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로애락이 있는 인간세계는 공부하기 좋은 환경
나의 몸은 건강한가? 썩 건강한 편은 아니다. 골골하다고 보아야 한다. 돌아 가면서 아픈 것 같다. 지금은 근육통이 진행 중에 있다.
몸에는 항상성이 있다. 몸에 균형이 무너졌을 때 복원되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몸이 고장나도 며칠 지나면 회복된다. 감기 같은 것이다. 지금 작은 통증은 크게 염려하지 않는다. 하루밤 푹 자고 나면 눈 녹듯이 사라질 수 있다.
인생십주기
이 몸은 언제까지 유지될까? 나이가 먹어 감에 따라 노화는 진행된다. 작년이 다르고 올해가 다르다. 나이가 칠십대, 팔십대, 구십대가 되었을 때 어떻게 될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십년주기로 건강상태에 대한 표현이 있다.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유아적 십년(0-10세): 둔십년(鈍十年)
여리고 불안정한 아이
2) 유희적 십년(11-20세): 희십년(戱十年)
그는 많은 유희를 즐긴다.
3) 미모적 십년(21-30세): 색십년(色十年)
그에게 미모에 대한 관심이 커진다.
4) 체력적 십년(31-40세): 력십년(力十年)
힘과 기력이 크게 생겨난다.
5) 지혜적 십년(41-50세): 혜십년(慧十年)
그에게 지혜가 잘 확립되는데,
선천적으로 지혜가 부족한 자에게도 이 시기에 지혜가 조금이나마 생긴다.
6) 퇴행적 십년(51-60세): 퇴십년(退十年)
그에게 유희, 미모, 체력, 지혜가 퇴행한다.
7) 경사적 십년(61-70세): 경십년(傾十年)
그에게 신체가 앞으로 기울어진다.
8) 타배(駝背)적 십년(71-80세): 곡십년(曲十年)
그에게 신체가 쟁기처럼 굽어버린다.
9) 노망적 십년(81-90세): 몽십년(蒙十年)
그는 몽매하게 되어 하는 것마다 망각한다.
10) 와상적 십년(91-100세): 와십년(臥十年)
백세를 먹은 자는 대부분 누워서 지낸다. (Vism.20.51)
오늘날 위와 같은 십년주기는 잘 들어 맞지 않는다. 농사를 짓는 등 육체노동을 그다지 많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8번항에서 타배(駝背)적 십년(71-80세)에서 보는 것처럼 “신체가 쟁기처럼 굽어버린다”라는 말은 좀처럼 성립되지 않는 것 같다.
어떤 이는 노모를 모신다. 연령대가 육십대나 칠십대인 사람은 구십대의 노모가 있다. 대체로 치매기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노화로 인하여 갖가지 질병으로 거동이 불편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본다면 10번항 와십년(91-100세)에서 보는 것처럼 “대부분 누워서 지낸다.”라는 말은 현실인 것 같다.
공부하기 어려운 지옥과 천상
몸이 불편하면 괴롭다. 모든 것이 불편하고 살 맛이 나지 않는다. 당연히 해야 할 일도 하기 힘들다. 더 심할 경우 지옥을 경험하는 것인지 모른다.
지옥은 있는 것일까? 불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있다고 말할 것이다. 지옥뿐만 아니라 천상도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는 내생을 믿는 것과 같다. 자연스럽게 전생과 윤회도 믿는다.
어느 종교이든지 지옥과 천상은 있다. 이는 가장 괴로운 곳과 가장 행복한 곳을 극단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의 삶에서 때로 지옥과 천상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불교를 종교로 갖고 있다 보니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지옥에서는 너무 괴로워서 공부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또한 천상에서는 너무 즐거워서 공부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공존하는 인간세상이야말로 공부하기 가장 좋은 환경이라고 말한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해야 한다. 공부하기 가장 좋은 환경, 즉 도를 닦기 가장 좋은 환경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는 윤회를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된다.
인간계는 도와 과를 이루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런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다. 또한 누군가 써 놓은 글을 보고서 알았다. 그런데 이번에 쌍윳따니까야를 보다가 근거가 되는 경을 발견했다. 이는 ‘기회의 경’(S35.135)을 말한다.
불교인이라면 경전적 근거를 들어야
그제 머리맡에 있는 쌍윳따니까야를 읽다가 기억하고 싶은 경을 발견했다. 그것은 “인간세계에서 깨달음을 얻기에 적합하다.”라고 말하는 근거가 되는 경을 말한다. 이는 다름아닌 ‘기회의 경’(S35.135)이다. 이는 기회가 되었다. 경전적 근거를 발견한 것이다.
불교인이라면 경전적 근거를 들어서 이야기해야 한다. 법문 할 때도 경전적 근거를 들어야 한다. 설령 그사람의 법문이 아무리 훌륭해도 경전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면 사견(私見), 즉 개인적인 견해기 되어 버린다. 더 나아가 사견(邪見, micchādiṭṭhi), 즉 삿된 견해가 되어 버린다.
늘 경전에 근거한 글을 쓰고자 한다. 경전에 근거하는 것은 가르침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왜 그런가? 이는 삼귀의에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라며 ‘법귀의’ 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경전에 근거해야 한다. 경전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만 한다면 그것은 사견이 된다. 당연히 경전에 근거하여 이야기하면 정견이 된다. 그렇다면 인간계가 도를 닦기 위해서 가장 적합한 환경이라는 것은 어떤 내용일까?
부처님이 말했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청정한 삶을 살 기회를 얻은 것은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에게 이득이다. 그대들에게 큰 이득이다.”(S35.135)라고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기라는 말과 같다.
부처님은 지옥과 천상에 대하여 설명했다. 얼마나 공부하기가 어려운 환경인지 말한 것이다.
지옥은 왜 공부하기 어려운가?
부처님은 먼저 지옥에 대해서 말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나는 ‘여섯 가지 접촉의 영역’이라는 아비지옥을 보았다.” (S35.135)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아비지옥은 지옥 중에서 최악의 지옥이다. 그것은 감각으로 겪는 고통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시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거기서는 시각으로 어떠한 형상을 보든지 열등한 형상을 보지 탁월한 형상을 보지 못하며, 추한 형상을 보지 아름다운 형상을 보지 못하며, 마음에 들지 않는 형상을 보지 마음에 드는 형상을 보지 못한다.”(S35.135)
시각적으로 본 것에 대한 설명이다. 이 정형구에는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에 대한 것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지옥에서는 여섯 가지 감감영역에서 괴로움을 받는다. 그것은 한마디로 “사랑스럽지 않은 것과 만남”에 대한 것이다. 이는 고성제에서 원증회고(怨憎會苦)와 같은 것이다.
살아가면서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것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사건이 될 수도 있다. 사랑스럽지 않는 것과 만남이 있을 때 괴롭다. 더구나 그 만남이 오래 지속되면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지옥에서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다. 이는 경에서 시각, 청각 등 여섯 가지 감각영역을 언급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 중에서 한가지라도 결여 되어 있다면 지옥이 아닐 것이다. 만약에 시각능력이 결여 되어 있다면 열등한 형상, 추한 형상, 마음에 들지 않는 형상을 볼 수 없어서 괴롭지 않을 것이다.
지옥에서는 여섯 가지 감각영역을 구족하고 있다. 그래야 여섯 감역에서 괴로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여섯 감역은 여섯 개의 세계와 같다는 것이다.
눈으로 보는 세계가 있고 귀로 듣는 세계가 있다. 여섯 감역이 있으면 여섯 감역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옥에서는 여섯 감역에서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지옥에서는 단 한순간이라도 괴롭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천사의 경’(M130)에서 묘사된 지옥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그 똥이 가득 찬 대지옥이 끝남과 동시에 숯불이 시뻘겋게 달궈진 대지옥이 전개된다. 그는 거기에 빠진다. 그때에 그는 괴롭고 아프고 격렬한 고통을 느낀다. 그렇지만 그에게 악업이 다하지 않는 한, 그는 죽지도 못한다.”(M130)
어떻게 이런 환경에서 공부를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부처님은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청정한 삶을 살 기회를 얻은 것은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에게 이득이다.”(S35.135)라고 했다. 인간세상에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기라고 했다.
천상에서는 왜 공부하기 힘들까?
지옥에서는 공부할 수 없다. 그런데 공부하기 힘든 곳은 지옥뿐만 아니라는 것이다. 천상에서도 공부하기 힘들다. 이는 부처님이 “나는 여섯 감촉의 영역이라고 하는 천상을 보았다.”(S35.135)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천상에서는 왜 공부하기 힘들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거기서는 시각으로 어떠한 형상을 보든지 탁월한 형상을 보지 열등한 형상을 보지 못하며, 아름다운 형상을 보지 추한 형상을 보지 못하며, 마음에 드는 형상을 보지 마음에 들지 않는 형상을 보지 못한다.”(S35.135)
천상은 지옥과 정반대임을 알 수 있다. 천상에서는 사랑하는 것과의 만남만 있을 뿐이다. 시각을 비롯하여,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과 같은 여섯 가지 감역에서 사랑스러운 것과의 만남만 있을 뿐이다.
천상에서는 여섯 가지 감각능력을 모두 구족하고 있다. 이는 여섯 가지 감각영역의 세계에서 즐거움을 누리기 위한 것이다. 오로지 사랑스러운 것과의 만남만 있는 천상에서는 매 순간 즐거움만 있을 뿐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공부하기 힘들다.
부처님은 지옥과 천상을 예로 들어서 공부하기 힘든 곳이라고 설명했다. 경에서는 청정한 삶을 살기 힘든 곳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지옥은 아비지옥을 말한다. 천상은 주석에 따르면 삼십삼천을 말한다.
부처님은 인간계에 태어난 것에 대하여 큰 이득이라고 했다. 왜 그랬을까? 주석에 따르면 “지옥에는 오로지 고통만이 있고 천계에는 오로지 행복만이 있고 인간의 세계란 고통과 행복이 섞인 상태이다.”(Srp.II.400)라고 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축복으로 알아야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축복으로 알아야 한다. 왜 그런가? 이는 부처님이 “그대들이 청정한 삶을 살 기회를 얻은 것은 큰 이익이다.”(S35.135)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는“그대가 이 인간의 상태를 얻은 것 때문에 그대에게 청정한 삶의 기회가 획득되는 것이다.”(Srp.II.400)라는 말과 같다.
상윳따니까야 ‘기회의 경(khaṇa sutta)’(S35.135)에 따르면, 나는 인간으로 태어나기를 참 잘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인간으로 있을 때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지옥과 천상은 보이지 않지만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몸이 아프면 지옥이 된다. 너무 괴로워서 공부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술에 취하면 천상이 된다. 너무 즐거워서 역시 공부할 마음이 나지 않는다.
지옥과 천상에서는 공부하기 힘들다. 너무 괴롭거나 너무 즐거우면 집중하기 힘들다. 육체적 고통이 극심할 때 삼매에 드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술 마신 상태에서 명상하기는 힘들다. 지옥과 천상에서는 청정한 삶을 살 수 없다.
청정한 삶을 사는 데는 조건이 있다. 이른바 팔난(八難)이라 하여 “1) 지옥에 태어나는 것, 2) 축생으로 태어나는 것, 3), 아귀로 태어나는 것, 4) 수명이 긴 신의 무리들에 태어나는 것, 5) 변방에 야만인으로 태어나는 것, 6) 사견을 갖는 것, 7) 지혜 없이 태어나는 것, 8) 정견을 구분 못하는 것” 이렇게 여덟 가지에 해당된다면 청정한 삶을 살 수 없다.
수행자가 천상에 태어나는 것은 치욕
사람들은 천상에 태어나고자 한다. 여섯 가지 감각을 즐길 수 있는 천상, 욕계청상을 말한다. 그러나 수행자는 감각적 욕망이 극대화된 욕계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치욕으로 여긴다. 이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 수 있다.
“요정들의 노래가 메아리치고
유령들이 출몰하는 숲은
무명의 숲이라 불리는데,
어떻게 그곳에서 벗어나랴?”(S1.46)
어느 수행자가 있었다. 그는 숲속에서 홀로 살면서 잠자는 것이나 먹는 것을 무시하고 고행을 했다. 너무 지나치게 정진을 해서일까 풍병(風病)을 얻었다. 그는 갑자기 죽게 되어서 삼십삼천 욕계천상에 태어났다.
수행자가 눈을 떴을 때 천상에 화생한 것임을 알았다. 자신의 주변에 천상의 미모를 가진 아름다운 천녀(acchara)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수행자로서 전혀 바라지 않던 것이었다.
전수행자는 삼십삼천 천상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보았다. 이는 천상에 대하여 요정들이 노래가 메아리치는 유령들의 숲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전수행자는 자신이 전생에 자신이 수행자로 산 것을 기억했다. 그래서 “어떻게 그곳에서 벗어나랴?”(S1.46)라고 말했다. 오로지 행복만 있는 천상을 탈출하고자 한 것이다.
천상에서는 즐거움만 있어서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기 힘들다. 그래서일까 티벳스님들은 거지로 태어나도 좋으니 인간으로만 태어나기를 바란다고 한다.
희로애락이 있는 인간세계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인간으로 태어난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없다. 인생을 십년 단위로 본다면 ‘경십년(傾十年)’이 되었다. 이는 육십대로 기울어지는 시기에 해당된다.
나는 인생을 잘 살아 왔는가? 도중에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났다. 나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서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인생십주기에서 혜십년(慧十年)에 해당되는 사십대에 불교에 입문하게 되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만약 내가 축생으로 태어났다면 내가 누군지 모를 것이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것이다. 당연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 불교를 접하고 부처님의 원음을 접했을 때 인식의 지평은 넓어지는 것 같다. 이럴 때 다음과 같은 부처님 가르침이 떠 오른다.
“세존이 세상에 출현한다. 그리고 고요로 이끌고 평화로 이끌로 깨달음으로 이끌고 바른 길로 잘 가신 님에 의해 선포된 가르침이 설해진다. 그리고 이 사람이 중앙에 태어나 지혜를 갖추어 둔하지 않고 어리석지 않아 잘 설해진 것과 잘못 설해진 것을 구분할 줄 안다. 수행들이여, 이것이 청정한 삶을 사는데 단 하나의 올바른 시간, 올바른 시기이다.”(A8.29)
글을 쓰다 보면 세상만사 잊는다. 몸이 아픈 것도 모른다. 글쓰기에 집중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지금도 그렇다.
매일 부처님 가르침과 함께 한다. 매일 한시간 좌선한다. 이 글이 끝나면 평좌 자세로 명상할 것이다. 글쓰기에서 형성된 집중을 그대로 좌선에 가져 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병고에 시달린다. 나이가 들수록 병치레 하게 된다. 그에 따라 집중도 약해 진다. 좀더 건강할 때, 나이가 한살이라도 젊었을 때 공부해야 한다.
지금은 좋은 시기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행운이다. 고통만 있는 지옥, 즐거움만 있는 천상에서는 공부하기 힘들다. 희로애락이 있는 인간세계는 공부하기 좋은 환경을 갖추었다.
하루하루 청정한 삶을 살아야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정법이 없다면 시기가 좋지 않은 것이다. 다행히도 지금은 정법시대이다. 부처님 원음이 실린 빠알리니까야가 전승되어 왔고, 팔정도 수행이 있고, 사향사과에 열반이 있으니 정법시대인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정법시대에 살더라도 지혜가 없으면 좋지 않은 시기에 태어나는 것과 같다. 지혜가 있다고 해도 사견을 가졌다면 좋지 않은 시기에 태어난 것과 같다.
항상 부처님 가르침과 함께 한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정법의 시대에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는 행운을 가졌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인생십주기에서 곡십년, 몽십년, 와십년이 오기 전에 이루어 놓아야 한다. 하루하루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이렇게 글을 쓰니 아픈 줄 모른다.
2024-01-0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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