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망갈라경이 행복경이라고? 승가이기주의와 번역참사를 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23. 7. 15. 12:16

망갈라경이 행복경이라고? 승가이기주의와 번역참사를 보고
 
 
최근 망갈라경 명칭에 대한 논란을 보았다. 승가에서는 이제 ‘행복경’으로 정착되는 것 같다. 가장 진보적인 선원그룹에 해당되는 지리산 B선원에서도 논란끝에 행복경으로 명명했다고 한다.
 
행복경 명칭 논란은 평소 존경하는 H스님이 올린 페이스북 글을 보고 알았다. 하안거 중에 있는 B선원의 스님대중이 망갈라경에 대한 윤문 작업을 한 과정에서 이런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안거 중인 스님들은 예불의식도 할 것이다. H스님에 따르면 지난 1년 동안 자애경(Sn2.1)을 합송했다고 한다. 한국 선불교 전통에서 테라와다불교 예불문이자 수호경에 해당되는 자애경을 합송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B선원이 진보적 선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B선원에서는 자애경(멧따경)만 합송하는 것이 지루했었던 것 같다. 변화를 주기 위해서 다른 예불문을 합송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 중에 하나가 망갈라경(Sn2.4)이다.
 
B선원에서는 대중들이 망강라경 윤문작업을 했다고 한다. 여러 대중들의 의견을 모아서 용어와 문구를 결정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경의 제목을 정하는데 있어서 의견 대립이 있었다고 한다. 망갈라라는 말을 행복으로 할 것인 것, 축복으로 할 것인지, 길상으로 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H스님에 따르면 B선원에서는 최종적으로 망갈라경을 행복경으로 정했다고 한다. 의견 대립이 있어서 투표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런 글을 접하면서 대단히 실망했다. 실망한 것에 대한 의견을 댓글로 남겼다.
 
진리는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또한 진리는 양보의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망갈라를 행복으로 결정했다는 것은 진리를 타협의 대상으로 보고, 진리를 양보의 대상으로 본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번역하려면 제대로 해야
 
망갈라경은 테라와다 삼대 예불문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수호경이다. 테라와다 불자들은 예불할 때 마다 라따나경(Sn2.1), 멧따경(Sn1.8), 망갈라경(Sn2.4)을 암송한다. 마치 우리나라 불교에서 예불의식할 때 천수경과 반야심경을 암송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즘 우리나라 불교에서도 테라와다불교의 예불문을 합송하는 곳이 점차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선원에서 테라와다 삼경을 합송할 정도이면 세상이 바뀐 것이다. 그러나 번역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본래의 의미가 훼손 되지 않도록 번역해야 한다. 자의적으로 해석하면 마치 한글삼귀의문처럼 된다. 승보에 대하여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승가를 뜻하는 상가는 커뮤니티를 뜻한다. 자자와 포살이 있는 커뮤니티가 승가인 것이다. 그런데 빠알리어 상가(Sangha)라는 말이 중국에서 상가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승(僧)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나라에서는 70년대 초반에 승가를 스님으로 차용한 것이다. 그 결과 한글삼귀의문에서는 “스님들께 귀의합니다.”가 되었다.
 
한글삼귀의문에서 승보는 스님이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의 모임을 뜻하는 상가가 스님들로 대체 된 것이다. 그 결과 스님들은 부처님과 동급이 되었다. 스님을 비판하면 삼보를 비난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승보를 스님들로 보는 것은 한국밖에 없다. 이는 한국불교가 스스로 무지를 드러내는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다. 또한 승가이기주의가 극도로 표출된 것이다. 이렇게 첫 단추를 잘못 꿰다 보니 개혁이 되지 않는다. 스님들은 마치 부처님처럼 대우 받고자 하며 기득권에 안주한다. 승보를 스님들이라고 하는 것이 명백히 잘못된 것임에도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망갈라경을 행복경이라고 명명한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스스로 무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본다. 또한 승가이기주의의 소산이라고 본다. 마치 승보에 대하여 스님들로 보는 것과 같다.
 
우리나라 대부분 스님들은 망갈라경을 행복경으로 부르고 있다. 가장 많이 배웠다는 상도선원의 미산스님도 망갈라경을 행복경으로 부르고 있다. 이에 대하여 비판 글을 여러 차례 쓴 바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놀랍게도 초기불전연구원에서도 망갈라경을 행복경으로 칭하고 있다.
 
초기불전연구원은 빠알리 삼장을 번역하는 곳이다. 대림스님과 각묵스님이 주로 번역한다. 이제까지 사부니까야를 완역하고 논서와 쿳다까니까야 일부를 번역했다. 이렇게 빠알리 니까야를 번역하는 스님들이 망갈라에 대하여 행복으로 번역한 것에 대하여 어떻게 보아야 할까?
 
빠알리니까야를 번역하는 스님들이 망갈라를 행복으로 번역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누구보다도 빠알리어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스님들이 축복이나 행운, 길상의 뜻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즐거움을 뜻하는 행복으로 번역했을까? 승가이기주의가 작동되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망갈라의 정확한 의미는?
 
현재 한국에는 두 종류의 빠알리니까야 번역서가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본과 초기불전연구원(초불연)본을 말한다. 한국의 불자들은 두 종류의 번역서가 있어서 대단히 행복하다. 그런데 전자는 재가불자의 것이고, 후자는 출가스님들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 선생은 망갈라경를 ‘축복의 경’으로 번역했다. 이는 각 게송마다 반복되는 후렴구“에땅 망갈라뭇따망(eta magalamuttama)”에 대하여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라고 번역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에 반해서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라고 번역했다.
 
축복과 행복은 다른 말이다. 두 번역을 보면 망갈라에 대하여 다른 의미로 번역했다. 왜 다른가? 먼저 행복이라는 말은 지금 여기에서 행복의 의미가 강하다. 반면에 축복은 미래의 행복을 가져 오는 것의 의미가 강하다.
 
망갈라의 정확한 의미를 알려면 사전을 찾아 보아야 한다. 빠알리사전을 보면 망갈라에 대하여 “[adj.] auspicious; royal; lucky; festive. (nt.), festivity; good omen; ceremony; prosperity.”라고 설명해 놓았다.
 
빠알리 사전을 보면 망갈라라는 뜻에 행복을 뜻하는 ‘happy’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에 형용사의 뜻으로 “상서로운(auspicious), 행운의(lucky), 축제의(festive)”의 뜻이 있다. 또한 명사의 뜻으로 “좋은 징조(good omen), 예식(ceremony), 번영(prosperity)”의 뜻이 있다. 행복을 뜻하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행복을 뜻하는 빠알리어는 수카(sukha)이다. 수카에 대하여 빠알리어를 찾아 보면 “pleasant, happy; happiness, pleasure, joy, bliss.”라고 되어 있다. 행복을 뜻하는 말도 있지만 즐거움(pleasant)이나 쾌락(pleasure)을 뜻하는 말도 있다.
 
지금 여기서 행복을 말한다면
 
어떤 초기불교전도사는 불교에 대하여 행복의 종교라고 말한다. 그래서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궁극적 행복을 말한다. 불교가 행복의 종교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nibbāna parama sukha)”(Dhp.204)라 하여 법구경에서도 확인 된다. 그러나 행복의 스펙트럼은 너무나 넓다.
 
세상 사람들은 행복을 말한다. 한때 TV에서 행복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른바 행복전도사들이다. 스님들도 행복에 대해서 말했다. 그런 행복은 어떤 행복인가? 대개 지금 여기에서 행복이기 쉽다.
 
행복을 말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인이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말하면 사견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부처님은 지금 여기에서 즐기는 삶을 살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행복이라는 말은 즐김, 쾌락이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이는 수카라는 말이 “pleasant, happy; happiness, pleasure, joy, bliss”의 뜻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누군가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말하면서 “지금 이순간을 즐기자”라고 말하는 것이 될 수 있다. 현법열반론자(現法涅槃論者: diṭṭhadhammanibbānavāda)가 되는 것이다.
 
현법열반론은 무엇인가? 유사열반 또는 가짜열반을 말한다. 감각적 쾌락을 즐기면 현법열반이 된다. 이는 외도의 견해이다. 그래서 디가니까야 1번 경을 보면 현법열반론은 62견에 중에 일부에 해당되는 사견에 속한다.
 
현법열반론이 왜 사견인가? 이는 “벗이여, 이 자아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소유하고 구족하고 즐긴다.”(D1.91)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눈과 귀 등으로 오욕락을 즐기는 것이 현법열반론인 것이다. 그런데 현법열반론은 선정에도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는 자아를 가진 자가 선정에서 느끼는 행복을 현법열반론이라고 하는 것이다.
 
현법이라는 말은 빠알리어로 딧타담마(diṭṭhadhamma)를 말한다. 이는 ‘보여진 법’을 말한다. 직접적으로 경험한 것이 보여진 것을 말한다. 영어로는 “here and now”로 번역된다. 우리말로는 “지금 여기”가 된다. 지금 여기에서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을 현법열반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자아를 가진 자가 지금 여기에서 선정의 즐거움을 즐기는 것도 현법열반이 된다.
 
현법열반론자들은 철저하게 자아를 기반으로 한다. 즐거워도 내가 즐거운 것이고, 행복해도 내가 행복한 것이다. 이처럼 자아를 가진 자가 감각적 즐거움이나 선정의 즐거움에 대하여 “벗이여, 이러한 한, 그 자아는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에 도달한 것이다.”(D1.91)라고 했다. 이는 사견이다.
 
언젠가 조폭영화를 본 적이 있다. 스님과 조폭이 나오는 영화이다. 스님들과 조폭들은 술을 마셨다. 그때 주지스님은 “이것이 열반주입니다.”라고 말했다. 술 취한 상태가 열반이라는 말이다. 이런 논리라면 밥을 먹을 때 즐거움을 느꼈다면 열반이라 할 것이다. 갈증에 물을 마셨다면 열반이라 할 것이다. 섹스하는 것도 열반이라 할 것이다. 당연히 선정도 열반이라 할 것이다.
 
현법열반은 자아를 가진 자가 지금 여기에서 즐거움과 행복, 쾌락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설령 그것이 일시적인 즐거움이든 잔잔한 즐거움이든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에 대하여 열반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유사열반, 가짜열반에 해당된다.
 
행복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세속의 행복이 있는가 하면 출세간의 행복도 있다. 누군가 “지금 이순간을 즐겨라!”라고 말한다면 이는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다. 부처님은 이 순간을 즐기라고 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이 순간의 행복을 말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그때 잘 관찰하라.”(M131)라고 말씀 하셨다.
 
지금 여기에서 즐겨서는 안된다. 행복한 상태로 머물러서는 안된다. 지금 여기는 즐기는 것이 아니라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그때 잘 관찰하라.”(M131)라고 했다.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다.
 
승가이기주의 아닌가?
 
한국불교에서 테라와다 삼경을 예불문으로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다만 뜻을 제대로 알고 써야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님박사라는 미산스님도 망갈라에 대하여 행복으로 번역했다. 또한 빠알리니까야를 번역하는 대림스님과 각묵스님도 망갈라를 행복으로 번역했다. 대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미산스님이나 대림스님, 각묵스님은 배운 사람들이다. 또한 빠알리어에 정통한 스님들이다. 그럼에도 길상, 좋은 징조, 축복, 행운, 번영의 뜻이 있는 망갈라에 대하여 왜 즐거움, 쾌락의 뜻이 있는 행복으로 번역했을까? 이들 스님들이 단어의 본래 뜻을 몰라서 그렇게 번역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승가이기주의를 강력하게 의심해 본다.
 
현재 한국에는 두 종류의 번역서가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본과 초기불전연구원(초불연)본을 말한다. 두 종류의 번역서가 있어서 불자들은 행복하다. 뜻이 난해 할 때 두 번역서를 참고하면 금방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KPTS는 재가의 것이고, 초불연은 출가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한국의 불자들은 대체로 스님들이 번역한 것을 선호하는 것 같다. 스님들이 번역하는 것에 대하여 더 신뢰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스님들은 수행을 했기 때문에 수행한 것이 번역에 도움을 주리라고 보는 것이다.
 
번역과 수행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번역은 먼저 언어학적 소양과 인문학적 소양이 있어야 한다. 스님이라고 하여 두 소양을 갖춘 것은 아니다. 재가번역자라 하여 수행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길고 짧은 것은 대 보면 알 수 있다. 지금 당장 두 번역서를 대조하면 금방 드러난다. 그것도 빠알리 원문과 비교하며 대조하는 것이다.
 
불자들이나 스님들은 두 종류의 번역서에 대한 호불호가 있다. 특히 재가의 번역에 대하여 편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재가보다 출가번역이 더 낫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인터넷 검색을 하다 보면 압도적으로 초불연 것이 많다.
 
이런 이야기도 들었다. 승가가에서는 스님들이 번역한 것을 승가대학 교재로 사용한다고 말한다. 재가에서 아무리 뛰어난 번역을 해도 승가대학 교재로 채택될 수 없음을 말한다. 초록이 동색이고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생각난다.
 
망갈라경에 대하여 두 개의 경의 제목이 있다. 하나는 축복의 경이고 또 하나는 행복경이다. 망갈라라는 말이 명백히 축복의 뜻이 있음에도 승가에서는 일률적으로 행복경이라고 칭한다. 대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승가이기주의가 작동하고 있다고 보는데 나만 그럴까?
 
망갈라가 행복이 아닌 축복인 이유는?
 
망갈라경이 축복의 경인 이유가 있다. 이는 마지막 게송에 답이 있다. 마지막 게송을 보면 “삽밧타 솟팅 갓찬띠(Sabbattha sotthi gacchanti”(Stn.269)라고 되어 있다. 이는 KPTS번역에 따르면 “모든 곳에서 번영하리니”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솟팅(sotthiṃ)이라는 말을 주목해야 한다.
 
망갈라경에서 대미를 장식하고 있는 마지막 게송을 보면 마치 유통분처럼 보인다. 그런데 마지막 게송을 보면 부처님 망갈라경에서 왜 망갈라라는 단어를 썼는지 알 수 있다. 솟티(sotthi)라는 단어를 보면 명백히 드러난다.
 
솟티에 대하여 빠알리 사전을 찾아 보았다. 빠알리어 솟티는 “well-being, safety, bless”의 뜻이다. 또한 솟티는 “prosperity”의 뜩이기도 하다. 잘 사는 것, 안전, 축복, 번영의 뜻이다. 그래서 “삽밧타 솟팅 갓찬띠(Sabbattha sotthi gacchanti)”라고 했을 때 이는 “모든 것에서 번영하리니”라고 번역하는 것이다.
 
망갈라경에서 키워드는 망갈라이다. 그런데 망갈라경을 보면 매 게송마다 “에땅 망갈라뭇따망(eta magalamuttama)”이라 하여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KPTS본)라는 후렴구가 붙는다. 초불연에서는 “더없는 행복이다.”라고 번역했다. B선원 윤문에서는 “으뜸가는 행복이라네”라고 번역 했다. 이는 빠알리어 솟티를 잘못 해석한 것이다.
 
망갈라경에서 키워드는 망갈라임이 틀림 없다. 이를 확인 시켜 주는 게송은 마지막에 있다. 마치 유통분처럼 보이는 마지막 게송에서 솟티라는 말이 이를 증명한다.
 
KPTS에서는 솟티에 대하여 ‘번영’으로 번역했다. 그래서“모든 곳에서 번영하리니”라고 번역했다. 초불연에서는 솟티에 대하여 ‘행복’으로 번역했다. 그래서 “어느 곳에서나 행복할 수 있다.”라고 번역했다. B선원에서는 솟티에 대하여 역시 ‘행복’으로 번역했다. 그래서 “으뜸가는 행복이라네.”라고 번역했다. 과연 어느 번역이 올바른 번역일까?
 
망갈라경에서 망갈라의 의미는 마지막 게송에서 정의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원문을 보면 에따디사니 까뜨와나 삽밧타 마빠라지따 땅 떼상 망갈라뭇따만띠(Etādisāni katvāna sabbattha maparājitā Sabbattha sotthi gacchanti ta tesa magalamuttamanti)”(Stn.269)라고 했다. 이 문구눈 이러한 방법으로 그 길을 따르면, 어디서든 실패하지 아니하고 모든 곳에서 번영하리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KPTS본 역)라는 뜻이다. 여기서 솟팅(sotthi) 이라는 말이 망갈라경 전체를 대표하는 말이 된다.
 
망갈라경에서 솟티의 의미를 알면 망갈라경이 왜 축복, 행운, 안전, 좋은 징조, 번영을 뜻하는 말인지 알 수 있다. 이는 빠알리사전에서도 솟티에 대하여 “brings future happiness(미래 행운을 가져 오는 것)”라고 설명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망갈라는 미래 행운을 가져 오는 것
 
망갈라경은 지금 여기에서 행복만을 말하지 않는다. 미래의 행복도 말하고 있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만 강조한다면 현법열반론이 되어 버리고 만다.
 
자아를 가진 자가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말했을 때 그 행복은 무엇이 될까? 아마그것은 즐거움, 쾌락이 되고 말 것이다. 부처님은 이런 행복을 말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지금 여기에서 행복뿐만 아니라 미래의 행복도 말했다. 바로 그 단어가 망갈라라는 말이다.
 
망갈라는 길조, 행운, 축복, 번영을 뜻한다. 또한 망갈라는 의례의식(seremony)를 뜻하기도 하다. 그래서 입학식이나 졸업식 때 “축하합니다.”라고 말하면 이는 길조, 행운, 축복, 번영을 뜻하는 말이 된다. 또한 결혼식이나 개업식, 이사 했을 때, 그리고 돌잔치 할 때나 회갑 또눈 칠순 잔치 할 때도 역시 “축하합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행운, 축복, 번영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미래의 행운을 가져오는 말이다.
 
망갈라는 축하의 말에 가깝다. 이는 현재의 행복뿐만 아니라 미래의 행복에 대한 말이기도 하다. 단순히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말하는 수카와는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왜 한국승가에서는 망갈라에 대하여 축복이 아닌 행복으로 번역하는 것인가? 이는 승가이기주의로 본다. 재가에서 번역된 말을 채용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외국에서는 어떻게 번역했을까?
 
외국에서는 망갈라를 어떻게 번역했을까? 외국에서도 한국에서와 같이 행복으로번역했을까? 검색해 보니 행복의 뜻으로 번역한 곳은 한곳도 발견하지 못했다. 영문으로 된 망갈라경은 공통적으로 축복을 뜻하는 “blessing”으로 번역했다.
 

 
망갈라경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게송에서 키워드는 솟티이다. 이 솟티에 대하여 빠알리 사전에서는 “well-being(잘 사는 것), safety(안전), blessing(축복), prosperity(번영)” 뜻이라고 했다.
 
망갈라는 행복을 뜻하는 해피(happy)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행운을 뜻하는 해피니스(happiness)라는 말은 볼 수 있다. 더구나 사전에서는 솟티에 대하여 “brings future happiness”라 하여 행복 또는 행운을 가져 오는 뜻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망갈라 또는 솟티라는 말은 지금 여기에서 행복의 뜻도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미래의 행운을 가져 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속적인 것부터 출세간적인 것에 이르기 까지 삼십 가지 이상의 망갈라를 말한 것이다.
 
한국불자 중에는 빅쿠보디의 영역을 표준으로 삼기도 한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도 빅쿠보디의 사부니까야 영역을 참고로 해서 번역했다. 이는 초불연 번역서에서 해제를 보면 알 수 있다. 각묵스님의 상윳따니까야 해제를 보면 “보디스님의 제안을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1권 79쪽)라고 밝힌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빅쿠보디는 망갈라경을 어떻게 번역했을까? 놀랍게도 “blessing”으로 번역했다. 축복으로 번역한 것이다. 또한 인터넷 검색에서 빅쿠보디의 육성을 들었는데 망갈라를 행복으로 보면 안된다고 했다. 망갈라는 “safety(안전), blessing(축복), prosperity (번영)”의 뜻이 있다고 했다. 참고로 빅쿠보디 육성 사이트는 “https://dharmaseed.org/talks/player/40709.html”이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과보에 대하여
 
망갈라는 현재의 행복뿐만 아니라 미래의 행복을 가져 오게 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삼십 여가지 망갈라에 대하여 설명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지금 여기에서의 행복과 미래의 행복은 어떻게 가져 오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씨하장군의 경’(A5.34)을 들 수 있다.
 
 
베쌀리에 씨하장군이 있었다. 장군은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지금 눈앞에 보이는 보시의 과보에 대하여 설명해 주시겠습니까?”(A5.34)라고 말했다. 이에 부처님은 다섯 가지로 말했다. 즉 보시를 하면 1)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호의를 받는 것, 2) 선한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 3) 훌륭한 명성이 널리 퍼져 나가는 것, 4) 어떠한 모임에 가든지 두려움 없이 나아가고 부끄러움 없이 나아가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5)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보시를 했다고 하여 즉각적으로 과보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즉각적으로 과보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시차를 두고 과보로 나타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사랑과 호의를 받는 것 등 다섯 가지로 설명했다. 최종적으로는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보시를 하면 지금 눈 앞에 이익이 기대된다고 했다.
 
망갈라경은 미래 행복을 가져 오는 것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세속적인 것에서부터 궁극적인 목표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인 방식으로 설명했다. 그래서 가장 처음에 나오는 말은 어리석은 자와 사귀지 않는 것이다.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말은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삼십 여가지 망갈라가 있다. 즉각적인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고 시차를 두고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망갈라를 행복이라고 번역했을 때 이는 지금 여기에서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즐거움 또는 쾌락을 행복으로 오해 받을 수 있다.
 
왜 번역참사가 났는가?
 

초불연에서는 빅쿠보디의 번역을 적극적으로 따랐다. 그럼에도 망갈라를 축복으로 번역하지 않고 행복으로 번역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재가의 번역에서 축복이라는 말을 먼저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미산스님은 박사스님으로 빠알리어에 정통한 스님임에도 왜 망갈라를 행복이라고 번역했을까? 망갈라의 뜻을 모르고 행복이라고 번역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승가에서 행복이라고 사용하니 그대로 따라 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가장 진보적인 B선원에서 논쟁이 있었다. 스님들은 망갈라의 뜻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투표를 해서 망갈라를 행복으로 번역했다고 한다. 이는 명백히 직무유기에 해당된다. 또한 진리를 타협이나 양보의 수단으로 보는 것 같다.

 

외국의 사례를 보면 어디에서나 망갈라를 “blessing”으로 번역했다. 미래 행운을 가져 오는 것으로 번역한 것이다. 빅쿠보디도 “blessing”으로 번역했다. 그럼에도 유독 한국의 승가에서만큼은 행복으로 번역했다. 마치 배가 산으로 가는 것 같다. 한글삼귀의문에서 승보에 대한 것을 보는 것 같다.

 

망갈라경을 빠알리어로 다 외운 바 있다. 2012년의 일이다. 빠알리어로 외울 때 단어 하나하나 의미를 새기며 외웠다. 당연히 망갈라에 대하여 “blessing”, 즉 축복, 행운, 번영의 뜻으로 새겼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어쩐 일인지 원어의 뜻대로 번역하지 않고 원어와 동떨어진 행복으로 번역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출가에서는 재가를 낮게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재가의 번역을 채택하지 않는 것 같다. 재가에서 용어를 선점했기 때문일까? 이처럼 재가의 번역을 낮게 보는 것은 출가의 우월주의에 기반한다고 본다.

 

승가의 우월적 자만이 결국 참사를 내고 말았다. 망갈라의 뜻이 상서로움, 길조, 좋은 징조, 축복, 행운, 번영과 같은 미래의 행복을 가져 오는 뜻임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현재의 지금 여기에서 행복만을 뜻하는 의미로 번역했다. 이를 승가이기주의 전형이라고 본다면 지나친 것일까?


 
 
2023-07-1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