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우리는 공업중생(共業衆生)일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4. 5. 7. 12:07

우리는 공업중생(共業衆生)일까?

 

 

흔히 공업중생(共業衆生)이라고 한다. 마치 공공재를 공유하는 것처럼 업도 공유함을 말한다.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할까?

 

공업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긍정적인 것이 있고 또 하나는 부정적인 것이 있다. 환경문제와 책임문제를 들 수 있다.

 

환경론자들은 늘 지구의 위기를 말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말한다. 이럴 때 공업론은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어떤 이가 한국의 불교가 이렇게 타락한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라고 말한다면 공업론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화엄경 여래출현품에

 

업은 행위에 대한 것이다. 초기경전에서 업은 세 가지, 즉 신체적 행위, 언어적 행위, 정신적 행위에 대한 것이다. 이는 모두 개인에 해당된 것이다. 그런데 공업론에 따르면 공동으로 지은 업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초기경전에 공업이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승경전에서 한번 보았다. 화엄경 여래출현품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불자들이여, 비유를 들자면 삼천대천세계가 한 가지 인연이나 한 가지 사실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한량없는 인연과 한량없는 사 실로써 이루어진다. 이른바 큰 구름을 일으켜 큰 비를 내리고 네 가지 풍륜(風輸)이 서로 지속하여 의지가 된다.

 

네 가지란, 하나는 능히 지님[能持]이니 큰 물을 지니기 때문이며, 둘은 능히 소멸함[能消]이니 큰 물을 소멸시키기 때문이며, 셋은 건립함이니 모든 처소를 건립하기 때문이며, 넷은 장엄함이니 장엄하여 퍼뜨림이 다 교묘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모두 중생들의 공업(共業)과 보살들의 선근(善根)으로 일으키는 것인데, 그 가운데서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저마다 마땅한 대로 받아서 쓰게 한다. 이와 같이 한량없는 인연으로 삼천대천세계가 이루어지는데 법의 성질이 으례 그런 것이고, 내는 이도 없고 짓는 이도 없고 아는 이도 없고 이루는 것도 없지만 저 세계가 성취 된다.”(화엄경 여래출현품, 신역 화엄경 166-167)

 

 

법정스님이 편역한 신역 화엄경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공업에 대하여 한 가지 인연이나 한 가지 사실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한량없는 인연과 한량없는 사 실로써 이루어진다.”라고 했다. 이는 연기법적으로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화엄경은 읽기가 난해하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심오한 것인지 모른다. 공업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네 가지 풍륜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뜻을 잘 모르겠다.

 

불교경전에서 공업에 대한 근거는 화엄경 이외에서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공업과 관련해서 법정스님의 주석을 보면 공동으로 선악의 행위를 하고, 공동으로 고락의 과보를 받는 것이라고 설명해 놓았다. 아마 사전적 의미의 설명이라고 본다.

 

부정적 의미의 공업론

 

공업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다. 먼저 부정적 의미의 공업이 검색되었다. 불교 적폐 청산에 앞장 섰던 허정스님은 불교닷컴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인간 세상의 다양한 사건을 모두 공업(共業)이라고 설명하면 원인을 밝힐 수 없는 모호한 사건으로 전락하고 책임을 묻는 것도 힘들어진다. 예를 들어 지구의 온난화 문제에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나라별로 큰 차이가 나고 있다. 중국이 가장 많이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데 그 배출량은 2등인 미국의 2배에 해당하고 우리나라가 배출하는 양보다 17배나 많다. 이러한 구체적인 차이를 거론하며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라들에 책임을 거론하지 않고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의 공업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중국이나 미국에게 면죄부를 주는 꼴이다. 지구 온난화가 우리의 공업이라고 말한다면 지금까지도 원시적인 모습으로 사는 아프리카 부족과 아직도 농업과 같은 1차산업이 주요 산업인 나라들은 참으로 억울하다. 이처럼 구체적인 사실을 파악하고 책임의 경중(敬重)을 가려야 할 일을 공업(共業)이라고 치부해 버리면 책임소재가 불분명해지고 죄인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결과를 초래한다.”([기고] 공업(共業)이란 무엇인가 - 불교닷컴 (bulkyo21.com, 2022-11-24)

 

허정스님의 칼럼은 공업론의 함정에 대한 것이다.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고 하여 면죄부를 줄 수 있음을 말한다.

 

업은 개인사에 대한 것이다. 이를 확장하여 사회에 적용했을 때 긍정적인 것도 있지만 부정적인 것도 있다.

 

진리는 하나이어야 한다. 진리가 두 개라면 진리로 볼 수 없다. 하나는 진리이고 하나는 진리가 아닌 것이라면 진리가 아닌 것이 된다. 공업에는 긍정적인 것도 있고 부정적인 것도 있어서 진리라고 보기 어렵다.

 

공업은 악용될 수 있다. 이는 공동사회가 짓는 업을 공업이라고 한다.”라는 사전적 의미가 이에 해당된다. 잘못을 저질러 놓고서 사회탓으로 돌린다면 공업론이 악용되는 것이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공업에 대한 근거가 또 하나 발견되었다. 이는 구사론에서 사회구성원들이 함께 짓는 업을 공업이라고 한 것이다.

 

구사론은 경서가 아니라 논서이다. 부처님 말씀이 아니라 논사의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화엄경에 실려 있는 공업이야기가 유일한 경전적 근거가 된다. 그러나 대승경전은 부처님 원음이라고 보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이라고 보기 힘들다.

 

초기경전, 즉 니까야에는 공업이라는 말은 없다. 행위를 뜻하는 깜마(kamma)라는 말은 무수하게 등장하지만 사회구성원의 공동책임을 뜻하는 공업이라는 말은 찾을 수 없다.

 

초기경전에서 언급되어 있는 업은 개인업에 대한 것이다. 이를 개별업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부처님이 업이라고 했을 때 이는 당연히 개인업에 대한 것이다.

 

업은 공유될 수 없다

 

나는 어떻게 여기 있게 되었는가? 이는 업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 지은 행위로 인하여 여기 있게 된 것이다. 과거에 지은 행위가 익어서 여기 있게 된 것이다. 조건이 맞아 떨어져서 과보로 나타난 것이다.

 

이 세상에는 인간도 있고 축생도 있다. 보이지 않는 존재도 있다. 이는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의 업을 지어서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다.

 

색계 정거천이 있다. 불환자들만 가는 곳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성자가 된 자들이 가서 머무르는 곳이다. 그곳에서 수명대로 살다가 완전한 열반에 든다.

 

색계 정거천은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텅텅 빌 때가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사라졌을 때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때인가 부처가 출현하여 정법을 펼치면 정거천은 다시 있게 된다.

 

정거천에 태어나는 존재는 자신이 지은 업에 따른다. 정거천에 태어날 업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정거천에 있는 존재들은 공업을 지은 것이 된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다. 끼리끼리 논다는 뜻이다. 그래서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는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 반대로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는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 이는 업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도 일종의 공업이라고 할 수 있다.

 

업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공유될 수 없다. 마치 업에 대하여 버스나 지하철처럼 공공재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각각 개인의 업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회구성원의 공동책임을 뜻하는 공업의 개념을 도입한다면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몸의 신진대사를 공업으로 본다면

 

오늘 새벽 밀린다팡하를 보다가 공업에 대한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구사론에서 말하는 사회구성원의 공동책임을 뜻하는 공업과는 거리가 멀다. 어떤 것인가?

 

밀린다왕이 물었다. 왕은 존자 나가쎄나여, 이러한 다섯 가지 감역은 그 다양한 업들로 생겨난 것입니까? 혹은 동일한 업으로 생겨난 것입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밀린다왕은 왜 이렇게 물었을까? 이는 공업을 묻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대승경전과 대승논서에 언급되어 있는 공업이 아니다. 사회구성원의 공동책임을 말하는 공업이 아니라 감각기관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밀린다팡하 교정본 각주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MKQ. 191-192에 따르면, 업설을 인정하지 않는 그리스 인에 의하면, 한 개인의 모든 감각기관이 서로 다른데, 그럼에도 모든 인간에게 각각의 감각기관이 일반적으로 유사성에 관하여. 그냥 단순히 과거의 업에 기초한다고 설명하여도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각 개인의 신체에 있는 감각과 대상과의 대응관계(āyatana)의 질서는 만인에게 공통된 것이기 때문에 각 개인의 선악의 행위인 업과는 무관한 것이다. 하물며 개개인의 감관 내지 대상이 행위의 주체로서 업을 만든다고 생 각할 수 없다. 여기서 나가쎄나가 말하는 업은 불공업(不共業: 개인에게 고유한 업)이 아니라 만인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공업(共業)을 의미하며 자연필연성에 상 당하는 경우의 업의 관념에 의해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의 자연법칙(physis)에 가까운 것이다.”(밀린다팡하 229번 각주)

 

 

밀린다왕의 공업 개념은 감각기관에 대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감각기관에서 짓는 행위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것임을 말한다. 그래서 공업이라고 했다. 사회구성원의 공동책임을 뜻하는 공업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눈이 있어서 형상을 본다. 이런 것은 의도하지 않은 것이다. 단지 감각기관의 작용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의도가 실리면 업이 된다. 그런데 밀린다왕이 말하는 공업개념은 신체활동에 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몸은 유기체이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각 신체기능이 작동된다.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되는 것은 나의 의지와 무관한 것이다. 먹은 음식이 열 번 가량 변하여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뼈가 되는 것도 나의 의지와는 무관한 것이다.

 

몸의 신진대사는 나의 의지와 무관하다. 눈이 있어서 대상을 보는 것 또한 나의 의지와 무관하다. 이와 같은 신체적 작용은 선악의 행위를 만드는 것과 무관하다. 그런데 이런 신진대사나 감각기관의 작용은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이다. 밀린다왕은 이를 공업으로 보고 있다.

 

밀린다왕은 만인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에 대하여 공업이라고 했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사회구성원의 공동책임을 뜻하는 공업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밀린다 왕은 시각이나 청각 등 다섯 가지 감역에 대하여 공업인지 아니면 개별업인지 물어 본 것이다. 이에 나가쎄나 존자는 대왕이여, 다양한 업들로 생겨난 것이지 동일한 업으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다양한 업은 개별업을 말하고, 동일한 업은 공업을 말한다.

 

밀린다왕은 그리스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이는 한 개인의 모든 감각기관이 서로 다름에도 일반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각각의 감각기관이 일반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에 공업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누구나 공업을 짓는 자가 된다.

 

씨앗의 비유를 들어

 

나가쎄나 존자는 공업을 부정했다. 다섯 가지 감역에 대하여 다양한 업들로 생겨난 것이지 동일한 업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왕은 잘 이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비유를 들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나가쎄나 존자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었다.

 

 

[나가쎄나] “대왕이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의 밭에 다양한 씨앗들을 뿌리면, 그 다양한 씨앗들이 다양한 열매를 생산합니까?”

 

[밀린다 왕] “존자여, 그렇습니다. 생산할 것입니다.”

[
나가쎄나] “대왕이여, 이와 마찬가지로 이들 다섯 가지 감역은 각각 다양한 업들로 인해서 생겨난 것이지 동일한 업으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밀린다 왕] “존자 나가쎄나여, 현명하십니다.”

 

(밀린다팡하, 201-202)

 

 

나가쎄나 존자는 씨앗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다양한 씨앗을 뿌리면 다양한 열매를 생산하는 것에 대하여 개별업으로 본 것이다.

 

공업은 있을까? 대승불교에서는 공업이 있다고 말한다. 화엄경에서도 발견되고 논서 구사론에도 실려 있다고 한다. 그러나 테라와다불교 논서인 아비담마에서 공업론은 발견되지 않는다.

 

업을 어떻게 공유할 수 있을까? 마치 공공재처럼 공유하는 것이 공업일까? 누군가 공업론을 근거로 하여 사회구성원의 공동책임이라고 말하면 억울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는 공업론이라는 말 자체가 없다. 초기불교에서 업은 당연히 개별업에 대한 것이다. 그럼에도 공업론을 주장한다면 마치 밀린다왕이 주장하는 것과 같다. 마치 신진대사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루어진다고 하여 이를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하여 공업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실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을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완전한 열반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실재를 관찰해야 한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여기에 공업이 끼여들 여지는 없다.

 

개인에게 책임을 물어야

 

개인의 업은 다양하다. 누구 하나 똑 같은 업은 없다. 이 시대 이 나라에 태어났다고 해서 공업으로 묶어 두려 한다면 부처님 가르침과 어긋난다. 사회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개인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군대에서 누군가 잘못을 하면 단체기합 받는다. 공업론은 마치 단체기합 받는 것과 같다. 구성원 중에 누군가 잘못을 하면 구성원 모두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과 같다.

 

누군가 잘못을 했으면 그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사회의 공동책임이라고 하여 잘못한 사람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몇 해전 이태원참사가 있었다. 그때 대통령은 고위직 책임을 묻지 않았다. 최고 책임자인 행안부장관에게 책임을 묻지 않은 것이다. 마치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여기는 공업론과 같은 것이다.

 

개인의 업을 사회의 업으로 만들면 속된말로 물타기가 된다. 개인업을 공업으로 만들었을 때 범죄는 정당화 될 수 있다. 사회의 잘못으로 돌렸을 때 처벌받지 않을 수 있다.

 

공업론은 개념

 

초기경전에서 공업에 대한 것을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대승불교에서는 공업론을 강조한다. 사회적 책임을 말하는 것이다.

 

공업론에는 양면이 있다. 환경문제에 대하여 공업론을 적용하면 긍정적이다. 그러나 사회문제에 공업론을 적용하면 부정적인 것이 된다. 이것은 진리가 될 수 없다. 진리는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진리이어야 한다. 진리 아닌 것이 조금만 섞여 있어도 진리 아닌 것이 된다. 개념적인 것이 그렇다.

 

공업론은 개념에 가깝다. 실재라고 볼 수 없다. 그런데 개념은 진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개념은 진리가 아닌 것이 된다. 공업론은 진리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공업론을 말하지 않은 것 같다.

 

업의 다양성

 

부처님의 관심사는 오로지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업에 대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업의 다양성이다.

 

개인의 업은 다양하다. 개인의 업이 동일한 것은 있을 수 없다. 이는 공업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업은 윤회한다. 이는 업이 시간을 두고 익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행위한 것에 대하여 지금 당장 받을 수도 있고, 이 생에서 받을 수도 있고, 다음 생에서도 받을 수 있고, 먼 후생에서도 받을 수 있다. 만약 공업이 있다면 이런 일이 가능할까?

 

공업은 개념에 대한 것이다. 이는 실재가 아님을 말한다. 또한 개념은 진리가 아님을 말한다. 진리는 생멸하는 것이다. 개념은 생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재하는 것도 아니고 진리도 아니다.

 

부처님은 개별업을 설했다. 아직까지 초기경전에서 공업에 대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는 공업이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행위도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 자신이 지은 행위를 남에게 전가할 수 없다. 이는 행위의 다양성, 업의 다양성에 따른다. 그래서 밀린다왕은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존자 나가쎄나여, 어떠한 원인으로 사람 들은 모두가 평등하지 않고, 어떤 자들은 단명하고, 어떤 자들은 장수하고, 어떤 자들은 다병하고, 어떤 자들은 건강하고, 어떤 자들은 못 생기고, 어떤 자들은 잘 생기고, 어떤 자들은 세력이 있고, 어떤 자들은 세력이 없고, 어떤 자는 가난하고 어떤 자는 부유하고, 어떤 자는 비천 하고, 어떤 자들은 고귀하고, 어떤 자들은 어리석고, 어떤 자들은 현명 합니까?”(Mil.65)

 

 

업의 다양성에 대한 질문이다. 여기서 어떤 자들은 못 생기고, 어떤 자들은 잘 생기는 것인지 묻는 것이 눈에 띈다. 이런 물음에 대하여 나가쎄나 존자는 대왕이여, 어째서 나무들은 모두가 평등하지 않습니까? 그 열매가 어떤 것은 시고, 어떤 것은 쓰고, 어떤 것은 맵고, 어떤 것은 떫고, 어떤 것은 단 것입니까?”라며 역질문한다.

 

사람들은 생김새가 모두 다르다. 생김새만 다른 것이 아니다. 성향 또한 모두 다 다르다. 일란성 쌍생아라도 모두 다른 것이다. 어느 누구 하나 똑 같은 것이 없다. 이는 업의 다양성에 따른다.

 

불평등하고 차별이 있는 업

 

업의 다양성에 따르면 공업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나가쎄나 존자는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왕이여, 이와 마찬가지로, 업의 다양성에 의해서 사람들은 모두가 평등하지 않고, 어떤 자들은 단명하고, 어떤 자들은 장수하고, 어떤 자들은 다병하고, 어떤 자들은 건강하고, 어떤 자들은 못 생기고, 어떤 자들은 잘 생기고, 어떤 자들은 세력이 있고, 어떤 자들은 세력이 없고, 어떤 자는 가난하고, 어떤 자는 부유하고, 어떤 자는 비천하고, 어떤 자들은 고귀하고, 어떤 자들은 어리석고, 어떤 자들은 현명한 것입니다. 대왕이여,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바라문 청년이여,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이다.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Mil.65)

 

 

나가쎄나 존자는 부처님 가르침을 인용하여 업의 가르침을 설명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수행승이든지 부처님 가르침에 기반하여 말해야 함을 뜻한다.

 

어떤이는 법문할 때 자신의 이야기를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법문이라 할 수 있을까? 누군가 공업론을 말한다면 이는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부처님은 업의 차별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이는 불평등을 인정하는 말이기도 하다. 각자 지은 업이 다르기 때문에 차별화 되고 불평등이 야기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구성원 모두의 책임이라며 공업론을 적용하려 한다면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2024-05-07

담마다사 이병욱