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법은 들을 준비된 자에게 설한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4. 1. 5. 10:12

법은 들을 준비된 자에게 설한다
 
 
새해 닷새째이다. 새해 다짐했던 것은 계속 지켜나가고 있다. 이대로 주욱 연말 끝자락까지 지켜 나간다면 대단한 정신적 성장을 이룰 것 같다.
 
요즘 일감은 없다. 일감이 없다고 해서 걱정하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겹치기로 들어 올 수 있다. 일감이 없다고 해서 가만 있어서는 안된다. 유튜브나 보는 등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한다면 퇴보할 것이다.
 
해야 할 일이 있다. 매일 하나 이상 글쓰기, 매일 한시간 좌선하기, 매일 경전과 논서읽기, 매일 빠알리어 공부하기를 말한다. 이와 같은 사대과업은 연말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주말없이 지속해 나가야 한다. 일감이 있든 없든 해야 하는 의무적인 일이다.
 
쌍윳따니까야를 읽다가
 
어제 쌍윳따니까야를 읽다가 눈의 띄는 경을 발견 했다. 지루한 반복구문의 연속인 쌍윳따니까야에서 눈에 번쩍 띄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진흙속에서 진주를 발견한 것 같다. 이럴 때 경전 읽는 맛을 알게 된다.
 

 
머리맡에 경전과 논서가 있다. 매일 잠자기 전에 읽고 잠에서 깨어나서 읽는다. 어떤 때는 새벽에 읽기도 한다. 새벽에 잠시 잠에서 깰 때가 있는데 그 때 스탠드 불을 켜고 경전을 펼치는 것이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하루라도 경전을 읽지 않으면 마음이 혼탁해지는 것 같다. 경전을 펼치는 순간 마음은 청정해진다.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일 것이다.
 
경전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발견했을 때 황재한 것 같다. 이럴 때는 오랫동안 새기고자 한다. 이렇게 글로 남기는 것은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베리핫짜니의 경(S35.133), 데바다하의 경(S35.134), 기회의 경(S35.135)을 말한다.
 
김진태 선생이 부탁한 것이 있었는데
 
대구에 사는 김진태 선생이 있다. 김진태 선생은 재가수행자이다. 또한 불교학자이기도 하다.
 
김진태 선생은 2007년 처음으로 만났다. 김진태 선생이 능인선원 금강회에서 반야심경 강의를 할 때 본 것이다. 김진태 선생은 2017년에는 미얀마로 수행자들을 인솔해 가기도 했다. 그때 함께 했었다.
 
작년 11월 김진태 선생을 조계사에서 만났다. 그때 김진태 선생은 자신의 저서 ‘반야심경의 바른 이해’에 대하여 증보판 준비를 하고 있었다.
 
김진태 선생이 부탁한 것이 하나 있었다. 자신이 어디에선가 들은 것이 있었는데 어느 경전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찾아 달라고 했다. 그것은 법사가 법을 설할 때 듣는 자의 조건에 대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청법(請法)자의 태도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법사는 법을 청해야 설한다. 마치 길거리 전도사처럼 아무나 붙잡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법사는 아무에게나 법을 설하지 않는 것이다.
 
김진태 선생에게 청법자의 조건에 대하여 알려 주었다. 율장 부기에 실려 있는 사항을 카톡으로 알려 준 것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설법에 대한 학습계율)


손에 일산을 든 자에게(Sekh. 57), 마찬가지로
손에 지팡이를 든 자에게(Sekh. 58),
칼을 든 자에게(Sekh. 59).
무기를 든 자에게(Sekh. 60),
여래는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

신발을 신은 자에게(Sekh. 61),

샌들을 신은 자에게(Sekh. 62),
탈 것을 탄 자에게(Sekh. 63),
침상위에 있는 자에게(Sekh. 64),
빈둥거리는 자세를 한 자에게(Sekh. 65),
터번을 두른 자에게(Sekh. 66),
복면을 한 자에게(Sekh. 67),
열한 가지 경우 빠짐이 없이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
(율장 부기, 3장 발생의 개요, 설법에 대한 학습계율)
 

 

 
율장 부기는 ‘빠리바라(Parivara)’라고 하여 율장의 부수적 부분에 대한 것이다. 율장의 대강을 기술한 것으로 ‘율장강요’라고 볼 수 있다.
 
율장 부기를 알게 된 것은 교정작업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부기를 완역했을 때 오자, 탈자 등 교정을 본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해서 청법자의 조건이 부기에 실려 있음을 알게 되었다.
 
청법자는 세 번 청해야 한다. 그것도 손에 일산을 들지 않는 등 열한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이런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법사는 법을 설하지 않는다.
 
어제 밤에 쌍윳따니까야 ‘베라핫짜니의 경’(S35.133)을 읽다가 설법에 대한 학습계율에 대한 것임을 알았다. 김진태 선생이 찾던 경이 이 경이 아닐까 생각했다.
 
바라문녀의 공양청
 
부처님 당시 우다인 존자가 어느 바라문 마을에 있었다. 그때 어느 바라문 청년이 우다인 존자의 설법을 듣고 감동했다. 바라문 청년은 자신의 스승의 아내인 바라문녀에게 우다인 존자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바라문녀는 우다인 존자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자 했다. 그래서 바라문 청년에게 공양청하겠다고 요청했다. 이에 우다인 존자는 침묵으로 응했다.
 
마침내 공양식사하는 날이 왔다. 바라문녀는 잘 차려진 음식을 손수 우다인 존자에게 대접했다.
 
공양을 했으면 설법해야 한다. 바라문녀는 설법을 듣고자 했다. 그런데 바라문녀의 태도가 문제가 되었다. 경에 따르면 “그리고 베라핫짜니 부인은 존자 우다인이 식사를 끝내고 바루에 처손을 때는 것을 보고는 신발을 신고 높은 자리에 앉아 머리를 덮어쓰고 존자 우다인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수행자여, 가르침을 설해 주십시오.””(S35.133)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우다인 존자는 계율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비록 공양음식을 받았지만 바라문녀의 태도를 보고서 설법할 마음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신발을 신고 높은 자리에 앉아 머리를 덮어쓰고 (pādukā ārohitvā ucce āsane nisīditvā sīsa oguṇṭhitvā)라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는 율장에서 금하는 것들이다.
 
설법을 청하는 자는 설법자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서는 안된다. 또한 샌들을 신어서도 안된다. 머리에 터번을 둘러서도 안된다. 바라문녀는 이 세 가지를 어겼다. 이런 이유로 우다인 존자는 공양식사만 하고서 설법을 하지 않은 것이다.
 
우다인 존자는 설법을 거부했다. 이는 “자매여, 때가 올 것입니다. (bhavissati, bhagini, samayo)라고 말하며 나가 버린 것에서 알 수 있다.
 
법사는 세 번 청해야 법을 설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경에서도 세 번 청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처음 청했을 때 설하지 않았다. 세 가지 조건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라문 청년은 두 번째로 우다인 존자를 식사에 초대하는 역할을 했다. 이번에는 바라문녀에게 인사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바라문녀는 여전히 높은 자리에 앉아 샌들을 신고 머리에 터번을 쓴 상태였다.
 
바라문녀는 첫 번째 공양과는 달리 두 번째 공양에서는 머리를 숙였다. 바라문녀는 머리를 숙이고서는 “수행자여, 가르침을 설해 주십시오. (bhaa, samaa, dhamman)라며 정중하게 말했다. 그럼에도 우다인 존자는 “자매여, 때가 올 것입니다.”라며 말하고서는 나가버렸다.
 
바라문녀는 두 번의 식사초대에서 법문을 듣지 못했다. 처음에는 인사도 하지 않고 법문을 청했다. 두 번째는 인사를 하고 법문을 청했다. 바라문녀는 어떤 문제인지 몰랐던 것 같다.
 
세 번째 식사초대에서는 법문이 이루어졌다. 이는 바라문녀가 “신발을 벗고 낮은 자리에 앉아 머리를 우러러 존자 우다인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S35.133)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우다인 존자는 세 번째 공양청에서 법문했다. 그것은 법사로부터 법을 들을 태도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는 신발을 벗는 것, 낮은 자리에 앉는 것, 머리덮개를 벗은 것을 말한다.
 
가르침을 경청할 때는
 
가르침을 경청할 때는 규칙이 있다.  율장에서는 신발을 신은 자에게(Sekh. 61), 침상위에 있는 자에게(Sekh. 64), 터번을 두른 자에게(Sekh. 66)에게는 법문하지 않는다고 했다.
 
율장에서 규칙을 세키야(Sekhiya)라고 한다. 규칙 중에서 64번째 항목을 보면 침상위에 있는 자에게(Sekh. 64)는 법을 설하지 않는다고 했다. 여기서 침상위에 있는 자는 높은 자리에 있는 것과 같다.
 
니까야를 보면 왕이라고 해서 높은 자리에 앉아 부처님 법문을 듣지 않는다. 이는 디가니까야 2번 경에서 아자따삿뚜왕이 부처님 계신 곳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한쪽으로 물러섰다.”(D2.13)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제자는 설법할 때 상석에 앉는다. 설법을 듣는 자보다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다. 그런데 바라문녀는 높은 자리에 앉아 신발을 신고 머리에 두른 것이 있었다. 그것도 처음에는 인사도 하지 않고 설법을 해달라고 말했다. 이에 우다인 존자는 청법자가 법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을 확인하고서 “자매여, 때가 올 것입니다.”라고 말하고서는 나가버린 것이다.
 
바라문녀의 귀의문
 
우다인 존자는 세 번째 공양청 받았을 때 설법했다. 설법을 청하는 자가 법을 들을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바라문녀는 공손하게 우다인 존자에게 질문했다. 바라문녀는 “존자여, 거룩한 님들은 무엇이 있을 때에 즐거움과 괴로움이 있다고 말씀하시며, 거룩한 님들은 무엇이 없을 때에 즐거움과 괴로움이 없다고 말씀하십니까?”(S35.133)라며 물었다. 이에 우다인 존자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거룩한 님들은 시각이 있을 때에 즐거움과 괴로움이 있다고 말하며, 거룩한 님들은 시각이 없을 때에 즐거움과 괴로움이 없다고 말합니다.”(S35.133)
 
 
시각에 대한 것이다. 나머지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거룩한 님은 아라한을 말한다. 바라문 가문의 바라문녀가 아라한이 어떤 상태인지 물었다. 이에 우다인 존자는 여섯 감역에서 즐거움도 괴로움도 느끼지 않는 존재에 대하여 아라한이라고 말했다.
 
고대인도에서 바라문 계급은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었다. 최상층부에 있는 바라문 가문의 바라문녀는 우다인 존자의 설법을 듣고 개종하기로 결심한다. 이는 경의 말미에 다음과 같은 귀의문(歸依文)으로 알 수 있다.
 
 
존자 우다인이여, 훌륭하십니다. 존자 우다인이여, 훌륭 하십니다.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 가려진 것을 열어 보이듯,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 주듯,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 존자 우다인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 법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존자 우다인이여, 이제 저는 세존께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수행승의 참 모임에 귀의합니다. 존자 우다인께서는 저를 재가의 여자 신자로 받 아 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이 다하도록 귀의하겠습니다.”(S35.133)
 
왜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하는가?
 
매일 경전을 읽는다. 이전에는 읽고 싶은 것만 읽었다. 필요로 하는 경만 읽은 것이다. 이런 방식은 경전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종종 핵심이 되는 경만을 모아 놓은 책을 본다. 이 니까야 저 니까야에서 발췌하여 실어 놓은 짤막한 경을 말한다. 더 나아가 대승경전에 있는 것도 선별하여 함께 실어 놓는다.
 
선집은 초심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깊이 알고자 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아야 한다.
 
니까야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고자 했다. 이는 십년 이상 읽고 싶은 것만 읽은 것에 대한 반성이다. 마치 보고 싶은 것만 보고자 하는 것과 같다.
 
경전읽기 방식을 바꾸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읽는 것이다. 각주에 실려 있는 작은 글씨까지 꼼꼼히 읽는다. 반복구문도 빼놓지 않고 읽어야 한다.
 
반복구문 읽는 것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이럴 경우 단어만 읽는다. 시각에 대한 정형구에서 청각, 후각 등 단어만 보는 것이다.
 
경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나가다 보면 의외로 얻는 것이 많다. 보고 싶은 것만 보았을 때 놓칠 수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빠짐 없이 읽다 보면 마치 진흙 속에서 진주를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는 것이다. 어제 그랬다.
 
들을 준비가 갖추어져 있을 때
 
한국불교에서는 법문을 시작하기 전에 청법가를 부른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법은 청해야 설하는 것이다. 청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설한 경우는 드물다.
 
바라문녀는 우다인 존자가 훌륭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청법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세 번째에 법문을 들을 수 있었다. 이런 태도는 왕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법은 함부로 설하지 말아야 한다. 청법자가 들을 준비가 갖추어져 있어야 법을 설할 수 있다. 반드시 ‘일산을 든 자’ 등 열한 가지 학습계율에 어긋나는 자를 말하지는 않는다. 이는 부처님이 “뿐니야여, 수행승이 1)믿음을 갖추었고, 2)찾아와서, 3)가까이 앉아, 4)질문하고, 5)귀를 기울여 가르침을 듣고, 6)가르침을 기억하고, 7)기억한 가르침의 의미를 탐구하더라도, 8)의미를 알고 원리를 알아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때까지 여래가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A8.82)라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경전적 근거를 발견했으니
 
김진태 선생은 종종 경전적 근거에 대하여 묻는다. 자신이 언젠가 들은 것이 있는데 어느 경전에 있는지 물어 보는 것이다. 작년 12월 청법자의 자세에 대하여 근거가 되는 경이 있는지 물었다.
 
김진태 선생에게 율장에 있는 열한 가지 학습계율에 대한 것을 알려 주었다. 그런데 어제 밤 쌍윳따니까야를 읽다가 경전적 근거를 발견했다. 김진태 선생이 궁금해 하던 경전적 근거가 ‘베라핫짜니의 경’(S35.133)에 실려 있었던 것이다. 이를 카톡으로 알려 주어야겠다.
 
 
2024-01-0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