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마음은 영원한 청년인데

담마다사 이병욱 2023. 6. 29. 08:54

마음은 영원한 청년인데
 
 
걸으면 살고 누우면 죽는다는 말이 있다. 어제 만보이상 걸었다. 10키로에 13,000보 정도 되는 것 같다. 시간은 2시간 반가량 된다. 이렇게 걸었으니 죽지 않는 것이 될까?
 
요즘 만보는 기본이다. 왜 그런가? 차를 타고 다니지 않고 걸어 다니기 때문이다. 아파트에서 일터까지 1.5키로 걸린다. 오늘 만보기로 재보니 2천보가 된다. 점심 때 밥 먹으로 집에 가기 때문에 하루에 네 번 1.5키로를 걷는다. 하루에 기본으로 8천보를 걷는다.
 

 
 
만보를 채우려면 명학공원 산책을 하면 된다. 일을 끝내면 보상심리가 발동된다. 이때 산책을 한다. 일터를 나서 만안구청을 거쳐서 명학공원에 이른다. 명학역 부근에서 가장 큰 공원이다. 옛날 동물검역소가 있던 자리이다. 그래서일까 공원에는 축혼비(蓄魂碑)가 있다.
 
공원에서 휠체어 탄 노인들을 보면
 
명학공원은 꽤 넓다. 옛날 동물검역소가 어디론가 옮겨 감에 따라 공원이 되었는데 개발하지 않고 공원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원에는 노인들의 천국이라는 것이다. 동네 노인들이 다 모이는 곳 같다. 더구나 휠체어에 탄 노인들도 볼 수 있다.
 

 
공원 바로 옆에는 안양6동주민센터가 있다. 주민센터 길 건너 바로 앞에는 안양아트센터가 있다. 또한 아트센터 맞은 편에는 요양원이 여러 개 있다. 명학공원에 노인이 많은 것은 요양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공원에서 휠체어 탄 노인들을 종종 본다. 보호자도 있다. 추측컨대 보호자는 봉사자 같다. 걸음을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은 노인을 흴체어에 태워 바깥 바람을 쏘여 주는 것 같다.
 
지팡이를 짚고 비틀비틀 걷는 노인이 있다. 노인은 명학공원 둘레 산책길을 비틀비틀 거리며 천천히 걷는다. 걸어야 산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같다. 몸이 불편하다고 누워만 있으면 죽음이 가까이 올 것이다.
 
노인들은 살고자 걷는 것 같다. 사지가 멀쩡한 나이든 노인들도 공원돌이를 한다. 공원을 계속 도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 오른쪽으로 돈다. 왼쪽으로 도는 사람은 없다. 이들과 함께 공원돌이 한다. 보통 두 번으로 끝낸다. 두 번 돌아도 천보는 되는 것 같다.
 
몸이 불편하니 만사가
 
편의점에서 어느 노인 두 명을 보았다. 편의점 야외에서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나이는 팔십대로 보인다. 몹시 힘들어 보인다. 머리는 허옅게 샜다. 표정은 매우 어둡다. 아마 병이 있는 것 같다. 병고로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다. 얼굴을 보니 젊은 시절 한가락 했던 것 같다. 얼굴에 과거 포스가 남아 있다.
 
나이가 들면 늙기 마련이다. 나이가 칠십 이상 되면 노화가 빨라지는 것 같다. 칠십대가 다르고 팔십대가 다르다. 등이 굽기도 하는 등 노화를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표정도 어둡다. 병고가 있다면 표정이 밝을 수 없을 것이다.
 
그다지 건강한 편은 아니다. 태생적으로 약하게 태어나다 보니 성인이 되어서도 영향이 있는 것 같다. 타고난 약골이라 몸은 가늘어 보기에도 좋지 않다. 그러나 큰 병은 없다. 그럼에도 몹시 힘들 때가 있다.
 
며칠 전의 일이다. 귀가길이 몹시 힘들었다. 공원 같은 아파트단지, 메가트리아를 통과할 때 아름다운 풍경도 눈에 들어 오지 않았다. 빨리 집에 가서 눕고 싶었다. 몸이 불편하니 만사가 귀찮은 것이다. 이럴진대 몸에 병이 있는 사람의 심정은 어떠할까?
 
영화 버킷리스트에서
 
영화 버킷리스트가 있다. 말기암에 걸린 남자는 재산이 많다. 어느 날 재산괸리 매니저가 “보유하고 있는 주식이 10% 올랐습니다.”라고 보고 했다.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몇 프로 오른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는 필요가 없다. 지금 병고를 겪고 있는 자는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도 눈에 들어 오지 않는다. 지금 닥친 괴로움에 마음이 가 있기 때문에 자신과 무관한 것이 된다.
 
사람이 늘 건강할 수만은 없다. 병이 날 수도 있고 다칠 수도 있다. 그제서야 건강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사람이 늘 젊을 수만은 없다. 나이를 먹게 됨에 따라 노화되어서 늙게 된다. 그제서야 젊음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없다. 언젠가는 죽음의 침상에 누워 있어야 할 것이다. 그제서야 삶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건강, 젊음, 삶은 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건강은 질병에 종속되고, 젊음은 늙음에 종속되고, 삶은 죽음에 종속된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건강의 교만으로 막행막식한다면
 
여기 건강한 자가 있다. 그는 이 건강이 영원할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그는 막행막식한다. 여기 젊은 자가 있다. 그는 이 젊음이 영원할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그는 막행막식한다. 여기 삶을 사는 자가 있다. 그는 이 삶이 영원할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그는 막행막식한다.
 
건강한 자는 건강의 교만으로 인하여 막행막식한다. 이는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는 것과 같다. 젊은 자는 젊음의 교만으로 살고, 살아 있는 자는 삶의 교만으로 산다. 그러나 건강한 자는 질병에 종속될 수밖에 없고, 젊은 자는 늙음에 종속될 수밖에 없고, 삶이 있는 자는 죽음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바로 그 고귀한 제자가 이와 같이 ‘나 혼자만 질병에 종속되어 질병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뭇삶들 또한 오고 가고 죽고 태어나는 한, 그 모든 뭇삶들이 질병에 종속되어 질병을 벗어날 수 없다.’라고 그가 그 사실을 자주 관찰하면, 길이 생겨난다. 그가 그 길을 섬기고 닦고 익힌다. 그 길을 섬기고 닦고 익히면, 그에게 결박이 끊어지고 경향이 종식된다.”(A5.57)
 
 
앙굿따라니까야 ‘사실의 경(ṭhāna sutta, A5.57))에 있는 가르침이다. 경에서는 다섯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여자나 남자나, 재가자나 출가자나 공통적으로 벗어날 수 없는 것 다섯 가지를 말한다. 즉, 늙음, 질병, 죽음,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 그리고 업이 자신이 주인임을 자주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 가지 사실에 대한 관찰을 하면 공통적으로 길이 열린다고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도를 닦아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면 생, 노, 병, 사 등 팔고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서양에서 하느님 이미지는 
 
나도 나이를 상당히 먹은 것 같다. 육십이 넘었으니 나이를 먹은 것이다. 머지 않아 지공거사가 될 것이다. 전철을 타면 프리패스가 되는 등 국가가 인정하는 노인이 되는 것이다.
 
마음은 늘 젊다. 주민등록상의 연령으로 보았을 때는 나이를 먹었음에 틀림 없다. 그러나 마음은 늘 청춘이다. 젊은 시절 그 모습이 연상된다. 마음은 영원한 청년인 것이다.
 
사람들은 영원한 청년을 꿈꾼다. 그런데 옛날 사람들도 영원한 청년을 꿈꾸었던 것 같다. 이는 디가니까야 18번 경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 하느님이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은 브라흐마(Brahma)를 말한다. 한역으로 범천(梵天)이라고 한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하느님이 출현할 때 먼저 빛을 낸다고 한다. 마치 해가 뜨기 전에 새벽 여명을 비추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떤 모습일까?
 
유럽에서 하느님의 모습은 늙은 이미지이다. 이는 미켈란젤로의 작품 ‘천지창조’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하느님 이미지는 정반대이다.
 

 
디가니까야 18번 경에 따르면 하느님의 이미지가 있다. 이는 경에서 “하느님 씨낭꾸마라는 거친 몸으로 화현하여 빤짜씨카의 모습을 하고 서른셋 하늘나라의 신들에게 나타났습니다.”(D18.14)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교에서 하느님의 이미지는 청년의 모습이다. 이를 영원한 청년 ‘빤짜씨카’라고 하는데, 이는 최하급신 건달바의 이미지를 말한다.
 
불교에서 하느님의 이미지는
 
하느님은 왜 하급신 건달바의 이미지로 화현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영원한 청년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마치 대중이 연예인을 좋아하는 이치와 같다고 본다. 중고등학교 아이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배우나 남자배우를 동경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불교에서 하느님의 이미지는 수염이 길게 난 늙은 노인이 모습이 아니다. 또한 거룩한 모습의 이미지도 아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이미지는 영원한 청년 빤짜씨카의 이미지다. 마치 영화 ‘토요일밤의 열기’에서 보는 것처럼 머리를 뒤로 넘긴 존 트라볼타의 이미지와 같은 것이다.
 

 
영원한 청년 빤짜씨카에 대한 묘사가 경에 있다. 이는 “마치 황금으로 만든 형상이 인간의 형상을 휠씬 능가하여 빛나듯, 세존이시여, 하느님 싸낭꾸마라가 서른셋 하늘나라에 나타날 때에 그 용모와 명성은 다른 신들을 훨씬 능가하여 빛납니다.”(D18.13)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하느님은 건달바의 이미지로 모습을 나타낸다. 거친 몸을 가진 존재로 화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왜 나이 먹은 흰 수염을 휘날리는 모습이 아닌 영원한 청년 이미지로 나타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모든 신들은 하늘아들 빤짜씨카 건달바의 몸을 애호하기 때문에 하느님도 그러한 몸을 만들어 화현한다.”(Smv.640)라고 설명되어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이미지는 기독교에서 생각하는 하느님의 이미지와는 다르다. 건달바의 이미지로 나타나는 것이다. 영원한 청년 빤짜씨카 건달바를 말한다. 그것도 황금으로 된 조각상 같은 이미지이다.
 
존 트라볼타처럼
 
영원한 청년 빤짜씨카 건달바는 오늘날 남자 영화배우에 해당되는 이미지일 것이다.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부르는 등 여성에게 인기 있는 젊은 이미지의 남자배우를 말한다. 그런데 자꾸 영화 ‘토요일밤의 열기’에 나오는 존 트라볼타가 연상되는데 나만 그런 그런 것일까?
 
사람이 언제까지나 청년으로 살 수 없다. 청년이라 하여 이 젊음과 건강, 그리고 삶이 영원히 유지 될 수 없다. 영화 ‘토요일밤의 열기’와 ‘그리스’에서 보는 존 트라볼타 역시 세월이 흘러 감에 따라 늙었다. 영원한 청년 이미지의 빤짜씨카는 만들어진 이미지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이 영원한 청년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 간다.
 
누구나 영원한 청년을 꿈꾼다. 그러나 영원한 청년 이미지는 교만을 만들어 낸다. 젊음의 교만, 건강의 교만, 삶의 교만을 말한다. 이런 교만은 오래 가지 못한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젊음은 늙음에 종속되고, 건강은 질병에 종속되고, 삶은 죽음에 종속된다.
 
마음은 영원한 청년인데
 
나는 지금도 마음은 청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마 영원한 청년 빤짜씨카와 같은 건달바를 꿈꾸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부처님은 형편 없이 늙어 버린 자, 병이 들어 똥오줌 가리지 못하는 자, 죽음에 이른 자를 보여 주면서 환상을 깨게 해준다. 이른바 천사(天使), 하늘의 사절단을 보내서 일깨워 주는 것이다.
 
명학공원에는 오늘도 노인들이 나와 있을 것이다. 요양원 노인들도 휠체어를 타고 나와 있을 것이다. 매일 명학공원돌기를 하면서 이들을 본다. 언젠가는 이들과 같은 운명이 될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공원에는 천사들이 많다. 나이 든 늙은 천사도 있고 휠체어를 탄 병이 든 천사도 있다. 모두 하늘이 보낸 사절단들이다. 그런데 천사들은 천사의 경고를 한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저렇게 된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마음은 영원한 청년이다. 그래서 건강의 교만, 젊음의 교만, 삶의 교만으로 살아 간다. 그러나 조만 간에 질병에 종속되고, 늙음에 종속되고, 죽음에 종속될 것이 다. 그럼에도 신체적으로 언어족으로 정신적으로 막행막식하며 살아 간다. 나는 언제나 건강의 교만, 젊음의 교만, 삶의 교만을 진실로 자각할 수 있을까?


 
2023-06-2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