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왜 목숨 걸고 바라밀공덕을 쌓아야 하는가?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1. 21. 10:54

왜 목숨 걸고 바라밀공덕을 쌓아야 하는가?
 
 
무엇이든지 힘 있을 때 해야 한다. 아침에 글을 쓰는 것도 힘이 있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학업에 매진하는 것은 힘이 있기 때문이다. 수행도 힘 있을 때 해야 한다.
 
한시간 앉아있기가 쉽지 않다.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다. 먼저 건강해야 한다. 한살이라도 젊으면 더 나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삼십대 수행하면 아나함이 될 수 있고, 사오십대에 수행하면 사다함, 육칠십대에 수행하면 수다원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앉아 있는다고 하여 모두 열반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힘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어제 저녁 유튜브에서 빤냐와로 스님 법문에서 들었다.
 
현시대는 인터넷과 정보통신 시대이다. 네트워크만 깔려 있으면 손 안에서도 정보를 접할 수 있다. 오래 전에 법문한 것도 누군가 올려 놓으면 공유된다.
 
어제 본 빤냐와로 스님의 유튜브 동영상 제목은 ‘수행 중 일어나는 현상 (20110927) (아짠 빤냐와로 진용)’이다. 2011년 법문한 것이다. 8년전에 올려 놓았는데 조회수는 3,000명 가량 된다. 놀고 먹고 마시는 동영상은 수만, 수십만 되지만 진리에 대한 것은 매우 낮은 편이다.
 
스님은 열반에 대하여 이야기 했다. 열반에 들어가는 것에 대하여 화장실 변기의 비유를 들었다. 마치 “쑤욱” 빨려 들듯이 들어간다고 했다. 그런데 힘이 없으면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흔히 도통한다고 말한다. 수행을 해서 무언가 밝은 것이 나타난다거나 한꺼번에 모든 것을 아는 경지가 되었을 때 ‘도통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체험을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도에 들어간다’라는 말도 있다는 것이다.
 
도통한다는 말과 도에 들어간다는 말은 다르다. 일반적으로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도통한다는 말을 하는 것 같다. 그런데 도에 들어간다는 말은 도통하는 것을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마치 화장실 변기의 물을 내리는 것처럼 몸과 마음이 “쑤욱”하며 빨려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도에 들어간다는 말은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도 보인다. 수행지침서에서는 도에 들어가는 순간, 열반의 순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해 놓았다.
 
 
1) 매우 무거운 짐을 내려놓듯이 대상과 새김들이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
2) 잡아당겨 움켜쥐던 곳에서 벗어나듯이 대상과 새김들에서 벗어나 버렸다.
3) 매우 단단히 묶여 있던 속박에서 갑자기 벗어나듯이 대상과 새김들로부터 벗어나 버렸다.
4) 대상과 새김들이 사라지는 모습이 마치 등불이 ‘획’꺼져 버리듯이 매우 빠르다.
5) 어둠 속에서 밝음으로 즉시 도달하듯이 대상과 새김들로부터 벗어 나 버렸다.
6) 얽매임 속에서 자유로운 상태로 ‘쑥’하며 이르듯이 대상과 새김들로부터 벗어나 버렸다.
7) 물속에 ‘쑥’가라앉듯이 대상이나 새김이 모두 가라앉아 버렸다.
8) 달려오던 이를 가로막아 갑자기 밀어내듯이 대상과 새김이 멈추어버렸다.
9) 대상과 새기는 마음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106-107쪽)
 
 
이것이 도에 들어가는 순간을 말한다. 마치 화장실 변기에 물을 내리듯이 “쑤욱”하며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빤냐와로 스님의 말의 의하면 힘이 있어야 도에 들어간다고 했다.
 
요즘 에스엔에스(SNS) 시대이다. 카톡, 밴드, 페이스북 등 실시간으로 정보를 주고 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중에서도 페이스북이 가장 강력하다. 그것은 친구맺기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친구, 이른바 ‘페친’ 중에는 스님들도 있다. 어느 스님은 봉사에 열중이다.
 
스님은 밥차를 운영한다. 전국을 대상으로 먹을 것을 만들어 필요로 하는 곳에 전달해 준다. 국내에서 그치지 않는다. 스리랑카에 가서도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다.
 
어느 스님은 미얀마 어린이 돕기 운동을 하고 있다. 난민촌 아이들을 돕는가 하면 아기들 분유값을 마련하기 위한 모금운동도 한다. 또 어느 스님은 무료급식소에서 봉사활동을 한다. 타종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봉사단체에서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스님들은 왜 봉사에 열중일까? 재가자들이나 하는 것을 굳이 스님들이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스님들이 봉사단체에서나 할 일을 하는 것에 대하여 그다지 좋게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빤냐와로 스님의 법문을 듣고 어느 정도 이해는 되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바라밀공덕을 쌓기 위한 것이다.
 
수행만 열심히 하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까?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듯한 체험을 했어도 도에 들어가는 경지, 열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힘은 다름아닌 바라밀공덕을 말한다.
 
부처님은 십바라밀을 실천하여 부처가 되었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힘을 필요로 하는데 사아승지하고도 십만겁동안 바라밀공덕을 쌓은 것이다. 그것도 목숨 걸고 바라밀행을 했다.
 
본래 바라밀행은 목숨 걸고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가? 하나의 예를 들 수 있다. 보시바라밀의 경우 “예를 들어 아내들, 아이들, 재물들을 기부하는 것은 일반적 초월의 길의 보시이고, 손이나 발 등의 장기를 기증하는 것은 우월적 초월의 길의 보시이고, 목숨을 보시하는 것은 승의적 초월의 길의 보시이다.”(Jat.I.73)라고 했다.
 
바라밀행에는 열 가지가 있다. 이를 십바라밀이라고 한다. 계행바라밀도 목숨 걸고 하는 것이고, 출리바라밀도 목숨 걸고 하는 것이다. 이밖에 지혜바라밀, 정진바라밀, 인내바라밀, 결정바라밀, 자애바라밀, 평정바라밀도 목숨 걸고 한다. 그래서 십바라밀을 ‘승의적 초월의 길(dasaparamatthapāramī)’이라고 말한다.
 
무엇이든지 목숨 걸고 하면 되지 않을 것이 없을 것이다. 설령 이 생에서 되지 않으면 다음 생을 기약하면 된다. 이 생에서는 발판을 마련해 놓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부처님 전생 이야기가 실려 있는 자타카가 있다. 자타카를 읽어 보면 보살은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부처가 되기로 서원했기 때문에 어느 생에서 어느 존재로 태어나든지 보살행을 한다. 십바라밀행을 하는 것이다. 그것도 목숨 걸고 한다.
 
자타카를 보면 바라밀행을 하다가 죽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보살이 토끼로 살 때 스스로 먹이가 되었다. 자타카 ‘토끼의 본생이야기’(Jat.316)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바라문이여. 음식을 구하기 위해 내게 온 것은 잘한 일입니다. 오늘 내가 예전에 보시한 적이 없는 것을 보시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대는 계행을 지키는 자로서, 살생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문이여, 가서 갖가지 장작을 모아서 한 숯불을 만들고 나서 나에게 알려주십시오. 내가 자신을 희생하여, 숯불 가운데로 뛰어들겠습니다. 나의 몸이 익으면, 그대가 그 살코기를 먹고 수행자의 삶을 사십시오.”(Jat.316)
 

 
보살이 토끼로 삶을 살 때 말한 것이다. 굶주린 바라문의 먹이가 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결심한 것은 포살일에 계행을 하고 보시를 하면 커다란 과보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처소에 온 행걸자들에게 풀을 대접할 수 없다. 만약에 내게 행걸자가 온다면, 나 자신 몸의 살코기를 주겠다.”(Jat.316)라며 생각한 것이다.
 
 
보살의 서원은 대단했다. 하늘에 있는 제석천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제석천은 토끼 왕을 실험하기 위해서 바라문의 행색으로 토끼 앞에 선 것이다.
 
토끼 왕은 구걸하는 바라문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한몸 먹이가 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토끼에게는 참깨도 없고,/ 콩도 쌀알도 또한 없다./ 이 모닥불로 내가 잘 구워지면, /그것을 먹고서 숲속에서 지내리.”(Jat.316)라며 게송을 읊었다. 그리고 불구덩이에 뛰어 들었다.
 
보살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이는 제석천이 “현자인 토끼여, 나는 바라문이 아닙니다. 니는 제석천입니다. 그대를 시험하기 위해서 왔습니다.”(Jat.316)라며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의 전생담 자타카는 현생과 과거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의 과거 보살행을 들려 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부처님은 토끼의 본생이야기와 관련해서는 “청신사여, 그대는 기뻐하고 환희해야 합니다. 이 보시라는 것은 옛 현자들의 전통입니다. 옛 현자들은, 자신에게 온 행걸자들에게 목숨을 버려서, 자신의 살코기까지 보시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보살은 열 가지 바라밀행을 해서 부처가 되었다. 그런데 성도의 순간에 악마가 방해했다. 이에 보살은 악마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악마여, 그 대는 열가지 일반적 초월의 길도, 열 가지 우월적 초월의 길도, 열 가지 승의적 초원의 길도 닦지 못하고, 다섯 가지 위대한 포기도 닦지 못했고, 앎을 위한 삶도 살지 않았고, 세상의 이익을 위한 삶을 살지 않았고, 깨달음을 위한 삶도 살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나는 닦았다. 그러므로 이 가부좌는 그 대의 것이 아니라, 참으로 나의 것이 다.”(Jat.I.73)
 

 

 
악마는 부처님의 성도를 방해했다. 부처님이 앉아 있던 금강좌를 자신이 차지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자 부처님은 악마에게 십바라밀도 닦지 않고, 위대한 포기의 삶도 살지 않고, 세상의 이익을 위한 삶도 살지 않고, 깨달음을 위한 삶도 살지 않은 자는 이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악마는 보살을 금강좌에서 끌어내고자 했다. 악마의 군대를 동원하여 부처가 되는 것을 방해한 것이다. 그러나 보살은 “초월의 길을 닦은 보살들이 최상의 깨달음을 얻은 날에 도달했던 가부좌는 나의 것이다.”(Jat.I.73)라고 말했다.
 
보살과 악마와의 자리 쟁탈전이 벌어졌다. 악마는 자신의 군대를 동원에서 자신이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다고 했다. 악마의 군대를 증언자로 삼았다. 그러나 부처님은 자신의 바라밀행에 대하여 눈으로 보여줄 수 없었다. 과거생에 바라밀행한 것을 악마의 눈으로 확인시켜 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보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가 보시한 것에 대한 증인들은 의식이 있는 존재들이지만, 나의 이 경우에 는 의식이 있는 어떠한 증인도 없다. 내가 다른 생에서 보시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벳싼따라’로서의 생에서 칠백 번 큰 보시를 행한 것에 대한 증인은 의식이 없는 두터운 대지 이다.”(Jat.I.74)
 

 

 
보살에게는 의식이 있는 증인은 없었다. 과거 보살로 살 때 바라밀행한 것에 대하여 지금 이 자리에서 증언해 줄 의식 있는 존재가 없었기 때문이다.
 
보살은 ‘벳싼따라’라는 이름으로 살았을 때 이야기를 했다. 이는 자타카 대미를 장식하는 7권 ‘벳싼따라 자타카’(Jat.547)에 대한 이야기를 말한다.
 
벳싸따라 자타카는 감동적이다. 보시바라밀의 진수를 보여 주는 바라밀이다. 보살은 벳싼따라로 살 때 보시바라밀 이야기를 악마에게 해 주었다. 이에 대하여 대지가 증언해줄 것이라고 했다.
 

 
석굴암에 가면 석굴암 본존불이 있다. 오른 손을 아래로 하고 있는 ‘항마촉지인’이 특징이다. 조계사의 거대한 황금불상도 항마촉지인이다. 미얀마 불상도 스리랑카 불상도 항마촉지인이다. 보살이 악마의 군대와 싸워서 이긴 것에 대한 표현이다. 항마촉지인은 아마 자타카에서 유래 되었을 것이다.
 

 
보살은 대지를 향해 손을 뻗쳤다. 그러자 “그때 내가 그대의 증인이다.”라며 백의 외침, 천의 외침, 십만 의 외침이 들려왔다. 대지가 증언해 준 것이다. 이에 대하여 “마군을 제압하는 것처럼 소리 쳤다.”(Jat.547)라고 표현되어 있다.
 
보살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 또 다시 태어나 바라밀행을 하기 때문에 죽음은 전혀 두렵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목숨걸고 바라밀행을 하는 것이다.
 
도에 들어가는 것은 힘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바라밀공덕을 쌓아야 한다. 그것도 한생만 쌓는 것이 아니라 여러 생 쌓아야 한다. 열반을 성취한 자들은 이전 생에서도 오랫동안 바라밀 공덕을 쌓았기 때문에 힘이 있어서 들어갔을 것이다.
 
 
2023-11-2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