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인상과 속성의 유혹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다면

담마다사 이병욱 2024. 1. 16. 10:35

인상과 속성의 유혹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다면
 
 
매일 아침 먹는 것이 있다. 고구마와 계란과 식빵이다. 찐 고구마 작은 것 한 개, 찐 계란 한 개, 그리고 치즈가 한조각 들어간 식빵 한 개를 꿀유자차를 타서 먹는다.
 
오늘 고구마는 실패 했다. 찜기에 찔 때 냄비 뚜껑을 닫아 놓지 않은 것이다. 그 결과 설 익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실수를 한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다. 아침을 만들어 먹는 것도 한달전이나 반년전이나 변함 없다. 눈감고도 할 수 있는 일상이다. 그럼에도 실수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도 불운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주문제작 할 때 숫자를 잘못 파악했다. 그 결과 다시 만들어 주어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모델넘버를 잘못 파악했다. 또 다시 만들어 주어야 했다. 똑 같은 실수를 연달아 두 번 했다. 이런 것도 불운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냄비 뚜껑 닫는 것을 잊어 버리는 것은 있을 수 있다. 주문제작 할 때 잘못 발주할 수 있다. 그러나 목숨과 관계된 실수라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작년 여름의 일이다. 그때 안성 죽산면에 있는 활인선원으로 수련회 갔었다. 다음날 처리할 일이 있어서 자정에 출발했다. 그런데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다. 달리다 보니 역주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주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당황했다. 죽음이 앞에 있는 것 같았다. 큰일 난 것이다. 차를 되돌려야 했다. 두 개의 차로가 있는 국도에서 한번 후진했다가 돌렸다. 돌리자 마자 탑차가 다가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경차를 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차이다. 차 길이도 짧다. 그러다 보니 한번 후진하여 돌릴 수 있었다. 만약 차가 중형차 이상이었다면 두 번 후진해서 돌렸을지 모른다. 그 경우 뒤에서 오는 차와 부딪칠 수 있을 것이다.
 
역주행한 것은 판단착오에 따른 것이다. 역주행 했을 때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다. 다행히도 차가 작아서 한번 후진해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만일 그 때 맞은 편에서 차가 오기라도 했다면 종이장처럼 구겨졌을 것이다.
 
사고는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모른다. 아무리 주의한다고 해도 실수할 수 있다. 그것이 목숨과 관계가 있다면 큰 사고가 날 수 있다. 설령 내가 방어운전한다고 해도 뒤에서 들이 받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이 순간에 최후를 맞이한다면
 
늘 삶과 죽음의 경계선상에 있다. 운이 따라 주지 않으면 죽을 수 있다. 불운이 겹치면 죽을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 최후를 맞이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다음과 같은 부처님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연소하고 작열하고 불꽃 튀는 뜨거운 쇠바늘로 시각기관을 차라리 지질지언정, 시각으로 인식되는 형상의 인상과 속성에 사로잡히지 말라.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의 의식이 인상의 유혹에 사로잡히거나 속성의 유혹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다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축생으로 태어나는 두 가지 운명 가 운데 하나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그 위험을 보고 이와 같이 말한다.”(S35.235)
 
 
눈이 있어서 대상을 본다. 매혹적인 형상을 보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계속 보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죽는다면 지옥이나 축생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매혹적인 대상에 눈길이 간다. 먼저 전체적으로 파악한다. 그래서 ‘여자다’ 또는 ‘남자다’라고 파악하는 것이다. 다음 단계는 부분적으로 파악한다. 눈이나 코 등 신체부위에 눈이 가는 것이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인상(nimitta)’이라고 했고, 부분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속성(anubyañjana)’이라고 했다.
 
즐거운 느낌에 목숨 걸었을 때
 
대부분 사람들은 감각을 즐긴다.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즐거움을 말한다. 동물과 다름 없는 삶이다. 눈과 귀, 코, 혀, 몸으로 즐기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즐거운 느낌에 목숨을 건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즐거움에 목숨을 거는 것이다. 그래서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 “죽어도 좋아!”라고 감각적 쾌감을 탐닉한다.
 
노인의 성문제를 다룬 영화가 있다. 제목은 ‘죽어도 좋아’이다. 이는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것이다. 즐거운 느낌에 목숨을 걸었을 때 “죽어도 좋아!”라고 말한다. 그러다 진짜 죽으면 어떻게 될까?
 
여러 가지 죽음이 있다. 감각적 쾌락을 탐닉하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 항상 즐거움만 있는 욕계천상에 태어날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그 순간에 죽는다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축생으로 태어나는 두 가지 운명 가 운데 하나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S35.235)라고 분명히 말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감각적 즐거움에 탐닉하는 삶을 살아간다. 음식을 즐기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음식은 단지 입으로만 먹지 않는다. 음식은 단지 미각으로만 먹지 않는다. 음식을 먹을 때는 오감이 총동원 된다. 고기를 예로 들 수 있다. 눈으로 고기를 보고, 귀로 고기 익는 소리를 듣고, 코로 고기 냄새를 맡고, 입으로 고기를 씹고, 목구멍으로 고기를 넘긴다.
 
고기는 오감으로 먹는다. 술도 오감으로 마신다. 이는 즐거운 느낌에 대한 것이다. 즐거운 느낌이 절정에 달했을 때 “죽어도 좋아!”라고 말할지 모른다. 즐거운 느낌에 목숨을 거는 것이다.
 
즐거운 느낌에 목숨 걸었을 때 진짜 죽으면 어떻게 될까? 오로지 즐거움만 있는 욕계천상에 태어날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와 정반대로 지옥이나 축생에 태어날 것이라고 했다. 왜 그런가? 오로지 본능에 충실한 축생과도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일찍이 여기서 맛을 탐하고 여기서 악한 행동을 한 어리석은 자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축생으로서 풀을 먹고 사는 생물가운데 동료로서 태어난다.”(M129)
 
 
맛을 탐하는 자는 축생으로 태어날 것이라고 했다. 맛을 탐하는 자는 감각적 욕망으로 사는 자를 말한다. 이는 인상과 속성에 사로잡혀 사는 자를 말한다. 한평생 식욕과 성욕으로 사는 자는 축생의 동료로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스님은 왜 윤회를 부정할까?
 
죽음은 언제 올지 모른다. 불운하면 오늘 올 수도 있다. 앞으로 한시간 앞을 보장할 수 없다. 갑자기 나에게 죽음이 닥친다면 나는 어떤 생각이 들까?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 공부도 해야 할 것이 많다. 공부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죽음이 찾아 왔다면 억울할 것 같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죽음이라니!”라며 비통해할지 모른다.
 
대부분 사람들은 천년만년 살 것처럼 즐기며 살아간다. 대부분 사람들은 지금 여기서 행복을 추구한다. 그런데 행복과 즐김은 다른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행복과 즐김은 동의어인 것이다.
 
어떤 스님은 행복을 말한다. 마치 행복전도사 같다. 스님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행복특강을 했다. 안양에 온 적도 있다. 그런데 스님은 윤회를 부정한다. 사람이 소가 되고 개가 되는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다.
 
스님은 왜 윤회를 부정할까? 아마 전국구 스님이기 때문일 것이다. 불교인들뿐만 아니라 일반사람들도 대상으로 하는 법문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기독교인들도 스님의 법문을 인용한다. 그러다 보니 스님은 사람이 죽어서 소가 되고 개가 되는 윤회를 말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본다.
 
스님은 지금 여기서 행복을 강조한다. 그런데 행복이라는 말은 즐거움 또는 쾌락이라는 말과 동의어라는 사실이다. 이는 행복을 뜻하는 빠알리어 수카(sukha)는 ‘pleasant, happy; happiness, pleasure, joy, bliss’의 뜻도 있기 때문이다.
 
스님의 행복론은 사람들을 감동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지금 여기서 행복은 지금 여기서 감각적 즐거움으로 변질되기 쉽다는 것이다. 더구나 윤회를 부정하기 때문에 즐기는 삶을 살아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스님에게도 윤회관은 있다. 그것은 현세에서의 윤회를 말한다. 살아 있을 때 삶의 과정이 윤회라는 것이다. 스님의 과학적 합리주의에 따르면 죽음 이후에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만 믿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자신의 눈으로 본 것만 믿는 사람이 있다. 이는 과학적이고 합리적 사고방식에 따른다. 그러나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과 같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신이다.
 
정신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마음도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없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윤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윤회를 말씀 하셨다. 이는 니까야를 보면 알 수 있다. 니까야 도처에서 윤회 이야기가 발견된다. 감각적 즐거움에 탐닉하다 그 순간에 죽으면 지옥이나 축생에 태어난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두 가지 선택이 있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세상사람들의 흐름을 따라 간다. 세상 사람들이 지금 여기서 행복을 말하며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갈 때 따라 가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경우가 많다.
 
지금 여기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아간다. 이런 삶은 다름 아닌 탐, 진, 치의 삶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가기 때문에 무탐, 무진, 무치의 삶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을 경계했다. 어느 정도인가? 시각을 감각을 즐기는 것에 대하여 “뜨거운 쇠바늘로 시각기관을 차라리 지질지언정, 시각으로 인식되는 형상의 인상과 속성에 사로잡히지 말라.”(S35.235)라고 했다. 왜 이렇게 과격하게 말씀하셨을까? 이는 “그 순간에 죽는다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축생으로 태어나는 두 가지 운명 가 운데 하나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S35.235)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알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두 가지 선택이 있다. 하나는 쇠바늘로 자신의 눈을 지지는 것과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까?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매혹되는 순간에 타락해서 지옥에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옥에 떨어질지언정 차라리 감각적인 시각기관을 작열하고 불꽃 튀는 뜨거운 쇠바늘로 지지는 것이 더 낫다.”(Srp.III.4)라고 설명하고 있다.
 
수행자는 감각적 즐거움에 빠져서는 안된다. 감각적 대상에 마음을 빼앗기 순간 죽게 된다면 지옥 아니면 축생이라고 했다. 그래서 시각적 대상에 대해서는 뜨거운 쇠바늘로 눈을 지질지언정 인상(nimitta)과 연상(anubyañjana)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했다. 그렇다면 출가수행자가 음행을 하면 어떻게 될까?
 
성접교섭에 대한 학습계율을 보면
 
율장을 보면 대부분 음계에 대한 것이 많다. 이는 감각적 욕망 중에서 성욕에 대한 것이 가장 강렬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음계의 시발점이 된 ‘성접교섭에 대한 학습계율(methunadhammāsikkhāpada)’을 보면 매우 노골적이다.
 
율장 비구계에 ‘쑤딘나 이야기’가 있다. 승단추방죄법이 최초로 생겨나게 한 이야기를 말한다. 이는 출가한 쑤딘나에게 아들 하나 낳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간청으로 시작된다.
 
쑤딘나는 부처님 설법을 듣고 감명 받아 출가했다. 어느 날 탁발 나갔다가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아들 하나 낳아 달라고 했다. 아들이 없으면 재산이 왕에게 귀속되기 때문이다. 쑤딘나는 어머니의 간청에 따라 전처와 세 번 성적교섭을 가졌다. 그 결과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이런 소문이 부처님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부처님은 쑤딘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적절하지 않고, 자연스럽지 않고, 알맞지 않고, 수행자의 삶이 아니고, 부당하고, 해서는 안될 일을 행한 것이다. 어리석은 자여, 이와 같이 잘 설해진 가르침과 계율에 출가하였지만, 평생 완전무결하고 청정무구한 거룩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 불가능하면 그대는 어찌할 셈인가? 어리석은 자여, 내가 여러 가지 법문으로 가르침을 설한 것은 탐욕의 여임을 위해서지 탐욕의 갖춤을 위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가르침을 설한 것은 결박의 여임을 위해서지 결박의 갖춤을 위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가르침을 설한 것은 집착의 여읨을 위해서지 집착의 갖춤을 위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어리석은 자여, 그런데 그대는 내가 탐욕의 여임을 위하여 가르침을 설할 때에 탐욕의 갖춤을 위해 애쓸 수 있는가? 결박의 여림을 위하여 가르침을 설할 때에 결박의 갖춤을 위해 애쓸 수 있는가? 집착의 여임을 위하여 가르침을 설할 때에 집착의 갖춤을 위해 애쓸 수 있는가? 어리석은 자여, 내가 여러 가지 방편으로 탐욕의 여임을 위하여, 교만을 부수기 위하여, 갈증을 제거하기 위하여, 경향을 제거하기 위하여, 윤회를 끊기 위하여, 갈애를 부수기 위해서, 사라지기 위해서, 지멸에 들기 위해서, 열반에 들기 위해서 가르침을 설하지 않았는가? 어리석은 자여, 내가 여러 가지 방편으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끊음에 관하여 설명하지 않았는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의한 지각에 대한 완전한 일에 관하여 설명하지 않았는가? 감각적 락의 욕망에 의한 갈증 제어에 관하여 설명하지 않았는가? 감각적 쾌락의 망에 의한 사유의 제거에 관하여 설명하지 않았는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한 열뇌의 지멸 관하여 설명하지 않았는가? 어리석은 자여, 오히려 맹독을 난 독사뱀의 아가리에 그대의 성기를 집어넣을지언정, 결코 여인의 성기에 넣지 말라. 어리석은 자여, 오히려 검은 뱀의 아가리에 그대의 성기를 넣을지언정, 결코 여인의 성기에 집어넣지 말라. 어리석은 자여, 오히려 뜨겁고 불타고 작열하는 숯불화로에 그대의 성기를 집어넣을지언정, 결코 여인의 성기에 집어넣지 말라.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어리석은 자여, 그것을 인연으로 죽음에 이르거나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겪게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 때문에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여, 이러한 이유로 그대는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어리석은 자여, 이러한 일을 위해서 그대는 부정한 짓, 비속한 짓, 저열한 짓, 추악한 짓 밑물 하는 짓, 은밀한 짓, 짝짓기에 종사해야 할 것이다.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많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의 최초의 실현자이자 선구자가 되었다. 어리석은 자여, 그것은 아직 청정한 믿음이 없는 자를 청정한 믿음으로 이끌고 이미 청정한 믿음이 있는 자를 더욱더 청정한 믿음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은 자이, 그것은 오히려, 아직 청정한 믿음이 없는 자를 불신으로 이끌고, 이미 청정한 믿음이 있는 자 가운데 어떤 자들을 타락시키는 것이다.”(Vin.III.20-22, 율장 비구계, 승단추방죄법 제1조, 성적교섭에 대한 학습계율, 쑤딘나의 이야기)
 

 
부처님은 청정한 삶을 살기로 맹세한 수행승은 성접교섭을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맹독을 난 독사뱀의 아가리에 그대의 성기를 집어넣을지언정, 결코 여인의 성기에 넣지 말라.”라는 등의 표현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런 표현은 율장에서만 발견된다.
 
수행자에게 성접교섭은 왜 좋지 않은가? 이는 “평생 완전무결하고 청정무구한 거룩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더구나 성접교섭을 했을 때 “죽음에 이르거나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겪을 것이다.”라고 했다. 더 나아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했다.
 
이 가르침에서 핵심은 “뜨겁고 불타고 작열하는 숯불화로에 그대의 성기를 집어넣을지언정, 결코 여인의 성기에 집어넣지 말라.”라는 말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지옥에 떨어지는 것보다 차라리 독사의 아가리에 성기를 집어 넣거나 숯불화로에 성기를 집어 넣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쑤딘나 존자를 경책했다. 그리고 법문으로 교화했다. 최종적으로 “수행승이여, 수행승이 성접교섭을 행한다면, 승단추방죄를 범하는 것이므로 함께 살 수 없다.”(Vin.III.21)라고 하여 최초의 학습계율을 시설했다.
 
인상(nimitta)과 그 속성(anubyañjana)에 빠지지 말아야
 
매일 경전을 읽는다. 머리맡에 경전이 있어서 읽는다. 잠자기 전에도 읽고 잠에서 깨어나서도 읽는다. 읽다 보면 기억해 두고 싶은 내용이 많다. 이럴 때는 글을 씀으로 인하여 새겨 두고자 한다.
 
감각적 쾌락을 즐기다가 죽었을 때 지옥이나 축생으로 태어난다는 가르침을 접했을 때 충격을 받았다. 이런 가르침을 다른 데서 본 적이 없다. 부처님 가르침에서 발견된다. 상윳따니까야를 읽다가 이런 가르침을 접했을 때 최악의 순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삶은 해빙기에 얼음판 위를 걷는 것과 같다. 삶은 전쟁터에서 지뢰밭을 걷는 것과 같다. 언제 빠질지 모르고 언제 밟을지 모른다. 운전할 때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운전할 때는 나의 목숨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한다. 한시간 후의 일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불운하여 죽었다면 어떻게 될까?
 
한평생 감각만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먹고 마시는 등 감각을 즐기는 일이다. 이런 일로 평생 살았을 때 불선업만 쌓일 것이다. 만약 그가 급작스럽게 죽었다면 그는 어디서 태어날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감각을 즐기다가 죽으면 지옥 아니면 축생으로 태어난다고 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는 말이다. 그래서 차라리 벌겋게 달군 쇠바늘로 자신의 눈을 지질지언정 인상(nimitta)과 그 속성(anubyañjana)에 빠지지 말라고 했다.
 
 
2024-01-1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