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법문을 하면 천신도 듣는다고 하는데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1. 2. 11:18

법문을 하면 천신도 듣는다고 하는데

 

 

생겨남은 괴로움이다.” 오늘 아침 좌선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번뇌망상이 생겨났을 때를 말한다. 다시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자 번뇌망상은 사라졌다. 이럴 때 고요와 평온이 찾아 왔다. 이때 고요와 평온은 행복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시간 좌선은 길다. 하루 24시간 중에 온전히 한시간 앉아 있는다는 것은 큰 투자이다. 시간이 돈인 세상에서 한시간은 금전적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이다.

 

 

재가 우안거가 끝난지 사흘이 지났다. 안거가 끝났어도 한시간 좌선은 계속된다. 안거 기간 중에 느꼈던 긴장감은 덜하다. 그래서일까 주관찰대상인 배의 부품과 꺼짐에 가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순간적으로 밝음이 있다. 이럴 때 밝음에 마음이 가 있으면 세상이 훤한 것 같다. 마치 어둠 속에서 불이 켜진 것 같다. 이럴 때는 잘 보인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도 잘 보인다.

 

어떤 이는 번뇌망상도 법이라고 한다. 그래서 알아차려야 할 대상으로 본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수행전통에서는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지 말라고 한다. 물론 호흡도 보지 말라고 한다. 육단계 행선도 하지 말라고 한다. 오로지 마음만 보라는 것이다. 이른바 심념처 수행을 말한다.

 

유튜브에서 심념처 수행에 대한 법문을 볼 수 있다. 스님은 싸띠를 강조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싸띠에 대한 이야기밖에 없다. 대체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 집중해서 들어 본다. 그러나 알 수 없다. 대체 뭔 얘기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법사는 이렇게 말한다. “깨달아봐야 깨달음을 알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이런 법문은 듣는 이로 하여금 열등감만 조장하게 한다. 좌절만 안겨 준다. 깨닫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법문은 들을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싸띠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의 법문도 그렀다. 마치 싸띠를 해 보아야 싸띠를 알 수 있지.”라고 말하는 것 같다.

 

깨달음은 무엇일까? 깨달음은 깨달아 봐야 알 수 있는 것일까? 불교에 대하여 안다고 말하는 이들은 깨달음은 깨달아 봐야 알 수 있다.”라는 식으로 말한다. 마치 나는 깨달은 자이고 너는 깨닫지 못한 자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너희들은 깨닫지 못한 자들이다. 어찌 깨달음에 대하여 알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는 것 같다.

 

부처님은 깨달음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초기경전, 즉 니까야를 보면 부처님은 도처에서 깨달음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비유로 말씀하셨다.

 

본래 진리라는 것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진리는 언어를 떠난 것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언어를 떠난 체험이고 경험이기 때문에 언어로 설명한다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비유로서 설명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열반에 대하여 안전하기가 섬과 같고, 안온하기가 동굴과도 같다는 식으로 비유적으로 설명했다.

 

깨달음에 대하여 알려거든 깨달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하는 것도 깨달음이 어떤 것인지 알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경서를 보고 논서를 보고 수행지침서를 보는 것도 깨달음이 어떤 것인지 알고자 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탐, , 치가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모든 번뇌가 사라졌을 때 깨달음은 완성된다. 이는 더 이상 배울 것도 없고 더 이상 닦을 것도 없는 무학도, 아라한의 경지를 말한다.

 

깨달음에는 단계가 있다. 맛지마니까야 70번 경에 따르면 낮은 단계에서부터 보면, 1)믿음을 따르는 자(saddhānusārīn), 2)가르침을 따르는 자(dhammānusārīn), 3)믿음으로 해탈한 자(saddhāvimutta), 4)견해를 성취한 자(diṭṭhappatta), 5)몸으로 깨우친 자(kāyasakkhīn), 6)지혜로 해탈한 자(paññāvimutta), 7)양면으로 해탈한 자(ubhatobhāgavimutta)가 있다. 이것이 깨달음의 단계이다.

 

사향사과도 깨달음의 단계에 해당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는 수다원 단계에서부터 수행의 단계라고 볼 수 있는 수다원과 아나함의 단계, 그리고 수행의 완성에 해당되는 무학도의 아라한의 단계가 있다.

 

깨달음은 믿음을 따르는 자(saddhānusārīn)’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여기 어떤 참사람이 형상을 뛰어넘고 물질에서 벗어나 고요한 해탈을 자신의 몸으로 체험하지 못하였고 또한 지혜로써 보아 모든 번뇌를 아직 부수지 못했으나, 여래에 대한 믿음이 있는 만큼 그리고 사랑이 있는 만큼 또한 나아가서 믿음의 능력, 정진의 능력, 새김의 능력, 집중의 능력, 지혜의 능력과 같은 법들을 갖추었다면, 수행승들이여, 이 참사람을 믿음을 따르는 자라고 부른다.”(M70)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믿음을 따르는 자는 부처님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다. 부처님에 대한 믿음만 가졌다고 믿음을 따르는 자는 아니다. 오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의 능력, 정진의 능력, 새김의 능력, 집중의 능력, 지혜의 능력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깨닫기 위한 조건을 갖추는 것이다.

 

다음 단계는 가르침을 따르는 자(dhammānusārīn)’이다. 부처님에 대한 믿음은 자연스럽게 가르침에 대한 믿음으로 전개될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듣거나 접하면 알 수 있다. 요즘 같은 시기는 경전을 통해서 접한다.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수행승들이여,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란 어떠한 자인가? 수행승들이여, 여기 어떤 참사람이 형상을 뛰어넘고 물질에서 벗어나 고요한 해탈을 자신의 몸으로 체험하지 못하였고 또한 지혜로써 보아 번뇌의 일부를 아직 부수지 못하였으나, 여래가 선언한 가르침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또 나아가서 믿음의 능력, 정진의 능력, 새김의 능력, 집중의 능력, 지혜의 능력과 같은 법들을 갖추었다면, 수행승들이여, 이 참사람을 가르침을 따르는 자라고 부른다.”(M70)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가르침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자를 말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르침을 새겨야 할 것이다. 경전을 보는 이유에 해당된다.

 

나는 깨달음에 있어서 어느 단계에 해당될까? 일곱 가지 단계에서 1번 믿음을 따르는 자와 2번 가르침을 따르는 자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상 단계는 현재로서는 언감생심이다.

 

일곱 가지 단계에서 네 번째 견해를 성취한 자(diṭṭhappatta)’의 단계가 있다. 어떤 견해를 말하는 것일까?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견해를 성취한 사람이란 어떠한 자인가? 수행승들이여, 여기 어떤 참사람이 형상을 뛰어넘고 물질에서 벗어나 고요한 해탈을 자신의 몸으로 체험하지 못하였으나 지혜로써 보아 번뇌의 일부를 부수고 또한 그에게 여래의 가르침이 잘 이해되고 잘 관통되면, 수행승들이여, 이 참사람을 견해를 성취한 자라고 부른다.”(M70)라고 했다.

 

견해라 하여 견청정을 의미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주석을 보면 사성제를 통찰한 사람에 해당된다. 인시설론에 따르면,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깨닫고 여래가 선언한 가르침을 지혜로써 사유하고 숙고하는 자를 말한다.”(Pug.74)라고 설명되어 있다.

 

좌선을 하다 보면 온갖 번뇌망상이 일어난다. 대개 새김(사띠)를 놓쳤을 때 일어난다. 그러나 새김이 있는 상태에서 일어난 생각은 지혜에 가깝다. 경전에서 보았단 것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머리맡에 상윳따니까야가 있다. 머리맡에 있기 때문에 손만 뻗으면 읽을 수 있다. 스탠드 등을 켜고 돋보기 안경을 착용하고 노랑색 형광메모리펜을 들고서 읽는다.

 

상윳따니까야를 읽다고 새기고 싶은 구절을 발견했다. 노랑형광색도 부족해서 분홍형광색 펜으로도 칠해 둔다. 주석까지 빠짐없이 읽는다.

 

어제는 찬나의 경’(S22.90)을 읽었다. 부처님의 마부출신 수행승을 말한다. 부처님 사후 브라흐마단다(범벌)라는 엄벌에 처해진 수행자를 말한다. 그것은 찬나의 자만과 관련된 것이다.

 

찬나는 부처님의 유성출가를 도왔다. 그로 인해 자부심이 대단했다. 심지어 부처님의 두 상수제자도 무시하기에 이르렀다. 부처님은 찬나의 이런 자만을 꺽어 주기 위해서 아무도 찬나에게 말 걸지 않도록 엄벌을 내린 것이다.

 

찬나는 출가한지 오래 되었지만 성자의 흐름에 들지 못했다. 부처님 사후 외톨이가 된 찬나는 더 나이 먹기 전에 깨달음을 얻고자 했다. 그래서 장로 수행승들을 찾아 다니며 법을 설해달라고 간청했다.

 

장로수행승들은 찬나를 가엽게 여겨 부처님 가르침을 알려 주었다. 그런데 다 알려 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것이다. “벗이여, 찬나여, 물질도 무상하고 느낌도 무상하고 지각도 무상하고 형성도 무상하고 의식도 무상하다. 물질도 실체가 없고 느낌도 실체가 없고 지각도 실체가 없고 형성도 실체가 없고 의식도 실체가 없다.”(S22.90)라고 알려 준 것이다.

 

장로수행승들은 찬나에게 일체개고만 빼고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에 대한 것만 알려 주었다. 왜 그랬을까?

 

경전에 각주가 있다. 각주에서는 주석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붓다고사에 따르면 먼저 모든 수백승들이 그를 가르치면서 왜 무상의 특징과 무아의 특징만을 말하고 괴로움의 특징은 말하지 않았는가?”(Srp.II.318)라고 묻는다. 그리고서는 왜냐하면 괴로움의 특징이 시설되면 이와 같이 이 수행승은 물질도 괴롭고 의식도 괴롭고 길()도 괴롭고 경지()도 괴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Srp.II.318)라고 설명했다.

 

찬나에게 일체개고를 빼고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만 알려 준 이유가 있었다. 공부를 하지 않은 찬나가 가르침을 잘못 이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찬나에게 일체가 괴로운 것이다.”라고 알려 주었을 때 찬나는 도와 과도 괴로운 것으로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체개고라 하여 도와 과도 괴로운 것이라면 깨달음을 추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장로수행승들은 찬나에게 눈높이 가르침을 알려 준 것이다.

 

찬나는 장로수행승들로부터 제행무상과 제법무아 가르침을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법무아가 이해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찬나는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 준다고 믿는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벗이여, 그러자 내게나도 역시 이처럼물질도 무상하고 느낌도 무상하고 지각도 무상하고 형성도 무상하고 의식도 무상하다. 물질도 실체가 없고 느낌도 실체가 없고 지각도 실체가 없고 형성도 실 체가 없고 의식도 실체가 없다.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고 모든 사실은 실체가 없다.’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의 마음은 모든 형성 의 멈춤, 모든 집착의 버림. 갈애의 파괴, 사라짐, 소멸, 열반에 뛰어 들지 못하고, 확신하지 못하고 안주하지 못하고 결정하지 못하고, 대신에 동요와 집착이 생겨나 나의 마음이 퇴전하여그렇다면 나의 자아는 누구인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리를 보는 자에게는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진리를 볼 수 있도록 누가 내게 가르침을 베풀 것인가?’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S22.90)

 

 

찬나는 제법무아에 대하여 의문했다. 어떤 것도 자아가 아니라는 것에 대하여 의문한 것이다. 그래서 그렇다면 나의 자아는 누구인가?”라고 생각한 것이다.

 

부처님은 모든 형성된 것에는 실체가 없다고 했다. 이를 아낫따(anatta)라고 한다. 한자어로는 무아(無我)라고 한다.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나가 없다면 나는 무엇일까? 누구나 이런 의문을 갖는다. 그래서 어떤 이는 비아(非我)라는 표현을 한다. 이는 내가 아니다라는 뜻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나는 없다라거나, ‘나는 아니다라는 말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찬나도 그랬다. 이렇게 무아의 개념조차 모르는 사람에게 일체가 괴롭다고 했을 때 아마 책상도 괴롭다거나, 심지어 도와 과도 괴롭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이를 간파한 아난다 존자는 찬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벗이여 찬나여, 나는 세존에서 직접 수행승 깟짜야나를 가르치는 것을 들었습니다. ‘깟짜야나여,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존재 또는 비존재 두 가지에 의존한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갓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도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접근, 집착, 주작을 통해 구속되어 있지만, 그는 접근, 집착, 그리고 마음의 독단 주착, 경향에 접근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나의 자아라는 독단을 취하지 않으며, ‘일어나는 것은 오로지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라지는 것은 오로지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이다.’라고 의심하지 않고 의혹하지 않는다. 여기에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그의 지혜가 있다. 맛짜 아니여, 이러한 점에서 그는 올바른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이다.”(S22.90)

 

 

아난다 존자는 깟짜야나곳따의 경을 인용하여 찬나에게 무아를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무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일체개고에 대한 것도 동시에 설명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일어나는 것은 오로지 괴로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라지는 것은 오로지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이다.”(S12.15)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오늘 좌선 중에 생겨나는 것은 괴로움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즐거운 것도 괴로운 것이라고 본다. 일시적 행복감에 지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일체개고이다. 그렇다고 책상도 괴롭고 도와 과도 괴로운 것은 아니다. 오온에서 형성된 것이 일체 괴로운 것임을 말한다.

 

좌선을 언제까지 해야 할까? 특별한 일 없으면 아침에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번뇌망상에 지배 받을 때는 그만 두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는 악마의 달콤한 유혹에 지나지 않는다.

 

마침내 한시간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오늘도 해낸 것이다. 비록 한시간 명상으로 얻는 것은 없지만 이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깨달음의 그날이 올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빤냐와로 스님아 마하수카 개원식에서 말한 것이다. 빤냐와로 스님은 마하수카 선원장 떼짓사라 스님에게 비록 한두명 앉아 있어도 여법하게 설법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태국에서 들은 법문을 들려 주었다.

 

태국에서는 법당에 법문들으러 온 사람이 없어도 법문한다고 말한다. 사람이 듣지 않아도 천신이 듣는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강한 충격을 받았다.

 

어떤 법사는 참석자를 따진다. 자신이 법문 하는데 최소한 몇 십 명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작 몇 명 앉아 있을 때 이루 말할 수 없이 실망이 클 것이다.

 

김도이 선생으로부터 위빠사나 지도 받은 적이 있다. 법문과 수행 지도한 것을 말한다. 코로나 이전의 일이다. 그때 선생은 단 한사람이 앉아 있어도 지도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 감명 받았다.

 

법사는 사람이 많으면 힘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몇 사람 앉아 있지 않아도 듣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이다. 천신들이 듣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사람 앉아 있어도 여법하게 법문 할 수 있는 것이다.

 

매일 한시간 앉아 있기로 했다. 너무 긴 것 같아 30분으로 줄이고자 했으나 그만 두었다.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이 나만 앉아 있는 것이 아님으로 보기 때문이다.

 

법문을 하면 천신도 듣는다고 한다. 수행자가 여법하게 수행하면 천신은 잘한다, 잘한다라며 응원할 지 모른다. 수행자가 방일하면 에이하며 실망할지 모른다. 나 혼자만 사는 세상이 아니다. 천신도 보고 있을 것이다.

 

 

2023-11-0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