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행복마저 초월하라 했거늘

담마다사 이병욱 2023. 7. 17. 10:33

행복마저 초월하라 했거늘
 
 
지금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계속 되길 바란다. 지금 불행한 자는 이 괴로움에서 한시바삐 벗어나길 바란다. 그러나 결국 어떤 행복도 괴로움으로 귀결되고 만다.
 
오래 전에 즐겨 듣던 노래가 있다. 팔십년대 말에 들었다. 김영동이 작곡한 사랑가이다. 국악인 김성녀가 불렀다. 가사에“이 행복이 부서질 것 같아”라는 구절이 있다.
 
행복은 부서지기 쉽다. 조금이라도 건들면 깨질 것 같다. 행복은 조건이 바뀌면 금방 사라진다. 행복은 일시적이다. 행복은 일시적 느낌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즐거운 느낌에 지나지 않는 행복
 
행복은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는 일시적 느낌이다. 사람들은 이런 행복에 목숨을 건다. 행복한 느낌에 목숨을 거는 것이다.
 
불교에서 행복은 어떤 의미일까? 불교에서는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행복은 즐거운 느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행복한 사람도 조건이 바뀌면 사라지고 만다.
 
행복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행복은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건이 조금만 바뀌어도 깨진다. 행복이 깨지면 그 다음은 무엇인가? 괴로움이다.
 
불교에서는 일체개고라고 말한다. 이는 법구경에서도 발견된다. 법구경에서는 삽베 상카라 둑카(Sabbe sakhārā dukkhā)라 하여 “일체의 형성된 것은 괴롭다.” (Dhp.278)라고 했다.
 
부처님은 괴로움의 진리를 설했다. 사성제에서 고성제를 말한다. 부처님은 생, 노, 병, 사와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취온고라 하여 팔고를 설했다. 오온에 집착하고 있는 한 괴로움뿐이라고 했다.
 
부처님은 행복의 진리를 말하지 않았다. 부처님이 행복을 강조 했다면 사성제는 거룩한 행복의 진리, 거룩한 행복의 원인의 진리, 거룩한 행복의 증득의 진리, 거룩한 행복의 증득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진리를 설했을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사성제이다.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은 모두 사성제에 포섭된다. 부처님이 사성제에서 괴로움을 강조한 것은 무엇인가?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그렇다고 이고득락을 말하지 않았다. 행복한 상태가 되기 위해서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함은 아니다.
 
부처님은 열반을 설했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열반이다. 열반은 불사이기 때문에 불생이 된다. 모든 형성된 것들에서 벗어나는 것이 열반이다. 탐, 진, 치에서 벗어나는 것도 열반이다. 이런 열반에 대하여 부처님은 궁극적 행복이라고 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nibbāna parama sukha)”(Dhp.204)라고 했다.
 
부처님도 행복을 설했다. 그것은 최상의 행복, 즉 궁극적 행복이다. 이를 법구경에서는 빠라마수카(parama sukha)라고 했다. 열반만이 진정한 행복인 것이다. 이전에 행복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선정의 행복
 
행복의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하다. 감각적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 행복이라고 말한다. 선정에서도 행복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행복은 궁극적 행복이 아니다. 열반의 행복이 아닌 것이다.
 
불교에서는 열반의 행복으로 나아가야 한다. 감각적 행복이나 선정의 행복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감각적 행복은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건이 바뀌면 금방 깨진다. 선정의 행복은 어떠할까?
 
니까야를 보면 선정에 대한 정형구가 있다. 초선정에서부터 3선정까지는 행복이 있다. 그러나 4선정이 되면 행복은 버려진다. 그래서 4선정의 정형구를 보면 “행복도 고통도 버려지고, 기쁨도 근심도 사라진 뒤,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Sukhassa ca pahānā dukkhassa ca pahānā pubbeva somanassa-domanassāna atthagamā adukkha asukha upekhā-sati-pārisuddhi catuttha jhāna)”(S45.8)이라고 했다.
 
 
네 번째 선정을 사념청정(捨念淸淨)이라고 한다. 이는 우뻬카사띠빠리숫디(upekkhāsatipārisuddhi)를 번역한 말이다. 사념청정 상태가 되면 평온해진다. 희열도 행복도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행복은 3선정까지만 있게 된다. 또한 행복이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행복은 지금 여기에서 경험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열반이 행복이라고 했을까? 열반은 나가 사라진 상태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각은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사리뿟따 존자는 “벗이여, 바로 거기에 느낌이 없는 것이 행복입니다.”(A9.34)라고 했다.
 
열반의 행복은 지금 여기에서 경험되는 것이 아니다. 감각적 쾌락이나 선정의 행복은 지금 여기에서 경험 되어진 것이지만 궁극적 행복은 경험되어지지 않는다. 이 말은 열반의 행복은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탐, 진, 치가 소멸되고 또한 가장 청정한 상태가 되었을 때, 나라는 개념 조차 없을 때 평온한 상태가 된다. 이는 지각할 수도 없고 느껴질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각은 있다. 이처럼 역설적으로 느낌이 없는 것이 궁극적 행복, 열반의 행복이라고 했다.
 
변화로 인한 불만족
 
대부분 사람들은 감각적 행복을 추구한다. 수행자들은 선정의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들 행복을 질병 같은 것으로 본다. 그래서 사리뿟따 존자는 감각적 행복에 대해서는 “감각적 쾌락에 수반하는 지각에 정신활동에 묶인다면, 그것은 그의 질병이 됩니다.”(A9.34)라고 했다. 또한 네 번째 선정에 든 자에 대해서는 “행복을 수반하는 지각에 정신활동에 묶인다면, 그것은 그의 질병이 됩니다.”(A9.34)라고 했다.
 
불교에서는 행복을 버려야 할 것으로 본다. 해탈과 열반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복에 머무는 것에 대하여 질병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왜 그런가? 이에 대하여 “행복한 자에게 불행이 생겨나듯”이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행복은 즐거운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즐거운 느낌에 목숨을 건다면 수행자가 아니다. 즐거운 느낌은 알아차려야 할 대상이다. 지금 즐거운 느낌, 즉 행복하다고 느낄 때 이 행복이 오래 가지 못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조건이 바뀌면 금방 괴로운 느낌으로 전환된다.
 
괴로운 느낌은 고통 그 자체로 괴로움 느낌일 수 있다. 또 하나는 변하기 때문에 괴로운 느낌이 된다. 지금 여기서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고 있는 자가 조건이 바뀌어 즐거운 느낌이 사라졌을 때 불만족이 된다. 변화로 인한 불만족이 괴로움이다.
 
형성된 모든 것은 변화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변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세가지 괴로움이 있다. 어떠한 것이 세가지인가? 고통의 괴로움, 형성의 괴로움, 변화의 괴로움이 있다.”(S38.14, S45.165)라고 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일체의 형성된 것은 괴롭다’라고 지혜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니 이것이 청정의 길이다.”(Dhp.278)라고 했다.
 
열반의 행복이란?
 
일반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한다. TV에서도 행복을 말한다. 행복을 말하는 행복전도사 스님도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행복을 추구하라고 하지 않았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라고 했지 행복을 목적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고득락은 잘못된 것이다.
 
부처님은 행복을 얻기 위해서 사성제를 설한 것이 아니다. 부처님 행복을 목적으로 설했다면 네 가지 행복의 진리를 설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네 가지 괴로움의 진리를 설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이 행복이 목적이 아님을 말한다.
 
부처님의 궁극적인 가르침은 열반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열반이 행복이라고 했다. 이를 두고 이고득락이라고 해석하면 잘못된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이고득락을 말하지만 니까야에는 이고득락이라는 말은 없다.
 
열반의 행복은 느낌이 없는 행복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일반사람들이 느끼는 감각적 행복도 아니고 수행자들이 느끼는 선정의 행복도 아니다. 그래서 열반의 행복에 대하여 느낌이 없는 행복이라고 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벗이여, 또한 수행승이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를 완전히 뛰어넘어 지각과 느낌의 소멸에 듭니다. 지혜로 보아, 그에게 모든 번뇌는 부서집니다. 벗이여, 이러한 이유로 실로 열반은 행복으로 자각될 수 있습니다.”(A9.34)
 
 
열반의 행복은 모든 번뇌가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이는 탐, 진, 치가 소멸된 상태와 같다. 또한 열반은 지각(想)과 느낌(受)의 소멸의 상태이기도 하다. 이런 상태에서는 느낄 수도 지각할 수도 없다. 감각적 행복이나 선정의 행복이 아님을 말한다. 또한 자아가 업기 때문에 느낄 수도 없고 지각할 수도 없다. 다만 자각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 행복이다.
 
행복경의 근원을 따져 보면
 
최근 망갈라경 번역을 둘러싸고 어느 스님과 글로서 논쟁을 벌였다. 스님은 망갈라경을 행복경으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망갈라라는 말이 길상, 좋은 징조, 축복, 번영, 안정의 의미가 있음에도 행복으로 번역한 것이다.
 
행복이라는 말은 수카를 뜻한다. 수카는 행복이라는 말도 있지만 즐거움, 쾌락이라는 말도 있다.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는 즐거운 느낌을 행복이라 하는 것이디. 이런 행복은 깨지기 쉽다. 조건이 바뀌면 금방 사라진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늘 알아차리라고 말한다. 즐거운 느낌일때도, 괴로운 느낌일 때도,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일때도 알아차리라고 말한다.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날 것이다. 연기가 회전된다.
 
연기의 끝은 어디인가? 이는 십이연기 정형구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끝은 절망이다. 이는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S12.2)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한국불교 스님들은 망갈라경을 행복경이라고 한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 것일까? 아마 그것은 법정스님 때부터라고 본다. 법정스님이 70년대 중후반에 수타니파타를 번역했는데 그때 행복경이라고 이름 붙였기 때문이다. 법정스님은 빠알리어 원문을 번역하지 않았다. 일본어로 된 수타니파타를 중역한 것이다.
 
한국불교 스님들은 거의 대부분 망갈라경을 행복경이라고 번역한다. 이는 교학에 밝은 스님들도 예외가 아니다. 심지어 빠알리니까야를 번역한 스님들도 예외가 아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경에 대한 깊은 성찰이 없었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경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빠알리니까야 경전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도 망갈라경을 행복경이라고 했다. 대림스님과 각묵스님은 빠알리니까야를 번역한 스님들이다. 누구보다도 망갈라의 뜻을 잘 알고 있을 것 같은 스님들이 이렇게 번역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미산스님은 많이 배운 스님이다. 옥스포드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교학과 교리에도 밝은 스님으로도 알려져 있다. 놀랍게도 이 스님 역시 망갈라에 대하여 행복으로 번역했다.
 
일묵스님이 있다. 유튜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신세대 스님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교학과 수행에 정통해서 법문을 들으면 들을 만 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망갈라경 법문에서 망갈라에 대하여 행복이라고 번역했다.
 
정목스님이 있다. 목소리가 아름다운 스님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유나방송 진행자이기도 하다. 유튜브에서 망갈라경 낭송하는 것을 보니 망갈라에 대하여 행복이라고 했다.
 
한국불교의 스님들은 한결같이 망갈라경에 대하여 행복경이라고 한다. 망갈라에 대하여 행복이라고 번역한다. 대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경전에 대한 무지이다. 경전을 읽어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는 맹목적으로 따라하기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앞서 스님들이 썼기 때문에 따라 하는 것이다. 법정스님이 망갈라경을 행복경이라고 번역했기 때문에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다.
 
행복은 세속팔풍 중의 하나
 
행복, 참으로 좋은 말이다. 누구나 행복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행복을 넘어서라고 했다. 이는 네 번째 선정에서 행복을 버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행복은 즐거운 느낌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알아차리라고 했다.
 
행복은 행복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행복감이라고 봐야 한다. 일시적으로 느끼는 행복감인 것이다. 이런 행복은 조건에 따란 얼마든지 바뀐다. 그래서 부처님은 행복에 대하여 세속팔풍 중의 하나라고 보았다.
 
세속팔풍이란 무엇인가? 이는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 곧, 이득과 불익,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이 있습니다.”(D33.15)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행복이 있으면 반드시 불행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자타카에서는 “행복과 불행, 이것들은 인간 세상의 무상한 원리이니” (Jat.329)라고 했다.
 
수카(행복)와 망갈라(축복)는 다른 말
 
행복은 무상한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스님들은 망갈라경에 대하여 본뜻과 다르게 행복경이라고 했다. 이런 명칭은 부처님 가르침에 맞지 않는다. 부처님은 행복도 초월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망갈라경이 행복경이 아니라 축복경인 이유는 많다. 망갈라라는 말은 지금 여기서 경험하는 행복한 느낌이 아니라 미래 행운을 불러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어리석은 사람을 사귀지 않으며, 슬기로운 사람에 가까이 지내고”(Stn.259)로 시작되는 망갈라경을 설했다.
 
부처님은 어리석은 자를 멀리하고 현명한 자를 가까이 하라고 했다. 이런 것은 지금 여기에서 경험으로 느끼는 즐거운 느낌은 아니다. 미래 행운을 가져 올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에땅 망갈라뭇따망(eta magalamuttama)”이라고 했다. 이를 바르게 번역하면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가 된다. 그럼에도 한국스님들은 법정스님역을 그대로 가져 와서 한결같이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행복이다.”라는 식으로 번역했다.
 
행복을 뜻하는 수카와 축복을 뜻하는 망갈라는 다른 말이다. 만일 부처님이 정말 행복을 바라고 이 경을 설했다면 망갈라는 말 대신에 수카라는 말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초기경전, 즉 니까야를 보면 수카는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는 즐거운 느낌, 그것도 일시적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한다. 행복에 목숨 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즐거운 느낌에 목숨 건다는 말과도 같다. 그래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하여 “죽어도 좋아!”라며 집착하는 것이다.
 
망갈라경은 수카경이 아니다. 망갈라경은 행복경이 아니다. 망갈라경은 테라와다 예불문이자 동시에 수호경이다. 우리나라 천수경처럼 불자들이 늘 독송하고 암송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경험적으로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아니라 미래 행운을 불러 오게 하는 일종의 빠릿따, 즉 주문이기도 한 것이다.
 
자야망갈라가타 유통분을 보면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망갈라경과 유사한 수호경이 여러 개 있다. 자야망갈라가타가 대표적이다. 이 게송은 부처님이 악마와 싸워서 이긴 이야기 등 부처님의 여덟 가지 승리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 게송의 유통분이라 볼 수 있는 아홉 번째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Etāpi  Buddha-jaya-magala-aṭṭha-gāthā
Yo  vācako  dinadine  sarate  matandi
Hitvān a neka-vividhāni cupaddavāni
Mokkha sukha adhigameyya naro sapañño
 
이 부처님의 승리와 행운을 나타내는
여덟 게송을 매일매일 게으름 없이 독송하면
하나 아닌 수많은 불행을 극복하고
슬기로운 자 해탈과 지복 얻을 것이 옵니다.”

(자야망갈라가타 유통분)
 

 

 
유통분을 보면 자아망갈라가타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지금 여기에서 느끼는 행복이 아니라 미래의 안전, 길상, 축복, 번영에 대한 것이다. 바로 그 단어가 망갈라(magala)인 것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출간된 예경지송이 있다. 이 책은 불자들이 독송하기 좋게, 암송하게 좋게 하기 위해서 편집된 것이다. 그 중에 수호경전품이 있다. 이 품에는 16개의 경 또는 게송이 있는데 보호경 또는 수호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호경에는 이른바 테라와다 삼대 경이 들어가 있다. 라따나경, 멧따경, 망갈라경을 말한다. 그런데 망갈라가 들어가 있는 하나의 게송이 있다는 것이다. 마하자야망갈라가타를 말한다. 이를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위대한 승리의 축복의 게송’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했다.
 
금요니까야 모임에서 전재성 선생으로부터 마하자야망갈라가타 해설을 들었다. 이 게송에 대하여“후대에 중세시대에 헌신적인 불자시인이 삼보를 찬양하여 지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삼보에 대한 찬탄과 삼보의 가피를 염원하는 가장 아름다운 게송 중의 하나라고 했다.
 
마하자야망갈라가타는 모두 20개의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에 12번째 게송을 보면 “모든 재앙 진압되고 모든 질병 소멸되고 모든 장애 사라지어 제게(그대에게) 승리의 축복이 함께하여지이다.”라고 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망갈라의 진정한 뜻이다. 미래의 길상, 좋은 징조, 축복, 번영, 안전이 나에게 떠는 그대에게 임하길 바라는 것이다.
 
망갈라의 진정한 뜻은?
 
블로그에 매일 장문의 글을 쓰는 블러거이다. 글을 쓸 때는 경전을 인용한다. 부처님의 권위를 빌어서 말하기 위함이다. 재가불자가 아무리 주장해도 승가에서 들어주지 않는다. 망갈라경에 대한 번역도 그렇다.
 
망갈라경은 행복경인가 축복경인가? 이는 후대 판가름 날 것이다. 이렇게 잘못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하나 있어야 할 것이다. 망갈라에 대하여 느낌에 지나지 않는 행복이라고 번역한 것은 명백히 잘못이다.
 
망갈라경은 천수경과 같은 생활경전이다. 테라와다불교권에서는 예불문이자 수호경이다. 그래서 독립기념일, 결혼식, 입학식, 졸업식, 개업식, 집들이 할 때 암송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지금 여기서 경험되어지는 즐거운 느낌을 말하는 행복이 아님을 말한다. 미래 안녕과 번영을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축복이다. 그래서 영역에서는 “blessing”이라는 제목이 붙는다. 축복경이라는 뜻이다.
 
망갈라경이 축복경인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이는 망갈라경 유통분에 해당되는 “삽밧타 솟팅 갓찬띠(Sabbattha sotthi gacchanti)”라는 말이다. 여기서 솟티는 번영, 안전을 뜻한다. 수호경 또는 주문으로서 성격이 잘 나타난다. 그런데 자야망갈라가타에서는 더 잘 드러난다는 것이다.
 
자야망갈라가타는 부처님의 여덟 가지 승리의 게송이라고 했다. 그래서 유통분 게송을 보면 “이 부처님의 승리와 행운을 나타내는 여덟 게송을 매일매일 게으름 없이 독송하면 하나 아닌 수많은 불행을 극복하고 슬기로운 자 해탈과 지복 얻을 것이 옵니다.”라고 했다. 이는 자야망갈라가타가 수호경, 즉 빠릿따로서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자야망갈라가타는 대표적인 수호경이다. 각 게송 후미에 후렴구로 나오는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는 “땅  떼자사-  바와뚜  떼  자야  망갈라-니(Ta-tejasā  bhavatu  te  jaya-magalāni)”라는 후렴구이다. 이 말은 “이 위대한 힘으로 승리의 행운 그대에게 임하길 바라옵니다.”라는 뜻이다. 이것이 전형적인 수호경의 문구이다. 여기서 떼(te)를 메(me)로 바꾸면 “이 위대한 힘으로 승리의 행운 나에게 임하길 바라옵니다.”가 된다.
 
자야망갈라가타는 나에게 또는 그대에게 부처님의 승리와 행운이 임하길 바라는 축복의 게송, 행운의 게송, 번영의 게송이다. 마찬가지로 망갈라경 역시 축복의 게송, 행운의 게송, 번영의 게송이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망갈라경을 행복경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몰라서 그런 것인가? 알면서도 그런 것인가? 몰라서 그런 것이라면 한국불교의 무지를 드러내는 수치에 해당된다. 알면서도 그런 것이라면 명백한 직무유기에 해당된다. 행복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부처님은 행복을 초월하라고 했다.
 
 
2023-07-1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