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깨달음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는가?
자칭타칭 깨달았다는 도인들이 많다. 대체 그들의 깨달음은 어떤 것일까? 합일의 경지가 깨달은 것일까?
고요한 새벽이다. 잠에서 깼을 때 더 잘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을 잠으로 보낼 수 없다. 또한 인생을 일만 하다 보낼 수 없다. 진리에 대한 갈증이 있다. 이럴 때는 경전을 봐야 하고 논서를 봐야 한다. 거기에 길이 있다.
새벽 몇 시인지 모른다. 고요한 새벽에 멍때리기 할 수 없어서 빠다나경을 암송했다.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 상태이어서일까 잘 떠 올랐다. 막힘 없이 계속 올라 왔다.
이 새벽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까? 금쪽같은 시간에 소설이나 일반 책을 읽는 것은 아깝다. 논서를 손에 잡았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말한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접하면 늘 감탄하게 된다. "어떻게 이런 논서가 있을까?"라는 경탄이다. 한구절 한구절 새롭다. 한구절 한구절 쏙쏙 들어 온다. 형광메모리칠을 하고 또 한다. 영원히 새겨 두고 싶다.
사람들은 사성제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마 고, 집, 멸, 도라는 것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사성제도 반야심경에서는 부정된다.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없는 것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이 부정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사성제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사성제가 설명되어 있다. 무려 73쪽에 이른다. 대념처경에 있는 사성제에 대한 설명이다. 이제까지 사성제에 대해 이렇게 상세하게 설한 것을 보지 못했다.
몇 날 몇 일에 걸쳐 조금씩 읽어 보았다. 그리고 뒤로부터도 읽어 보았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어느 한구절 버릴 것이 없다. 이런 논서를 접했다는 것은 행운이다.
누군가는 행복을 말한다.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열반의 행복이 아닌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일시적으로 느끼는 행복감일 뿐이다.
일반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은 즐거운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즐거운 느낌은 조건이 바뀌면 사라진다. 괴로운 느낌이 되는 것은 순간적이다. 지금 여기에서 경험되어지는 행복은 언제 변할지 모른다. 행복한 느낌에 목숨 건다면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다.
진정한 행복은 느낌이 없는 행복이다. 즐거운 느낌을 느낄 수 없는 상태, 즉 자아가 없는 상태가 진정한 행복이다. 지각과 느낌이 사라진 상태가 진정한 행복이다. 모든 형성된 것들이 멈출 때 진정한 행복이다. 이것이 열반의 행복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nibbānaṃ paramaṃ sukhaṃ)”(Dhp.204)라고 했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열반이다. 열반을 성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먼저 괴로움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팔고를 설했다.
어떤 이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아름답다고 말한다. 건강할 때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몸이 아프면 세상도 괴롭다. 존재 자체가 괴로운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다.
어떤 이는 부처님 가르침을 확장한다. 부처님이 일체개고를 설했다고 하여 산천초목삼라만상도 괴로운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논리로 따지면 책상도 괴로운 것이 되고 스마트폰도 괴로운 것이 된다.
일체개고를 잘못 이해 하면 도(道: magga)도 괴로운 것이 되고 과(果: phala)도 괴로운 것이 된다. 이쯤 되면 도를 닦을 필요도 없고 과를 이룰 필요도 없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살면 그만일 것이다. 막행막식하는 삶이다.
부처님은 일체개고라고 했다. 이때 일체는 오온에 한정된다. 일체라고 하여 산천초목삼라만상으로 확장해서는 안된다. 우리 몸과 마음에서 찾아야 한다. 몸과 마음 밖에서 찾아서는 안된다. 사성제는 몸과 마음을 관찰하여 도와 과에 이르는 방법을 제시한다.
사성제는 성자들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성자들의 바른 법이기 때문에 성스런 진리라고 한다. 그것은 괴로움을 아는 것이다. 지금 결과로서 나타나는 괴로움의 진리를 알게 되면 나머지 세 가지 진리도 관통하게 된다.
부처님은 괴로움의 진리를 설했다. 부처님은 행복의 진리를 설하지 않았다. 진정한 행복은 열반뿐이다. 열반을 제외한 행복은 일시적인 즐거운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
세간적인 행복은 변화될 수밖에 없는 행복이다. 이와 같은 행복한 느낌에 대해서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여러 가지 대상으로 유혹하고 현혹하여 마음을 미치게 하는 야차녀와 같다.”(1권, 528쪽)라고 했다.
불교인이라면 행복을 쫓기 보다는 괴로움에 사무쳐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즐거움을 느낄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괴로움을 절절하게 느껴야 한다. 마치 형편 없이 늙어 버린 노인이 휠체어에 의지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아야 한다.
종종 명학공원으로 산책나간다. 근처 요양병원에서 사는 환자들이 휠체어를 타고 산책나온다. 봉사자와 함께 나온다. 자신의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다. 문밖 출입이 자유롭지 않다.
요양병원 환자는 사회적으로는 이미 사망한 상태이다.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 절망적 상황이다. 이럴 때 “이것이 인생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사성제에 대해서 무려 73쪽에 걸쳐서 설명해 놓았다. 읽고 또 읽어 본다. 세상에 어느 누가 이렇게 절절하게 설명해 놓았을까? 괴로움의 종착지, 궁극적 행복인 열반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해 놓은 책을 보지 못했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보지 않고서 도와 과, 깨달음에 대해서 이야기 해서는 안된다. 누가 깨달음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는가? 다음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새기고 싶은 내용을 추려 본 것이다.
1.
“비구들이여, '느껴지는 그 모든 것들은 괴로움이다'라는 것은 바로 '형성들이 무상한 것을 연유로 해서 내가 설한 것이다.”(1권, 528쪽, S36.11)
2.
“이 네 가지 진리 중 괴로움의 진리와 생겨남의 진리라고 하는 윤전하게 하는 두 가지 진리만을 관찰하여 새겨야 한다. 소멸의 진리와 도의 진리라고 하는, 운전에서 벗어나게 하는 두 가지 원리는 ‘좋은 것이다. 거룩한 것이다’라고 듣는 것만으로 알고 마음을 향하는 정도만 필요하다.”(534-535쪽)
3.
“끊임없이 생멸하고 있는 법들뿐이다. 계속 무너지고만 있다. 좋지 않은 것만을 새기고 있다. 이것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고요할 수 없다. 그것들이 있어서 괴롭다. 전혀 고요하지 않다.”(540쪽)
4.
“중생들의 존재상속에 생겨나고 있는 욕계, 색계, 무색계 법들만이 괴로움의 진리라고 알아야 한다. 중생들의 존재상속에 포함되지 않는, 무생물(ani- ndriyabaddha)은 괴로움의 진리에 포함시켜서는 안 된다. 무엇 때문인가? 무생물은 생겨남, 사라짐이 있어 무상, 고라고 할 수 있어도 갈애라는 생겨남의 진리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542쪽)
5.
“ ‘지금 새겨 알 수 있는 (현재의)물질과 정신이 원인 없이는 생겨날 수 없듯이 재생연결을 시작으로 한생 동안 생겨나는 물질과 정신들도 원인이 있어야 된다’라든가, ‘무엇 때문에 생겨났는가?’라고 새기는 중간에 숙고하면 ‘과거 생에 행 했던 업 때문에 생겨났다’라고 쉽게 결정하여 안다.”(548쪽)
6.
“지금 생에서 바라고 기대하여 애쓰는 것처럼 과거 생에서도 바라고 기대하여 노력했었던 업이 있었다. 그 바라고 기대한 갈애 때문에 현 생의 물질과 정신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549쪽)
7.
“생멸의 지혜 정도에 이르게 되었을 때 ‘무명, 갈애, 업, 음식, 접촉, 물질과 정진 등이 없으면 다섯 무더기가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을 저절로 숙고하여 알기도 한다.”(552-553쪽)
8.
“세 번째 도(아나함도)에 의해 미세한 감각욕망 애착을 포함한 모든 감각욕망에 대 한 갈애가 생겨날 수 없게 된다. 네 번째 도(아라한도)에 의해 색계의 삶, 무색계의 삶을 애착하고 바라는 갈애가 생겨날 수 없게 된다. 비유하자면 가난한 이의 상태에서 거부장자나 왕이 된 이가 농사 짓 고 가난한 이로서의 삶을 다시 애착하거나 바라지 않게 되는 것과 같다.”(560쪽)
9.
“바로 그 도의 순간에 이 ‘제거 통찰’이 성취되기 때문에 수다원 등의 성자들이 다시 돌이켜 반조해 보았을 때 물질과 정신에 대한 애착, 바람인 갈애를 ‘괴로움이 생겨나게 하는 원인의 법’이라고 알게 된다. 범부 등과 같이 ‘행복한 것,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담배를 확실하게 끊은 이는 담배 피려고 하는 것과 담배 피는 것을 ‘좋다’라고 이전처럼 생각하지 않고 ‘일을 많게 하고 고통을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라고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이 생겨남의 진리를 아는 모습이다.”(560-561쪽)
10.
“ ‘형성들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난다’라고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전 생에서 있었던 갈애 때문에 지금 현재 삶에서 업의 결과들인 물질과 정신들의 연속이 생겨난다.”(583쪽)
11.
‘이전 생에 있었던 그 생겨남의 진리(갈애) 는 직접 관찰 위빳사나로는 알 수 없다. 지혜가 성숙되었을 때 지금 현재 생겨나는 갈애를 직접관찰 위빳사나로 새겨 알고 나서 추론관찰 위빳사나로만 과거의 갈애를 관찰 할 수 있다.”(584쪽)
12.
“사띠와 결합한 마 음, 마음부수, 대상인 물질과 정신, 토대인 물질, 이러한 법들도 위빠사나 지혜, 도의 지혜로 분명히 알 수 있는 괴로움의 진리라고 알아야 한 다.”(588쪽)
13.
“이상 새김확립 긴 경(대념처경)에서 실한 21가지 수 행주제 중 어느 한 가지 방법에 따라 노력하는 이에게 네 가지 진리 수행주제가 생겨나 아라한과에까지 이르는 모습을 주석서에 따라 간략하게 설명했다.”(589쪽)
2023-07-2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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