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더 이상 배우려 하지 않는 꼰대

담마다사 이병욱 2024. 3. 8. 11:13

더 이상 배우려 하지 않는 꼰대
 
 
모임에서는 흔히 ‘선생’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선생이라는 용어는 매우 생소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한번도 선생이었던 적이 없었고 한번도 선생이라고 불리어졌던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2016년의 일이다. 그 해 봄에 전재성 선생을 찾아 갔다. 전재성 선생은 나에게 “이선생”이라고 호칭했다. 참으로 어색했다. 평생 살아 오면서 한번도 선생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선생이라니!
 
선생이라는 호칭에는 존경의 의미가 담겨 있다. 학교 선생을 생각하면 된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그 학교 선생을 말한다. 그럼에도 선생이라고 했다. 나에게 “씨(氏)”라고 하지 않고 선생이라는 호칭을 붙여 주었을 때 정말 선생이 된 것 같았다.
 
요즘 글을 쓰면 누구에게나 선생이라는 호칭을 붙여 준다. 사람을 만났을 때 대화할 때도 “선생님”이라고 호칭을 붙여 준다. 이는 그 사람을 인정해주는 말과 같다. 오랜 세월 살아 오면서 전문가가 된 것으로 간주하여 붙여 주는 아름다운 말이다.
 

 
재가불교단체에서는 선생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그런데 이를 좀더 개량한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것은 “샘”이라는 말이다. 흔히 말하는 “쌤”이 아니라 “샘”이다.
 
어느 때인가 “샘님”이라고 호칭한 적이 있다. 이런 글에 지적을 당했다. 호칭할 때 샘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샘이라는 말에는 이미 존칭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님자를 붙이면 이중으로 존칭하는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부를 때 난감하다. 대개 직책에 님자를 붙여 준다. 그러나 모임에서는 모두 샘으로 통일해야 한다. 그럼에도 잘 나오지 않아 샘님이라고 할 때도 있다.
 
모임에서 나이 많은 사람도 있다. 학교 선배도 있을 것이다. 이럴 때 어떤 이는 “선배님”이라고 말한다. 이럴 경우 그 학교 출신도 아니고 젊어서부터 그 모임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소외되기 쉽다.
 
어떤 사람은 모임에서 “형님”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과 나이가 더 많은 사람으로서 친한 경우에 붙여 준다. 그러나 옆에서 지켜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불편하다. 마치 마피아처럼 하나의 패밀리를 형성하는 것 같다.
 
세상에 나온 지 벌써 9년 되었다. 2015년 처음으로 재가단체에 가입했으니 9년 된 것이다. 이전까지는 집과 일터를 왕래했다. 그런 세월을 10년 살았다. 그리고 글만 썼다.
 
2006년 이후 거의 매일 블로그에 글만 썼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과 접촉이 없었다. 그런데 세상에 나와 보니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아주 오랜 세월 함께한 사람들이었다. 학교 다닐 때부터 활동하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언젠가 한번 “형님” 소리를 들었다. 또 언젠가 한번 “선배님” 소리를 들었다. 매우 생소했다. 마치 선생 소리 듣는 것만큼이나 어색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부르는 호칭임을 알았다. 좀더 친근감을 갖기 위하여 부르는 것으로 본다.
 
모임에서 인간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제까지 경전을 보고 글을 쓰면서 느낀 것은 ‘우정의 관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에 자애가 있다. 자애라는 말은 빠알리어로 멧따(metta)를 번역한 말이다. 그런데 이 멧따와 유사한 말은 친구를 뜻하는 밋따(mitta)가 있다는 사실이다.
 
밋따에 대한 또 다른 뜻은 우정(friendship)다. 이렇게 본다면 멧따라는 말은 친구와의 우정이라는 근본적인 뜻이 있다.
 
멧따는 영어로 'amity; benevolence’의 뜻이다. 이는 우호적인 관계를 뜻한다. 이와 같은 우호적 관계는 나이와 성별을 초월한다. 우호적인 관계가 형성되면 어린아이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 물론 선생과도 친구가 될 수 있다.
 
부처님은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다. 그렇다고 부처님은 스승으로서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이는 “세존을 좋은 벗으로 삼아”(S3.18)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진리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친구로 삼으라는 말과 같다.
 
진리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친구는 의지처가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과 사귀는 것이 청정한 삶의 전부라고 알아야 한다.” (S3.18)라고 말했다. 이렇게 본다면 스승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서로가 서로를 끌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최상의 모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최상의 모임이란 무엇인가? 그 모임 가운데 장로수행승이 사치하지 않고, 태만하지 않고 탈선을 멍에로 꺼리고 멀리 여읨을 선호하고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열심히 정진한다. 그의 후계자도 자각적으로 본 것을 따라 한다. 그들도 사치하지 않고 태만하지 않고 탈선을 멍에로 꺼리고 멀리 여읨을 선호하고 도달하지 못한 것에 도달하고,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열심히 정진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최상의 모임이라고 한다.”(A3.93)
 
 
최상의 모임은 정진의 모임이다. 모임에는 반드시 배울 사람이 있다. 그래서 그 사람과 같이 되고자 한다. 그 사람이 결국 스승이 된다. 그런데 그 사람은 스승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동료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정진의 모임은 우정의 모임이 된다.
 
고미숙 선생이 있다. 유튜브 스타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방송 스타라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수많은 강연을 했기 때문에 선생임에 틀림 없다. 그런데 청년붓다 강연 시간에 “저는 여러분의 좋은 도반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말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J스님은 강연을 참 잘한다. 불교계에서 스타 강사나 다름 없다. 그런데 스님은 항상 스승의 위치에 있는 것 같다.
 
언젠가 유튜브에서 J스님의 말을 들었다. 스님에 따르면 청중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래서 “개무시하듯 말하면 됩니다.”라고 했다.
 
아직까지 한번도 강연을 해 본적이 없다. 만약 대중 앞에서 말을 한다면 떨려서 말을 하지 못할 것 같다. 그런데 J스님의 말을 들으면 용기가 날 것 같다.
 
청중들을 개무시하면 강연이 잘 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청중들은 무지하기 때문에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알려 주면 된다.”라는 식으로 마구 말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청중을 개무시하듯 강연하면 떨리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다. 꼰대라는 소리를 듣기 쉽기 때문이다.
 
한번 스승이면 영원한 스승일까? 한번 선생이면 영원한 선생일까? 스승이라고 하여 선생이라고 하여 완전한 사람일까?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모두 학인, 배우는 자로 본다.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모두 배우는 자이다. 그럼에도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며 가르치려 든다면 자만이 될 것이다. 아직 배울 것이 많음에도 조금 아는 것으로 스승 노릇 하려 한다면 ‘꼰대’라는 소리를 듣기 쉽다.
 
오늘 아침 경전을 보다가 눈에 띄는 구절을 발견했다. 어쩌면 내가 찾고 있던 구절인지 모른다. 그것은 “벗이여, 싸리뿟따여, 이제 배울 것이 없는 무학이라도 수행승은 네 가지 새김의 토대를 성취해야 합니다.”(S52.5)라는 말이다.
 
아라한은 번뇌가 소멸된 자이다. 그래서 더 이상 배울 것도 없고 더 이상 닦을 것도 없다. 이러한 아라한의 상태에 대하여 무학도(無學道)라고 한다. 그렇다면 무학도의 아라한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야 할까?
 
경에서는 사리뿟따가 묻고 아누룻다가 답한다. 사리뿟따는 “벗이여, 아누룻다여, 이제 배울 것이 없는 무학으로서 수행승은 어떠한 원리를 성취해야 합니까?” (S52.5)라며 물어 보았다. 이에 아누룻다는 무학이라도 할 일이 있음을 말했다. 그것은 네 가지 새김의 토대, 즉 사념처를 닦는 것이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 어느 정도이어야 할까? 이는 “나는 예전에 들은 모든 가르침을 이 몸으로 경험하여 지혜로 꿰뚫어 본다.”(S48.50)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여기서 들은 것은 배운 것을 말한다. 배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래서 몸으로 체험하여 알았을 때 지식은 지혜가 된다.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배워야 한다. 그런데 아라한이 되고 나서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념처이다. 그래서 "이제 배울 것이 없는 무학이라도 수행승은 네 가지 새김의 토대를 성취해야 합니다.”(S52.5)라고 말했다.
 
번뇌가 다한 아라한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는 다음과 같은 아라한의 인생관으로 알 수 있다.
 
 
죽음을 기뻐하지도 않고
삶을 환희하지도 않는다.
일꾼이 급여를 기다리듯,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06)
 
죽음을 기뻐하지도 않고
삶을 환희하지도 않는다.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07)
 
 
아라한은 조용히 때를 기다린다. 어느 때인가? 죽음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라한에게 죽음이라는 말은 시설되지 않는다. 번뇌가 남아 있는 자에게는 오온의 죽음은 진짜죽음이 되어서 재생되지만, 번뇌가 남아 있지 않은 아라한은 자아가 시설되지 않기 때문에 불사(不死: amata)가 된다.
 
아라한은 죽지 않는다. 아라한은 불사이기 때문에 불생(不生)이 된다. 오온이 부서졌을 때 다시 재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라한은 마치 월급생활자가 월급날을 고대하듯이 완전한 열반에 들 날을 조용히 기다린다는 것이다.
 
도를 이루면 하루를 살아도 여한이 없다고 말한다. 이는 법구경에서 “불사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불사의 진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4)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아라한은 하루를 사는 것이나 주어진 수명대로 사는 것이나 같은 것이 된다.
 
아라한에게 오래 사는 것은 의미가 없다. 무학도를 이루었으면 지금 당장 죽어도 좋은 것이다. 그럼에도 삶도 죽음을 기뻐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어찌 내가 오래 살아야 한단 말인가? 나는 삶을 원하지도 않는다.”(Thag.A.II.257)라고 했다.
 
아라한은 생사를 초월한 존재이다. 아라한에게 자아는 없다. 아라한은 무아의 성자이기 때문에 삶이라는 말도 죽음이라는 말도 성립되지 않는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다름 아닌 ‘생사일여(生死一如)’의 마음인 것이다.
 
생사일여의 아라한은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그렇다고 삶을 즐기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아라한은 무슨 재미로 살아갈까? 이런 의문에 대하여 아누룻다는 “이제 배울 것이 없는 무학이라도 수행승은 네 가지 새김의 토대를 성취해야 합니다.”(S52.5)라고 말했다. 이 말은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07)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본다.
 
부처님은 항상 깨어 있음을 강조했다.  이는“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는 것과 음식을 먹을 때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과 깨어있음에 전념하는 것이다.”(S35.239)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깨어있음에 전념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아라한은 죽음의 순간까지 새김과 알아차림을 유지한다. 모두 다 깨달았다고 하여 막행막식하지 않는다. 아라한이라도 감각의 문을 수호하고 음식절제를 하고 늘 깨어 있는 삶을 산다. 그렇다면 어떻게 늘 깨어 있을 수 있을까? 이는 “새김을 확립하여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눕는다.” (S35.239)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잠을 잘 자는 사람이 있다. 머리가 베개에 닿자마자 코를 고는 사람이다. 그런데 깨달은 자도 잠을 잘 잔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인가? 호흡을 관찰하여 들숨에 자서 날숨에 깨는 것이다. 이는 깨어날 것을 염두에 두고 잠을 자는 것과 같다.
 
선가에 몽중일여(夢中一如)라는 말이 있다. 꿈속에서도 화두를 드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몽중일여라는 말은 없다. 그래서 “잠 잘 때는 시체처럼 뒤척이지 말고 자라”라고 말했다. 이렇게 잤을 때 꿈은 있을 수 없다.
 
아라한은 해야 할 일을 다 했음에도 일을 한다. 어떤 것인가? 그것은 새김(sati)과 알아차림(sampajāna)이다. 어느 정도인가? 상수멸에 들었다가 출정했을 때 “오히려 그의 마음은, 이전에도 그렇게 닦여져 왔듯이, 그를 그러한 상태로 이끕니다.”(S41.6)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상수멸에서 출정했을 때 ‘그러한 상태로(tathattaya)’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새김의 상태 또는 지성적인 상태”라고 했다. 마치 잠에서 깨었을 때 사띠와 삼빠자나가 있는 상태와 같은 것이 된다. 그래서 “ ‘이전에도 그렇게 닦여져 왔듯이’는 지멸을 성취하기 전에 ‘ 당시에 나는 새김이 없었지만, 이후에는 새김을 확립할 것이다.’라고 결정하는 것과 관계된 표현이다.”(Srp.III.97)라고 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그러한 상태로(tathattaya)’라는 말에 대하여 달리 해석했다. 이는 “멸진정에 들기 전에 나는 이 정도의 시간동안 마음이 없게 되었다가 그 마음에 마음이 있게(sacittaka) 될 것이다.’라고 기간을 한정하는 마음을 말한다.”(SA.iii.95)라고 주석을 인용하여 설명해 놓았다.
 
빅쿠보디는 ‘tathattaya’와 관련하여 어떻게 설명해 놓았을까? 303번 각주를 보니 “Before attaining cessation, at the time of delimiting the duration, he resolves, “I will be mindless for such a time and afterwards will again become mindful.””(cdb, 303번 각주)라고 설명해 놓았다. 이 말은 초기불전연구원에서 각주한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상수멸에 들어 갔을 때는 마치 시체처럼 잠 자는 것과 같은 상태로 본다. 꿈을 꿀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몽중일여라고 볼 수 없다. 그런데 입정하기 전에는 사띠와 삼빠자나가 유지되어 있었고, 출정할 때 역시 사띠와 삼빠자나가 유지된다. 이는 잠 잘 때 깰 것을 염두에 두고 잠을 자는 것과 같다.
 
 
무학도의 아라한은 더 이상 배울 것도 없고 닦을 것도 없다. 그렇다고 남은 여생을 즐기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늘 새김(사띠)과 알아차림(삼빠자나)을 유지하고 있다. 잠을 잘 때는 깰 것을 염두에 두고 자고, 멸진정에 들 때 역시 출정할 때를 염두에 둔다. 이는 속칭 꼰대라는 사람과 대조적이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선생이 된다. 인생을 살만큼 살았다면 누구나 선생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머리가 희다고 하여 모두 선생은 아니다. 그가 탐, 진, 치로 산다면 단지 나이만 먹은 늙은이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회에서 배운 자는 선생이 된다. 교단이나 강단에 섰을 때 존경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남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공부가 다 된 사람들일까?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행복이라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어느 행복도 아라한의 행복만 못하기 때문이다. 즐거운 느낌이 사라진 것이 아라한의 행복이다. 행복이라고 느끼지 않는 것이 최상의 행복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스승 행세를 해서는 안된다.
 
번뇌 다한 무학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배울 것도 없고 더 이상 닦을 것도 없는 아라한일지라도 배운다. 무엇을 배우는가? 사념처를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 새김과 알아차림을 유지한다.
 
이 세상에는 자칭타칭 선생들이 많다. 그들이 가르치려 할 뿐 배우려 하지 않는다면 꼰대라고 말할 수 있다. 더 이상 배울 것도 없고 더 이상 닦을 것도 없는 아라한도 늘 새기며 알아차리며 살고자 한다. 더 이상 닦으려 하지 않고 스승의 권위만 내세운다면 꼰대가 된다. 더 이상 배우려 하지 않고 가르치려고만 한다면 꼰대가 된다.
 
 
2024-03-0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