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타이틀이 부끄럽다, 윤회를 부정하는 H스님
유튜브에서 본 것이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가 운영하는 채널에서 H스님을 인터뷰한 것이다. 명사들만 찾아 다니는 기자는 H스님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상당히 기대를 가지고 보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것일까? 윤회를 부정하는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분노가 치밀었다.
윤회는 불교의 근본이나 다름 없다. 그럼에도 윤회를 부정하는 자들이 있다. 소위 많이 배웠다는 자들에게서 그런 경향이 있다. 또한 선승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윤회는 있을까 없을까? 이런 질문하는 것 자체가 우문이다. 당연히 있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 하기 때문이다. 마치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합니까?”라고 물어 보는 것과 같다.
윤회부정론자들이 늘 하는 말
윤회부정론자들이 늘 하는 말이 있다. 무아이기 때문에 윤회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윤회의 주체가 없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합니까?”라고 말하는 것은 유아론을 배경에 깔고 있는 것이다. 오물장 같은 질문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무아이기 때문에 윤회한다. 이는 초기경전을 열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는 연기법적으로 설명이 가능한다. 십이연기에서 조건발생하는 고리를 보면 알 수 있다. 조건발생하기 때문에 무아인 것이다. 행위에 대한 과보가 있기 때문에 윤회하는 것이다.
H스님은 문필가로 알려져 있다. 나의 이삼십대 시절 스님은 유명한 문학가였다. 스님의 책이 신문 광고에 나왔기 때문이다. 비교적 좋은 이미지, 긍정적 이미지의 스님이었으나 이번에 조현기자의 인터뷰를 보고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었다.
H스님에게 분노한다. 그러나 분노보다 연민이 앞선다. 나이가 팔십줄에 들어섰으나 부처님 그분이 누구인지, 부처님 그분이 어떤 이야기를 하셨는지 전혀 아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H스님의 윤회부정론은 간단하다. 스님은 연기송을 들어 윤회를 부정했다. 연기송에서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 이것이 생겨나지 않으면 저것이 생겨나지 않는다.”라는 후송을 근거로 하여 부정한 것이다.
H스님의 논리는 명쾌하다. 내가 없으니 윤회도 없다는 매우 단순하고 무식한 논리를 제시한다. 이는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에서 이것에 무아를 대입하고, 저것에 윤회를 대입한 것이다.
스님을 비판하면 삼보를 비방한다는데
한국불교는 스님을 비판하면 삼보를 비방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윤회를 부정하는 스님에 대하여 비판하면 삼보를 비방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왜곡하는 것에 대해서는 두고 볼 수 있다. 반드시 지적이 따라야 한다.
누구나 자신의 견해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삼보에 귀의한 불자라면 가르침에 근거해서 말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동의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고, 그 말마디와 맥락을 잘 파악하여 법문과 대조해 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D16.98)라고 했다.
어떤 이가 윤회를 부정했을 때 가만 있어야 할까? 불교인이라면 한마디 해주어야 할 것이다. 반드시 경전을 근거로 해야 한다. 경전을 근거로 하지 않으면 개인적인 견해, 즉 사견이 되어 버린다.
사견을 말하는 자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부처님은 “그의 말을 법문과 대조해 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 법문에 들어맞지 않고 계율에 적합하지 않다면, ‘ 이것은 세상에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깨달은 님의 말이 아니다. 이 수행승은 잘못 파악한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D16.98)라고 말씀 하셨다.
임제선사의 영향이 컸을 것
H스님은 한국불교에서 출가해서 오랜 세월 살았다. 계행은 청정한 것 같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모르는 것 같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전혀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아마도 임제종의 개산조 임제선사의 영향이 컸을 것이라고 본다.
한국불교에 대하여 잘 모른다. 선종을 표방하는, 그것도 임제선을 추구하는 한국불교에서 스님들은 임제선사의 아들들과 같다. 그런데 임제선사는 매우 파격적으로 알고 있다.
임제선사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다. 임제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이 임제에 대하여 글을 쓴다면 구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임제를 따르는 스님들 입에서 간접적으로 들은 것이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팔만사천리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한국불교에서 스님들은 대체로 윤회를 부정하는 것 같다. 학자들도 따라가는 것 같다. 무아윤회를 부정한다고 하여 유아윤회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무아이니 윤회가 없다는 매우 단순화고 명쾌하고 무식한 논리를 제시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라는 연기 후송을 근거로 제시한다.
윤회를 부정하는 스님들 중에는 즉문즉설로 유명한 스님도 있다. 스님은 즉문즉설 시간에 공개적으로 윤회를 부정했다. 부처님은 그런 말 한적이 없다는 것이다. 윤회를 부정하는 스님들 대다수가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스스로 무식을 폭로하는 것과 같다. 경전을 전혀 읽어 보지 않았다는 것을 밝히는 것과 같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윤회가 없을 수 있다. 이는 아라한이 되었을 때 가능하다. 이는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은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는 일이 없다.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라는 정형구로 알 수 있다. 이를 ‘아라한송’이라고 한다. 일종의 오도송이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이는 깊은 명상에서 출정하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열반을 체험하고 난 다음 반조가 일어나는데 그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에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시켜 가는 과정이 수행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도를 보아야 한다. 이는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른바 열반 체험을 하면 견도(見道)로 보는 것이다.
견도 했다고 하여 다 깨우친은 것은 아니다. 반조해 보면 자신에 남아 있는 번뇌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이 나의 것이라는 유신견 등은 사라졌지만 미세하게 탐, 진, 치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견도 이후를 수행도라고 한다. 견도에서 확인한 번뇌를 소멸하는 과정이다. 사다함과 아나함 단계를 수행도라고 한다. 마침내 모든 번뇌가 소멸되었음을 확인하게 되었을 때 스스로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은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는 일이 없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학도이다.
무아이면 윤회가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영혼, 즉 아트만과 같은 자아가 없으면 윤회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초등학생 같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에서 각각을 대입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경전을 근거로 법문하는 미얀마 사야도
윤회가 없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깨달은 사람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번뇌가 없는 사람이다. 번뇌가 없으니 더 이상 태어날 것도 없다. 그러나 번뇌가 있는 사람들은 생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법문이 있다.
“볼 때 등에 분명하게 존재하는 괴로움의 진리에 해당하는 바로 그 다 첫 취착무더기 법들을 '좋은 것, 거룩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좋아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기대하고 원하는 것이 갈애(tanha)이다.
이 갈애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이에게는 지금 행복하고 잘 살기를, 나중에 행복하고 잘 살기를 바라며 깨끗한 마음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를 할 때마 다 선업 [허물이 없는 행위)이 생겨난다. 깨끗하지 않은 마음으로 생각 하고 말하고 행위를 할 때마다 불선업(허물이 있는 행위)이 생겨난다.
각각의 생마다 이 선업, 불선업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생겨난 다. 그렇지만 이미 행했던 많은 업들 가운데 적당한 기회에 따라 어느 한 업이나 그 업을 행할 때의 표상이 임종에 즈음한 마음에 드러난다. 그렇지 않으면 태어날 새로운 생에서 머물 곳의 여러 상황을 나타내는 대상이 그 업 때문에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마음에 드러난다.
이러한 세 가지 대상 중 어느 하나의 대상에 집착하며 죽는 이는 마지막 물질과 정신이 무너짐과 동시에 그 대상만을 집착하여, 바로 그 업 때문에 그에 게 새로운 생이 머무는 곳에 새로운 다섯 취착무더기가 생겨난다.
여기서 집착하는 모습은 무서운 꿈을 꾼 이가 깨고 나서도 그 두려움이 사라 지지 않는 것과 같다. 앞뒤가 이어져 연결된 모습은 보고 난 대상에 대 해 생각하는 것이 이어서 생겨나는 것과 같다.(수행자들이 직접 알 수 있는 비유이다.)
제일 먼저 생겨난 무더기들에 이어서 새로운 생에서 죽을 때까지 거듭 취착무더기들이 계속 이어서 생겨나고 사라진다. 이번 생에서 보고 나면 다시 보고, 보고 나면 생각하고, 보고 나면 듣고, 이러한 등으로 취착무더기들이 계속 이어서 끊임없이 생겨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생겨날 때 그 취착무더기들이 제일 먼저 생겨나는 것이 '태어남이라는 괴로움'이다. 거듭 생겨난 뒤 그 무더기들이 성숙하는 것이 '늙음이라는 괴로움'이다. 마지막으로 그 무더기들이 무너지는 것이 '죽음이라는 괴로움'이다. 죽기 전에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생겨나는 슬픔, 비탄 등 도 괴로움일 뿐이다. 봄, 들음 등에 의해 끊임없이 생겨나는 취착무더기 들도 괴로움일 뿐이다.
그러면 이러한 괴로움의 진리에 해당하는 법들 은 무엇 때문에 생겨났는가? 바로 업 때문에 생겨났다. 업은 무엇 때문 에 생겨났는가? 무엇 때문에 그 결과를 줄 수 있는가? 취착무더기에 대 해 좋아하고 바라는 갈애 때문이다.
이 갈애가 사라진 이에게는 새로운 업이 생겨날 수 없다. 생겨난 과거의 업들도 새로운 생의 무더기들을 생 겨나게 할 수 없다. 따라서 각각의 생마다 제일 먼저 생겨나는 취착무더기 등 모든 고통들의 근본원인은 바로 갈애이다.
그렇기 때문에 볼 때 등에 분명하게 존재하는 바로 그 취착무더기들을 '좋은 것, 거룩한 것'이 라고 생각하여 좋아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기대하고 원하는 것이라 고 하는 갈애(tanha)를 '생겨남의 진리'라고 한다. “yāyaṃ taṇhā ponobhavikā nandirāgasahagatā(그것은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즐김과 애착이 함께하며)”라는 경전내용과 일치한다.”
(마하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532쪽)
마하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집성제에 대한 것이다.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리를 설명했다. 그것은 갈애 때문이다. 오온에 대한 집착으로 인하여 괴로움이 발생하는 것이다.
마하시사야도는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리에 대하여 “야양 딴하 뽀노바위까 난디라가사하가따”(S56.11)라는 문구를 근거로 들어 설명했다. 담마짝까빠왓타나경, 즉 초전법륜경을 근거로 설명한 것이다.
미얀마 사야도들은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법문한다. 그러다 보니 개인적인 견해가 발 붙이지 못하는 것이다. 경전을 근거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각각 다른 목소리를 낼 것이다. 그 결과 중구난방이 되어 버린다.
H스님은 무아이니 윤회가 없다는 말을 했다. 영혼이 없으니 윤회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말은 깨달은 자에게나 적용되는 말이다. 모든 번뇌가 소멸된 아라한에게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아라한이 아닌 자들은 윤회할 수밖에 없다. 이는 마하시사야도가 “세 가지 대상 중 어느 하나의 대상에 집착하며 죽는 이는 마지막 물질과 정신이 무너짐과 동시에 그 대상만을 집착하여, 바로 그 업 때문에 그에 게 새로운 생이 머무는 곳에 새로운 다섯 취착무더기가 생겨난다.”라는 말로도 알 수 있다.
세 가지 대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업과 업의 표상과 태어날 곳의 표상을 말한다.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난다. 재생연결식은 이와 같은 세 가지 중에 하나를 대상으로 해서 일어난다. 그래서 다음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확률이 반반이라면
한평생 막행막식하며 산 자가 있다. 그는 윤회는 없다는 말을 믿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했을 때 굳이 계를 지키거나 보시를 하는 등, 도덕적인 삶, 보시하는 삶을 살 근거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행위를 하면 과보를 받게 되어 있다. 이는 원인과 결과에 대한 것이다. 그럼에도 윤회를 부정한다는 것은 결과를 부정한다는 말과 같다. 막행막식해도 죽으면 그만일 것이다. 이런 스님의 말을 듣고 막행막식한다면 어떻게 될까? 현명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된 뒤의 자신을 안전하게 만들 것이다. 만약 저 세상이 존재한다면, 이 인간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의 그러한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차라리 저 세상이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여전히 이러한 사람은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내세가 없다고 주장하는 비도덕적인 사람으로서 현자들에 의해서 지금 여기서 비난받는다. 그러나 반대로 저 세상이 있다면, 이 사람은 양쪽에서 불운에 떨어진다. 지금 여기서 현자들에 의해 비난받고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여 실천하여 한 쪽만을 충족시키고, 착하고 건전한 것을 버리고 있다.”(M60)
맛지마니까야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M60)에 실려 있다. 윤회가 없다고 여기는 어리석은 자는 마치 내기 놀이를 하는 자 같다. 확률은 반반이다. 죽고 난 다음 윤회가 없다면 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윤회가 계속 된다면 낭패를 보게 될 것이다.
확률이 반반이라면 어디에 내기를 걸어야 할까? 윤회가 없다고 본다면 반만 안심은 맞고 반은 틀릴 것이다. 윤회가 있다고 본다면 모두 안심일 것이다. 왜 그런가? 윤회가 없다고 보는 자는 막행막식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기 때문에 윤회가 계속 되었을 때 악처에 떨어질 것이다. 반대로 윤회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산 자가 죽었을 때 윤회가 계속되면 선처에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다행일 것이다.
아직까지 죽어서 돌아온 사람이 없다. 내생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추론으로 알 수 있다. 현재의 삶을 무한히 확장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행위에 대한 과보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렇게 추론적으로 관찰하면 내생과 윤회는 있을 수밖에 없다.
윤회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다. 지금 여기서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즐거움이라는 뜻도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쾌락이라는 말도 된다. 지금 이순간을 즐기자는 것이다.
부처님은 지금 이순간을 즐기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지금 이순간을 관찰하자고 말했다. 그래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그때 잘 관찰하라.”(M131)라고 말씀 하셨다.
M스님은 윤회가 없다고 했다. 심지어 육도윤회도 없다고 했다. 이런 파격에 불자들은 당황스럽다. 스님의 말을 믿어야 할까? 그런데 놀랍게도 즉문즉설로 유명한 스님도 똑 같은 말을 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법문 중에 “천당이 어디 있어요? 본 사람 있어요?”라고 말했다.
스승이 없는 시대에
불자들은 혼란스럽다. 이름이 잘 알려진 스님이 윤회가 없다고 했을 때 당황스러운 것이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그의 말을 법문과 대조해 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 법문에 들어맞지 않고 계율에 적합하지 않다면, ‘ 이것은 세상에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깨달은 님의 말이 아니다. 이 수행승은 잘못 파악한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D16.98)라는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스승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스승이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장자들이여, 그대들이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 이러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들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면, 그것은 그대들에게 오랜 세월 이익이 되고 행복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 하셨다. 경전을 스승으로 하는 것이다.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 스님을 믿어도 실망하기 쉽다. 스님에게 의지 하기 보다는 삼보에 의지해야 한다. 믿고 의지할 만한 스승이 없을 때는 경전에 의지해야 한다. 윤회에 대한 것도 그렇다.
경전에 답이 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경전을 열어 보면 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불교 스님들은 경전에 근거해서 말하지 않는다. 모두 자신의 말만 하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중구난방 되는 것 같다.
한국스님들은 자신의 말만 하는 것 같다. 자신의 말을 해야 공부한 것처럼 보이는 것 같다. 윤회를 부정해야 공부를 많이 한 것처럼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모든 정보가 오픈 되어 있는 인터넷과 정보통신시대에 스스로 무지를 폭로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윤회를 부정하는 H스님에게 분노했다. 그리고 불편하고 불쾌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런 한편 연민의 마음도 갖게 되었다. 팔십 평생 부처님이 그 분이 어떤 분인지, 부처님 그분이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도 모르고 생을 마치는 것 같아 안타깝게 보인다.
2023-07-0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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