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축생도 하느님의 세계(色界)에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1. 11. 12:46

축생도 하느님의 세계(色界)에
 
 
개에 대한 이야기를 몇 편 썼다. 대개 부정적이다. 때로 혐오적이다. 이런 글에 대하여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개도 감정이 있다는 것이다. 개도 사람 못지 않은 정이 있다고 말한다.
 
스님은 강아지를 분양했다. 아마 신도들에게 분양했을 것이다. 네 마리 다 분양한 것 같다. 이럴 때 어미개의 심정은 어떠할까? 스님은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우리
이쁜이들이
각자의 운명을 따라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진 모르지만
애초에 만나지 마라 ~
만난자는 반드시 이별이다

다들 좋은 분들이
하나씩 데려가셔서
그나마 위안은 되지만 ~

좀있다가 이쁜이
수술도 시켜줘야 한다 ~~

날은 추워지는데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

그래도 씁쓸함은 어쩔수 없다 ~


무슨 일로 어찌하여 태어났던고 ~


이쁜아! 이제 낳지말자 미안하다 ~

각자 어디서든 인연따라 편안하길 ~

나무 우리 이쁜이화신 보살 마하살 ~

사진은 ~ 새끼들을 멀리 떠나보내고
하루종일 새끼들을 찾아 헤매다니다
삶을포기한 이쁜이 ~ 에휴 맘아프다

OO산 OO사 OO암 OO산방”

 

 

 

 
 
스님은 네 마리의 강아지들에 대하여 ‘이쁜이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어미개를 ‘이쁜이보살’이라고 했다. 태어난지 한달 밖에 되지 않은 강아지들을 떠나 보내는 심정에 대하여 어미개를 대신하여 말하고 있다.
 
스님의 개는 이번이 두 번째 출산이다. 이삼년전 첫 번째 출산했을 때도 알렸다. 이번에 두 번째 출산도 상세히 알렸다. 그런데 원치 않는 임신이었다는 것이다.
 
원치 않는 임신은 당연히 원치 않는 출산이 된다. 그럼에도 태어났으니 소중한 생명이다. 자비의 마음으로 다시는 개라는 축생으로 태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이 절절하다.
 
스님은 강아지에 대한 글을 종종 올린다. 그때 마다 “어쩌다가 강아지로 태어났을까?”라든가, “얘네들은 어디서 왔을까?”라든가, “불쌍하다”라고 댓글을 달아 주었다. 그럴 때마다 스님은 윤회의 무서움을 말하면서 “인간도 불쌍하기는 마찬가지이지요”라는 식으로 답글을 달았다.
 
인간이나 개나 윤회하는 존재이다. 육도윤회에서 두 세계는 눈으로 직접 확인이 가능한 것이다. 이럴 때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얼마나 다행으로 생각하는지 모른다. 그것은 축생의 삶과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불교적 윤회관에 따르면 인간이 죽으면 개로도 태어날 수 있다. 이는 업식(業識: kammaviññāa)에 따라 육도윤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기경전에서 인간이 개로 태어났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부처님의 전생이야기를 다룬 자타카가 있다. 자타카를 보면 부처님은 축생으로도 태어났다. 그러나 개로 태어난 것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소로 태어난 이야기도 없다. 아마도 집에서 가축으로 기르는 축생은 대상이 되지 않은 것 같다.
 
초기경전에 축생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그러나 개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는 편이다. 두 편을 발견했다. 하나는 맛지마니까야 ‘개의 행실을 닦는 자의 경’(M57)과 상윳따니까야 ‘가죽끈에 묶임의 경’(S22.99)이 그것이다.
 
초기경전에서 개에 대한 이야기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한마디로 ‘개 같은 사람’에 대한 것이다. 개처럼 사는 자를 말한다.
 
부처님 당시에 소처럼 개처럼 사는 자들이 있었다. 개처럼 사는 자에 대하여 경에서는 “개처럼 몸을 구부리고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M57)라고 표현되어 있다.
 
개처럼 사는 자는 개처럼 행위한다. 주석을 보면 “그는 그의 두발로 땅을 긁고 몸을 구부리고 앉았다. ‘저는 개가 하는 짓을 행합니다.’고 말 하며 세존께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나서 두 손으로 땅을 긁으며 머리를 흔들며 멍멍하고 짓은 후에 손발을 겹쳐서 개처럼 앉았다.”(Pps.III.100)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들은 왜 소처럼 개처럼 살았을까? 이는 “개의 행실을 닦는 쎄니야는 고행을 행하는 자입니다.”(M57)라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 당시에 고행을 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개처럼 살았다. 자신의 몸을 학대해서 고행을 하면 몸이 청정해질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잘못된 믿음이 있다. 잘못된 수행방법이 있다. 이를 계금취견이라고 한다. 외도에게서 볼 수 있다.
 
부처님은 개처럼 사는 자에 뭐라고 말씀하셨을까? 이는 “세상에 어떤 사람이 완전히 철저히 개의 행실을 닦고, 완전히 철저하게 개의 습관을 닦고, 완전히 철저하게 개의 마음을 닦고, 완전히 철저하게 개의 행동을 닦으면,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개의 동료로 태어납니다.”(M57)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업대로 산다는 말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는행위한 대로 태어납니다.”(M57)라고 말했다. 개의 행실을 닦으면 개로 태어남을 말한다.
 
개의 행실을 닦으면 청정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이런 사견에 대하여 부처님은 “두 가지 운명 즉 지옥이나 축생이 그를 기다린다고 나는 말합니다.”(M57)라고 말했다.
 
사견은 십악업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사견은 무간업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초기불교에 육무간업이 있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오무간업에 하나 더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다름 아닌 사견(邪見)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그는 이와 같이 ‘올바른 견해를 지닌 사람이 다른 스승을 인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고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리고 그는 ‘보통의 일반사람이 다른 스승을 인정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라고 분명히 안다.”(M115)
 
 
오무간업이 있다. 이는 어머니의 생명을 빼앗는 것, 아버지의 생명을 빼앗는 것, 아라한의 목숨을 빼앗는 것, 부처님에게 피를 흘리게 하는 것, 그리고 승가를 분열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경전에서는 데바닷따를 지칭한다. 그런데 여기에 사견을 가지는 것이 하나 더 추가 되어서 육무간업이 된다는 것이다.
 
무간업을 지으면 어떻게 될까? 한우주기가 끝나도 구제받지 못한다. 빛이 없는 암흑의 지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데바닷따가 대표적이다.
 
데바닷따는 부처님을 살해하고 자신이 부처님이 되고자 했다. 그 결과 승단을 분열시켰다. 또한 부처님의 몸에 피가 나게 했다. 이는 사견에 따른 것이다. 이런 데바닷따에 대하여 부처님은 “데바닷따여, 그만 두어라. 참모임의 파괴를 기뻐하지 말라. 데바닷따여, 참모임의 분열은 엄중한 것이다. 데바닷따여, 조화로운 참모임을 파괴하면, 한우주기 동안 지탱하는 죄과를 낳고, 한우주기 동안 지옥에서 삶아진다.”(율장소품, Vin.II.198)라고 했다.
 
사견의 반대말은 정견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정견이다. 당연히 부처님 가르침이 아닌 것은 사견이 된다. 잘못된 믿음, 잘못된 수행방법도 사견에 따른 것이다.
 
소처럼 개처럼 사는 자는 사견에 따른 것이다. 개처럼 살며 개의 행실을 닦는 자는 청정한 삶이 아니다. 개로 행위한 과보에 따라 개의 동료로 태어나거나 지옥과 같은 악처에 날 것이라고 했다.
 
한번 사견에 빠지면 헤어나오기 어렵다. 어리석은 자가 어리석은 줄 모르는 것과 같다. 영원주의와 허무주의가 대표적이다.
 
사견은 견고한 것이다. 견고하기 때문에 버리기 어렵다. 또한 그 견해로 인하여 불선업을 짓게 된다. 그런데 육무간업에서 최악은 사견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는 “그 업의 잠재력이 아직도 살아 움직이는 한, 심지어 세상의 시스템이 파괴된다고 하더라도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업과 윤회의 법칙, 346쪽)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불교적 우주관에 따르면 우주는 겁단위로 성주괴공한다. 일겁에 성주괴공하는 것이다. 그래서 겁화가 일어나면 색계초선천까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예를 들어 버터나 참기름이 불이 타서 연소되면, 결코 재학 검댕이를 남기지 않듯, 수행승들이여, 이 산의 제왕인 수미산이 불 타서 연소되면, 결코 재나 검댕이를 남기지 않는다.”(A7.66)라고 했다.
 
우주가 괴겁기가 되면 지옥부터 차례로 파괴된다. 색계초선천까지 파괴되는데 검댕이 하나 남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사견을 가지면 한우주기가 지나도 암흑의 사이지옥(lokantarika)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이지옥은 간극지옥이라고도 한다. 세계(시스템)와 세계 사이에 있는 일종의 빛의 사각지대를 말한다. 그래서 한우주기동안 빛을 볼 수 없다. 부처가 출현해야 그제서야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볼 수 있는 무간지옥이다.
 
개의 행실을 닦는 자는 그 행위로 인하여 악처로 떨어진다. 그런데 축생으로 떨어져도 언젠가는 축생계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가능할까? 청정도론에서는 “이와 같이 오랜 세월이 지나면 이곳저곳의 물이 말라버린다. 서서히 물고기와 거북이도 죽어서 하느님의 세계에 태어난다. 지옥의 뭇삶들도 죽어서 하느님의 세계에 태어난다.”(Vism.13.32)라고 했다.
 
겁화가 일어나면 색계초선천까지 파괴된다. 검댕이 하나 남기지 않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런데 색계는 선정을 닦은 자들이 태어나는 세계라는 것이다.
 
괴겁기에 초선천까지 파괴된다. 이는 탐욕이 치성했을 때 겁화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초선천 이상은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옥이나 축생과 같은 악처에 태어난 자도 괴겁기가 되면 색계에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괴겁기가 되면 우주가 지옥부터 파괴된다. 지옥에서부터 차례로 축생, 아수라, 인간, 욕계천상, 색계초선천 순으로 파괴되는 것이다.
 
세계가 파괴되면 텅텅 빌 것이다. 지옥도 텅텅 빌 것이고, 축생도 텅텅 빌 것이다. 당연히 인간도 텅텅 빌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텅텅 빌 때에 지옥 중생도 색계 천상에 태어나고 축생 중생도 색계 천상에 태어날 것이라고 한다.
 
어떻게 악처 중생들은 색계 천상에 태어날 수 있을까? 악처에서는 선정수행하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 않음에도 어떻게 색계에 태어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어떻게 그들이 그곳에 태어나는가? 감각적 쾌락의 욕망계의 천상세계에서 얻은 선정을 통해서 그곳에 태어난다.”(Vism.13.33)라고 했다.
 
유일신교에서는 한번 지옥이면 영원한 지옥이 된다. 그러나 불교적 세계관에서는 영원한 지옥은 있을 수 없다. 영원주의적 세계관에서는 한번 천상이면 영원한 천상이고 한번 지옥이면 영원한 지옥이라는 견해가 성립되지만 제행무상을 말하는 불교적 우주관에서는 영원한 것은 없다. 당연히 지옥도 축생도 영원하지 않다. 그래서 지은 행위(業)에 따라 육도윤회한다고 말한다.
 
축생으로 태어난 중생은 축생으로 살아가기 쉽다. 축생이 인간이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 그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올라서 그 구멍이 하나가 뚫린 멍에에 목을 끼워 넣는 것이 수행승들이여, 한번 타락한 곳에 떨어진 어리석은 자가 인간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보다 빠르다.”(M129)라고 했다. 이른바 맹구우목의 비유이다.
 
한번 축생으로 떨어지면 인간의 지위로 회복되기 힘들다. 그 어려움에 대하여 눈먼 거북이가 백년마다 한번 떠오르는 널판지의 구멍에 목을 끼워 넣는 것과 같다고 했다. 사실상 축생이 인간의 지위를 얻는 것이 불가능함을 말한다.
 
축생이 인간의 지위를 얻는 것이 왜 불가능한가? 이는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약육강식이 있다.”(M129)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축생은 약육강식을 특징으로 한다. 인간으로 말하면 불살생계를 어기는 것이다. 이처럼 서로 잡아 먹고 서로 잡아먹히는 축생의 세계에서 법이 있을 수 없다. 악업의 악순환이다. 이런 세계에 사는 중생이 인간의 지위를 얻는 것에 대하여 맹구우목의 비유로 설명한 것이다.
 
축생이 인간이 될 수도 있다. 한량 없는 윤회에 있어서 언젠가 선업을 행하던 때도 있었을 것이다. 악업이 다하고 선업이 남았을 때 인간의 지위를 획득할 것이다. 어떤 인간의 지위를 획득할까? 경에서는 다음과 설명되어 있다.
 
 
그 어리석은 자는 오랜 세월이 지나 언젠가 어느 곳에선가 인간의 몸을 얻는다면, 그 때마다 비천한 가문 즉, 짠달라 가문, 사냥꾼 가문, 죽세공 가문 수레공 가문, 백정의 가문과 같은 가난하고 음식이 모자라고 곤궁하게 사는 가문에 다시 태어난다. 그곳에서는 음식과 의복을 얻기도 힘들다. 그는 용모가 악하고 모습이 추하고 왜소하고 질병이 많고, 눈멀거나 팔병신이거나 절름발이이거나 반신불수이고, 음식, 음료, 의복, 수레, 화환, 향료, 크림, 침대, 집, 등불을 얻지 못한다. 그는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한다.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고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M129)
 
 
참으로 무서운 가르침이다. 장애를 가진 것에 대해서 인정하기 싫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있는 그대로 말했다. 이는 업대로 살기 때문이다.
 
선업공덕을 쌓아야 한다. 악업이 선업보다 압도적으로 많으면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지위가 낮게 태어난다. 또한 인간으로 오래 있지 못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존재의 태어남은 존재에 기인합니다. 그는 행위한 대로 태어납니다. 태어나면 접촉이 그를 접촉합니다. 그러므로 존재란 행위의 상속자 라고 나는 말합니다. 뿐나여, 어두운 행위 에는 어두운 결과가 따른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M57)라고 말했다.
 
사람 몸 받기 힘들다. 그러나 축생으로 몸 받기는 쉽다. 오계를 어기는 삶을 살면 축생의 지위를 얻는다. 개의 행실을 닦는 자는 어두운 행위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두운 과보를 받는다. 개의 동료로 태어나는 것이다.
 
한번 개로 태어나면 계속 개로 태어날 것이다. 설령 인간으로 태어나도 오래 머물지 못한다. 그런데 악처에 태어난 존재도 괴겁기가 되면 모두 하느님세계(색계)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괴겁기가 되면 세계는 검댕이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지옥도 텅텅 비고 축생도 텅텅 비고 인간도 텅텅 비고 욕계 천상도 텅텅 비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악처 중생들도 천상에 태어날 수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그런데 다른 자들은 후대의 생에서 과보를 받는 업을 통해서 천상세계에 태어난다.”(Vism.13.35)라고 했다.
 
축생의 존재도 괴겁기에는 하느님세계에 태어난다. 이는 순후수업(順後受業)에 따른다. 아직 확정되어 있지 않은 업을 받는 것을 말한다. 미래의 생에서 받는 시기의 업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후대의 생에서 과보를 받는 업이 없이 윤회 가운데 유전하는 뭇삶은 없기 때문이다.”(Vism.13.35)라고 한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를 받게 되어 있다. 이 생에서 못 받으면 다음 생에서 받는다. 다음 생에서도 못 받으면 언젠가 어느 생에서 받게 되어 있다.
 
그가 아무리 극악무도한 죄를 저질렀어도 한량없는 윤회의 과정에서 어느 생에서인가는 선업을 쌓았을 것이다. 그리고 선정수행도 했을 것이다. 그곳이 욕계천상일 수도 있다.
 
악처 중생일지라도 악업에 대한 과보가 다 했을 때 언젠가 어느 세계에서 선정수행한 공덕으로 괴겁기에 하느님세계(색계)에 태어날 수 있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그들도 그곳에서 마찬가지로 선정을 획득한다. 이와 같이 천상세계에서 선정을 획득함으로써 모두가 하느님의 세계에 태어난다.”(Vism.13.35)라고 했다.
 
스님은 강아지들을 떠나 보냈다. 아는 사람들에게 분양한 것이다. 이럴 때 강아지들은 누구의 소유인가?
 
어미 개가 강아지들을 낳았다. 당연히 어미 개의 소유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어미 개에는 소유권이 없다. 개의 소유자가 강아지를 처분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강아지들이 산방에 머문 기간은 한달에 불과하다. 그 사이에 강아지들은 어미 젖을 먹고 토실토실 살이 올랐다. 한창 귀여울 때이다.
 
개는 강아지일 때가 귀엽다. 두 달이 지나면 개로서 모습을 갖춘다. 사람도 아기일 때가 귀엽다. 두 살이 넘어가면 달라진다.
 
어미개는 시름에 잠겨 있다. 스님 글에 따르면 하루종일 강아지들을 찾았다고 한다. 더 이상 찾지 못하자 드러누웠다고 한다. 마치 죽고자 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강아지들은 어디서 왔을까? 어떤 인연으로 오게 되었을까? 한달 어미 젖을 빨다가 인연따라 떠나갔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개로서 일생을 살아 갈 것이다. 이럴 때 상윳따니까야 ‘젖의 경’이 떠오른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을 거쳐서 유전하고 윤회하면서 마신 어머니의 젖이 훨씬 더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그대들은 고통을 경험하고 고뇌를 경험하고 재난을 경험하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S15.4)
 
 
2023-11-1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