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진정으로 홀로 지내는 자는?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2. 22. 10:32

진정으로 홀로 지내는 자는?
 
 
백권당의 아침이다. 커피를 마시고 있다. 그리고 하얀 여백을 대하고 있다. 오늘도 힘차게 달리는 거다.
 
오늘 아침 일터로 나오는 길에 무장을 단단히 했다. 영하 13도가 어떤 추위라는 것은 알고 있다. 가장 취약한 부분은 귀와 손이다.
 
귀를 막기 위해서 목티를 둘러 썼다. 머리와 귀가 보호된다. 목이 노출되기 때문에 목도리를 했다. 마스크는 필수품이다. 장갑도 역시 필수품이다.
 
두툼한 외투를 입었다. 내것이 아니다. 아들 것이다. 아들 옷은 수없이 많다. 남아 돌아서 내가 입고 있다. 요즘 젊은 사람들 사치가 심한 것 같다.
 
외투입고 외투모자를 썼다. 눈만 나오는 모습이다. 밖에 나서니 하나도 춥지 않다. 일터까지 1.3키로거리를 20여분 걸어가야 한다. 사시사철 늘 다니는 길이다.
 

 
세상은 꽁꽁 얼었다. 이제 안양천도 얼기 시작했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 오른쪽 장갑을 벗었는데 손가락이 아리도록 추웠다.
 

 
겨울은 겨울다워야 한다. 겨울에 영상의 날씨가 계속 된다면 맛이 나지 않는다. 영하의 날씨에 바람까지 쌩쌩 불면 극한에 이르는 것 같다.
 
전천후 수행자가 되고자
 
오늘은 동짓날이다. 절에서는 동지팥죽 행사를 할 것이다. 올해 겨울 들어서 가장 추운 날씨에 밤은 가장 긴 동짓날이다. 극한에 극한이 겹쳐서 초극한이 된 날이다.
 
비온다고 전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춥다고 전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게으른 자는 아직도 이불 속에 있을 것이다.
 
 
“너무 춥다고 일을 하지 않고,
너무 덥다고 일을 하지 않고,
너무 이르다고 일을 하지 않고,
너무 늦다고 일을 하지 않고,
너무 배고프다고 일을 하지 않고,
너무 배부르다고 일을 하지 않습니다.”(D31.12)
 
 
부처님이 장자의 아들에게 훈계하는 말이다. 게으름에 빠지는 것에 대한 훈계를 말한다,
 
게으른 자에게는 핑계가 많다. 그 중에 하나는 날씨 탓이다. 추우면 춥다고 일을 하지 않고 더우면 덥다고 일을 하지 않는다. 당연히 비가 오면 비 온다고 일을 하지 않을 것이고, 눈이 온다면 눈 온다고 일 하지 않을 것이다.
 

 
전천후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추우나 더우나 한결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늘만 바라 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오늘은 몹시 추운 날이다.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것은 평소와 다름 없는 일을 하기 위함이다. 추우면 껴입으면 된다. 무장을 단단히 하면 추위를 이겨 낼 수 있다. 전천후 수행자가 되고자 한다.
 
쌍윳따니까야를 읽다가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다. 매일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 있다. 매일 의무적으로 한 개 이상 글을 써야 한다. 매일 의무적으로 한시간 좌선을 해야 한다. 매일 의무적으로 경전과 논서를 읽어야 한다. 여기에 하나가 더 추가 되었다. 매일 의무적으로 빠알리어 문법공부를 해야 한다.
 
오늘 새벽에 쌍윳따니까야를 읽었다. 현재 쌀라야따나쌍윳따(S35)를 읽고 있다. 육처에 대한 것이다.
 
오늘 진도를 많이 나갔다. 그것은 반복구문이 있기 때문이다. 한 문장에 대하여 여섯 번 반복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반복구문은 다 읽지 않고 넘어 간다. 그러다 보니 진도가 잘 나가는 것이다.
 
반복구문은 생략해서 읽는다. 이런 생략에 대하여 뻬이얄라(peyyāla)라고 한다. 중략이라고 한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본에서는 중략하지 않고 모두 살려 놓았다. 반면에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에서는 중략 처리해놓았다. 어느 방식이 더 나은지 알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모두 살려 두는 것이 나을 듯 하다. 왜 그런가? 반복해서 읽다 보면 의미를 더 잘 새길 수 있기 때문이다.
 
초기경전은 반복구문이 많다. 이는 법수대로 반복하기 때문이다. 육처에 대한 것은 여섯 번 반복된다. 이렇게 반복구문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그것은 매우 중요한 가르침이기 때문일 것이다. 꼭 전달해야 할 가르침으로 본다. 마치 어른이 훈계할 때 했던 얘기 또 하는 것과 같다.
 
오늘 새벽 니까야를 읽다가 새겨 두고 싶은 구절을 발견했다.  그것은 홀로 지내는 자에 대한 것이다.
 
 
미가잘라 존자가 부처님에 물었다. 미가잘라는 “세존이시여, ‘홀로 지내는 자, 홀로 지내는 자’라고 하는데, 어떻게 지내면 홀로 지내는 자입니까?”(S35.63)라며 질문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미가잘라여, 원하고 즐겁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자극하고 애착의 대상이 되는, 시각으로 인식되는 형상들이 있는데, 수행승이 그것들을 환희하고 환호하고 탐착한다. 그것들에 대한 환희가 있고 환호가 있고 탐착이 있다면, 그에게 환락이 생겨나고, 환락이 생겨나면 애착이 생겨나고, 애착이 생겨나면 결박이 생겨난다. 미가잘라여, 그 환락의 결박에 묶인 수행승은 함께 지내는 자라고 한다.”(S35.63)
 
 
여섯 가지 감역 중에서 시각에 대한 것이다. 나머지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에 대한 것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래서 청각부터 점점점(…) 처리한다. 반야심경에 ‘역부여시’와 같은 것이다. 이것이 뻬이얄라, 즉 중략처리는 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보는 것을 즐긴다면 애착이 생겨난다고 했다. 그런데 그 애착은 마치 친구와도 같다는 것이다. 혼자 있지만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것은 즐길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저마다 낙(樂)이 있는데
 
사람들은 저마다 즐길거리(樂)가 있다. 부자에게는 부자의 즐길거리가 있고 가난한 자에게는 가난한 자의 즐길거리가 있다.
 
부자는 예산에 있어서 한계가 없기 때문에 해외여행이나 최상의 오락을 즐길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예산에 있어서 한계가 있기 때문에 TV나 유튜브 보는 것을 즐길 것이다.
 
어른은 어른의 즐길거리가 있고 아이는 아이의 즐길거리가 있다. 어른은 자동차를 몰고 드라이브하는 것을 즐기지만 아이는 흙놀이 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이 세상 사람들은 저마다 즐길거리가 있다. 즐길거리가 없으면 즐길거리를 찾아나선다. 심심한 것을 참지 못한다. 권태를 견디지 못한다. 이렇게 즐길 거리를 찾는 것에 대하여 초전법륜경 집성제에서는 “따뜨라 따뜨라비난디니(tatra tatrābhinandinī)”(S56.11)라고 했다. 즐길거리를 찾아“여기저기에서 환희”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외롭다고 한다. 혼자 있는 것을 견디어 내지 못한다. 수행자도 다르지않을 것이다. 그런데 홀로 있어도 홀로 있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 환락의 결박에 묶인 수행승은 함께 지내는 자라고 한다.”(S35.63)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갈애와 함께 지내는 자
 
혼자 살아도 잘 사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나름대로 즐길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즐길거리가 없으면 찾아 나선다. 수행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미가잘라여, 이와 같이 지내는 수행승은 어떠한 자이든, 한적하고 숲속이고 외딴 숙소를 찾아 소음이 적고 소란하지 않고 법석대지 않고 인적이 드문 곳에서 홀로 명상을 즐기며 지내더라도 그는 ‘함께 지내는 자’라고 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가 떠나지 못한 갈애가 그의 벗이기 때문에 ‘함께 지내는 자’라고 한다.”(S35.63)
 
 
부처님 가르침은 참으로 위대하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을 알게 해준다. 경전을 읽지 않으면 알기 힘든 가르침이다. 이런 가르침을 접했을 때 새겨 두고자 한다. 그리고 이렇게 글로 표현해서 공유하고자 한다.
 
출가자는 세상과 인연을 끊은 사람이다. 세상과 인연을 끊고 거듭나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출가 이전과 이후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간다. 먼저 겉모습부터 다르다. 머리를 깍고 승복을 입은 것이 다르다. 그리고 대부분 홀로 살아간다.
 
출가수행자는 홀로 열심히 정진한다. 홀로 숲속에서 살면서 명상을 한다. 그런데 명상도 명상 나름이다. 명상을 즐기기 위한 것으로 본다면 갈애와 함께 하는 것이 된다. 갈애를 친구로 삼아 지내기 때문에 홀로 지내는 것이 아닌 것이 된다. 그래서 ‘갈애와 함께 지내는 자’라고 했다.
 
자아에 기반하는 한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명상은 즐기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명상을 즐긴다면 갈애 때문으로 본다. 마치 감각적 욕망을 즐기듯이 명상을 즐기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현법론자들은 명상도 즐기는 대상이 된다. 마치 시각이나 청각으로 감각을 즐기듯이 명상도 즐기는 것이다. 이는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D1)에서도 확인 된다.
 
현법열반론은 유사열반을 말한다. 가짜열반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술을 마신 자가 취한 상태를 열반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현법열번론자들은 선정에서 즐거움에 대하여 “벗이여, 이러한 한, 그 자아는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에 도달한 것이다.”(D1.91)라고 말하는 것이다.
 
현법열반론은 자아에 기반한다. 선정에서 즐거움도 자아에 기반한 것이다. 자아를 기반으로 하여 즐거움을 향유하는 한 현법열반론자가 되기 쉽다.
 
출가수행자가 외딴 곳 오두막집에서 수행하고 있다. 그는 명상에 들어 최상의 즐거움을 누린다. 그런데 그 명상이 자아에 기반한 것이라면 현법열반이 되기 쉽다. 자아에 기반한 즐거움은 어떤 경우에서든지 갈애가 수반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홀로 지내는 자는?
 
홀로 사는 사람이 잘 사는 것은 나름대로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TV를 보고나 유튜브를 보면 심심하지 않다. 그래도 심심하면 혼자 술이라도 마실 것이다. 그래도 심심하면 게임이라도 할 것이다.
 
그가 혼자 산다고 하더라도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즐길거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한 갈애가 그의 친구가 된다. 그런데 정말 혼자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여러 사람들 가운데 혼자 사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인가? 다음과 같은 부처님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미가잘라여, 이와 같이 지내는 수행승은 어떠한 자이든 수행승, 수행녀, 청신사, 청신녀, 국왕, 대신, 이교도, 이교도의 제자들이 모여 있는 어떠한 마을에서 지내더라도 그는 ‘홀로 지내는 자’라고 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갈애가 그의 벗이었는데 그가 그것을 끊었기 때문에 ‘홀로 지내는 자’라고 한다.”(S36.63)
 
 
진정으로 홀로 사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여러 사람들 속에서 살아도 홀로 사는 사람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갈애가 그의 벗이었는데 그가 그것을 끊었기 때문에 ‘홀로 지내는 자’”라고 했다. 갈애를 끊은 자는 진정으로 홀로 사는 자이다.
 
재생을 불러 오는 갈애
 
요즘 홀로 사는 사람들이 많다. 원룸이 늘어나는 것도 홀로 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홀로 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혼기를 놓쳐서 홀로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혼으로 홀로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직장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홀로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 노년이 되었을 때 배우자가 사망했을 때 홀로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출가하여 수행자로서 홀로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홀로 살면 외로울 것 같다. 외로움, 심심함, 권태를 견디지 못하여 즐길거리를 찾게 될 것이다. TV, 유튜브, 게임, 주식 등 갖가지 즐길거리를 찾는다. 수행자에게는 명상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혼자 된 사람은 낙이 있어야 살아간다. 낙이 없이 살 수 없다. 그래서 부자나 가난한 자나, 귀한 자나 천한 자나 자신만의 즐길 수 있는 낙이 있다. 이는 집성제에서 “따뜨라 따뜨라비난디니(여기저기에서 환희하며)”라는 문구로도 알 수 있다.
 
낙은 자아에 기반한다. 자아가 있는 한 즐길거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 즐거움을 자아와 동일시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선정에서의 즐거움도 자아에 기반한다. 이는 다름아닌 자아에 기반한 갈애이다.
 
자아에 기반한 갈애는 필연적으로 업을 짓게 만든다. 그래서 “야양 딴하 뽀노바위까 난디라가사하가따 따뜨라 따뜨라비난디니 (yāyaṃ taṇhā ponobhavikā nandirāgasahagatā tatra tatrābhinandinī)”(S56.11)라고 했다. 이는 집성제에서 “그것은 바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S56.11)고 했다.
 
자아에 기반한 갈애는 재생을 불러 온다. 늘 즐길거리를 찾아 두리번 거리는 사람은 업을 짓게 되어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 한량 없는 세월을 세세생생 윤회하는 것이다. 이는 세세생생 괴로운 삶을 사는 것과 같다.
 
괴로움을 끝내려면 홀로 살아야 한다. 부처님은 진정으로 홀로 사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것은 갈애와 친구를 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혼자 살 수밖에 없다. 가족이 있지만 늘 함께 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혼자가 된다. 그러나 자아개념이 있는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갈애라는 동반자가 있는 한 결코 혼자라고 볼 수 없다.
 
갈애와 친구를 하면 깊은 산중에서 홀로 살아도 홀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가 떠나지 못한 갈애가 그의 벗이기 때문에 ‘함께 지내는 자’라고 한다.”(S35.63)라고 했다. 그러나 갈애를 끊으면 시장바닥에 살아도 홀로 사는 것이 된다. 이는 “갈애가 그의 벗이었는데 그가 그것을 끊었기 때문에 ‘홀로 지내는 자’라고 한다.”(S36.63)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수행자는 고독해야
 
수행자는 고독해야 한다. 수행자가 외로움을 느끼면 수행자가 아니다.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무엇엔가 의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사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고독은 다르다.
 
고독한 수행자는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는다. 자아개념이 부수어진 수행자는 갈애가 소멸되었기 때문에 갈애라는 친구가 있을 수 없다. 혼자일 수밖에 없다
 
자아개념이 부수어진 수행자는 고독하다. 갈애라는 친구가 떠났기 때문에 진정으로 홀로 된 자이다. 고독한 수행자는 자신을 의지처로 삼는다. 자신을 섬으로 하여, 자신을 등불로 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2023-12-2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