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가르침의 도둑 위장출가자가 본 것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3. 8. 13. 11:37

가르침의 도둑 위장출가자가 본 것은



지금 시각은 새벽 2시 50분이다. 너무 일찍 일어 났다. 이 시각에 잠 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시각에 어떻게 해야 할까?

든든한 백이 있다. 믿는 구석이 있다. 그것은 경전이다. 빠알리니까야 경전이야말로 의지처이다. 의지처이자 귀의처이자 피난처이다. 경전을 펼치는 순간 안온해진다.

머리맡에 상윳따니까야가 있다. 머리맡에 있어서 손만 닿으면 읽을 수 있다. 이렇게 새벽에 읽을 수 있는 것은 머리맡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인연상윳따(S12)부터 읽고 있다. 한번 읽을 때마다 한 경 읽는다. 너무 많은 경을 읽지 않는다. 내용이 심오하기 때문에 다 수용할 수 없다.

경을 읽었으면 새겨야 한다. 오랫동안 기억해야 한다. 그럴 경우 읽고 또 읽어야 한다. 어제 봤던 것을 한번 더 봐야 한다. 노랑 형광메모리 펜으로 칠해 놓았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다.

오늘 새벽에는 '유행자 쑤시마의 경'(S12.70)을 읽었다. 가르침의 도둑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의 명성이 널리 퍼지자 공양하는 사람들도 늘어 났다. 이를 본 외도가 부처님 가르침을 훔쳐서 자신도 공양받고자 한 것이다. 이에 어느 외도가 부처님의 교단에 위장출가했다.

부처님의 담마를 도둑질하기 위해 위장출가한 외도 수시마가 부처님과 마주했다. 부처님은 외도의 의도를 간파했다. 교화하면 아라한이 될 것으로 보았다. 이에 무상, 고, 무아의 가르침을 펼친다.

위장출가자가 하나 착각한 것이 있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특별한 것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아라한선언을 한 수행자들에게 신통의 능력이 있는지 물어 본다. 이에 아라한들은 그런 능력이 없다고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에 비밀 가르침은 없다. 스승에게서 제자로 이어지는 은밀한 비밀의 가르침(사권)이 없음을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면 누구나 아라한이 될 수 있다. 신통 없이도 가능한 것이다. 지혜에 의한 해탈로도 가능한 것이다.

지혜에 의한 해탈이란 무엇인가? 주석에 따르면, 신체적 정신적 현상에 대한 통찰만으로 거룩한 경지(阿羅漢)에 도달한 자를 말한다. 여기서 신체적 정신적 현상에 대한 통찰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다름아닌 오온에 대한 통찰이다.

오온에 대한 통찰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가르침의 도둑이자 위장출가자 수시마에게 "쑤씨마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영원한 가 무상한가?"라며 물어 본다. 이에 수시마는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라고 대답한다.

부처님 설법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문답식이다. 제자를 가르칠 때에나 외도를 교화할 때도 문답식 기법을 사용한다. 부처님은 "그런데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을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여기는 것은 옳은 것인가?"라며 계속 몰아 부친다.

부처님은 오온에 대하여 무상, 고, 무아를 설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조건발생하는 오온은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임을 말한다. 항상하지 않고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고, 항상하지 않고 무상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것이다.

부처님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오온에 자아, 중생, 신이라는 실체가 없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연기법을 설한다. 부처님은 "쑤씨마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겨난다고 보는가?"라며 역시 문답식으로 진행한다.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존재에 실체가 있을 수 없다. 조건발생하는 연기법을 보면 알 수 있다. 실체가 있다면 연기법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 연기법은 물질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도 적용된다. 우리 몸과 마음에 모두 적용되는 것이다.

연기법에 따르면 이 몸은 내몸이라 할 수 없다. 이 느낌도 내것이라 할 수 없다. 이 분노도 내것이라 할 수 없다. 이런 마음도 내것이 아니다. 모두 원인이 있어서 발생된 것이다. 이를 조건발생법, 연기법이라고 한다.

조건발생하는 것은 조건이 다하면 소멸하기 마련이다. 아주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찰나생찰나멸이 된다. 그럼에도 즐거운 느낌을 자신의 것으로 본다면 이를 갈애에 따른 집착으로 본다.

집착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이는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 난다. 이와 같이 해서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 들이 생겨난다."라는 정형구로 알 수 있다.

집착의 끝은 절망이다. 사람들은 절망을 향하여 달려 가고 있다. 연기의 순방향, 즉 세상의 흐름대로 살면 죽음이라는 절망에 이른다. 지은 행위가 있기 때문에 그 업으로 인해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세세생생 괴로운 삶을 살게 된다. 이에 부처님은 윤회하는 삶을 끊는 법문을 한다. 그것이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와 같은 근본가르침이다.

담마의 도둑이자 위장출가자인 수시마는 부처님으로부터 오온무상과 연기의 가르침을 들었다. 외도가 알고 있는 부처님의 비밀 가르침은 없었던 것이다. 부처님이 설한 근본가르침을 실천하여 번뇌가 소멸된 자,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신통을 가진 것과 비할 바가 아니다.

가르침에 대한 통찰만으로 아라한이 된 자가 있다. 선정에서의 신통없이 지혜에 의한 해탈로 깨달음에 이른 자를 말한다. 이를 선정이 없는 건조한 통찰자라 하여 건관자(乾觀者: sukkhavipassati)라고 한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반드시 선정을 증득해야만, 신통을 부릴 줄 알아야만 깨닫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선정없이 지혜에 의한 해탈만으로도 가능하다. 위빳사나 수행을 해서 깨닫는 것이 가능함을 말한다. 그런데 선정의 상태도 지혜에 의한 해탈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위빳사나 수행자도 선정이 있어야 한다. 건관자에게 선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건관자는 순간삼매로 통찰하기 때문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궁극은 열반이다.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의 소멸은 열반이다."(S12.68)라고 보는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오온의 소멸이다. 명색이 소멸하는 것이다. 또한 의식이 소멸하는 것이다.

명색과 의식은 상호의존적이다. 이는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조건으 로 명색이 생겨난다."(S12.65)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한자어로 표현하면 명색연식(名色緣識)과 식연명식(識緣名色)이 된다. 이것은 현실의 삶에 대한 것이다.

명색과 의식은 갈대묶음이 서로 의존하는 것과 같다. 한 묶음을 떼어 내면 다른 것은 쓰러진다. 그래서 명색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고,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 삶은 명색과 의식이 강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이 의식은 여기서 되돌아오고 더 이상 명색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와 같이 태어나서 늙어서 죽고 세상을 떠나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S12.65)라고 한다. 연기의 순관이 중생의 삶인 것이다.

열반에 이르려면 명색을 넘어서야 한다. 물질, 느낌, 지각, 형성을 소멸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명색을 넘어서면 의식도 소멸하게 된다. 열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이는 부처님이 "나는 깨달음의 길을 성취했다."(S12.65)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깨달음의 길은 빠알리어로 '막고 보다야(maggo bodhaya)'를 번역한 말이다. 이는 명색과 의식의 상호소멸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깨달음의 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는 깨달음의 길을 성취했다. 명색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고,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한다.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역이 소멸하고, 여섯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며, 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며, 갈애가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하고, 집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며,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소멸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해서 소멸한다.”(S12.65)


이것이 깨달음의 길, 도(道)의 길이다. 십이연기 역관이 깨달음의 길인 것이다. 깨달음이라 하여 신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명색과 의식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 즉 열반에 이르는 것이 깨달음의 길이다.

열반은 궁극적 체험에 대한 것이다. 열반을 성취했다고 해서 번뇌가 다 소멸된 것은 아니다. 열반에서 나와 반조해 보면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이제 남은 생은 잔여번뇌의 소멸을 위한 수행을 해야 한다.

위빠사나 통찰로 열반을 보았다면 견도(見道)가 된다. 남은 생은 번뇌를 소멸하기 위한 삶이 된다. 수행도(修行道)의 단계가 되는 것이다. 마침내 모든 번뇌가 소멸되었을 때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은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며 아라한선언을 하게 된다. 이것이 깨달음의 완성이다. 무학도(無學道)의 단계이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연기와 열반의 본성에 대하여 아라한의 고유특성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연기와 열반은 아라한을 포함하여 학인들(sekha)의 공통적 특성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학인은 아라한을 제외한 사향사과의 성자들을 말한다.


누구나 궁극적 경지인 열반을 체험할 수 있다. 열반을 체험하여 도의 깨달음에 이르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다. 견도의 단계가 되는 것이다. 수다원의 단계이다. 그러나 아직 소멸해야 번뇌가 남아 있기 때문에 잔여번뇌의 소멸을 위한 수행을 해야 한다. 수행도의 단계이다. 사다함과 아나함의 단계이다. 마침내 모든 번뇌가 소멸되면 더이상 닦을 것도 없고 배울 것도 없다. 무학도의 단계이다. 아라한의 단계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열반과 사향사과에 대한 것이다. 사향사과는 열반체험이 전제가 되어야 가능하다. 이와 같은 열반에 대하여 학인들과 아라한의 공통적 특성이라고 했다. 학인들도 열반을 체험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열반을 체험 했다고 해서 다 끝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탐, 진, 치로 대표되는 번뇌가 소멸되어야 한다. 그래야 깨달음이 완성되는 것이다.

위장출가자 수시마는 부처님 가르침에 비밀이 있는 줄 알았다. 신통과 같은 비밀가르침이 있는 것으로 본 것이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위장출가하고 가르침을 도둑질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부처님 제자들처럼 공양받으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위장출가자 수시마는 부처님 제자들이 아라한선언하는 것을 들었다. 틀림없이 신통과 같은 비밀가르침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비밀은 없었다. 누구나 가르침을 실천하면 열반에 들 수 있다. 궁극적으로 모든 번뇌를 소멸하여 아라한선언을 하게 된다.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다. 어쩌면 이것이 부처님의 신통인지 모른다.



2023-08-1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