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맡에 상윳따니까야
지금 시각은 4시 48분, 고요한 새벽이다. 스마트폰을 봤을 때눈 3시 58분이었다. 더 자야 할까?
새벽 3시대가 되면 선원에서의 생활이 떠오른다. 비록 짧은 단기 집중수행이었지만 일어날 시간이다. 새벽 4시가 되면 명상홀에서 새벽좌선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새벽이 되면 정신이 맑다.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른다. 생각에 끄달려 가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전환해야 한다. 반전하듯이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암송보다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빠다나경을 암송했다. 한동안 암송하지 못했는데 며칠전에 복원했다. 나는 긴 길이의 경을 막힘없이 잘 암송할 수 있을까? 이런 우려는 불식되었다. 잘 올라왔기 때문이다. 암송이 끝났을 때 "사두!사두!사두!"했다. 스스로에게 칭찬한 것이다.
잠은 달아났다. 억지로 청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이럴 때는 경전을 봐야 한다. 머리맡에 상윳따니까야가 있어서 펼쳐 보았다.
경전을 열면 경건해진다.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각주에 있는 주석을 보면 경전 읽는 맛을 느끼게 해 준다.
어느 수행승이 부처님에게 물었다. 수행승은 "세존이시여, 늙음과 죽음이 무엇이고 늙음과 죽음에 이르는 자는 누구입니까?"(S12.35)라고 물었다. 누구나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왜 이런 질문이 적당하지 않다고 말했을까? 주석에서는 "여기서 질문이 적절하게 보이더라도 '누구에게 늙음과 죽음이 있는가?'라고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존재에 대한 신뢰의 담론을 암시하는 것으로 전체 질문이 잘못 표현된 것이다."(Srp.II.68)라고 했다.
누군가 "나는 누구인가?"라고 의문 했을 때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런 의문은 자아가 있다는 가정하에 의문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것도 참자아를 말한다. 이런 의문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왜 그런가? 아무리 찾아 봐도 나는 없기 때문이다. 있다면 명칭으로만 있을 것이다.
누군가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존재가 무엇이고, 존재하 는 자는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다. 또한 "세존이시여, 집착이 무엇이고, 집착하 는 자는 누구입니까?"라고 물을 수 있다. 갈애하는 자, 느끼는 자, 접촉하는 자, 여섯 감역을 지닌 자, 명색을 지닌 자, 의식을 지닌 자, 형성하는 자가 누구인지 질문할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런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라고 했다. 연기법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질문이다. 이에 대해서 주석에서는 "그것은 황금의 쟁반 위에 올려진 맛있는 음식을 담은 접시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약간의 똥 덩어리가 있는 것과 같아 모든 음식은 먹을 수 없고 버려져야 하는 것과 같다."(Srp.II.68)라고 했다.
"나는 누구인가?" 이런 의문은 형이상학적 질문이다. 누군가 "보고 듣고 느끼고 맛 보는 자는 누구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존재의 근원을 찾는 질문은 "이 우주는 유한한가? 무한한가?"라는 형이상학적 질문과 같은 것이다.
형이상학은 경험되어지지 않는 것이다. 단지 언어적 개념으로만 형성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비트겐쉬타인은 "말 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라고 말했다. 경험되어지지 않은 형이상학적 질문에는 답이 없음을 말했다.
부처님은 형이상학적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았다. 답이 없기 때문에 답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라고 말했다. 잘못된 질문, 질문같지 않은 질문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잘못된 질문에 대해서는 음식 위에 약간의 똥덩어리가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똥은 조금만 묻어도 악취가 난다. 예술작품 같은 음식에 똥덩어리가 약간 묻어 있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먹지 못하고 버릴 것이다. 누군가 존재의 근원을 알고자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는 자는 누구입니까?"라며 묻는다면 똥같은 질문이 된다.
수행승이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존재가 무엇이고, 존재하 는 자는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알려 주었다.
"그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 수행승이여, '존재가 무엇이고, 존재하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하거나 수행승이여, '존재와 존재하는 자가 서로 '다르다'고 한다면, 그 양자는 같은 것이며 표현만 다른 것이다. 수행승이여, '영혼과 육체는 서로 같다.'라는 견해가 있다면 청정한 삶을 살지 못한다. 수행승이여, '영혼과 육체는 서로 다르다.'라는 견해가 있어도 청정한 삶을 살지 못한다. 여래 는 이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난다."(S12.35)
부처님은 나를 찾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질문같지 않은 질문, 질문으로 성립되지 않는 질문, 똥같은 질문임을 말한다. 이런 질문에 부처님은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에 바탕을 둔 질문이라고 했다.
나에 대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행위하는 자와 향수하는 자를 동일하게 보면 영원주의가 되고 달리 보면 허무주의가 된다. 이런 견해를 가지면 청정한 삶을 살 수 없다. 왜 그런가?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 했다.
"여기서 청정한 삶은 여덟 가지 고귀한 길(팔정도)을 가는 삶을 말한 다. '영혼과 신체가 같다'는 것은 죽음과 함께 영혼도 단말한다는 허무주의자의 견해를 말한다. 허무주의자들은 고귀한 길을 통하지 않고도 윤회를 끝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고귀 한 길을 닦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영혼과 신체가 다르다'라는 것은 신체만이 파괴되고 영혼은 새가 새장에서 날아가는 것 같이 자유롭게 돌아다닌다는 것으로 영원주의자의 견해이다. 하나의 형성이라도 지속적이고 견고하고 영원한 것이 있다면, 고귀한 길을 닦아 윤회를 끝낼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고귀한 길을 닦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Srp.II.68-69)
누군가 나를 찾으려 한다면 허무주의자 또는 영원주의자가 되기 쉽다. 이런 견해는 양극단이다. 양극단은 연기법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
양극단은 형이상학적 견해에 해당된다. 형이상학적 견해는 경험될 수 없는 것이기에 허튼소리, 똥같은 소리가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존재의 근원을 찾는 질문에 대해서는 답을 하지 않았다. 예의를 갖추어 질문한 자, 배우려고 질문한 자에 대해서는 연기법적으로 설명했다. 그래서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난다."(S12.35)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6시가 되었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다. 오전 6시는 새벽과 아침을 가르는 시간이다.
아침을 준비한다. 먹거리를 준비한다. 밤호박을 찌고 감자를 찐다. 계란도 찐다. 오늘 아침 일터에서 먹을 것이다.
눈만 뜨면 일터로 달려 간다. 특별한 일 없으면 좌선을 한다. 유튜브는 자제하려 한다. 유튜브에 빠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TV채널을 돌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유튜브를 보는 것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삶이다. 좌선을 하는 것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방식이다. 사무실 불을 끄고 자연채광 상태에서 앉아 있으면 스스로 거룩한 자가 되는 것 같다. 오늘도 승리하는 하루가 되길!
2023-07-24
담마다사 이병욱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르침의 도둑 위장출가자가 본 것은 (0) | 2023.08.13 |
---|---|
불교계의 미인도는? (0) | 2023.07.29 |
누가 깨달음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는가? (0) | 2023.07.21 |
행복마저 초월하라 했거늘 (3) | 2023.07.17 |
망갈라경이 행복경이라고? 승가이기주의와 번역참사를 보고 (3) | 2023.0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