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강아지들를 보면
요즘 아파트 단지나 공원에서 개와 산책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대체로 몰티즈 종이 많다. 몸집이 작고 흰 것이 특징이다. 안고 다니는 사람도 있고 유모차에 실어 끌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개는 목줄을 하고 있다. 주인은 줄을 잡는다. 그러나 개는 제멋대로이다. 이곳 저곳 냄새 맡는가 하면 아무 곳에서나 오줌을 눋는다. 똥을 싸면 주인은 치워 준다. 어쨌듯 세상을 더럽히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개를 좋아하지 않는다. 어렸을 때는 좋아했다. 그러나 강아지였을 때뿐이다. 점차 커감에 따라 개의 본연의 모습을 보였을 때 더 이상 좋아 할 수 없었다.
개를 좋아하지 않지만 개를 불쌍하게 생각한다. 이럴 때 “어쩌다가 개로 태어났을까?”라고 생각한다. 축생으로 태어난 과보가 있을 것이다. 연민의 마음의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스님은 개를 사랑하는 것 같다. 새끼를 난 어미 개를 ‘이쁜이보살’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쁜이보살이 어느 날 임신을 했다. 스님은 원치 않는 것이었다.
임신했으면 낳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몇 마리 낳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의 유방이 열 개 가량 되니 열 마리도 낳을 수도 있다. 스님의 개는 네 마리를 낳았다.
스님은 개의 출산을 도왔다. 미역국까지 끓여 주었다. 그리고 인도로 순례를 떠났다.
순례 중인 스님에게 개 소식을 물어 보았다. 페이스북에서 문자로 소통한 것이다.
스님은 강아지 사진을 몇 장 올렸다. 그러면서 “한마리 분양하지 않겠어요?”라며 권유했다. 이에 활짝 웃는 모양의‘웃겨요’아이콘을 눌렀다
강아지 두 마리 사진을 보니 2016년 천장사에서 본 강아지 두 마리가 생각났다. 그때 그 강아지와 지금의 강아지는 생긴 모습이 똑 같은 것 같다. 종이 같은 것일까? 아마도 똥강아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천장사 강아지 2016)
강아지를 ‘똥강아지’라고도 한다. 왜 똥강아지라고 했을까? 그것은 아마 천하고 천하기 때문에 붙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개’자가 붙으면 천한 것이다. 식물이름에도 ‘개’자가 붙은 것이 많다. 요즘에는 타인을 비하할 때도 ‘개’자를 붙인다. 성 대신에 ‘개’자를 붙이는 것이다. 직업에도 ‘개’자를 붙인다. 대체로 권력기관이기 쉽다.
개는 혐오의 대상이다. 이는 명칭에 ‘개’자가 붙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개 플러스’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개’와 ‘똥’의 결합일 것이다. 그래서 ‘개똥’이 된다.
이름 중에 ‘개똥이’가 있다. 귀한 집 자식에 대하여 천하고 천한 이름을 붙여 주는 것이다. 왜 이런 이름을 붙였을까? 아마 그것은 똥개처럼 잘 자라라는 뜻일 것이다. 똥개는 내버려 두어도 알아서 잘 크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귀한 집 자식이 다치는 것을 염려해서 붙여 주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마치 귀한 집 자식을 똥개처럼 보는 것이다.
개는 천박하지만 똥개는 ‘천박 플러스’가 된다. 그런데 강아지를 때로 ‘똥강아지’라고 하는 것이다.
똥강아지가 있다면 똥개도 있다. 똥개는 대체로 계보가 없는 개를 말한다. 족보가 없는 잡종견을 똥개라고 하는 것이다.
개는 똥개이기 쉽다. 그러나 애완견은 똥개가 아니다. 가장 선호하는 듯한 몰티즈는 애완견으로서 최상인 것 같다.
절에서 키우는 개는 똥개로 보인다. 오륙년전에 본 천장사의 강아지도 똥개인 것으로 보이고 페이스북 스님의 개도 똥개로 보인다.
똥개는 강아지일 때가 가장 귀엽다. 그런 한편 서글픈 느낌도 든다. 그럴 때 마다 드는 생각은 “얘네들은 어디서 왔을까?”라는 의문이다.
요즘 유튜브에서 종종 개에 대한 영상을 본다. 한번 보았더니 유튜브 알고리즘이 유도하는 것 같다.
어떤 영상에서 놀라운 것을 보았다. 몰티즈와 허스키가 결합된 새끼가 태어난 것이다. 몰티즈는 숫놈이고 허스키는 암놈이다.
애완견의 대명사 몰티즈는 마치 늑대처럼 생긴 허스키보다 사이즈가 사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새끼가 태어났다. 어떻게 된 일일까?
개 주인에 따르면 몰티즈는 허스키를 6년 따라 다녔다고 한다. 그럼에도 내버려 두었다고 한다. 몸집이 큰 다른 종의 수캐는 중성화 수술을 했지만 몰티즈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속담에 ‘설마가 사람 잡는다’라는 말이 있다. 어느 날 몰티즈는 자신보다 몸집이 네 배나 큰 허스키와 결합했다. 주인은 이를 사진도 찍어 놓았다.
주인은 허를 찔렸다. 설마 했는데 현실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일은 벌어졌다. 한번 수태하면 태내에서 생명은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마침내 새끼들이 태어났다. 여섯 마리가 태어난 것이다. 그런데 강아지들이 성장함에 따라 어미 개와 아비 개의 중간형질이 되었다는 것이다. 반은 몰티즈이고 반은 허스키인 것이다. 그래서 유튜브 영상에서는 ‘몰스키’라고 했다. 이른바 믹스견이 탄생한 것이다.
아비 개 몰티즈는 두 달 된 강아지 보다 사이즈가 작았다. 세상에 이런 일도 일어나는 것이다. 한눈 파는 사이에, 방심한 사이에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유튜브에서 또 하나의 영상을 보았다. 두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주인은 삼박사일여행 갔었다고 한다. 각각 따로 철조망에 가두어 두고 간 것이다. 그 사이에 일이 벌어졌다. 개는 철조망을 부수고 결합한 것이다. 그 결과 무려 11한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한번 수태하면 폭발적인 성장을 한다. 한번 출산하면 강아지들 역시 폭풍성장한다. 열한 마리의 강아지는 성장함에 따라 온 집안을 헤집고 다닌다. 마치 개떼의 엄습처럼 보인다.
강아지 먹이 줄 시간이다. 주인은 먹이를 커다란 그릇에 담아 준다. 이때 강아지들은 우르르 달려 든다. 생존경쟁이다. 양보는 있을 수 없다. 젖 먹을 때도 생존경쟁 한다. 경쟁에서 밀리면 도태된다.
축생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약육강식이다. 강한 것은 잡아 먹고 약한 것은 잡아 먹힌다. 이런 축생의 세계에서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있을 수 없다.
스님은 개를 사랑하는 것 같다. 어미 개가 새끼를 낳을 때마다 “불쌍한 축생들!”이라며 글을 남겼다. 그러면 스님은 “불쌍한 인간들!”이라는 말로 응수했다.
인간이나 개나 동물인 것은 사실이다. 인간도 동물적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축생과 다른 것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이띠붓따까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밝은 원리가 세상을 수호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밝은 원리가 세상을 수호할 수 없다면 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이나 스승의 부인이라고 시설할 수 없을 것이고, 세상은 염소, 양, 닭, 돼지, 개, 승냥이처럼 혼란에 빠질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밝은 원리가 세상을 수호하므로, 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이나 스승의 부인이다라고 시설하는 것이다.”(It.36, A1.51)
부처님은 세상을 밝히는 두 가지 원리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에 대하여 양심과 수치심, 참(慙)과 괴(愧), 히리(hiri)와 옷땁빠(ottappa)라고 한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이 왜 세상을 수호하는 것인가? 이는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은 세상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과도 같기 때문이다.
절에 가면 일주문이 있다. 일주문은 두 개의 기둥으로 지탱된다. 두 개의 기둥 중에 하나만 없어도 무너진다. 두 개 다 없으면 세울 수가 없다. 사람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경에 따르면 두 가지 밝은 원리, 즉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면 축생의 세계와 같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어머니나 이모나 외숙모나 선생의 부인이나 스승의 부인이라고 시설할 수 없을 것”(It.36)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없다면 근친상간도 할 수 있음을 말한다.
개는 근친상간을 할 수 있다. 부모 개가 자식 개와 붙어서 새끼를 낳을 수 있다. 인간에게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경에서는 “세상은 염소, 양, 닭, 돼지, 개, 승냥이처럼 혼란에 빠질 것이다.”(It.36)라고 했다.
인간세상에도 개처럼 사는 자들이 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권력기관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은 마치 약육강식의 축생의 세계에서 사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개검, 개판이라는 명칭을 붙여 주는지 모른다.
개는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혐오의 대명사이다. 이는 축생의 특징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것이 가장 크다. 더 혐오하면 ‘똥’자를 붙여 준다. 그래서 ‘똥개’라고 한다. 사람에게는 ‘개똥이’라는 애칭을 붙여 주기도 한다.
똥강아지는 귀엽다. 그래서일까 옛날 할머니들은 손자들을 보면 “우리 강아지” 또는 “우리 똥강아지”라고 했다.
오늘날 상대방을 비하할 때 ‘개’자를 붙인다. 그런데 ‘개 플러스’는 똥개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똥강아지’라고 한다.
똥강아지는 내버려 두어도 잘 자란다. 사람이 먹다 남은 것을 주어도 잘 먹는다. 먹은 것은 살이 되고 뼈가 된다. 이런 똥강아지를 보면 귀엽다. 그래서일까 할아버지 할머니는 손자를 볼 때 별탈 없이 잘 자라라는 뜻으로 “우리 똥강아지”라고 했을 것이다.
반려동물 8백만 시대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거리 곳곳에서 반려견을 볼 수 있다. 이런 반려견을 볼 때마다 윤회의 두려움을 느낀다.
누구나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하는 삶을 살고 있다. 이번 생에서는 운 좋게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다음 생에는 어떤 존재로 태어날지 알 수 없다.
보시공덕과 지계공덕을 쌓으면 천상이나 인간으로 태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가능성이 높을 뿐이다.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수행공덕을 쌓으면 다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죽어서 축생과 같은 악처는 면할 수 있다. 수행을 해서 성자의 흐름(수다원)에 들어가면 악처의 문은 닫히는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지 못해도 한번에 한해서 악처를 면할 수 있다. 이는 준수다원이 되었을 때를 말한다. 그래서 ‘견해의 청정’과 ‘의혹의 극복의 청정’에 이른 자에 대하여 “그리고 이러한 앎을 갖춘 통찰수행자를 두고 부처님의 교법에서 안식을 얻은 님, 발판을 얻은 님, 존재의 운명이 정초된 님, 작은 흐름에 든 님이라고 한다.”(Vism.19.27)라고 했다.
유튜브 영상에서 강아지에 대한 것을 보면 착잡하기 그지없다. 마치 커다란 공에서 갑자기 여러 개의 공이 갑자기 튀어 나온 것 같다. 강아지 떼가 달려 오는 것을 보면 두려움을 느낀다.
강아지에게서 두려움을 느낀다. 한번에 열 마리 낳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폭풍성장하는 것에서도 두려움을 느낀다. 그것은 강아지 운명에 대한 것이다.
개는 강아지일 때 귀엽다. 똥강아지일 때가 가장 귀여운 것이다. 그러나 폭풍성장하여 두 세 달 지나면 귀여움은 사라진다. 개의 모습을 보였을 때 더 이상 귀여움의 대상은 아니다.
강아지 열 마리를 다 키울 수 없을 것이다. 이럴 경우 분양할 것이다. 누가 똥강아지를 데려 갈 것인가?
강아지는 어미 개의 허락도 없이 낯선 곳으로 팔려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개의 일생을 보낼 것이다. 그런데 유튜브에서는 개의 일생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개는 어떤 운명을 맞을 것인가? 애완견으로 죽음을 맞이한다면 상팔자일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지 알 수 없다.
사람들은 강아지일 때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개도 병들고 늙어 죽는다. 이런 개의 일생에 대하여 사람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나 개나 똑 같은 동물이다. 동물인 것에 있어서는 축생이다. 그러나 인간이 개와 다른 것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이다. 만일 인간에게서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빠져 있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개가 될 것이다. 권력기관이라면 ‘개나리’가 될 것이다.
2023-11-01
담마다사 이병욱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축생도 하느님의 세계(色界)에 (15) | 2023.11.11 |
---|---|
법문을 하면 천신도 듣는다고 하는데 (11) | 2023.11.02 |
출가는 왜 하는가? 중학교 때 출가하려 했는데 (1) | 2023.10.18 |
나는 그 길을 따라 갔다 (0) | 2023.08.15 |
가르침의 도둑 위장출가자가 본 것은 (0) | 2023.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