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自洲)에서 나(atta)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오늘 새벽 쌍윳따니까야를 읽다가 새기고 싶은 내용을 발견했다. 그것은 자주법주(自洲法洲)에서 법에 대한 것이다.
자주법주는 빠알리어 “attadīpā attasaraṇā dhammadīpā dhammasaraṇā”를 한역한 말이다. 우리말로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법을 섬으로 삼는다.”라고 번역된다.
자주법주에 대한 글은 여러 차례 썼다. 글을 쓸 때마다 새롭다. 그것은 아직 다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전을 읽으면 늘 새로운 것은 아직 나의 것으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주법주에서 ‘법’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각주를 보면 주석을 인용하여 “여기서 법이라고 하는 것은 아홉 가지 출세간의 가르침(九出世間法: 四向四果와 涅槃)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해 놓았다. 이 말에 사무쳤다.
부처님이 설한 담마(dhamma)를 법(法)으로 번역한다. 담마에는 진리, 원리, 가르침, 법 등 다양한 뜻이 있다. 심지어 ‘것’이라고도 번역된다. 이것 저것 할 때 그 ‘것’을 말한다.
자주법주에서 담마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구출세간법이라고 했다. 구출세간법은 사향사과와 열반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야 자신을 섬으로 삼을 수 있음을 말한다.
불교를 공부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불교수행을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도와 과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도와 과를 이룬다는 것은 열반을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열반을 체험하여 불교적 지혜, 즉 무상, 고, 무아의 지혜를 얻어야 성자의 흐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을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눈다. 범부와 성자를 말한다. 범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팔랑개비와 같다. 왜 그런가? 세속적이기 때문이다. 세속에 사는 사람들은 이익과 불익, 칭찬과 비난, 명예와 불명예, 그리고 행복과 불행이라는 여덟 가지 바람에 흔들리며 살아간다. 이와 같은 여덟 가지를 여덟 가지 세간법이라고 한다.
세간법이 있으면 출세간법이 있기 마련이다. 출세간법 아홉 가지이다. 사향사과와 열반, 이렇게 아홉 가지를 출세간법이라고 한다. 그런데 출세간법을 증득하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저 높은 곳에 있는 바위산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바람이 심하게 불어도 흔들림 없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범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자이고 성자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자이다. 범부는 사소한 이익에 기뻐하고 사소한 손해에 슬퍼한다. 마치 주식 차트에 일희일비하는 것 같은 자와 같다. 그러나 성자는 주식과 같은 사행성 도박을 일체 하지 않기 때문에 일희일비 하지 않는다.
범부는 타인에게 의지한다. 성자는 자신에게 의지한다. 범부는 외롭다고 말하지만 성자는 고독하다고 말한다. 외롭다고 말한 것은 타인에게 의지하는 것이고 고독하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의지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자주법주를 말했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말했다.
“아난다여, 지금이든 내가 멸도한 뒤에든지 아난다여, 어떠한 수행승들이든지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지 남을 귀의처로 삼지 말고, 가르침을 섬으로 삼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삼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지 않는 다면 아난다여, 나에게 그 수행승들은 누구이든 배우고자 열망하는 자들 가운데 최상의 존재들이 될 것이다.”(S47.9)
이 가르침은 쌍윳따니까야 ‘질병의 경’에 실려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자주법주 가르침은 니까야 도처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D16)과 쌍윳따니까야 ‘자신을 섬으로의 경’(S22.43)에서도 병행한다.
부처님은 자신과 법을 섬으로 삼으라고 했다. 이렇게 말한 것은 윤회의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섬이기 때문이다. 이는 거센 흐름에서 안전한 것이다.
네 가지 거센 흐름(暴流)가 있다. 그것은 감각적 욕망의 거센 흐름, 존재의 거센 흐름, 견해의 거센 흐름, 무명의 거센 흐름을 말한다. 범부들은 이런 거센 흐름에 휩쓸려 버린다. 그러나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안심이다. 마치 폭류를 건너 저 언덕에 서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윤회의 바다에서 섬은 안전한 곳이다. 폭류를 건너 일단 섬에 있으면 휩쓸리지 않는다. 이는 세속팔풍이라고 일컬어지는 이익과 불익, 칭찬과 비난, 명예와 불명예, 행복과 불행이라는 바람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그래서 바람에 따라 방향을 달리하는 팔랑개비처럼 되지 않고 저 바위산과 같이 되는 것이다.
자신을 섬으로 만들어 놓아야 한다. 자신을 섬으로 만들어 놓으면 폭풍우가 몰아쳐도 안심이다. 섬이라는 피안으로 건너 갔을 때 더 이상 세속팔풍에 이러저리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 이렇게 자신을 섬으로 만들어 놓았을 때 자신이 자신을 보호하게 된다.
사람들은 외롭다고 한다. 특히 나이를 먹으면 더욱 외로움을 타는 것 같다. 둘이 같이 살다가 한사람이 죽었을 때도 외롭다고 말한다.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또 다른 배우자를 찾아 간다.
사람들은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늘 즐길거리를 찾는다. 마음은 늘 외부 대상에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감각을 만족시켜 주지 않으면 참지 못한다. 어른이나 아이나 즐길거리를 찾는다.
즐길거리를 찾는데 남녀노소와 빈부귀천이 없다. 각자 형편에 맞는 대로 즐길거리를 찾는다. 부자는 예산이 풍부하기 때문에 도박 등 보다 자극적인 즐길거리를 찾는다. 가난한 자는 예산이 풍족하지 않기 때문에 TV나 유튜브 보는 것을 즐길 것이다. 어른은 자동차를 몰고 드라이브 하는 것을 즐기지만 아이는 장난감 자동차 굴리는 것을 즐길 것이다.
범부들은 끊임없이 즐길거리를 찾아 헤맨다. 잠시도 눈을 가만 두지 않는다. 즐길거리가 없으면 심심해 한다. 무료한 것을 참지 못한다. 그런데 조금하다 보면 싫증난다는 것이다. 권태가 오면 잠을 잘 것이다.
즐길거리만 찾다 보면 외부대상에 의존하게 된다. 사람에게도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자의 흐름에 들면 자신에게 의존한다. 자신을 섬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자신의 내면에 의존한다.
범부는 감각을 즐긴다. 감각을 즐기는 것이 낙이고 행복인 것이다. 늘 외부 대상에 마음이 가 있다. 이런 사람에게 명상 하라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오분도 앉아 있기 힘들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자는 늘 새기며 알아차린다. 외부 대상에 마음에 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새김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외부 대상에 마음이 휘둘리지 않는다. 세상사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명상을 하면 몇 시간이든지 않아 있을 것이다.
부처님은 자신을 섬으로 하라고 했다. 북방불교에서는 자신을 등불로 하라고 했다. 이렇게 차이 나는 것은 디빠(dipa)를 달리 해석했기 때문이다. 남방에서는 섬으로 해석했고 북방에서는 등으로 해석한 것이다.
부처님은 자신을 버리라고 했다. 그럼에도 자신을 섬으로 삼으라고 했다. 모순처럼 보인다. 초기불전연구원 번역본의 각주에 따르면, “자신(atta)이란 바로 법(dhamma)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다.”(SAT.ii.175)라며 복주석을 인용 했다. 자신을 법으로 했을 때 “법을 섬으로 삼고”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스럽지 않다.
자신을 섬으로 삼으라고 했다. 복주석과는 달리 해석해 본다. 여기서 자신은 관습적 표현인 것 같다. 왜 그런가? 일반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말하는 나로 본다. 이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 수 있다.
“해야 할 것을 다 마치고 번뇌를 떠나
궁극의 몸을 이룬 거룩한 수행승이
‘나는 말한다.’고 하든가
‘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한다.’고 하여도
세상에 불리는 명칭을 잘 알아서
오로지 관례에 따라 부르는 것이네.”(S1.25)
번뇌 다한 아라한은 나를 세우지 않는다. 무아의 성자에게 나라는 말은 단지 시설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적으로 표현된 명칭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아라한이 나라고 말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오로지 관례에 따라 부르는 것이네.”(S1.25)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깨닫고 난 다음 세상 사람들에게 설법을 했다. 그런데 부처님은 “내가”라는 말을 사용했다. 자아를 인정하지 않는 자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나라는 말을 쓸 수가 없다. 그럼에도 나라는 말을 쓰는 것은 세상의 관례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불리는 명칭을 잘 알아서 오로지 관례에 따라 부르는 것이네.”(S1.25)라고 한 것이다.
부처님은 자주법주를 설명하면서 나(atta)를 사용했다. 초기불전연구원 번역본의 각주에서는 복주석을 인용하여 앗따는 담마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본의 각주에서는 이런 내용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아마도 앗따라는 말을 관용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세상 사람들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섬으로 삼고(attasaraṇā)”라고 했을 것이다.
불교인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살아간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이 삼보 중에 하나인 법보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가르침에 크게 의지해야 함을 말한다.
종종 TV나 유튜브에서 새에 대한 영상을 본다. 새가 짝을 맺어 알을 낳고 부화시키고 키우는 과정에 대한 것이다.
새의 새끼는 어미 새에 크게 의존한다. 어미가 물어다 준 먹이를 먹고 폭풍성장한다. 마침내 어느 정도 자랐을 때 날개 짓하며 둥지를 박차고 날아간다.
새에 대한 영상을 보면 자주법주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쉽다. 처음 부처님 가르침을 접한 자는 부처님 가르침에 크게 의존한다. 그러다가 성자의 흐름에 들어서면 더 이상 의존하지 않게 된다. 그 다음부터는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가르침을 섬으로 삼지만 다음에는 자신을 섬으로 삼는다. 그렇다고 하여 가르침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 가르침에 대한 집착만 버리는 것이다.
오늘 새벽 경전을 읽다가 크게 새겨 두고 싶은 주석을 발견했다. 자주법주에서 법은 구출세간법이라고 했다. 사향사과와 열반을 말한다. 이제까지 법에 대하여 단순하게 부처님 가르침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각주를 보고서 눈이 번쩍 뜨인 것이다.
자주법주에서 법이 구출세간법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크게 깨달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까지 궁금하게 생각했었던 것이 한꺼번에 풀린 것 같았다. 이런 것은 누군가 가르쳐 주지 않으면 모른다. 경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있기 때문에 발견한 것이다.
자신을 섬으로 삼아야 한다. 자신을 섬으로 삼으면 안전하다. 섬은 윤회의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다. 감각적 욕망, 존재, 견해, 무명이라는 폭류를 건넜기 때문에 안전하기가 섬과 같은 것이다.
윤회의 바다에서 섬은 안전한 곳이다. 그런데 섬은 열반을 상징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는 무위쌍윳따에서 “수행승들이여, 섬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그것을 수행승들이여, 섬이라고 한다.”(S43.40)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열반은 탐, 진, 치가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이 상태가 가장 안전하다. 그래서 안전하기가 섬과 같다고 말한다. 또한 안온하기가 동굴같다고 말한다. 모두 열반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자신을 섬으로 삼으면 자신이 자신을 보호하게 된다. 자신을 등불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섬으로 삼았다는 것은 더 이상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 악처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안전한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많이 잡아도 일곱 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게 되어 있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윤회가 끊어지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자신에 의지하게 된다. 자신을 섬으로, 자신을 등불로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다른 것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지 남을 귀의처로 삼지 말라.”(S47.9)라고 했다.
자신을 섬으로 삼으면 자신이 의지처가 되고 자신이 귀의처가 되고 자신이 피난처가 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성자의 흐름에 들면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는다. 혼자서도 잘 사는 것이다.
2024-02-2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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