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2. 29. 09:57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무엇이든지 꾸준히 해야 한다. 하다 말다 하면 결국 하지 않게 된다. 왜 그런가? 관성의 법칙 때문이다.
 
한번 힘을 가하면 그 방향으로 계속 가고자 하는 속성이 있다. 그런데 관성의 법칙은 단지 운동의 법칙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활에서도 볼 수 있다. 그것은 습관으로 나타난다.
 
건전한 습관을 들여야 한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관성의 법칙대로 술을 마시지 않는 삶을 된다. 반대로 매일 술을 마시는 사람은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관성의 법칙에 따른다.
 
매일 글쓰기를 하고 있다. 매일 이른 아침 백권당에 와서 하얀 여백을 마주하며 자판을 두드린다. 이런 세월이 십년이 넘었다. 그러다 보니 하루만 쓰지 않아도 견딜 수 없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 같다. 무엇이라도 하나 써야 한다. 하나 써서 인터넷에 올려 놓아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 한 것 같다. 이런 것도 관성의 법칙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요즘 명상을 매일 한다. 글쓰기가 끝나면 바로 명상으로 들어간다. 글쓰기에서 형성된 집중을 고스란히 명상으로 가져 가면 매우 효과적이다. 힘들이지 않고 집중이 된다. 그런데 하루라도 명상을 거스르면 어떻게 될까? 하루, 이틀, 사흘 이렇게 연속으로 하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될까? 자리에 앉기가 싫어질 것이다. 하기 싫은 관성의 법칙이 작동된 것이다.
 
매일 경전을 보고 있다. 따로 경전 볼 시간이 없어서 머리맡에 놓고 보고 있다. 잠 자기 전과 잠에서 깨어난 후에 본다. 종종 새벽에 보기도 한다. 새벽에 잠에서 깨었을 때 잠시 보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잠을 잔다.
 
머리맡에 경전을 둔 것은 습관들이기 위한 것이다. 경전 보는 것을 생활화 하는 것이다. 마음은 스마트폰에 가 있지만 억제한다. 유튜브를 보다 보면 빠져서 헤어 나오기 힘들다. 이럴 때 경전을 펼쳐 든다. 이렇게 매일 경전을 보는 것도 관성의 법칙에 따른 것이다.
 

 
경전을 읽는 것은 진도 나가기 위한 것도 있다. 우리말로 번역된 니까야를 모두다 읽어 보자는 원을 세웠다. 아마 평생 보아야 할 것 같다. 한번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읽은 것을 또 읽어야 한다. 나중에 읽을 때는 형광메모리 칠 해진 것만 보아도 된다. 새겨야 할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매일 똑 같은 일상이다. 거의 변화가 없는 일상이다. 이런 일상이 17년째 이어지고 있다. 개인사업자로 삶을 살면서 시작된 것이다. 이전에는 직장을 자주 옮겼기 때문에 변화무쌍한 삶을 살았다. 당연히 자기계발 할 시간은 없었다. 오로지 직장과 집을 왕래하는 삶만 산 것이다.
 
개인사업자로 살면서 나의 삶을 살게 되었다. 이전에는 나의 삶이 아니었다. 월급을 받아 먹는 다는 것은 시간을 팔아 먹는다는 말과 같다. 직장에 있는 시간은 내 시간이 아니라 사용자의 시간인 것이다. 마치 봉건시대 노예처럼 산 것이다.
 
내가 나답게 산 것은 내 사업을 하면서부터 시작 되었다. 홀로서기를 했을 때 주체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 일감이 없으면 놀아야 했다. 당연히 수입도 없었다. 이럴 때 가만 있을 수 없다. 마치 세렝게티 평원에서 굶주린 치타가 사냥에 나서는 것과 같다.
 
개인사업자로 살면서 동시에 불교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전에 직장 다닐 때는 불교공부는 꿈에도 꾸지 못했다. 불교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다만 정서적으로는 불자였다. 그래서 종교란에 ‘불교’라고 써넣기도 했다.
 
불교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직장을 그만 두고 난 다음부터이다. 마지막 직장을 그만 두자 할 것이 없었다. 시간 보내기 위한 작은 사무실을 하나 임대했는데 할 일이 없어서 컴퓨터를 가지고 놀았다. 그러다가 ‘블로그’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주체적인 삶을 살게 된 것은 블로그에 글을 쓰고 나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2006년도의 일이다. 이후 거의 하루도 빠짐 없이 글을 올렸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이제 7,400개가 넘게 되었다. 이렇게 매일 쓰다 보니 멈출 수가 없다. 이런 것도 관성의 법칙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과거와 비교하여 얼마나 달라졌을까? 변화가 많은 것 같다. 욕망과 분노가 많이 줄었다. 나이가 든 탓도 있을 것이다. 특히 화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분노할 대상을 접했을 때 이를 ‘시험’으로 본다.
 
최근 유튜브에서 어느 여성 재가수행자의 영상을 보았다. 여성 수행자는 거의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것 같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렇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입으로 경지를 말하는 것은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는 증거도 된다. 그럼에도 이야기를 들어 보면 공감하는 것이 많다.
 
여성 수행자가 말하기를 탐, 진, 치를 수행해서 탐, 진, 치가 소멸되었다면 탐, 진, 치를 낼 수 없다고 말했다.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여성수행자는 탐, 진, 치가 소멸 되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자애, 연민, 기쁨, 평정의 마음이 채워졌다고 말했다. 이 말에 공감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탐, 진, 치로 살아 간다. 탐, 진, 치가 많을수록 자애, 연민, 기쁨, 평정은 줄어 든다. 반대로 탐, 진, 치가 적을수록 자애, 연민, 기쁨, 평정은 많아진다. 마치 ‘시소’를 타는 것 같다.
 
내가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줄어 들었다면 당연히 자애, 연민, 기쁨, 평정의 마음은 늘어나야 할 것이다. 탐, 진, 치가 완전히 소멸 되었다면 그 자리에는 자애, 연민, 기쁨, 평정만 남아 있을 것이다.
 
흔히 지혜와 자비는 동전의 양면 같다고 말한다. 지혜로운 자는 자비가 넘침을 말한다. 이런 사람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깨달은 사람은 깨달은 사람을 알아본다. 그러나 범부는 깨달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 이는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라는 말이 있다.
 
범부는 깨달은 사람을 알아보기 힘들다. 깨달은 사람은 지혜가 있기 때문에 그 지혜를 알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이 지혜가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경전에 따르면, 그 사람과 토론해 보면 그 사람에게 지혜가 있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왜 그런가? 지혜는 체험에서 나오는 말이기 때문이다.
 
지혜는 머리로 아는 지식과 다른 것이다. 지혜는 온몸으로 아는 것이 지혜이다. 학자가 아는 지혜와 노인농부가 아는 지혜는 다른 것이다. 학자는 머리로 아는 지식을 가졌지만 노인농부는 온 몸으로 체험해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깨달은 사람인지 알려거든 토론해 보면 알 수 있다. 진리는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진리는 언어로써 드러나기도 한다. 이는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로도 알 수 있다.
 
범부는 깨달은 자의 마음을 알 수 없다. 범부의 지혜는 깨달은 자의 지혜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범부는 깨달은 자를 아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깨달은 자는 탐, 진, 치가 떠난 자이다. 깨달은 자가 욕심 낸다면 그는 더 이상 깨달은 자가 아니다. 깨달은 자가 화를 낸다면 그는 더 이상 깨달은 자가 아니다. 설령 제자를 훈계하기 위한 ‘자비의 분노’라고 말할지라도 성냄은 성냄인 것이다.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은 어리석음이다. 어리석음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깨달은 사람인지 아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자비로운지로 알 수 있다. 왜 그런가? 깨달은 자는 지혜와 자비를 구족한 자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자애로우면 깨달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 사람이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연민의 마음을 낸다면 그 사람은 깨달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 사람이 타인의 성공과 번영에 기뻐한다면 그 사람은 깨달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 사람은 어떤 경우에서라도 평정을 유지한다면 역시 깨달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나는 깨달은 사람인가? 단연코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여전히 마음에는 욕망이 꿈틀대고 분노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와 비교했을 때는 많이 누그러졌다. 아마 나이 탓도 있을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공부하지 않는다. 어른 티를 내려 한다. 요즘 속된 말로 ‘꼰대’짓을 하려 하는 것이다. 특히 남을 가르치는 입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심한 것 같다.
 
늘 배우는 자세로 임하고 있다. 매일 글 쓰는 것도, 매일 한 시간씩 좌선 하는 것도, 매일 한 시간씩 빠알리어 공부하는 것도, 매일 머리맡에 있는 경전과 논서를 읽는 것도 공부하기 위한 것이다.
 
여러모로 부족한 사람이다. 부족하기 때문에 채워 넣기 위해서 공부한다. 좋은 문구가 있으면 새기려고 노력한다. 오늘 새벽 머리맡에 있는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다가 새기고 싶은 문구를 발견했다. 그것은 “물질과 정신을 파악하여 관찰하고 새김에 머무는 이가 볼 수 있다.”(2권, 591쪽)라는 말이다.
 
경전과 논서를 읽다 보면 좋은 말을 발견한다. 놓치기 싫어서 형광메모리펜 칠을 해 둔다. 나중에 다시 볼 것이다. 재가수행자로서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말은 정신과 물질에 대한 것이다. 찰나찰나 생멸하는 정신과 물질을 새기라는 말이다.
 
 
“Nissesa sakhāra viveka lakkhaņa;
Sakala sa
khāta vidhura sabhāva.
Nibbananameta sugatena desita;
J
āneyya sakhāra nirodhamattaka.”

(
대역)

“Nissesa sa
khāra viveka lakkhaņa 남김없이 모든 형성들의 멀리 떠남이라는 특성이 있는

sakala sankh
āta vidhura sabhāva 모든 형성들과 조금도 같지 않은, 정반대인 성품인,

sugatena desita
선서(善逝)이신 부처님께서 설하신,

eta
nibbāna 적정한 특성이 있는 이 열반이라는 법을,

sa
khāra nirodhamattaka 원인과 결과, 두 가지로 서로서로 연결되어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는 모든 물질·정신 형성들이 완전히 사라진, 소멸된 성품일 뿐이라고

(paññav
ā) 지혜 있는 이들이,

j
āneyya 의심 없이, 의혹 없이, 바르고 확실하게 알게 되기를”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534쪽)
 
 
이 게송은 출처가 적혀 있지 않다. 마하시 사야도가 읊은 것 같다. 이 빠알리 게송은 ‘기억해야 할 것의 요약’이라는 항목에 실려 있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이라는 논서의 마침표와 같은 게송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푹 빠져 있다. 이 논서를 만난 것은 행운이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수행방법에 대하여 상세하게 써 놓았을까? 진리는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데 진리의 길로 들어가는 방법에 대하여 어떻게 이렇게 친절하게 써 놓았을까?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고 또 읽는다. 분홍색 형광메모리펜 칠로 인하여 책이 온통 붉은 색이 되었다. 나중에 한번 더 볼 때 칠한 부분만 집중적으로 보면 된다. 더 새기고 싶은 부위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시해 놓았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으면 가슴 벅차다. 직접 체험한 것이 아님에도 머리로는 다 이해된다. 그래서일까 열반과 관련된 2권을 읽지 말라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보는 것은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다.
 
이렇게 불교공부를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열반에 이르기 위함이다. 열반이라는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매일 네 가지 서브루틴을 반복한다. 그런데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보면 새기고 싶은 구절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이 있다. 이를 ‘중대한 위빳사나 열여덟 가지(aṭṭharasa mahāvipassanā nāma)’라고 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중대한 위빳사나 열여덟 가지 대역)
 
(1) aniccānupassana무상하다’라고 관찰하는 지혜인 무상 거듭관찰을 bhāvento수행하는, 닦는 이는 niccasañña항상하다는 인식을 pajahati제거한다. 사라지게 한다. 생겨날 기회를 주지 않는다.

(2) dukkh
ānupassana'괴롭다'라고 관찰하는 지혜인 괴로움 거듭관찰을 bhāvento수행하는, 닦는 이는 sukhasañña행복하다는 인식을 pajahati제거한다. 사라지게 한다. 생겨날 기회를 주지 않는다.

(3) anatt
ānupassana'주재하는 자아가 없다'라고 관찰하는 지혜인 무아 거듭관찰을 bhāvento수행하는, 닦는 이는 attasañña자아라는 인 식을 pajahati제거한다. 사라지게 한다. 생겨날 기회를 주지 않는다.
 
(4) nibbidānupassana 역겨워하면서 관찰하는 지혜인 염오 거듭관찰을 bhāvento수행하는, 닦는 이는 nandi수행하면서 즐기는 갈애, 즉 즐김을 pajahati제거한다. 사라지게 한다. 생겨날 기회를 주지 않는다.

(5) vir
āgānupassana애착을 제거하면서 관찰하는 지혜인 애착 빛바램 거듭관찰을 bhāvento수행하는, 닦는 이는 raga 애착하는 갈애, 즉 애착을 pajahati제거한다. 사라지게 한다. 생겨날 기회를 주지 않 는다.

(6) nirodh
ānupassana'소멸한다'라고 관찰하는 지혜, 또는 다음 새로운 생에 태어나지 않도록 형성들이 소멸되도록 관찰하는 지혜인 소멸 거듭관찰을 bhāvento수행하는, 닦는 이는 samudaya 생겨남을 pajahati제거한다. 사라지게 한다. 생겨날 기회를 주지 않는다.

(7) pa
inissaggānupassana'항상하다. 행복하다. 자아이다'라고 생각 하고 집착하는 번뇌들을 다시 내버리며, 또는 열반으로도 기울게 다시 내버리며 관찰하는 지혜인 다시 내버림 거듭관찰을 bhāvento 수행하는, 닦는 이는 adana생길 기회를 주는 것으로 번뇌를 취함. 받아들임, 형성대상들에 대해 그 허물을 보지 못하고 취함, 받아들임이라는 취함을 pajahati제거한다. 사라지게 한다. 생겨날 기회를 주지 않는다.

(8) khay
ānupassana'무너진다'라고 관찰하는 지혜인 다함 거듭관찰을 bhāvento 수행하는, 닦는 이는 ghanasañña'한 덩어리이다'라고 생 각하는 덩어리라는 인식을 pajahati제거한다. 사라지게 한다. 생겨날 기회를 주지 않는다.

(9) vay
ānupassana 직접 볼 수 있는 현재 형성들의 사라짐, 그것을 바탕으로 직접 접하지 못하는 과거·미래 형성들의 사라짐을 구분하여 관찰하는 지혜인 사라짐 거듭관찰을 bhāvento 수행하는, 닦는 이는 ayūhana수행하면서 행복하고 잘 되려고 노력함이라는 애씀을 pajahati제거한다. 사라지게 한다. 생겨날 기회를 주지 않는다.
 
(10) vipariņāmānupassana'원래 그대로 머물지 않고 바뀐다'라고 관찰하는 변함 거듭관찰을 bhāvento 수행하는, 닦는 이는 수행하면서 dhuvasañña 바뀌지 않고, 변화하지 않는다. 원래 그대로이다'라는 견고하다는 인식을 pajahati제거한다. 사라지게 한다. 생겨날 기회를 주지 않는다.

(11) animitt
ānupassana 항상한 모습이나 형체가 없다'라고 관찰하는 표상없음 거듭관찰을 bhāvento 수행하는, 닦는 이는 nimitta수행하 면서 항상한 모습, 형체가 있는 것처럼 드러나는 형성 표상, 덩어리 표상, 항상하다는 표상 등의 표상을 pajahati제거한다. 사라지게 한다. 생겨날 기회를 주지 않는다.

(12) appanihit
ānupassana바라고 즐기는 것과 반대되는 것으로 관찰 하는 원함없음 거듭관찰을 bhavento수행하는, 닦는 이는 paidhi행 복을 바라는 갈에, 원함을 pajahati제거한다. 사라지게 한다. 생겨날 기회를 주지 않는다.

(13) suññat
ānupassana'주재하는 실체는 없다. 비었다'라고 관찰하는 공(空)함 거듭관찰을 bhāvento수행하는, 닦는 이는 abhinivesa주재 하는 실체라고 생각함, 집착함, 고집을 pajahati제거한다. 사라지게 한다. 생겨날 기회를 주지 않는다.

(4) adhipaññ
ādhammavipassana대상으로서의 형성, 대상을 취하는 것으로서의 형성, 이 두 가지 형성 모두의 소멸을 반복해서 경험하고 알게 되어 '형성들만 사라진다'라고 성품법에 대하여 관찰하여 생겨나는 높은 통찰지 법 관찰 위빳사나를 bhāvento수행하는, 닦는 이는 sārādānābhinivesa항상한 실체, 주재하는 실체 등의 고갱이 취함 고집을 pajahati제거한다. 사라지게 한다. 생겨날 기회를 주지 않는다.

(15) yath
ābhūtañānadassana원인과 함께 물질과 정신을 여실하게, 즉 사실대로 바르게 아는 여실지견을 bhāvento수행하는, 닦는 이는 sammohābhinivesa'과거에는 나라는 것이 있었는가?' 등의 여러 의심, '중생들은 창조주가 창조하였다' 등의 여러 잘못된 견해라는 미혹 고집을 pajahati제거한다. 사라지게 한다. 생겨날 기회를 주지 않는다.

(16)
ādīnavānupassana두려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형성에 대해 허물을 보는 허물 거듭관찰을 bhāvento수행하는, 닦는 이는 ālayabhinivesa 형성들은 의지할 만한, 기댈 만한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들붙음 고집을 pajahati제거한다. 사라지게 한다. 생겨날 기 회를 주지 않는다.

(17) pa
isakhānupassana 형성들을 버리기 위해 다시 관찰하는 재성찰 거듭관찰을 bhavento수행하는, 닦는 이는 appatisankha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인 형성들을 재성찰하지 않음, 즉 다시 관찰하지 않음, 다시 알지 못함이라고 하는 어리석음을 pajahati제거한다. 사라지게 한다. 생겨날 기회를 주지 않는다.

(18) viva
ṭṭānupassana모든 형성들로부터 물러서면서 관찰하는 물러섬 거듭관찰을 bhavento수행하는, 닦는 이는 sayogābhinivesa 형성들과 함께하며 즐기는 속박 고집, 즉 번뇌를 pajahati제거한다. 사라 지게 한다. 생겨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537-540쪽)
 
 
일생의 방향은 정해졌다. 그 길로만 주욱 가면 된다. 하루일과도 진리의 길로 가는 일정으로 짜여져 있다. 글쓰기, 좌선하기, 빠알리공부하기, 경전읽기 라는 네 기지 서브루틴을 말한다.
 
올해 한해가 다 지나간다. 오늘이 지나면 이틀 남았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는 큰 변화는 없다. 작년의 연속이고 재작년의 연속이다. 단지 햇수만 바뀔 뿐이다. 언제 중단 될지 알 수 없지만 관성의 법칙대로 주욱 나아가고자 한다.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한다.
 
 
2023-12-2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