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흐름대로 살면 골로 간다
또 다시 새벽이다. 어제와는 몸 상태가 다르다. 한기는 사라졌다. 약의 힘이다. 속이 매스껍기는 하지만 한기가 사라지니 살만 하다.
몸은 매우 민감하다.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불편과 불쾌와 짜증과 아픔과 괴로움을 느낀다. 감기에 걸려 몸에 한기가 들었을 때 세상만사가 다 귀찮아 진다. 아름다운 풍경도 나와 무관한 것이 된다. 이럴 때 마음청정이면 중생청정이라는 말을 떠 올려 보게 된다.
마음이 더러운 자들은 세상도 더럽게 보일 것이다. 탐욕으로 가득한 자는 지나가는 여인은 성적대상으로 보일 것이다. 분노에 가득 찬 자들은 세상이 불합리하고 불공정하고 불공평으로 가득한 세상으로 보일 것이다.
연애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아름다워 보일 것이다. 마음이 청정한 사람들은 세상이 아름다워 보일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마음이 오염되므로 뭇삶이 오염되고, 마음이 청정해지는 까닭에 뭇삶이 청정해진다.”(S22.100)라고 했다.
골로 간다는 말은 비속어일까?
오늘 아침은 밤호박과 감자, 삶은 계란으로 준비했다. 눈만 뜨면 일터로 달려 가기 때문에 커다란 배낭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일터에 도착하여 꿀절구커피차를 만들었다. 절구질한 커피에 꿀을 탄 커피를 말한다.
밤호박은 파근파근하다. 감자는 파슬파슬하다. 계란은 물컹물컹하다. 소금이 없어도 먹을 만 하다. 꿀절구커피차를 곁들이니 한끼 식사로 충분하다. 이것보다 더한 웰빙 식단이 있을까?
오늘 아침 걸어서 일터에 왔다. 좋은 생각이 계속해서 떠 올랐다. 이럴 때는 흘려 보낼 수 없다. 스마트폰 메모앱에 키워드를 쳐 두었다. 어제 유튜브에서 보았던 자유의지와 상윳따니까야에서 보았던 십이연기를 혼합하면 글이 하나 나올 것 같았다.
글의 제목을 생각해 보았다. 글의 제목은 글이 완성되고 난 다음 붙이는 경우가 많다. 글의 제목을 먼저 생각하고 글을 써 내려가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다가 갑자기 “세상의 흐름대로 살면 골로 간다”라는 글의 제목이 생각 났다.
비속어를 쓰지 말라고 한다. 동어반복도 하지 말라고 한다. 골로 간다는 말은 비속어일까 아닐까? 인터넷 사전을 찾아 보았다.
인터넷 어학 사전에 ‘골로 간다’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나무위키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골이 ‘관’이라는 뜻도 있고 ‘골짜기’라는 뜻도 있다. 전자는 ‘관으로 들어가다’의 뜻이고, 후자는 ‘골짜기로 들어가다’는 뜻이다. 공통적으로 ‘죽는다’라는 뜻이다.
골짜기로 들어가는 것이 왜 죽음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는 산골에 공동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하나는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이 있었을 때 산골에서 처형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골로 간다는 말은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교양인들은 쓰지 않는 말 같다. 유튜버들이 주로 쓰는 것을 보았다. 블로거도 쓸 수 있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좀 더 자극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요즘 주문이 없다. 일감이 없을 때는 유튜브 보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감기로 인하여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가능한 움직이지 않고 신경 쓰는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글을 쓸 때만큼은 예외이다.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유도하는 대로 유튜브를 보았다. 옛날에 봤던 것을 또 보게 되었다. 김필영 선생이 운영하는 ‘5분 뚝딱 철학’은 언제 보아도 새롭다. 아마 그것은 콘텐츠를 완전히 소화하지 못햇기 때문일 것이다.
결정론과 자유의지론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있는 것일까? 어떤이는 없다고 말한다. 인간은 단지 생체로보트에 불과하다는 사람도 있다. 정신과전문의 전현수 선생은 자유의지가 없다고 노골적으로 말한다. 이를 경전적 근거를 들어서 말한다.
한때 전현수 선생의 견해를 지지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김필영 선생의 5분 뚝딱 철학에서 자유의지에 대한 영상을 보고서 생각이 약간 바뀌었다. 인간은 결정론적 존재이기도 하면서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보는 것이다.
전현수 선생은 왜 인간이 자유의지가 없는 것으로 보았을까? 이에 무아상경을 예로 들었다.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닌 것을 예로 든 것이다. 몸에 대한 것을 보면 “만약 이 물질이 나라면 이 물질에 질병이 들 수가 없다.”(S22.59)라고 한 것을 예로 든 것이다.
무아상경은 상윳따니까야에서 ‘다섯 명의 경’(S22.59)에 해당된다. 몸이 내것이라면 나의 통제하에 있어야 할 것이다. 몸이 진짜 내것이라면 몸은 늙지도 말고 병들지도 말고 죽지도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S22.59)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했다.
물질만 나의 것이 아니다. 느낌도 지각도, 형성도, 의식도 나의 것이 아니다.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니까야에서는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정형구가 수없이 반복된다.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니라면 오온은 나의 통제밖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런데 부처님은 오온을 통제하는 나라는 것은 없다고 했다. 나라는 말은 관습적으로 불리는 명칭에 지나지 않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자유의지는 없는 것과 같다. 전현수 선생의 주장에 무게가 실린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자유의지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까? 대부분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을 것이다.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의지가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런 사고는 일반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은 정말 자유의지가 있는 것일까? 인간은 프로그램된 생체로보트에 불과한 것일까? 5분 뚝딱 철학에서는 프랭크 퍼트의 양립가능이론을 소개하고 있다.
양립가능이론이란 무엇인가? 세계는 결정론적이면서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부 사람에 한한다는 말이다. 이를 금연 도표로 설명할 수 있다.
두 명의 골초가 있는데
민수는 골초이다. 그는 맨날 “끊어야지, 끊어야지”하면서도 담배를 계속 피운다. 이때 민수는 두 가지 종류의 1차적 욕구를 가진다. 하나는 담배를 피고 싶다는 욕구이고, 다른 하나는 담배를 끊고 싶다는 욕구이다. 민수는 이렇게 상반된 욕구를 가진다.
민수는 담배를 피고 있지만 담배를 끊고 싶어 한다. 담배를 피고 싶은 것은 1차적 욕구이고, 담배를 끊고 싶어 하는 것은 2차적 욕구이다. 그런데 2차적 욕구는 욕구에 대한 욕구라는 것이다. 여기서 1차적 욕구는 본능에 대한 것이고, 2차적 욕구는 이성에 대한 것이다. 과연 본능과 이성이 싸워서 누가 이길까?
민수는 담배를 피울지 말지 고민하다가 결국 담배를 피우고 말았다. 이런 민수의 행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민수가 담배가 피우고 싶어서 담배를 피운 것에 대하여 자유의지로 볼 수 있을까?
민수의 2차적 욕구는 담배를 끊는 것이었다. 그러나 말로는 “끊어야지, 끊어야지”하면서도 담배를 보면 담배에 손이 가서 담배를 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과연 이것이 민수의 자유의지라고 볼 수 있을까?
민수가 담배를 피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담배를 무는 것은 어쩌면 자유의지에 해당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본능적이다. 마치 배고프면 먹는 것과 같고 졸리면 자는 것과 같다. 이런 행위는 동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동물의 영역에 속한다. 인간은 동물적 요소가 많다. 이에 반하여 인간의 이성은 매우 약하다. 인간의 몸 속에는 커다란 코끼리가 한마리 살고 있는 것과 같다. 인간은 코끼리 위에 타고 있는 나약한 존재이다.
인간은 힘으로 코끼리를 당할 수 없다. 코끼리를 타고 있는 인간은 코끼리가 본능적으로 행동하면 제어하기 힘들다. 인간 내부에 있는 본능은 코끼리같은 것이다. 담배가 해로운지 알면서도 피우는 것도 인간 내부에 있는 코끼리 같은 동물적 본능을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감각을 추구한다. 이는 눈이나 귀 등으로 오욕락을 즐김을 말한다. 특히 먹는 것은 오욕락이 총동원 되는 것과 같다. 신체적 접촉도 이와 다르지 않다.
식도락가, 애연가, 애주가 등은 감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동물도 감각을 즐긴다. 하루 종일 먹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람이 감각을 즐기며 산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사는 것과 같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등 생체로보트와 다름 없다.
동물과 같은 생체로보트는 자유의지가 없다. 그렇다고 먹는 행위에 대하여 자유의지를 가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설령 자유의지라고 하더라도 동물적 자유의지에 해당된다. 1차적 욕구를 말한다.
민수의 친구 영희가 있다. 영희도 골초이다. 영희도 담배를 필 때마다 “끊어여지, 끊어야지”라고 했다. 영희의 2차적 욕구는 담배를 끊는 것이다. 그런데 영희는 정말 담배를 끊었다. 이럴 때 영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한다.
진정한 자유의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2차적 욕구가 실현 되었을 때이다. 담배를 끊겠다고 했을 때 이는 담배를 피고 싶은 욕구를 이긴 것이 된다.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담배를 끊었을 때 진정한 자유의지가 발현되었다고 말한다.
1차적 욕구는 동물들도 갖는다. 동물은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는다. 오직 인간만이 1차적 욕구에 대한 2차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이는 행위의 자유와 자유의지는 다르기 때문이다. 행위의 의지는 동물적 의지와 같다. 그러나 자유의지는 사람에게만 있다는 것이다.
프랭크 퍼트의 양립가능이론
대부분 사람들은 1차적 욕구로 살아간다. 감각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해당된다. 세상사람들이 탐, 진, 치로 살아 가는 것도 1차적 욕구로 사는 것이다. 그런데 프랭크 퍼트에 따르면 1차적 욕구로 살아가는 사람은 결정론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1차적 욕구로 살아가는 사람이 왜 결정론적으로 사는 사람들일까? 이는 인과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배가 고프면 먹는 것도 인과에 따른 것이다. 담배가 피고 싶을 때 담배를 피는 것도 인과에 따른 것이다. 생체로보트와 같은 삶이다.
로보트는 프로그램 된 대로 움직인다. 동물이나 인간도 본능적으로 살아 간다며 생체로보트와 같다. 그러나 인간이 2차적 욕구가 있어서 이를 실현 했다면 더 이상 생체로보트가 아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된다.
1차적 욕구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나 2차적 욕구는 결정된 것이 아니다. 결정된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래서 2차적 욕구는 미결정이라고 한다. 민수처럼 담배에 굴복하면 자유의지가 없는 것이고, 영희처럼 담배를 끊으면 자유의지가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세계는 결정론적이지만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라는 말과 같다.
세계는 결정되어 있다고 말한다. 왜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이는 세계가 인과의 법칙에 지배 받기 때문이다. 원인을 알면 결과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세계는 결정되어 있다고 말한다.
세계가 결정되어 있다면 인간도 결정되어 있다. 인간이 생체로보트처럼 산다면 인간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왜 그런가? 인간이 인과의 법칙대로 살면 생체로보트와 다름 없기 때문이다. 배고프면 먹고 담배 피고 싶으면 담배 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세계는 결정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의지와 이성이 있어서 2차적 욕구에 따라 자유의지가 있을 수 있다. 이를 프랭크 퍼트의 양립가능이론이라고 한다.
결정론과 자유의지론, 오래 전부터 논란이 되어 왔다. 정신과전문의 전현수 선생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고 했다. 무아상경(S22.59)을 근거로 해서 설명했다. 그런 한편 자신의 의지에 의한 행위로 자유의지를 만들어 갈 수 있다고 했다. 이를 길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길은 점점 커진다. 산에 길이 나는 것도 사람들이 많이 다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과에 따른 생체로보트처럼 결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하면 마치 길이 나는 것처럼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현대 철학자 프랭크 퍼트는 양립가능론을 제시했다. 세계는 결정론적이면서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양리가능론은 이미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나 다름 없다. 십이연기에서 유전문과 환멸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유전문과 환멸문
요즘 상윳따니까야읽기를 하고 있다. 그제부터 시작 했다. 언제 끝날지 모른다. 1년 이상 예상하고 있다. 머리맡에 놓고 틈만 나면 보고자 한다.
상윳따니까야에서 인연상윳따부터 읽고 있다. 인연상윳따는 연기에 대한 것이다. 특히 십이연기가 주류를 이룬다. 그런데 부처님은 연기를 설명할 때 반드시 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항상 함께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처님은 십이연기의 순관에 대하여 ‘잘못된 길(micchāpaṭipadā)’이라고 했다. 반대로 십이연기의 역관에 대해서는 ‘올바른 길(sammāpaṭipadā)’이라고 했다. 부처님은 왜 이렇게 말씀 하셨을까?
십이연기 순관은 무명에서부터 시작된다. 무명이 조건이 되어서 형성이 되고, 형성이 조건이 되어서 의식이 발생된다. 이렇게 노사까지 이어진다. 마치 사람의 일생을 보는 것 같다. 또한 한 존재의 윤회를 보는 것 같다. 분명한 사실은 조건발생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의 관심사는 오온이었다. 오온을 떠나서 삼라만상산천초목에 이르기 까지 담마를 설명하지 않았다. 십이연기의 고리는 오온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모두 조건 발생이다. 이는 조건을 뜻하는 빳짜야(paccaya)가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끝은 어디인가? 죽음이다. 그것도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으로 끝난다고 했다.
사람은 살다가 죽는다. 자신이 태어난 것을 보지 못했고 죽는 것도 보지 못하지만 타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결국 십이연기의 고리로 사는 것과 같다. 사건에 사건이 일어나서 사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세상의 흐름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흐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욕망으로 사는 것이다. 감각으로 사는 것이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듯이 사는 것이다. 이런 것도 자유의지라고 할 수 있을까? 원인과 결과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자유의지가 없다고 말한다. 동물적 본능으로 살고 있기 때문에 생체로보트와 같은 삶이라고 말한다. 마치 운명이 결정된 것처럼 사는 것이다.
십이연기의 유전문은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따른 것이다. 이렇게 인연과(因緣果)로 살면 그 생은 결정되어 있다. 이는 십이연기의 종착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죽음과 함께 절망으로 끝난다. 이런 삶은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이렇게 본다면 세상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 없다.
부처님은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살고자 했다. 세상의 흐름과 거슬러 살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미묘한 진리를 어둠에 뒤덮이고 탐욕에 불붙은 자는 보지 못하네.”(S6.1)라고 했다. 부처님이 막 정각을 이루고 난 다음 말한 것이다.
부처님은 역류도(逆流道)를 설했다. 이는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이라는 문구를 보면 알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 세상의 흐름대로 욕망으로 살 때, 부처님은 욕망을 소멸시키는 삶을 산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탐, 진, 치로 살 때, 부처님은 무탐, 무진, 무치로 살라고 했다. 이는 세상의 흐름과 반대되는 것이다. 그래서 빠띠소따가미(paṭisotagāmī), 즉 역류도라고 했다.
유전적 삶을 살 것인가 환멸적 삶을 살 것인가?
역류도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환멸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십이연기의 역관을 말한다. 연기의 흐름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연기의 흐름을 거슬러 사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무명이 사라져 없어지므로 형성이 소멸하고,…”로 시작되는 환멸문을 설한 것이다.
십이연기에서 유전문은 1차적 욕구로 사는 것이다. 본능적으로 사는 것, 감각적으로 사는 것, 동물적으로 사는 것이 된다. 이런 삶은 결정되어 있다. 최종적으로 죽음으로 끝난다.
유전적으로 살면 자유의지가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담배 피는 자가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과 같다. 물건에 손을 대면 잘못인 줄 알면서도 자꾸 손이 가는 것과 같다. 이런 삶은 결정되어 있다. 자유의지가 없는 삶은 결정론적 삶이나 다름 없다. 생체로보트나 다름 없다.
부처님은 환멸적으로 살라고 했다. 유전적 삶을 거부하는 삶이다. 세상의 흐름대로 사는 것을 거부하는 삶이다. 담배를 끊겠다고 선언했을 때 정말로 담배를 끊었다면 자유의지가 있는 것이다. 환멸적 삶은 자유의지가 있는 삶이다. 더 이상 결정되어 있는 삶이 아니다. 생체로보트도 아니다.
유전적 삶을 살 것인가 환멸적 삶을 살 것인가? 분명한 사실은 전자는 잘못된 삶이고, 후자는 올바른 삶이라고 했다. 전자는 자유의지가 없는 결정론적 삶이고, 후자는 자유의지가 있는 비결정론적 삶이다.
부처님은 분명하게 환멸론적 삶을 살라고 했다. 그것은 세상의 흐름과 반대되는 되는 삶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세상의 흐름대로 살면 골로 가지만,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산다면 불사(不死)에 이를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2023-07-1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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