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찟따장자는 유마거사의 롤모델

담마다사 이병욱 2024. 1. 31. 10:53

찟따장자는 유마거사의 롤모델
 
 
1월도 끝자락이다. 나는 잘 살았는가? 새해 첫날 결심했던 것은 실현되고 있는가? 한해의 십이분이 일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점검해본다.
 
부끄러움 없이 살기로 했다. 이는 자신을 속이지 않는 삶이다. 양심의 가책이 없는 삶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계행을 지키는 삶이다.
 
쌍윳따니까야에서 읽은 것이 있다. 중병에 걸린 수행승 박깔리는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부처님이 병문안 왔다. 부처님은 “어떠한 가책이라도 한 적이 있는가? 어떠한 후회가 될만한 일이라도 한적이 있는가?”(S22.87)라며 물어 보았다.
 
양심에 가책을 느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부끄러운 삶이다. 내면적인 부끄러움이다. 자신을 속이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계행을 어기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박깔리는 “저는 계행을 실천하는데 욕되게 한적이 없습니다.”(S22.87)라고 말했다.
 
수행승 박깔리는 병이 깊어지자 견딜 수 없었다. 육체적 고통이 정신을 압도했을 때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박깔리는 자결했다.
 
부처님은 목숨을 끊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고 했다. 이는 청정한 자의 자살은 용인 되는 것이다. 중병에 걸려서 회복될 기미가 없을 때나 고통이 심할 때 계행이 청정한 자나 번뇌가 다한 청정한 아라한의 자살은 용인되었던 것이다. 니까야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지난 시절을 돌아본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자신을 속였다. 부끄러운 삶을 산 것이다. 올해부터는 한점 부끄러움 없게 살기로 했다. 오늘로써 한달이 되었다.
 
커피향에 삶의 의욕을
 
오늘 커피가 입에 달라 붙는다. 어떤 날은 쓰기만 하다. 커피에는 쓴맛, 단맛, 신맛이 있다. 이 세 가지 맛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최상이다. 절구커피가 그런 것 같다.
 
오늘 아침에도 절구질 했다. 원두콩을 나무절구통에 담고 공이로 찧는 것이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작업을 한다. 이때 분쇄된 커피에서 향을 느낀다.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것 같다. 커피향에 삶의 의욕을 느낀다.
 

 
흔히 커피는 맛으로도 먹지만 향으로도 먹는다고 말한다. 커피를 마실 때 향이 올라 오는데 그 때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일시적이다. 순간적으로 느낄 뿐이다. 이때 향은 마시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향을 먹는다고 말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향을 맡는 것이다.
 
커피는 아침에 삶에 활력을 주기에 충분하다. 커피를 마시는 것도 행복이지만 커피 향을 맡는 것도 행복이다. 그러나 쭈그리고 앉아 절구질 했을 때, 분쇄된 커피 향만 못할 것이다.
 
세상에 향기로운 것은 커피향만 있는 것은 아니다. 꽃의 향기도 있다. 그러나 꽃의 향기는 바람을 거스르지 못한다. 라일락 철이 되었을 때 코를 가까이 대어야 특유의 향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참사람의 향기만 못할 것이다.
 
참사람은 계행을 지키는 사람이다. 참사람에게는 계의 향기가 난다. 그런데 계의 향기는 바람을 거슬러 간다는 것이다. 더구나 천리만리까지 퍼진다. 부끄러움 없이 사는 사람의 향기는 시방으로 천상에 까지 이를 것이다.
 
아침이 되면 활력이
 
아침이 되면 활력이 넘친다. 이는 저녁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아침에는 마치 인생의 초년시절 같다. 저녁은 인생의 황혼시절 같다. 매일 백권당으로 가는 길은 하루인생의 새로운 출발이다.
 
도시에서 살고 있다. 전원생활을 꿈꾸어 보지만 꿈으로 그친다. 현실적으로 도시를 떠날 수 없다. 그래도 전원생활이 그리우면 자연휴량림에 간다. 자연휴양림 통나무집에서 하루밤 머물면서 자연인이 되어 본다.
 
도시는 시시각각 변한다. 정적인 농촌과 대조적이다. 도시는 늘 역동적이다. 도시에서 하루를 보내고 도시에서 일년을 보내고 도시에서 일생을 보낸다. 이 도시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2024-01-31)

 
하루 일과를 시작할 때 오피스텔 꼭대기 층에 오른다. 18층 꼭대기에서 동쪽 하늘을 바라 본다. 해 뜨기 전에 동녘을 보기 위함이다. 구름이 약간 끼여 있을 때가 최상의 조건이 된다. 해 뜨기 전에 구름이 붉게 물들 때 태고의 신비를 보는 것 같다. 자연과 인공의 묘한 조화를 본다. 승리자의 입장에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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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승리자가 되고자 한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지만 죽는 그 순간만큼은 청정한 상태를 유지하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닦아야 한다. 수행을 하고 경전을 보는 이유에 해당된다.
 
꼰대가 걱정하는 것을 보면
 
오늘 새벽 경전을 보다가 인상적인 구절을 발견했다. 이는 “탐욕이 근심이고 미움이 근심이고 어리석음이 근심입니다.”(S41.5)라는 말이다. 나는 왜 이 말에 꼽혔을까? 노랑형광색 칠을 해놓았다. 그리고 새겼다.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한 세상이다. 페이스북에서 어떤 사람은 꼰대 같아 보인다. 나이가 여든은 넘은 것 같다. 젊은 세대들에게 불만이 대단하다. 주된 것은 예의가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자라던 시절에는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치 “라떼는 말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꼰대는 요새 젊은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아 걱정이다.”라고 했다. 이런 글을 접했을 때 답답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대책은 내놓지 않고 걱정만 하는 모습이 좋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글을 쓸 때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해법까지 내놓는다. 부처님도 그랬다. 부처님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며 사고와 팔고를 설했다. 이것으로 그쳤다면 염세주의자로 몰렸을 것이다. 법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부처님은 문제를 제기하고 해법까지 내놓았다. 부처님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팔고를 설했지만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라 하여 괴로움의 발생 원인을 설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서도 설했고 괴로움의 소멸방법에 대해서도 설했다. 그래서 가르침이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내려 온 것이다.
 
꼰대의 글을 보면 걱정 아닌 것이 없다. 젊은 세대에 대한 불만이 가득하다. 젊은 세대들에 적대감도 느껴진다. 심지어는 무례한 것들에 대해서는 쫓아가서 훈계를 한다. 전형적인 꼰대스타일이다.
 
꼰대는 걱정이라는 말을 달고 다닌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걱정을 없앨 수 있을까? 아마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다면 걱정이 없어서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시인은 슬픔을 노래한다. 시인의 시를 보면 거의 예외 없이 ‘슬프다’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이럴 때 슬퍼해서 슬픔이 없다면 슬픔이 없어서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걱정한다고 하여 걱정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슬퍼한다고 슬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걱정을 하면 할수록 걱정이 많아지고, 슬퍼하면 할수록 더욱더 슬퍼진다. 그래서 찟따장자는 수행승 까마부에게 “존자여, 탐욕이 근심이고 미움이 근심이고 어리석음이 근심입니다.”(S41.5)라고 말 했을 것이다.
 
유마거사의 모티브가 되는 찟따장자
 
머리맡에 쌍윳따니까야를 읽고 있다. 매일 자기전과 잠에서 깨어 났을 때 읽는다. 한두경 읽는 것이 고작이다.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에 새기며 읽어야 한다. 그런데 어제 밤에 찟따상윳따(S41)을 읽다 보니 “혹시 유마경의 모티브가 되는 상윳따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승경전에 유마경이 있다. 읽어 보지는 않았다. 십년도 전에 불교방송 경전공부 시간에 들었다. 재가의 거사가 수행승들을 혼내키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심지어 법의 장군이라 불리우는 사리뿟따 존자도 유마거사 앞에서는 한수 배우는 입장이 되었다.
 
니까야를 처음부터 읽고 있다. 현재 사부니까야 중에서 차례로 앙굿따라니까야, 맛지마니까야, 디가니까야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 지금은 쌍윳따니까야를 읽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니까야를 읽다 보면 놀랍게도 대승경전에 실려 있는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금강경에 실려 있는 ‘뗏목의 비유’는 맛지마니까야에서 발견된다. 시기적으로 맛지마니까야가 먼저 형성되었기 때문에 금강경에 실려 있는 뗏목의 비유는 오리지널 버전이 아니다. 그런데 이번에 찟따쌍윳따를 읽다가 “혹시 찟따장자는 유마거사의 모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찟따쌍윳따에서 찟따장자는 수행승들과 대화를 나눈다. 수행승이 찟따장자에게 질문하면 찟따장자가 알려 주기도 한다. 이렇게 본다면 찟따장자는 삼장에 통달한 정도의 위치가 아닐까 생각한다.
 
찟따장자와 유마거사와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겸손에 있다. 니까야에서 보는 찟따장자는 매우 겸손하다. 그러나 유마경에서 보는 유마거사는 무례해 보인다. 어느 정도인가? 법의 장군 사리뿟따 존자를 훈계하는 것도 부족해서 모욕까지 주는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의문의 게송이 있는데
 
쌍윳따니까야 까마부의 경에서 찟따장자는 수행승 까마부에게 한수 가르쳐 준다. 까마부 존자가 부처님에게 들은 게송이 있는데 그 의미를 설명해 달라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부서진 곳 없이 하얀색 지붕을 이은
수레가 한 바퀴를 구른다.
흐름을 끊고 결박 없이
근심 없이 오는 자를 보라.”(S41.6)
 
 
이 게송은 우다나 ‘밧디야의 경’(Ud.76)과 병행한다. 부처님이 추하고 못생긴 수행승 밧디야를 보고 읊은 게송이다. 추하고 불구인 밧디야에 대하여 광대한 위력을 지녔다고 수행승들에게 말하면서 읊은 것이다.
 
우다나에는 게송만 소개 되어 있다. 그런데 쌍윳따니까야에는 설명이 되어 있다. 그것도 재가의 장자 찟따가 수행승 까마부에게 설명한 것이다.
 
니까야를 보면 중복되는 가르침이 많다. 이 니까야에서는 간략하게 설명된 가르침이 저 니까야에서는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위 게송도 그런 것 중의 하나이다.
 
찟따장자가 해설한 게송의 내용
 
우다나를 보면 부처님이 불구자 밧디야를 칭찬했다. 추하고 불구이고 못생긴 밧디야를 경멸하는 수행승들이 있었는데 게송으로 알려 준 것이다. 그런데 게송에 대한 설명이 없다. 아마 그때 당시 부처님이 게송을 읊었을 때 수행승 까마부도 있었을 것이다.
 
수행승 까마부는 게송의 의미를 몰랐다. 까마부는 찟따장자에게 외운 게송을 말하고서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풀이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쌍윳따니까야를 보면 찟따장자는 까마부로부터 게송을 처음 들었던 것 같다. 이는 “존자여, 세존께서 설한 것입니까?”(S41.6)라며 물어 본 것으로 알 수 있다.
 
찟따장자는 게송의 의미를 파악했다. 이는 “그래서 장자 찟따는 잠시 침묵한 뒤에 존자 까마부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S41.6)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다음은 찟따 존자가 해설한 내용이다.
 
 
존자여, ‘부서진 곳 없이’이란 계행을 두고 한 말입니다. 존자여, ‘하얀색 지붕’이란 ‘해탈’을 두고 한 말입니다. 존자여, ‘한 바퀴’란 ‘새김’을 두고 한 말입니다. 존자여, ‘구른다’는 것이란 ‘앞으로 가고 뒤로 간다’는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존자여, ‘수레’란 ‘네 가지 광대한 존재로 구성되어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 생겨나고 유미죽으로 키워진 무상하고 붕괴되고 마멸되고 파괴되고 괴멸되는 것인 이 몸’을 두고 한 말입니다. 존자여, 탐욕이 근심이고 미움이 근심이고 어리석음이 근심입니다. 번뇌가 소멸한 수행승들에게 그것들은 버려지고, 뿌리째 뽑히고, 종려나무 그루터기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다시 생겨나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번뇌가 소멸한 수행승은 ‘근심이 없다.’라고 합니다. 존자여, ‘오는 자’ 란 ‘거룩한 남’을 두고 한 말입니다. 존자여, ‘흐름’이란 ‘갈애’를 두고 한 말입니다. 번뇌가 소멸한 수행승들에게 그것은 버려지고 뿌리 뽑혔고 종려나무 토막처럼 되었고 존재하지 않게 되며 미래에 다시 생겨나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번뇌가 소멸한 수행승은 ‘흐름 을 끊었다.’라고 합니다. 존자여, 탐욕이 결박이고 미움이 결박이고 어리석음이 결박입니다. 번뇌가 소멸한 수행승들에게 그것들은 버려지고 뿌리 뽑혔고 종려나무 토막처럼 되었고 존재하지 않게 되며 미래에 다시 생겨나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번뇌가 소멸한 수행승 은 ‘결박이 없다.’라고 합니다.”(S41.5)
 
 
 
찟따장자의 설명은 명쾌하다. 마치 부처님이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우다나에서는 게송만 소개 되어 있는데 이렇게 찟따쌍윳따(S41)에서는 게송에 대한 해설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 게송은 부처님이 설한 게송임에 틀림 없다.
 
우다나와 쌍윳따니까에는 게송이 병행하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수행승 까마부는 게송을 듣기만 했을 뿐 설명을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우다나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게송만 있을 뿐 설명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승 까마부는 찟따장자에게 설명을 부탁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니까야는 서로 연계 되어 있음을 말한다. 또한 니까야가 후대에 꾸며진 것이 아님을 말한다. 우다나 밧디야의 경과 쌍윳따니까야 까마부의 경1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경전 읽는 맛을 느낀다.
 
부서지는 것과 부수어야 할 것
 
찟따장자는 재가의 거사로서 유마거사의 롤모델이 된 것 같다. 대승경전 유마경을 누군가 지었을 때 아마 찟따장자를 모티브로 해서 유마거사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찟따장자는 게송에 대하여 단어 하나하나 풀이 했다. 특히 몸과 관련해서 “네 가지 광대한 존재로 구성되어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 생겨나고 유미죽으로 키워진 무상하고 붕괴되고 마멸되고 파괴되고 괴멸되는 것인 이 몸”(S41.5)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물질이라는 것은 부서지고 파괴되고 붕괴되고 마는 것임을 말한다.
 
몸은 부서지는 것이다. 그러나 부서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열반이다. 해탈한 자는 부서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해탈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게송에서는 탐, 진, 치가 부서지는 것이라고 했다.
 
열반은 어떤 것인가? 언어로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비유로서 밖에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벗이여, 탐욕이 부서지고 성냄이 부서지고 어리석음이 부서지면 그것을 열반이라고 부릅니다.”(S38.1)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이렇게 열반은 탐, 진, 치가 부서지는 것이다.
 
이 몸은 영원하지 않다. 나이가 듦에 따라 병이 든다. 장기가 하나 둘 망가지면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몸에 대하여 집착한다. 자신의 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몸만 집착하지 않는다. 마음도 집착한다. 마음도 내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근심과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근심과 걱정을 내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온을 내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대로 이루어진 몸은 부서지고 마는 것인데 마음의 작용으로 이루어진 마음부수 역시 부서지고 마는 것이다. 그럼에도 꽉 쥐고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에 대하여 “탐욕이 근심이고 미움이 근심이고 어리석음이 근심입니다. (rāgo kho, bhante, nīgho, doso nīgho, moho nīgho.)”(S41.5)라고 했다.
 
게송에서 “결박 없이 근심 없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탐, 진, 치와 관련 있다.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꽉 움켜 쥐고 있을 때 결박이 된다. 또한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겼을 때 근심, 걱정, 슬픔이 생겨난다.
 
몸은 부서지게 되어 있다. 부서지지 않게 할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근심하고 걱정하고 슬퍼한다. 이는 다름 아닌 집착이다. 결박되어 있는 것이다. 탐, 진, 치에 결박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탐욕이 근심이고 미움이 근심이고 어리석음이 근심”이라고 했다. 이런 논리를 슬픔에도 적용할 수 있다. “탐욕이 슬픔이고 미움이 슬픔이고 어리석음이 슬픔”인 것이다.
 
부서지는 것은 몸이다. 부서지지 말라고 해서 부서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부수어야 할 것은 탐, 진, 치이다. 부서지는 몸에서 탐, 진, 치를 부수면 근심과 걱정과 슬픔도 부서진다. 부서지는 것이 있고 부수어야 할 것이 있다.
 
자판을 두들길 때 펄펄 나는 것 같다
 
부처님 가르침은 혁명적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역설적이기도 하다. 근심이 탐욕이고 근심이 미움이고 근심이 어리석음이라는 가르침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근심과 걱정, 슬픔으로 가득한 자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 남의 업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을 내 뜻대로 하고자 했을 때 근심과 걱정, 슬픔이 생겨난다. 그것은 탐욕에 의한 것이고, 미움에 의한 것이고, 더 나아가 어리석기 때문이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다면 걱정이 없어서 정말 좋겠다. 슬퍼해서 슬픔이 없다면 슬픔이 없어서 정말 좋을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근심하고 걱정할수록, 슬퍼할수록 애만 탄다. 오온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사는 자에게 근심과 걱정과 슬픔이 생겨난다.
 
오늘 아침에도 신나게 썼다. 자판을 무서운 속도로 두들겼다. 이렇게 자판을 두들길 때 펄펄 나는 것 같다. 아픈 것도 모른다. 오늘도 해야 할 일을 한 것 같다.
 
 
2024-01-3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