’을 말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한결 같이 “이것입니다. 이것뿐이라니까요.”라고 말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어떤 이는 이것으로 한시간 보낸다. 이것 타령하다 보면 한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리는 것이다. 대체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유튜브에서 이것을 말하는 자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지금 우리는 모두 다 깨달은 존재라고 말한다. 지금 눈 앞에 이렇게 명백하게 드러나 있는데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것입니다. 이것뿐입니다. 이것이라니까요.”라며 답답한 듯이 말한다. 심지어 책상을 쾅쾅 치면서 “이것입니다, 이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말하는 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여러 편의 영상을 보았지만 알 듯 모를 듯 하다. 오로지 그 사람의 입만 쳐다 본다. 그런데 그 사람은 ‘불수행’을 말한다. 애써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말하는 자는 오로지 자신의 이야기만 듣다 보면 어느 순간 문득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 깨닫고 나면 코 만지기 보다 더 쉽다고 말한다. 그래서“이것이 깨달음이었어?”라며 실망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에게는 수행은 없다. 옛날에 다 해 보았던 것이라고 말하면서 수행한다고 다리 꼬고 앉아 있는 것에 대하여 한심하다는 식으로 말한다. 오로지 자신의 입만 바라보고 있으면 깨달을 수 있다는 말로 들렸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깨달음은
 
부처님도 깨달음에 대하여 말했다. 그러나 유튜브에서 이것을 말하는 자들과 다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깨달음은 해탈과 열반에 대한 것이다. 또한 탐, 진, 치의 소멸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깨달음도 깨달음 나름이다. 불교적 깨달음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사성제를 깨닫는 것이다. 왜 사성제인가? 사성제 안에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이 다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사성제의 도성제는 팔정도에 대한 것이다. 사성제의 고성제와 집성제는 이지연기에 대한 것이다. 사성제는 연기에 대한 가르침도 들어가 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은 사성제에 모두 포섭되어 있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이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그것은 언어적 개념을 타파하는 것이다. 이런 말은 부처님도 했다.
 
부처님은 오온에 대하여 분석적으로 설명했다. 오온에 대하여 무상, 고, 무아로 통찰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가르침은 자아가 있다고 여기는 언어적 개념을 부수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오온무아의 가르침을 초월한다. 그것은 오염원의 소멸이다. 탐, 진, 치라는 오염원의 뿌리를 소멸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아개념이 타파되면 그 다음 단계는 수행도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크게 세 가지 단계가 있다. 견도, 수행도, 무학도의 단계를 말한다. 여기서 수행도는 탐, 진. 치의 소멸 단계를 말한다. 탐, 진, 치가 완전히 소멸되었을 때 더 이상 배울 것도 없고 더 이상 닦을 것도 없는 무학도의 단계가 된다.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불교에 수행도(修行道)가 있는 것은
 
이것을 말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 보면 이른바 견도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언어적 형성을 타파한 것을 말한다. 자아개념을 부순 단계이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의 단계는 사향사과에서 수다원 단계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칠청정에서 견해청정 단계에 해당된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중에서 1단계인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단계에 해당된다.
 
자아개념이 부수어졌다고 해서 깨달은 것이 아니다. 이제 깨달음을 향한 시작단계에 불과하다. 그 다음 단계는 수행의 단계이다. 그럼에도 이것을 말하는 자들, 현존을 말하는 자들은 수행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부처님은 완전한 열반에 들 때 최후의 말을 했다. 그것은 “빠마데나 삼빠데타”는 말이다. 이 말은 “불방일정진”으로 번역된다. 게으르지 말고 수행하라는 말과도 같다.
 
부처님은 불방일정진을 말했다. 이 말은 번뇌가 다한 아라한에게도 해당된다. 아라한이 되었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다면 부처님 제자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아라한은 해야 할 일을 마친 자이다. 더 이상 배울 것도 없고 더 이상 닦을 것도 없는 아라한은 막행막식해도 될까? 그러나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왜 감관을 수호해야 하는가?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감관을 수호하라고 했다. 감관의 수호는 여섯 가지 감역에서 방일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감관수호가 어느 정도 중요한 것일까?
 
쌍윳따니까야에 ‘바라드와자의 경’(S35.127)이 있다. 이 경은 여인을 대처하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다.
 
가장 먼저 여인을 가족처럼 보라고 했다. 어머니 뻘 되는 여인에게는 어머니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누이 뻘 되는 여인에게는 누이를 대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딸 뻘 되는 여인에게는 딸을 대하는 마음으로 여인을 대하라고 했다. 이 것이 여의치 않으면 부정관 수행을 하라고 했다. 머리부터 발에 이르기까지 32가지 신체기관에 대하여 부정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고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도 여의치 않으면 여섯 가지 감각의 문을 수호하라고 했다. 그래서 “시각으로 형상을 보고 그 인상을 취하지 말고 그 연상을 취하지 말라.”(S35.127)라고 했다.
 
감각기관의 수호는 방일하지 않음으로써 성취된다. 이는 늘 싸띠해야 함을 말한다. 오온에서 물질과 정신 현상의 생멸에 대하여 무상, 고, 무아로 새기는 것이다. 또한 부처님 가르침을 늘 새기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새김은 번뇌 다한 아라한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부처님은 아라한의 감각의 문 수호에 대하여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했다. 이는 “그들에게 방일하는 것은 이미 끝났으므로 그들은 방일할 수가 없는 것이다. (kata tesa appamādena, abhabbā te pamajjitu. )”(M35.134)
 
부처님 가르침은 참으로 명쾌하다. 깨달은 자의 행위에 대하여 명쾌하게 정의해놓았다.
 
이제까지 들어서 아는 것이 있다. 깨달은 자는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기 때문에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고 알고 있었다. 더구나 깨달은 자는 걸림이 없기 때문에 어떤 행위를 해도 무애행이 된다고 알고 있었다. 과연 그럴까?
 
자칭타칭 깨달았다고 하여 막행막식을 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걸림이 없다. 계행에 있어서도 걸림이 없다. 깨달은 자에게 계율은 거치장스러운 것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부처님 가르침도 새기기 않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감각의 문을 수호하지 않는 것 같다.
 
아라한은 늘 불방일 상태
 
감각의 문은 싸띠로 수호된다. 눈이나 귀 등 여섯 감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새기는 것이다. 이렇게 새기다 보면 늘 평온상태가 된다. 그런데 번뇌 다한 아라한은 늘 평온상태라는 것이다. 이는 새김이 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아라한의 인생관을 보면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Nābhinandāmi maraa,
nābhinandāmi jīvita;
Kālañca paikakhāmi,
sampajāno patissato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삶을 환희하지도 않는다.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07)
 
 
아라한은 깨달은 자이다. 탐, 진, 치로 대표되는 번뇌가 다한 자이다. 이는 청정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청정도론에 칠청정이 있다. 계청정부터 시작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청정을 말한다. 이는 계, 정, 혜 삼학에 대한 것이다.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한 자만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한다.
 
토한 음식은 다시 삼킬 수 없다
 
아라한은 몸과 마음이 청정한 자이다. 한번 청정에 이르면 다시는 오염원이 나타나지 않는다. 어느 정도일까? 이는 “갈애, 무명, 여러 가지 사랑스런 것, 아름다운 형상, 즐거운 느낌, 마음에 드는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토해냈으니, 토해서 버려진 것을 내가 다시 삼킬 수 없으리.”(Thag.1131)라는 게송으로도 알 수 없다.
 
토한 음식은 다시 먹을 수 없다. 청정한 삶을 살아 번뇌가 다한 아라한에게 다시 번뇌는 일어나지 않는다. 아라한에게 막행막식이 일어날 수 없는 이유이다.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이 있다. 한번 아라한이면 영원한 아라한이다.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 다시 번뇌가 일어날 수 없다. 따라서 아라한은 늘 깨어 있는 상태가 된다.
 
아라한은 늘 깨어 있다. 이는 늘 싸띠가 지속되고 있음을 말한다. 최후의 순간까지 사띠가 유지된다. 그래서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07)라고 한 것이다.
 
아라한은 생사를 초월한 자를 말한다. 무아의 아라한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이라는 말은 언어적 개념에 불과한 말이다. 아라한에게는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 그런데 아라한은 탐, 진, 치로 대표 되는 번뇌가 다했기 때문 감각의 문은 자연스럽게 수호된다는 것이다.
 
아라한은 늘 싸띠가 유지된다. 자연스럽게 감각의 문은 수호된다. 이는 방일이 끝났기 때문이다. 불방일 상태이기 때문에 감각의 문은 자동적으로 수호된다. 깨깨달음이 완성된 아라한은 막행막식 할 수 없는 것이다.
 
글이 길어서 죄송합니다.”
 
오늘 추운 겨울날씨에 백권당에 일찍 나와 한편의 글을 썼다. 신나게 자판을 두들겼다. 쓰다 보니 A4로 8페이지가 되었다. 폰트 사이즈는 12이다.
 
어떤 이는 글이 너무 길다고 말한다. 아마 시간을 많이 빼앗겨서 불만을 토로한 것이라 보여진다. 이럴 때 미한한 마음이 든다. 그래서 “글이 길어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한다.
 
글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처음에는 이렇게 길지 않았다. 2006년 처음 글 쓸 때는 A4 한장 채우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경전을 근거로 하여 쓰다 보니 글이 갈수록 길어졌다. 특히 오늘 같은 일요일 오전에는 마음 놓고 두드린다.
 
오늘은 쌍윳따니까야를 읽다가 꼭 새기고 싶은 내용을 발견해서 글을 쓰게 되었다. 그것은 깨달은 자의 막행막식과 관련이 있다.
 
자칭타칭 깨달았다는 자들은 걸림이 없다. 그래서 무애행을 하는 것 같다. 나쁘게 말하면 막행막식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라한은 늘 깨어 있는 상태이다. 이런 상태이다 보니 계율은 자동적으로 지켜 진다. 여섯 가지 감각의 문도 자동적으로 수호된다. 이는 “그들에게 방일하는 것은 이미 끝났으므로 그들은 방일할 수가 없는 것이다. (kata tesa appamādena, abhabbā te pamajjitu. )”(M35.134)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자칭타칭 깨달았다고 하는 자들은 막행막식을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자들은 깨달았다고 말할 수 없다. 왜 그런가? 막행막식한다는 것은 감각의 문이 수호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싸띠도 되어 있지 않다. 마치 토한 음식을 다시 삼킨 자들과 같은 것이다.
 
 
2024-01-0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