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깨달음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면

담마다사 이병욱 2023. 6. 14. 08:13

깨달음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면

 


유튜브에서 영화 리뷰를 봤다. 영화소개를 한 것이다. 물론 스포일러가 있다. 영화를 정식으로 보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리뷰를 보지 말아야 할 것이다. 결말을 보면 재미 없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스님들이 나온다. 스님들이 나오기 때문에 불교영화라고 볼 수 있다. 네 명의 스님들이 등장한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네 명의 상좌들이 치매에 걸린 은사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은사스님 사후 이해 관계에 대한 것이다.

첫번째 상좌가 영화의 주인공이다. 어렸을 때 은사스님 손을 잡고 절에 들어 왔다. 청년시절 수련장면도 나온다. 일년동안 무문관 수행을 하는 장면을 말한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주인공은 대체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라며 절규한다.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불교에 입문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문하는 것이다. "대체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았을까?"라고도 생각할 것이다. 왜 이렇게 깨달음에 의문하는 것일까? 왜 깨달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부처님 그분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깨달음이 무엇인지 알려면 부처님 일생부터 공부해야 한다. 부처님이 왜 출가하게 되었는지,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어떤 수행을 했는지 알아야 한다. 부처님 그분을 구체적으로 알려면 경전을 보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경전은 초기경전, 즉 니까야를 말한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경전에는 불자들이 궁금해 하는 것이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연히 깨달음에 관한 것도 있다.

부처님 그분이 누구인지, 부처님 그분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알려면 경전을 봐야 한다. 여기에 더 추가한다면 논서를 보아야 한다. 아비담마나 청정도론과 같은 논서를 말한다. 논서는 일종의 참고서 같은 역할이다. 경전에 대한 주석서 같은 역할이다. 마치 전과처럼 불교에 대한 모든 것이 망라되어 있는가 하면 교리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특히 청정도론이 그렇다.

청정도론을 십년 이상 보았다. 처음 읽어 보았을 때 무슨 말인지 몰랐다. 아마 체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인내를 가지고 끝까지 읽어 보았다. 가장 궁금한 열반에 대한 것은 가장 마지막 장에 있었다.

깨달음은 무엇일까? 불자들이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이다. 출가자와 학자도 질문하는 것이다. 그러나 뭐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다. 왜 그럴까? 깨달음은 언어의 영역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체험의 영역이기 때문에 말로 표현하기가 곤란하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비유로서 표현했다. 이런 것이다. 열반은 섬과 같고 또한 열반은 동굴과 같다는 식이다. 열반은 섬과 같이 안전하기가 그지없고, 열반은 동굴처럼 안온하기가 그지없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수많은 비유가 있다.

깨달음에 대해서 긍정적 언표로 된 것도 있고 부정적 언표로 된 것도 있다. 긍정적 언표보다 부정적 언표가 더 포괄적이다. 이는 이것은 ~이다라고 한정 짓는 것보다, “이것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 더 범위가 넓다. 법률용어에서 주로 볼 수 있다. 무위에 대해서 탐진치가 없는 상태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좋은 예에 해당된다.

깨달음이 무엇인지 알려면 니까야를 읽어야 한다. 평소 궁금해 하던 것이 다 나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소 모르고 있었던 것도 당연히 있다. 인류의 지혜가 축적된 지혜의 보고(寶庫)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깨달음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고자 한다면 청정도론을 보아야 한다. 청정도론을 보면 교리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또한 청정도론은 니까야 주석서이자 동시에 훌륭한 수행지침서이다. 청정도론 을 읽다 보면 불교의 진수와 만나게 된다.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대개 자신만의 독특한 이론을 내놓는 학자나 스님이 그렇다. 이를 추종하는 자들도 그렇다. 그들은 왜 이렇게 비난에 열을 올릴까? 그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논서를 비난하는 자들은 그들의 이론과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자신이 세운 이론 체계를 정당화 하기 위해서 비난하는 것이다. 이론의 차별화를 위해서 비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치 대승이 초기에 흥기할 때 기존불교를 소승이라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소승(小乘)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소승이란 무엇인가? 소승을 뜻하는 히나야나(Hīnayāna)는 문자적으로는 작은 탈것을 의미하지만 저열한 것(low; inferior)’이라는 의미도 있다.

 

소승을 말하는 것은 대승과 차별화를 하기 위한 것이다. 대승보살 사상을 강조하기 위해서 소승이라고 비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쩌면 후발주자의 운명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선발주자를 따라 잡으려면 꼬투리를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후발주자들은 선발주자를 비판해야 설 자리가 있다. 기존불교를 소승이라 폄하하는 것도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논서에 대한 공격도 멈추지 않는다.

 

중도체계론을 말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을 격렬하게 비난한다. 그래야 입지가 확보되기 때문일 것이다. 추종자들 역시 따라 비난한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을 읽어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일반사람들에게 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크게 웃어버릴 것이다. 누군가 도에 대해서 얘기 하면 극히 소수는 경청하고, 소수는 반신반의하고, 대다수는 웃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도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 일반사람, 범부에게 도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심지어 세상사람들이 비난 하지 않는 도는 도가 아니다.”라고 했다.

어디 가서 수행했다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당장 비난이 들어 온다. “도 닦는다는 사람이..”라는비난을 말한다. 어디 가서 불교공부한다라고 말해서도 안된다. 또한 니까야를 보고 청정도론을 봤다라고 말해서도 안된다. 당장 견제구가 들어 오고 태클을 걸기 때문이다. 그들 대부분은 수행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고 니까야도 읽지 않고 청정도론도 읽지 않은 사람들이다.

수행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수행을 비난한다. 경전을 읽지 않은 사람들이 경전을 비난한다. 특히 논서를 읽지 않은 사람들이 논서를 비난한다. 청정도론을 한번도 읽지 않은 자들이 삼세양중인과나 윤회에 대해서 격렬하게 비난한다. 그럴 때는 한번 읽어 보고 말하십시오. 읽어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마십시오.’라고 충고해 주고 싶다.

불교 입문한지 오래 되지 않았다. 30, 40, 50년 된 사람들과 비교해서 말하는 것이다. 2004년 정식으로 수계 받았으니 이제 19년밖에 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럼에도 대부분 기간을 니까야와 청정도론을 보았다.

니까야와 청정도론에는 평소 내가 궁금해 하고 있었던 것이 다 있었다.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도 있었다. 평생 보아도 못볼 정도로 방대하다. 이런 경전과 논서가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날마다 좋은 날이다. 여기에다 요즘에는 마하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푹 빠져 있다. 니까야와 청정도론을 근거로 한 것이다. 어쩌면 복주석서 성격에 가깝다. 무엇보다 수행지침서라는 것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으면 읽는 맛이 난다. 하루 한페이지 나가기도 힘들지만 읽고 나면 뿌듯하다. 새기고 싶은 내용이 많다. 이렇게 글로 써서 남기고 싶다. 공유하고 싶어 지는 것이다. 마치 깨달음은 이것이다.”라고 말해 주는 것 같다.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물질의 생겨남과 사라짐을 아는 모습)

볼 때, 굽힐 때 등에 '본다'. '굽힌다' 등으로 새길 때마다 '눈의 깨끗함 보이는 형색, 움직임' 등의 물질들을 획, '하며 생겨나서는 ', '하며 사라지고 소멸해 간다"라고 안다. 이렇게 알고 보는 것이 samudaya (생겨남) 혹은 nibbattilakkhanā(발생함의 특성)라고 부르는 생겨남과 vaya(사라짐) 혹은 viparinamalakkhana(변함의 특성)라고 부르는 소멸을 직접 아는 생멸의 지혜(udayabbhaya ñana)이다.

어리석은 범부들은 이러한 물질과 정신뿐인 것을 '행복하다. 좋다. 아름답다'라고 생각한다. '고통이다. 좋지 않다. 아름답지 않다'라고는 알 수 없다. 생각할 수 없다. 생겨난 물질과 정신들이 전혀 생겨나지 않고 소멸되고 사라진 것도 '행복하다, 좋다'라고 알지 못하고 무명(avijja)이다. 과거 생들에서 업을 행할 때 이 무명이 다 사라지지 않았었기 때문에 물질과 정신들에 대한 애착, 바람이 생겨났었다. 따라서 애 착하고 좋아하는 물질과 정신들에게, 그 법들이 잘 지내게 하기 위해 어떠한 법을 행해 주었다. 그러한 행위가 선업, 불선업이다. 지금 생의 원인만을 말한다면 선업만이 해당된다.

위빳사나를 관찰하는 수행자라면 이전에 미리 "견해를 바르게 하고 (ditthi ca ujuka)"라는 말에 따라 '업 때문에 좋은 결과, 나쁜 결과가 생 겨난다'라고 들어서 아는 지혜로 믿고 알고 본다. 위빳사나를 관찰할 때 에는 물질과 정신들이 여러 조건들과 함께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직 접 알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직접적인 지혜와 들어서 아는 지혜가 섞여 다음에 말할 방법처럼 이해하면서 알 수 있기도 한다.

이전 생의 무명 이 아직 사라지지 않아서 이 물질이 생겨난다. (무명이) 사라졌다면 생겨날 수 없다'라든가’, ‘즐기고 애착하는 갈애가 아직 사라지지 않아서 이 물질이 생겨난다. (갈애가) 사라졌다면 생겨날 수 없다라든가, ‘이전에 행했던 업이 있어서 이 물질이 생겨난다. (업이) 없다면 생겨날 수 없다라든가, ‘이번 생에서 먹고 마신 음식이 있어서 이 물질이 생겨난다. (음식이) 없다면 생겨날 수 없다라고 반조하면서 안다. 이렇게 아는 것은 “avij
āsamudayā rūpasamudayo avijjanirodhā rūpanirodho (무명이생겨나기 때문에 물질이 생겨난다. 무명이 사라지면 물질이 사라진다)” 라는 등의 빠띠삼비다막가의 내용과 일치한다.

이는 samudaya = 생 겨남(생겨나게 하는 원인법들), vaya norodha = 사라지고 소멸함(사라지고 소멸하게 하는 원인법)들을 유추를 통해 추측하여 아는 생멸의 지혜이다. ‘굽히려는 마음이 있어서 굽히는 동작이 생긴다. 없다면 생겨날 수 없다라는 등으로 아는 것, 혹은 추움, 더움 등의 날씨 때문에 추운 물질, 더운 물질들이 생겨난다. 없다면 생겨날 수 없다라고 아는 것 등은 현재 생의 원인들을 아는 것으로 같은 성품이기 때문에 “ahara- samudaya rupasamudayo ahāranirodha rupanirodho (음식이 생겨 나면 물질이 생겨난다. 음식이 사라지면 물질이 사라진다)”라는 구절만 설명해 놓았다고 대복주서에서 설명하였다.

지금까지 설명한 방법에 따라 물질의 생겨남과 사라짐을 아는 것은 “iti rupassa samudayo, iti rupassa atthangamo(이것이 물질의 생겨남이다. 이것이 물질의 사라 짐이다)”라는 경전내용과 일치한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 507-509)

오온 중에서 물질에 대한 것이다.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대한 것도 동일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직접적으로 아는 것과 추론으로 아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아는 지혜가 있다. 오온에서 직접 경험해서 이는 생멸의 지혜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추론적으로 아는 지혜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언어적 개념으로 아는 지혜를 말한다. 무명, 마음, 갈애 같은 것이다. 그래서 즐기고 애착하는 갈애가 아직 사라지지 않아서 이 물질이 생겨난다. (갈애가) 사라졌다면 생겨날 수 없다”(479)라고 말하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아는 지혜와 유추해서 추론으로 아는 지혜가 있다. 이와 같은 두 종류의 지혜에 대해서 사라짐을 아는 것이 한 가지. 생겨나는 원인을 아는 것이 네 가지, 사라지는 원인을 아는 것이 네 가지, 이렇게 전부 지혜가 열 가지이다. 따라서 다섯 무더기(五蘊) 모두에 지혜가 50가지이다. 이 지혜 50가지를 50가지 특성을 아는 생멸의 지혜이다.”(511)라고 했다.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수많은 사람들이 의문한다. 그러나 누구하나 콕 집어서 말하지 못한다. 너무나 당연하다. 깨달음은 언어의 영역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체험한 자만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여러가지 비유로 설명해 주셨다. 친절한 부처님이다. 더 친절한 것도 있다. 청정도론과 같은 논서이다.

깨달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청정도론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나의 상상을 초월하는 모든 것이 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생에서 청정도론을 만난 것은 큰 행운이다. 더 큰 행운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만난 것이다.

오늘도 니까야를 보고 청정도론을 보고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볼 것이다. 평생 공부해도 부족하다. 그래서일까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몇 생, 아니 수십, 수백, 수천생, 아니 그 이상 걸릴지 모른다. 이번 생에 부처님 가르침을 만난 것은 인생 최대의 행운이다.


2023-06-1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