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중축복과 오중축복의 차이는?
평온한 아침이다. 지금 시각은 7시 11분, 아직 해는 뜨지 않았다. 잔뜩 구를 낀 날씨이지만 마음은 가볍다. 몸도 편안하다. 몸과 마음이 가벼우니 삶에 활력을 느낀다.
몸이 불편하면 만사가 귀찮다. 어제가 그랬다. 불선심만 일어나는 것 같았다. 잘 먹고 잘 쉬고 푹 자다 보니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경안상태가 되었다.
마음에 여유가 있다. 그것은 짐이 없는 것이 큰 이유가 된다. 일감이 있어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마음은 조급해진다. 납기를 지켜야 하고 그것도 품질에 문제가 없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을 때 해방된 것 같다.
사람들이 한 세상을 살면서 가장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대부분 사람들은 돈일 것이다. 재물이 행복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는 것이다.
재물은 필요조건이다. 재물은 충분조건은 아닌 것이다. 재물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건강은 충분조건이 된다. 지금 괴롭다면 천문학적 재산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여기 중병에 걸린 자가 있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자에게 재산관리인이 보고 한다. 보유한 주식이 상한가를 쳐서 재산이 늘어 났음을 알린다. 부자는 이런 보고에 시큰둥한다. 영화 ‘버킷리스트’에서 본 한 장면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아유 반노 수캉 발랑”이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법구경에 있는 말이다. 이 말은 “장수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건강하기를!”(Dhp.109)라는 말이다. 장로가 보시하는 자에게 축원해 주는 말이다.
사람들은 오래 살기를 바란다. 그것도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란다. 그것도 아름답게 오래 살기를 바란다. 그것도 행복하게 오래 살기를 바란다. 이렇게 본다면 “아유 반노 수캉 발랑(장수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건강하기를!)”이라는 말은 최상의 축원문이 된다.
잘 사는 것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은 잘 죽는 것이다. 아직까지 죽어 보지 않아서 확신할 수 없지만 이런 저런 지식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것은 성자의 흐름에 들어서 죽는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사악처는 벗어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 죽으면 천상이나 인간에 태어난다. 인간에 태어나도 고귀한 존재로 태어난다. 그래서 성자의 흐름에 드는 것에 대하여 “지옥도 부서지고 축생도 부서지고 아귀의 세계도 부서지고”(S55.30)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신이 성자인 것을 알 수 있을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아는 방법이 있다. 법의 거울(Dhammadasa)에 비추어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거울은 액면 그대로 비추어 준다. 속일 수가 없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과 계행이 있다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삼보에 대한 믿음과 계행은 자신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 된다. 그래서 부처님과 가르침과 상가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계행, 이 네 가지 원리를 구족하면 그는 성자의 흐름에 든 자가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난다까여, 이러한 네 가지 원리를 갖추면 고귀한 제자는 하늘사람이거나 인간이거나 긴 수명을 갖게 되고 하늘사람이거나 인간이거나 아름다움을 갖게 되고 하늘사람이거나 인간이거나 지복을 갖게 되고 하늘사람이거나 인간이거나 명예를 갖게 되고 하늘사람이거나 인간이거나 위신력을 갖게 된다.”(S55.30)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과 계행을 구족한 자에게 다섯 가지 축복이 있다. 그것은 수명(āyu), 아름다움(vaṇṇa), 지복(sukha), 명예(yasa), 위신력 (ādhipateyya)이다. 이를 오중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장로는 보시자에게 “아유 반노 수캉 발랑”하며 축복해준다. 이는 수명, 아름다움, 행복, 건강에 대한 것으로 사중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범부에 대한 축복이기도 하다. 그런데 성자의 흐름에 든 자는 오중축복이다.
오중축복에서 명예가 있다. 이는 사중축복에서 건강이 탈락된 것이다. 그리고 위신력이 추가 되어서 오중축복이 되었다.
불교에서 사중축복은 범부에 대한 축북으로 수명(āyu), 아름다움(vaṇṇa), 지복(sukha), 건강(bala)에 대한 것이다. 오중축복은 성자에 대한 것으로 수명(āyu), 아름다움(vaṇṇa), 지복(sukha), 명예(yasa), 위신력 (ādhipateyya)에 대한 것이다. 차이는 명예와 위신력이다.
범부는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 그러다 보니 깨달은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부처님 제자는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고 있다. 법의 거울이라는 네 가지 원리에 비추어 보면 자신이 성자의 흐름에 들었는지 들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 깨달은 자가 있다. 깨달은 자는 자신의 깨달음의 상태를 스스로 알 수 있다. 깨달음은 누군가 인가해 주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깨달았다고 도장을 찍어 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번뇌는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자신에게 얼마나 번뇌가 남아 있는지도 법의 거울에 비추어 보면 알 수 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이 난다까에게 “난다까여, 나는 이것에 대하여 다른 수행자나 성직자에게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내가 스스로 알고 스스로 보고 스스로 깨우친 것을 설하는 것입니다.”(S55.30)라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불교에서는 누구나 성자가 될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실천하면 누구나 성자의 흐름에 들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성자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이 있다. 깨달은 자는 깨달은 자만 알아 볼 수 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는 말이다.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다. 이는 정신세계가 각각 다름을 말한다. 보다 높은 정신세계를 가진 자는 하위의 정신세계의 가진 자의 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범부는 깨달은 자를 알아 보지 못한다. 반면에 깨달은 자는 범부의 마음을 알고 있다.
위빠사나 선원에서 수행을 하면 수행점검을 한다. 보다 높은 정신세계를 가진 자가 점검해 준다. 이는 나이와 상관 없다. 정신세계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칠세아라한이 삼장법사 장로를 지도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보다 높은 정신 세계를 가진 자는 이미 체험한 자이다. 아직 체험하지 못한 자에게 수행점검을 해 주는 것은 당연하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듯이 범부의 눈에는 범부만 보인다. 설령 바로 옆에 깨달은 자가 있다고 한들 알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그 역은 성립된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범부는 흐름에 든 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한번 돌아오는 님(一來者), 돌아오지 않는님(不還者), 거룩한 님(阿羅漢)의 마음을 알지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거룩한 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안다. 다른 자도 위에 있는 자는 아래에 있는 자의 마음을 안다. 이와 같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Vism.13.110)라고 했다.
네 가지 종류의 성자가 있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을 말한다. 이 네 가지 과위는 각각 다른 정신세계에서 살아 가고 있다.
수다원은 아라한의 마음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라한 모두 다 알고 있다. 이는 “길과 경지를 알 때는 그것은 무한적 대상을 갖는다.”(Vism.13.110)라는 말에 따른다.
깨닫지 못한 자는 깨달은 자의 마음을 알 수 없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경전에 따르면 하나의 롤모델로 판단할 수 있다. 부처님과 견주어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수행승들이여, 관찰하는 수행승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읽는지 알지 못한다면, 여래에 대하여 두 가지 관점에서 눈과 귀를 통해서 인식 가능하다는 관점에서 ‘눈이나 귀를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오염된 상태들이 여래에게 존재하는지 아닌지’를 관찰해야 한다.”(M47.6)라는 했다.
하나의 판단 기준이 있으면 비교하기 쉽다. 그 사람이 깨달은 자인지 아닌지 알아 보려면 깨달은 자와 비교해 보면 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은 자이기 때문에 부처님과 견주어 보았을 때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직접적으로 만나기도 하고 간접적으로 접하기도 한다. 페이스북과 같은 에스엔에스에서는 간접적으로 접한다. 그러나 대화를 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오래 함께 같이 살아보기 전에는 그 사람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 사람이 깨달은 사람인지 알아 보는 방법이 있다. 그 사람과 토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려면 질문해야 한다. 그런데 질문을 통해서 상대방도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왜 그런가? 질문은 그 사람의 현재 상태를 잘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질문에 훌륭한 답이 나온다. 대화를 통해서 서로 정신적인 경지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나보다 더 높은 정신적 단계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초기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해 놓았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사람들은 사람과 함께 논의 하면서 이와 같이 ‘이 존자는 탐구하는 자세와 말솜씨와 질문하는 것에 따르면, 이 존자는 지혜가 열악하고 이 존자는 지혜가 없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존자는 심오하고 승묘하고 사유의 영역을 뛰어넘고 미묘하여 오직 슬기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의미 있는 말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존자는 가르침을 설할 때에 간략하고 혹은 상세하게 설명하고, 교시하고, 시설하고, 확립하고, 개현하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밝힐 힘이 없다.’라고 안다.”(A4.192)
보다 높은 정신적인 과위에 오른 자의 언어는 다르다. 이는 경에서 “심오하고 승묘하고 사유의 영역을 뛰어넘고 미묘하여 오직 슬기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의미 있는 말을 표현한다.”라는 구절로 알 수 있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열반이다. 그런데 열반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열반은 사유의 영역을 뛰어넘은 것이고, 미묘한 것이고, 오직 지혜로운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선불교에 법거량이 있다. 자신이 어느 정도 정신적 단계인지 알려면 자신보다 더 나은 자를 찾아가서 대화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초기경전에도 실려 있다. 질문과 응답으로 어느 정도 경지인지 알 수 있음을 말한다.
깨달은 자는 깨달은 자를 알아본다. 그러나 범부는 깨달은 자를 알아 보지 못한다. 주변에 깨달은 자가 있어도 알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대왕이여, 당신은 세속인으로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고 북적거리는 수많은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으며 까씨 국에서 나는 전단을 쓰고 화환과 향수의 크림을 사용하며 금과 은을 받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들이 거룩한 님인가 또는 거룩한 길에 들어선 님인가’를 알기 어렵습니다.”(Ud.64)라고 했다.
범부는 그 사람이 깨달은 자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옥석을 가릴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알아 보는 방법이 있다. 부처님과 견주어 보는 것이다. 부처님이 없는 시대에 산다면 가장 존경하는 사람과 견주어 보는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 ‘선언의 경’(A10.84)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열 가지 깨달음의 판단기준이 있다.
1) 이 존자는 분노하고 있다.
2) 이 존자는 원한을 품고 있다.
3) 이 존자는 위선을 품고 있다.
4) 이 존자는 잔인하다.
5) 이 존자는 질투하고 있다.
6) 이 존자는 인색하다.
7) 이 존자는 기만하고 있다.
8) 이 존자는 허상을 품고 있다.
9) 이 존자는 삿된 욕망을 가지고 있다.
10) 이 존자는 새김을 잃고 있다.
깨달음 판단기준을 보면 크게 탐, 진, 치에 대한 것이다. 그 사람에게 탐, 진, 치가 얼마나 남아 있느냐에 따라 정신적 단계가 달라진다. 탐진치가 완전하게 소멸되었다면 아라한이 된다.
탐진치는 깨달음의 단계를 판별하는 잣대와도 같다. 가장 쉽게 드러나는 것인 성냄이다. 이는 눈으로 직접 확인가능한 것이다.
큰스님이 벌컥 화를 냈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어떤 이는 자비의 분노라고 말할 수도 있다. 감정을 실지 않고 단지 화내는 모습만 보여 주는 것을 말한다. 이는 “여래가 설한 가르침과 계율에 비추어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은 퇴전이다.”(A10.84)라는 가르침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화를 내면 낮은 단계라고 보아야 한다.
성냄은 눈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파악하기 쉽다. 그러나 탐욕은 좀처럼 알기 어렵다. 그러나 아는 방법이 있다. 밥 먹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젓가락 하나 놀리는 것만 보아도 그 사람이 얼마나 탐욕이 있는지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어리석은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리석음은 성냄과 탐욕은 드러나기 때문에 알 수 있다. 또한 질투와 인색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얼마나 지혜로운 자인지는 알기 힘들다.
그 사람이 얼마나 지혜로운 자인지는 토론해 보아야 알 수 있다. 그러나 범부의 마음으로는 그 사람의 정신적 수준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아마 그것은 열 번째 항복인“이 존자는 새김을 잃고 있다.”라는 말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새김은 사띠를 말한다. 사띠를 유지하고 있을 때 깨달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도 올바른 사띠, 삼마사띠를 말한다. 사띠는 기억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도 사띠에 해당된다. 매사에 늘 새김을 유지하고 있다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어느 단계의 사람일까? 요즘 화를 낸 적이 없기 때문에 성냄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계에 부딪치면 무너진다. 단지 화를 표출하지 않을 뿐이지 마음속으로는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욕망은 어떠할까? 허겁지겁 밥 먹는 것을 보면 여전히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나에게는 질투와 인색도 대단하다. 다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시기와 질투에 지배 받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띠가 없다는 것이다. 자꾸 잊어 버린다든가 자주 떨어뜨리는 것 등이 이에 해당된다. 매사에 새김이 없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정신적은 능력에 따라 세계를 구분해 놓았다. 가장 저열한 단계는 지옥이다. 잔인하고 살생을 저지르는 자들이 가는 악처이다. 다음은 아귀이다. 인색한 자들이 가는 곳이다. 다음은 축생이다. 어리석고 탐욕이 있는 자들이 가는 세계이다. 오계를 지키면 인간으로 태어난다. 보시하고 지계하는 삶을 살면 욕계천상에 태어난다. 수행을 하면 색계와 무색계 천상에 태어난다. 모두 33개의 정신세계가 있다.
불교에서는 해탈과 열반을 목적으로 한다. 다시는 죽지도 않고 태어나지도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은 탐, 진, 치를 소멸하는 길이다.
종종 이런 생각을 해본다. “저 사람은 깨달은 사람일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과 함께 살아 보기 전에는 그 사람의 계행을 알 수 없다. 그것도 오래 살아 보아야 한다.
그 사람과 대화하기 전에는 그 사람이 얼마나 정직한지 알 수 없다. 한 입으로 두 말하는지는 살아 보아야 알 수 있다.
그 사람과 토론하기 전에는 그 사람이 얼마나 지혜로운 자인지 알 수 없다. 심오하고 미묘하고 언어를 뛰어넘는 말을 하는지로 알 수 있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범부의 눈에는 범부만 보인다. 범부는 깨달은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똑 같은 범부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 보면 보인다. 열 가지 판단기준에 적용하면 드러난다. 그 중에서도 새김(sati)이다. 매사에 사띠를 놓치지 않고 있다면 그는 지혜로운 사람임에 틀림 없다.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에스엔에스에도 수많은 친구들이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없다. 말을 하지 않으면 ‘도인’인지 ‘돌인’인지 알 수 없다.
범부는 도인을 알 수 없다. 범부의 눈에는 범부만 보이기 때문에 도인을 알아 볼 수 없는 것이 큰 이유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도인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눈 있는 자는 오히려 눈먼 자와 같고, 귀 있는 자는 오히려 귀먹은 자와 같아야 한다. 지혜가 있는 자는 오히려 바보와 같고 힘센 자는 오히려 허약한 자와 같아야 한다.” (Thag.501)라는 테라가타 게송으로도 알 수 있다.
도인은 봉사처럼 살고 귀머거리처럼 산다. 도인은 심지어 바보처럼 산다. 주변에 이렇게 사는 사람이 있다면 천대받을 것이다. 그러나 도인은 도인을 알아 본다.
주변에는 수많은 도인이 있다. 주변에는 수많은 깨달은 자들이 있다. 그러나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은 범부의 눈을 가졌기 때문이다.
범부는 눈이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범부는 지혜가 없어서 누가 도인인지, 누가 깨달은 자인지 알지 못한다. 때로 자신을 드러내는 자를 도인이나 깨달은 자로 착각할 수 있다. 페이스북과 같은 에스엔에스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도인은 조용히 살아간다. 도인은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간다. 도인은 바보처럼 살아간다.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시장이나 버스정거장에서 채소 등을 파는 사람이 관세음보살일 수 있다.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부가 도인일 수 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할 바를 묵묵히 다하는 자가 성자일 수 있다.
여기 화 내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도인일 수 있다. 여기 욕심 없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도인일 수 있다. 여기 매사에 새김이 있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깨달은 사람일 수 있다. 도인은 도처에 있다. 잘 보면 보인다.
2023-12-0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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