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자신이 자신의 의지처가 되어야

담마다사 이병욱 2023. 6. 6. 17:12

자신을 어떻게 등불로 삼을 것인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오 나의 스승께서는 다른 이의 의지처는 되실지언정 당신 자신의 의지처는 아직 되지 못하셨구나."(1, 484)라는 구절을 말한다.

제자는 스승이 아직 아라한이 되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스승님에게 가르침을 드 려야겠다라며 스승을 방문했다. 마하시와(Mahasiva) 장로에 대한 이야기를 말한다.

마하시와 장로는 대강백이었다. 장로에게 배워 아라한이 된 사람은 무려 3만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정작 장로는 아라한이 되지 못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제자가 깨우쳐 주고자 했다. 마하시와 장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마하시와 장로 이야기)

마하시와 장로의 일화 마하시와 장로는 열여덟 종파의 스님들에게 경 전을 강의하는 대강백이었고, 그의 가르침에 따라서 아라한이 된 스님 들이 무려 8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분들 중 한 스님이 자신의 공덕을 반조하고 나서 '나의 공덕이 한계를 헤아릴 수 없이 많구나. 나의 스승께서는 공덕이 얼마나 되실까?"라고 반조하였을 때 스승께서 아직 범부인 것을 알고는 '오 나의 스승께서는 다른 이의 의지처는 되실지언정 당신 자신의 의지처는 아직 되지 못하셨구나. 스승님에게 가르침을 드 려야겠다'라고 생각하고는 즉시 하늘을 날아서 마하시와 장로가 있는 곳으로 갔다. 절 근처에 다다르자 하늘에서 내려와 스승에게 가까이 다 가갔다.

무슨 일인가?”라고 마하시와 장로가 물었다.

축원법문 하나 배우려고 왔습니다라고 제자가 청하였다.

빈 시간이 없네."

탁발준비하려고 잠시 서 계실 때 묻겠습니다.”

그때는 다른 비구가 질문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네.”

탁발하시러 마을에 들어가실 때 묻겠습니다.”

그때도 다른 비구가 질문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네.”

그러면 가사를 고쳐 입으실 때, 발우를 꺼내실 때, …죽을 마시고 나셨을 때 묻겠습니다.”

그때도 주석서를 배우려고 하는 여러 장로스님들이 질문하고 있네.”

이러한 방법으로 제자가 시간을 청하였지만 장로는 탁발하는 마음에 저 나올 때, 마을에서 절로 돌아올 때, 공양을 마쳤을 때, 낮을 보내는 곳 에서 지낼 때, 잠자리에 들기 위해 발을 씻을 때,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 어나 세수할 때, 세수하고 났을 때, 방 안에서 잠시 앉아 있을 때, 이러한 여러 시간에도 질문하는 이들이 다 약속이 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제자가 오 스님! 세수하고 나서는 방 안에 들어가 잠자리를 따뜻하게 하도록 잠시 앉아서 수행할 정도의 시간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과 같은 생활이라면 스님께는 죽기 위한 시간도 없지 않겠습니까? 스님은 등받이 의자와 같습니다. 남의 의지치는 될지언정 자기 스스로의 의지처는 될 수 없습니다. 스님의 축원법문은 필요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면서 하늘로 날아올라 떠나갔다.

그때 장로는 '이 스님이 나에게 온 것은 법문을 배우려고 온 것이 아니다. 나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려고 온 것이구나'라고 알고 그 다음날 아침 일찍 발우와 가사 등을 지니고 수행하기 위해 절을 나섰다.

 

나 정 도면 아라한과를 증득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틀이나 사흘 정도면 아라한이 되어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는 제자 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마을 근처 숲에서 지내며 음력 6월 상현의 13 일부터 수행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보름날이 되어도 특별한 법을 얻지 못하였다.

 

장로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 이틀, 사흘이면 아라한과 를 증득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왔는데 아직 얻지 못했구나. 어쩔 수 없지. 이 안거 3개월을 3일처럼 생각하고 수행하자. 안거가 끝나 해제하면 할수 있겠지'라고 생각하고 결제에 들어가 다시 수행하였다.

 

하지만 해제하였어도 도와가를 증득하지 못하였고 장로는 다시 ', 이틀 사흘이면 일이 다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왔건만 석 달이 지나도 많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구나. 안거를 지낸 다른 많은 대중들은 아라한으로서 자자(pavarana)를 행할 텐데'라고 생각했고 그러자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나서 '잠자리에 들어갈 매 발을 씻어야 하고, 기대고 눕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도와 과를 증득하지 못했던 것이다'라고 생각하고는 침대를 치워 버렸다.

 

그때부터 시작하여 앉고, 서고, 가는 이 세 가지 자세로만 수행하며 지냈다. 하지만 그렇게 29년 동안 수행했어도 도와 과를 증득하지 못하였다. 그렇게 29년간 자자를 행하는 날마다 눈물을 흘렸다.

 

30년째 자자날이 되었어도 도와 과를 여전히 얻지 못하자 장로는 '! 내가 수행한 지 어언 30년이나 지났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아라한과를 증득하지 못했다. 맞구나. 나는 이번 생에서는 도와 과를 증득하지 못하는 이구나. 다른 대중들과 아라한으로서 자자를 행하지 못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또다시 매우 격렬한 슬픔이 생겨나 눈물을 흘렸다.

 

그때 근처에 있던 한 천녀가 경각심을 일깨워 주려는 목적으로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울면서 서 있었다.

이보시오. 누가 거기에서 울고 있소?”라고 장로가 물었다.

저는 천녀입니다. 스님.”

무엇 때문에 울고 있소?”

스님께서 울고 있는 것을 보고 우는 것으로도 도와 과를 증득할 수 있구나라고 생각해 도와 과를 두 개, 세 개 얻을 요량으로 울고 있습니 \. 스님이라고 천녀가 대답했다.

그때 장로는 정신을 번쩍 차리고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훈계했다.

! 마하시와! 보아라! 천녀도 그대를 놀리고 있지 않는가? 그대의 이런 행동이 그대에게 여법한가?”라고 숙고하고 (스스로를)훈계하고 나서 슬픔을 제거하고 위빳사나 수행을 차례대로 닦아가서 아라한과에 이르렀다.

(위빠사나 수행방법론 1, 484-487)


마하시와 장로는 왜 이렇게 아라한이 되는데 늦었을까? 삼장에 통달한 대강백이기 때문에 3일이면 될 줄 알았으나 무려 30년 걸렸다. 이에 대하여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해 놓았다.


이 마하시와 장로가 오랜 기간 수행을 해야만 했던 것은 경전지식이 많아서 자세한 방법으로 사유했기 때문이라고 알아야 한다. 마하목갈라나 존자보다 사리뿟따 존자가 더 오랜 기간 수행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1, 487)


사리뿟따 존자는 아라한이 되는데 2주 걸렸다. 목갈라나 존자는 1주일 걸렸다. 사리뿟따 존자가 목갈라나 존자 보다 아라한이 되는데 더 걸린 것은 법을 더 세밀하게 관찰했기 때문이다. 마하시와 장로도 그랬다.

마하시와 장로가 아라한이 되는데 30년 걸린 것은 아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강백이라 아는 것이 많아 30년 동안 위빳사나 수행을 해서 아라한이 되었는데, 30년에 걸쳐서 위빳사나 지혜가 무르익었던 것이다.

흔히 선가에서 공부하지 말라고 말한다. 책을 보면 수행에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도와 과를 증득하는데 오랜 세월 걸린다는 말과 같다. 아마 마하시와 장로 이야기를 말하는 것 같다.

마하시와 장로는 법을 세밀하게 관찰했다. 배운 대로 아는 대로 관찰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위빳사나 지혜의 성숙이 늦었다. 그래서 마하시와 장로가 간략한 방법으로 수행했다면 빠른 시일에 아라한이 될 수도 있었지만 자세한 방법으로 위빳사나를 수행했기때문에, 그렇게 자세한 방법의 위빳사나 지혜가 성숙되는데 시간이 걸렸다는 말이다. 간략한 방법으로 수행했어도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471번 각주)라고 했다.

아라한인 제자는 아직 아라한이 되지 못한 스승을 안타깝게 여겨 알려 주고자 했다. 강백으로 일생을 보내는 것보다 수행을 해서 아라한이 되는 것이 더 나음을 말한다. 그래서 스님은 등받이 의자와 같습니다. 남의 의지치는 될지언정 자기 스스로의 의지처는 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자기 스스로의 의지처는 아라한임에 틀림없다.

부처님 가르침에 자귀의법귀의(自歸依法歸依)가 있다. 자신을 섬으로 삼고 가르침을 섬으로 삼지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과 가르침을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살아가라는 말이다. 이때 법귀의는 이해가 되지만 자귀의는 잘 이해 되지 않는다. 어떻게 자귀의 하는 것일까?

자신을 의지처로 하기 위해서는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야 한다. 예류자가 되면 사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 보다 더 안전한 것이 없다. 아무리 보시를 많이하고 계율을 잘 지켜도 수다원이 되지 못하면 어떤 세계에 떨어질지 알 수 없다. 보시공덕과 지계공덕이 천상에 나는 것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자신이 자신의 의지처가 된다. 또 하나 결정적으로는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든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것이다. 예류자가 되면 완전한 열반이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흐름에 든 님으로서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삶이 정초되어 올바른 깨달음을 궁극으로 하기 때문이다.”(D16.125)라고 했다.

수다원이 되면 두 가지가 보장된다. 사악도에 떨어지지 않는 것과 완전한 열반이다. 이 두 가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것이다. 그래서 성자의 흐름에 들면 자신이 자신의 의지처가 된다. 수다원이 되면 자신이 자신의 등불이 되어 자신이 자신을 의지처로 하여 살아가게 된다. 하물며 아라한이 되면 어떠할까? 그래서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수호자이니
다른 누가 수호자가 되리.
자신을 잘 제어할 때
얻기 어려운 수호자를 얻는다.”(Dhp.160)


자신을 의지처로 하려면 자신을 잘 제어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떻게 제어하는가? 이는 자귀의법귀의 가르침에 이어 나오는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아난다여, 어떻게 수행승이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피난처로 삼지 다른 것을 피난처로 삼지 말고, 가르침을 섬으로 삼고 가르침을 피난처로 삼지 다른 것을 피난처로 삼지 않는가?”(D16.53)라며 말씀하시면서 사념처를 설했다.


자신의 행위를 알아차리면 자신을 제어할 수 있다. 이는 네 가지 알아차림, 즉 신, , , 법 사념처로 제어 된다. 늘 깨어 있을 때 자신이 수호된다. 늘 사띠 했을 때 자신이 수호되기 때문에 사념처를 하면 자신이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이 된다. 또한 사념처는 부처님 가르침이기 때문에 법에 의지하게 된다. 그래서 자귀의법귀의가 된다.

부처님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고 했다. 의지할 것은 오직 자신과 가르침뿐이라고 했다. 그런데 왜 자귀의가 먼저 나올까? 그것은 먼저 자신을 제어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념처로 제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귀의가 먼저 나온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훌륭한 가르침이 있어도 실천하지 않으면 쓸모 없다. 아무리 삼장에 통달해도 그런 지식이 자신의 의지처가 될 수 없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야 자신이 자신의 의지처가 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야 자신을 자신의 등불로 삼아 나아 갈 수 있는 것이다.


2023-06-0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