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오온을 살인자로 보아야, 오온의 악마성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2. 30. 09:55

오온을 살인자로 보아야, 오온의 악마성
 
 
하루를 상쾌하게 보내려면 샤워 해야 한다. 아침에 샤워하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상태가 된다. 한달을 상쾌하게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달을 상쾌하게 보내려면
 
머리가 길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머리가 귀를 약간 슬쩍 덮을 때, 그 때가 이발할 때이다.
 
어제 동네 이발소에 갔다. 어느 해부터 다녔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20년 된 것 같다. 비산동 동양월드타워 3층에 있는 ‘과천이발’이다.
 
점심 때 이발소에 갔다. 정오가 약간 넘어서 도착했다. 주인은 언제나 그렇듯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매달 한번 이발을 하니 20년이면 240번이 된다.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전기방석을 깔았는지 앉으면 뜨뜻하다. 주인은 “세월이 참 빠르지요.”라며 말한다. 이어서 “올해 마지막 이발이네요.”라고 말했다.
 
한달에 한번 이발을 하니 올해 마지막 이발이 맞다. 주인에게 “여기서 몇 년 하셨어요?”라고 물어 보았다. 주인은 23년 되었다고 한다.
 
주인은 과천에 있다가 왔다. 과천 아파트단지가 재건축 들어감에 따라 안양에 잠시 온 것이다. 그런데 잠시 온 것이 이제 정착이 된 것 같다. 무려 23년 있었던 것이다.
 
과천이발소는 아파트 가까이 있어서 가게 되었다. 자주 다니다 보니 단골이 되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 금액이 싸다는 것이다. 현재 7천원이다. 다른 데는 커트만 하는데 만원이다. 왜 금액을 올리지 않은지 물어 보았다. 자신의 가게이기 때문에 올리지 않는다고 했다.
 
둘째, 이발을 잘 하는 것이다. 주인은 나이가 칠십대 중반으로 이발의 달인이라 볼 수 있다. 아버지도 이발업을 했다고 한다. 대를 이어서 하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이발을 해서일까 어떤 두상이든지 마음에 들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주인은 노티가 나지 않는 신사이다. 단정한 머리에 단정한 옷차림에 손님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항상 웃는 얼굴로 예의 바르게 말한다. 겉모습에서 믿음이 간다.
 
주인은 나와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정치성향이다. 이발소에 가면 항상 뉴스를 보게 되는데 요즘 같은 때 고역이 아닐 수 없다. 보면 번뇌가 일어나는 뉴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로 식당도 가려 간다. 뉴스가 있는 식당을 피하는 것이다.
 
어제 이발소는 평소와는 달랐다. 뉴스채널이 아닌 것이다. 어떤 일일까? 이런 상상을 해본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과 정치인에게 실망해서 그런 것 아닐까?”라고 마음대로 상상해 보는 것이다.
 
이발을 하고 나니 상쾌했다. 머리가 길면 개운하지 않다. 이럴 때 이발을 하면 새로운 기분이 된다. 한달에 한번 이발하기 때문에 한달이 상쾌한 것이다. 그렇다면 일생을 상쾌하게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공개적으로 저격 당했을 때
 
살면서 작은 깨달음을 가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아, 그거였구나!” “아, 그랬었구나!”라고 알게 된다. 몰랐던 것을 아는 것이다. 이런 것은 지혜에 해당된다.
 
삶의 지혜가 생겼을 때 삶을 살아 가기가 수월하다. 똑 같은 실수를 되풀이지 하지 않을 수 있다. 무엇보다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작은 깨달음이 모이고 모이다 보면 큰 지혜가 될 것이다.
 
문득 기발한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다. 경전을 읽었을 때 연상 작용이 일어난다. 삶에서 경험 했던 것들이 경전의 문구와 매칭이 되면서 하나의 깨달음이 일어난다. 어쩌면 이런 깨달음은 평생 가는 것인지 모른다.
 
올해 봄의 일이다. 그때 무척 불쾌한 일이 있었다. 모임에서 저격 당한 것이다. 그것도 공개적으로 저격당했다. 나를 지적해서 말한 것이다. 여러 사람들 있는 곳에서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비판과 비방은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지적 행위에 대하여 수용하면 비판이 된다. 반면에 수용하지 못하면 비방으로 본다.
 
지적질에 비방 당했다고 생각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무시당했다고 느껴질 것이다. 또한 모욕당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공개적으로 지적질 하여 비방했을 때 수모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분노할 때가 있다. 모욕을 당했을 때 분노한다. 자신을 욕되게 했을 때 분노는 하늘을 찌른다. 그래서 수모 당한 것에 대하여 복수하고자 한다. 똑 같은 방식으로 되갚아 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지적질에 분노했다. 불쾌한 감정이 며칠 지나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가만 있을 수 없었다. 불교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했어도 경계에 부딪치자 여지없이 무너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사람에게 카톡을 보냈다. 불괘한 감정을 억누르고 “제가 도중에 끼여 든 것 같이 보여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라고 문자를 보냈다. 그 사람 발언 중에 끼여 든 것을 말한다. 그 사람 의견에 동의하면서 부가적인 설명을 하려 했는데 그 사람은 자신의 발표를 방해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어쩌면 전직 직함이라는 우월적 자만이 작동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사람도 미안했던 것 같다. 자신이 지나치게 과민반응 했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저도 제자신을 돌아 봅니다.”라는 취지로 글을 남겼다.
 
모욕을 당했을 때 갚아 주고자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하수가 된다. 아무리 화가 나도 화로서 갚음을 하면 안된다. 공개적으로 모역을 주었다고 하여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면 똑 같은 사람이 된다. 상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 가르침에 답이 있다.
 
부부싸움을 하다 보면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보면 발상의 전환에 대한 것이 많다. 마치 영화를 볼 때 극적 반전을 보는 것 같다.
 
부처님은 무탐, 무진, 무치를 말했다. 특히 분노에 대하여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는 자는 더욱 악한 자가 될 뿐, 분노하는 자에게 더 이상 화내지 않는 것이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 승리하는 것이네.”(S7.2)라고 말했다.
 
싸움을 하면 이기고자 한다. 부부싸움도 그렇다. 그런데 부부싸움은 말싸움이 되기 쉽고 감정싸움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모욕적인 말을 들었을 때 되갚아 주고자 한다. 그래서 더 센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다 보면 싸움은 더욱더 격렬해진다. 남은 것은 무엇일까? 상처투성이뿐이다. 설령 이겼다고 해도 상처뿐인 승리에 지나지 않는다.
 
부부싸움을 해 본 사람들은 안다. 어느 선에서 멈추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이럴 때 부처님이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는 자는 더욱 악한 자가 될 뿐”(S7.2)이라는 말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이런 생각을 해 본다. 홀로 사는 사람은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 약한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혼자 사는 사람에 대한 편견일지 모른다. 결혼생활을 해 보지 않은 사람에 대한 단견일지 모른다.
 
그 사람은 왜 그렇게 지적질 했을까? 상대방을 배려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이럴 때 “결혼생활을 해 보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닐까?”라고 추측할 수 있다.
 
부부싸움 하다 보면 서로가 손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서로 자제한다. 선을 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평생 독신으로 산 사람은 상대방이 어떤 상처를 받을지 생각하지 않고 뱉는 것 같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분노의 밥상을 받지 않아야
 
생활속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한다. 경전에 실려 있는 문구대로 살아보고자 한다. 부부싸움을 했을 때 상대방이 화를 낸다고 해서 맞받아 친다면 하수에 지나지 않는다.
 
담마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분노의 밥상을 받지 않아야 한다. 이는 “바라문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그대는 비난하지 않는 우리를 비난하고 화내지 않는 우리에게 화내고 욕지거리하지 않는 우리에게 욕지거리를 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바라문이여, 그것은 그대의 것이 됩니다.”(S7.2)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분노의 밥상을 받지 않았다. 그 사람이 한상 가득 차려 놓은 모욕, 조롱, 비방이라는 분노의 밥상을 받지 않은 것이다. 그 대신 내가 사과했다. 그래서“당신의 말에 끼여 들어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든 것에 대하여 사과합니다.”라는 취지로 글을 남겼다. 그러자 그 사람은 꼬리를 내렸다. 자신의 행위가 부끄러운 줄 알았던 것이다.
 
담마의 힘은 크다. 경전을 읽은 것이 힘을 발휘한 것이다. 경전대로 실천했더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분노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때 그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불편하고 불쾌하다. 그 사람 얼굴만 보아도, 그 사람 이름만 보아도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어떻게 해야 미움의 감정을 남김없이 해소할 수 있을까?
 
살인자와 같은 오온
 
요즘 머리맡에 있는 쌍윳따니까야를 읽고 있다. 오온에 대한 것을 읽다가 인상적인 문구를 발견했다.
 
니까야를 보면 오온에 대한 갖가지 표현이 있다. 그 중에 오온에 대하여 살인자와 악마로 표현한 가르침이 있다.
 
오온이 어떻게 살인자가 될 수 있을까? 이는 싸리뿟따 존자가 “그는 살인적인 물질에 관하여 물질은 살인적이라고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S22.85)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싸리뿟따 존자는 오온을 살인자와 같다고 했다. 왜 이렇게 말했을까? 이는 오온에 대하여 항상하고 즐거운 것이고 자아가 있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오온을 보면 필연적으로 괴로움이 따른다. 결국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 넣는다.
 
오온이 살인자라면 우리는 우리 몸과 마음에 살인자와 함께 사는 것이 된다. 그런데 살인자는 언제든지 나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살인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하여 분노하면 죽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마음 속으로는 이미 살인을 한 것이다. 그러나 범부는 이런 사실을 모른다. 가르침을 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범부에 대하여 “그는 살인적인 느낌에 관하여 느낌은 살인적이라고 분명히 알지 못한다.”(S22.85)라고 했다.
 
우리 몸과 마음에는 살인자가 살고 있다. 살인자는 호시탐탐 살인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 모욕을 당했을 때, 수모라고 느껴졌을 때 살인충동을 느낀다. 그런데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근 유명 남자배우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 검찰과 경찰에서 마약혐으로 수사 받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배우는 왜 극단적 선택을 했을까? 그것은 모욕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평생 당해 보지 않은 수모를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모욕과 수모는 참을 수 없는 것이어서 자신을 자신이 살해한 것이다. 오온이 살인자라는 말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담마를 알지 못하면 분노를 분노로 되갚아 줄 것이다. 이런 행위는 결국 자신을 죽이는 것과 같다. 오온 안에 있는 살인자에게 살해 당하는 것과 같다.
 
오온에 악마성이
 
니까야를 보면 놀랍게도 오온에 대하여 악마라고도 했다. 어떻게 오온을 악마로 볼 수 있을까?
 
주석에서는 악마에 대하여 다섯 가지로 보고 있다. 이는 (1) 신으로서의 마라(devaputta-māra), (2) 번뇌로서의 마라(kilesa-māra), (3) 오온으로서의 마라(khandha-māra), (4) 업으로서의 마라(kamma-māra), (5) 죽음으로서의 마라(maccu-māra)를 말한다. 이 중에서 세 번째 항을 보면 오온으로서의 악마가 있다.
 
오온을 악마라고 한 것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 근거가 되는 수많은 경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최근 상윳따니까야에서 본 ‘악마의 경’(S23.1)이 결정적이다.
 
라다 존자가 부처님에 물었다. 라다 존자는 “세존이시여, ‘악마’, ‘악마’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서 악마가 있을 수 있습니까?” (S23.1)라고 물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라다여, 물질이 있다면, 악마나 살해하는 자나 살해되는 자가 있을 수 있다. 라다여, 그러므로 세상에서 물질을 악마라고 보고, 살해하는 자라고 보고, 살해되는 자라고 보아야 한다. 물질을 질병이라고 보고, 물질을 종기라고 보고, 물질을 화살이라고 보고, 고통이라고 보고, 고통의 근원이라고 보아야 한다. 물질을 이와 같이 보는 사람은 올바로 보는 것이다.”(S23.1)
 
오온 중에서 물질에 대한 것이다. 느낌, 지각, 형성, 정신에 대한 것도 위 문장에 그대로 적용된다.
 
부처님은 오온을 왜 악마로 보라고 했을까? 이는 이어지는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오온을 살해하는 자와 살해되는 자로 보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 아닌 오온의 악마성에 대한 것이다.
 
오온을 악마라고 한 것은 오온에 악마성이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온은 악마성을 상징한다.
 
오온은 여러 가지 상징이 있다. 오온은 악마이고, 오온은 살인자이고, 오온은 질병이고, 오온은 종기이고, 오온은 화살이고, 오온은 고통이고, 오온은 고통의 근원인 것이다. 이런 오온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사람들은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으로 본다. 그래서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면 죽음으로 간다는 것이다. 요즘 속된 말로 “골로” 가는 것이다.
 
골로 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라다에게 문답식으로 알려 주었다. 핵심은 오온에서 싫어하여 떠나는 것이다.
 
오온에서 싫어하여 떠나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오온에 대하여 염오의 마음을 내야 한다. 오온을 악마보듯 해야 하고, 오온을 살인자 보듯 해야 한다. 이런 마음을 내지 않으면 싫어하여 떠날 수 없다. 당연히 해탈도 없고 열반도 없다.
 
오온을 나의 것이라고 보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오온에 대하여 집착하면 세세생생 윤회하게 된다. 악마의 밧줄에 꽁꽁 묶여 있는 것이 된다.
 
그 사람에 대하여 원한의 마음은 아직까지 남아 있다. 그것은 모욕과 수모를 당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것 자체가 악마성이다.
 
그 사람에 대하여 미워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나의 마음속에는 살인자가 있다. 결국 자신을 죽이는 것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은 누구나 악마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오온에 대하여 악마라고 했을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획기적이다. 또한 부처님 가르침은 나의 인식을 뛰어 넘는다. 세상에 내가 살인자라니! 세상에 내가 악마라니! 세상에 이런 가르침은 없다.
 
삶에서 깨달음이 오면 일생을 상쾌하게
 
그 사람은 나를 공개적으로 저격했다. 지적질하여 공개망신을 준 것이다. 그 사람에게서 악마를 보았다. 그 사람은 살인자처럼 생각되었다.
 
그 사람이 싸움을 걸어 왔다. 그 사람은 분노의 마음으로 나를 저격했다. 분노에 분노로 대응하면 똑 같은 하수가 되어 버린다. 똑 같은 악마가 되어 버린다. 똑 같은 살인자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경전을 열면 달라진다.
 
항상 부처님 가르침과 함께 한다. 가르침을 접하면 마음이 평온해 진다. 그것은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담마를 새기면 악마가 되지 않고 살인자가 되지 않는다.
 
샤워를 하면 하루를 상쾌하게 보낼 수 있다. 이발을 하면 한달을 상쾌하게 지낼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깨달으면 일생을 상쾌하게 살 수 있다. 오온에 대하여 “무상하고 조건지어지고 연기된 것으로 부서지고야 마는 것, 무너지고야 마는 것, 소멸하고야 마는 것이다.”(S22.21)라고 알고 있는 한 나는 악마도 아니고 살인자도 아니다.
 
 
2023-12-3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