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수다원인지 아는 방법이 있는데
두 가지 죽음이 있다. 어떤 이는 “그 사람 참 아깝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그 놈 참 잘 죽었다.”라고 말한다.
아까운 죽음이 있다. 오래 살아서 이 사회와 이 세상에 기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한창 일할 나이에 요절한다든가 사고로 인하여 사망했을 때 사람들은 아쉬워하고 애도 한다.
저주하는 죽음도 있다. 이 사회와 세상을 어지럽힌 자를 말한다. 그 사람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았을 때 하루빨리 사라지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속시원하게 생각한다.
며칠전 아까운 죽음이 있었다. 김성철 선생이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사인은 심장마비라고 한다. 운동하다 쓰러져서 사망에 이르렀다고 한다.
에스엔에스에서는 김성철 선생의 부고 소식에 안타까워한다. 선생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인연을 이야기한다.
김성철 선생을 처음 본 것은 2015년의 일이다. 그때 당시 이학종 선생 처가 부모 중의 한사람 상이 있었는데 거기서 본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서 아는 척 했다. 김성철 선생은 필명 ‘진흙속의연꽃’ 존재를 알고 있었다.
김성철 선생은 오래 전에 알고 있었다. 2005년 블로그를 만들어 불교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질 때를 말한다. 그 때 불교TV에서 김성철 선생의 불교강좌가 있었는데 40편 가까이 되는 영상을 모두 다 보았다. 영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김성철 선생과 명함을 교환했다. 이렇게 한번 인사를 나누게 되자 팬이 되었다. 김성철 선생의 영상 강연을 찾아서 들었다. 특히 중관학에 대한 강연을 이 사이트 저 사이트에서 찾아서 들었다.
김성철 선생은 말이 빠르다. 일반사람의 두 배 정도 빠른 것 같다. 그 만큼 아는 것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만큼 알려 줄 것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김성철 선생의 중관학 강연을 듣고 수많은 글을 남겼다. 블로그 검색창에서 ‘김성철’을 키워드로 검색하니 26개의 글이 나온다. 그 중에 가장 인상적인 강연이 있다. 이를 ‘중론(中論)은 사상체계가 아니라 테크닉, 책장을 덮으면 잊어 버려야 할 것’(2016-01-25)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다.
흔히 중관학에 대하여 어려운 것이라고 말한다. 중론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는 공사상이 있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와 그다지 친하지 않다. 그것은 공사상 때문이다. 공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오리무중에 빠지는 것 같다. 공, 공, 공 했을 때 혼란스러웠다.
김성철 선생은 공사상에 대하여 명쾌하게 정리했다. 영상을 보고 녹취해서 글을썼는데 다음과 같은 말이 인상에 남았다.
“중관논리, 공의 논리는 사상이 아니고 테크닉입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게 구사나 유식 같은 이런 교리는 다 사상이죠. 내용이 있죠. 세계관이 있고, 체계가 있는데 중관사상은 내용이 없습니다. 다만 부수어 버리는 방법만 알려줄 뿐이지 테크닉이기 때문에 테크닉에서 나온 결론들을 인생관으로 삼고 세계관으로 삼을 경우에는 어떻게 되냐하면 결론은 퇴보를 하게 됩니다.”
(김성철교수, 중론11강, 3:23)
김성철 선생은 중론 강연에서 중관은 테크닉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말을 듣자 속이 시원했다.
중론, 중관, 공이라는 말에 주눅들어 있었다. 이런 공부를 꼭 해야 하는지 의문도 들었다. 그런데 김성철 선생은 중론을 듣자 자신감이 생겼다.
김성철 선생은 중론을 자신의 사상체계로 삼으면 큰 일 날 수 있다고 말했다. 공병 들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책장 덮은 다음에는 잊어버려야 해요”라고 말했는데 이 말에 무척 공감했다.
김성철 선생이 불교학회장 할 때의 일이다. 김성철 선생 홈페이지에서 학술대회를 알리는 소식을 보았다. 금산사에서 열린 학술대회였다. 동국대 정각원 앞에서 전세버스가 출발했다. 이에 대하여 ‘민중들의 애환과 희망을, 금산사 미륵대불 스토리’ (2018-10-21)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다.
버스에 탄 사람들에게 이미우이 음악씨디를 한장씩 선물로 주었다. 김성철 선생은 운전기사에게 양해를 구해서 씨디를 틀어 주었다. 그리고 자비송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불교계에서 누적조회수가 가장 많은 파워블로거라고 소개시켜 주었다.
김성철 선생의 죽음은 아깝다. 요즘 백세 시대이다. 부고장을 받으면 구십대인 경우가 많다. 이처럼 백세시대에 칠십대에 죽으면 아깝다고 말한다. 하물며 육십대의 죽음은 어떠할까?
예경지송에 죽음명상 게송이 있다. 다섯 게송 중에서 가장 첫 번째 게송을 보면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라는 내용이 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이 살면 백세까지 살 수 있다. 백세는 긴 수명이다. 그러나 백세가 되면 지난날이 꿈만 같을 것이다. 금방 백세가 되어 버린 듯한 느낌이 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래 사는 것이나 짧게 사는 것이나 큰 차이가 없게 된다.
사람들은 젊어서 죽은 사람들을 애처로워 한다. 나이가 들어 살만큼 살다가 죽은 사람을 보면 잘 살다 죽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젊은 나이에 죽은 사람들을 오래 기억한다. 역사의 흐름을 바꾼 사람들은 대개 젊은 나이에 죽은 사람들이다. 그래서일까 항상 젊은 이미지이다. 그러나 나이 들어 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요즘은 웰다잉시대이다. 한때 웰비잉이라는 말이 회자 되었으나 고령화 시대를 맞이하여 이제“어떻게 하면 잘 죽을 것인가?”가 화두가 되었다.
사람의 목숨은 정해지지 않아서 알 수 없다. 오늘 죽을 수도 있다. 오늘이 최후의 날이라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떤 이는 백세시대를 말한다. 아직도 살 날이 수십년 남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도 나의 안전을 지켜 주지 않는다. 백세까지 산다는 보장이 없다. 백세까지 살지는 살아 보아야 알 수 있다.
인간의 백년은 천상에서 반나절 밖에 안된다. 잠시 마실 다녀 온 세월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즐기며 살아간다.
오늘 죽음이 덮칠지 모른다. 오늘이 최후의 날이 되었을 때 나는 미소 지으며 죽을 수 있을까?
사람이 죽으면 업식(業識)에 의해서 다시 태어난다. 그것도 틈이 없이 곧바로 태어난다.
마지막 죽음의식이 일어날 때 업,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을 대상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난다. 그런데 무간(無間)이라는 것이다. 이는 중간 단계가 없이 곧바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사생 중의 하나로, 그리고 육도 중의 하나의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잘 죽고 잘 태어날 수 있을까? 그것은 공덕으로 결정된다.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에 따라 내세가 결정되는 것이다.
흔히 보시하고 지계하면 천상에 태어난다고 말한다. 그러나 보장 되는 것은 아니다. 가능성이 높은 것일 뿐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아무리 보시를 많이 하고 지계하는 삶을 살았어도 악처에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악처에 태어나지 않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성자의 흐름에 들어갔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는 ‘법의 거울(dhammadasa)’에 비추어 보면 된다.
어느 날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에게 사람이 죽으면 어디에 태어났는지 물었다. 그때 마다 부처님은 어느 세계에 태어났는지 알려 주었다. 그러나 매번 알려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기준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담마다사, 즉 법의 거울이다.
법의 거울에 비추어 보면 자신이 어디에 태어날 지 알 수 있다. 자신의 삶을 법의 거울에 비추어 보았을 때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기준인가?
법의 거울에는 네 가지 판단 기준이 있다. 그것은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심 세 가지가 있다. 또 한가지는 청정한 계행이다. 이 네 가지는 거울로 보듯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법의 거울이라고 하는 것이다.
거울을 보면 액면 그대로 드러난다. 거울에 드러난 얼굴은 숨길 수 없다. 법의 거울에 자신의 신심과 계행을 비추어 보면 액면 그대로 드러난다.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과 계행을 갖추었다면 성자의 흐름에 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법의 거울에 비추어 보면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있다. 네 가지 원리를 갖춘 자는 다음과 같이 스스로 선언한다고 했다.
“지옥도 부서졌고 축생도 부서졌고 아귀도 부서졌고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도 부서졌고 나는 이제 흐름에 든 님이 되어 더 이상 타락하지 않고 삶의 길이 정초되어 올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간다.”(S55.8)
네 가지 원리, 즉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과 계행을 갖춘 자는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는 성자의 흐름에 들었기 때문이다.
성자의 흐름에 든 자는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가르침에 대한 의심이 있을 수 없다. 또한 잘못된 계율이나 수행방법에 빠지지 않는다. 오로지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하여 실천한다. 그 결과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간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는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갔는지도 자신이 잘 알고 있다. 네 가지 원리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법의 거울에 비추어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을 예지할 수 있는 진리의 거울”(S55.8)이라고 했다.
성자의 흐름에 든 자는 사악처에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보시를 많이 하고 아무리 계행을 잘 지켜도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이 없다면 사악처에 떨어질 수 있다. 그래서 네 가지 원리를 갖춘 자는 마치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있다.
흔히 어떤 이는 죽는 것이 대수냐는 식으로 말한다. 죽음은 대수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아난다가 죽은 자의 태어날 곳에 대하여 물어 보자 “아난다여, 인간으로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S55.8)라고 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떤 존재로든지 다시 태어난다. 번뇌 다한 아라한만이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한번 악처로 떨어지면 인간세상에 오기 힘들다는 것이다.
인간 이상 세계에 태어나려거든 어떻게 해야 할까? 보시하고 지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수행을 해야 한다. 수행을 해서 성자의 흐름에 들면, 즉 수다원이 되면 확실화게 사악처는 면하는 것이 된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길게 오래 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오래 살면 살수록 악업만 늘어난다면 내세 비참한 운명이 되기 쉽다.
사람들은 오래 살고자 한다. 그것도 건강하게 오래 살고자 한다. 그렇다고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산다면 악처는 면할 수 없다.
오래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오래 살수록 공덕 있는 삶이 되기 때문이다. 보시공덕과 지계공덕만으로는 부족하다. 악처에 태어나지 않으려면 수행을 해야 한다. 보시공덕, 지계공덕과 함께 수행공덕을 쌓아야 한다. 그것도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야 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수다원이 되면 사악처는 면제 된다. 최소한 인간 이상의 세계에 태어난다. 그런데 자신이 수다원인지 아닌지 아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담마다사, 법의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것이다. 네 가지 원리, 즉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과 청정한 계행이 있다면 사악처는 면한 것이 된다. 지금 죽어도 좋은 것이다.
2023-11-2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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